#37. <전설을 마주하는 이류무사(2)>
[태을문? 그런 문파가 있었나?]
[거 있잖아. 거짓말을 뿌려서 백팔봉에 들어간 문파.]
[아아, 태을검제. 이야. 우리 태을검제의 후손께 한 수 배울 수 있으려나?]
[조심하라고 태을검제에 맞섰다가 제대로 살아남은 사람이 없다는 전설이 있으니.]
모든 걸 기억하는 능력은 꿈에도 영향을 미친다.
꿈속에서도 선명히 전해지는 과거의 기억들은 내가 꿈을 꾸고 있다는 자각을 하게 만들었고 대부분 그런 날은 종일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래도 이번만큼은 이런 기억력을 탓할 수 없는 것이, 꿈속에서 내가 멸혼진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는 것을 깨닫고는 재빨리 정신을 차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사방에 뿌연 안개가 시야를 가린다.
-사, 살려줘!
-누가 좀 도와줘!
-거기 누구 없어요!
시간과 공간의 경계가 사라진 속에서 가까운 것인지 먼 것인지 구분 안 되는 절규가 귓속으로 들려온다.
아마도 길을 찾겠다며 멸혼진에 들어간 사람들이 외치는 비명이겠지.
각기 들려오는 목소리 중에 무리를 짓고 있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수백 명의 사람이 진 속에 들어왔지만, 각자 다른 곳에 동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백만 개나 되는 진법의 진로가 서로를 완전히 동떨어지게 해놓은 것인가?”
모산파의 술사들이 진법의 구조를 파악했으면서도 절대 들어가지 않으려 했던 이유가 여기 있었다.
안력을 돋우려 했지만, 단전이 텅 비어있었다.
“정신을 놓은 것인가, 광천신장을 쐈다는 걸 망각하고 있었다니.”
절대적인 기억력도 발휘되지 않을 만큼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진짜 소름이 끼치는 놈이네.”
파쇄식은 전생에도 금방 극복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가지만, 광천신장까지 흘려낸 건 눈으로 보고도 쉽사리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멸혼진으로 처넣다니 어렸을 때부터 음흉한 놈이었구나.”
그 짧은 시간 광천신장의 파괴력을 깨닫고는 자신의 일에 방해가 될 것으로 생각하여 나를 멸혼진으로 처박았다.
적이지만 기민할 정도로 머리가 잘 돌아가는 놈이란 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것들을 밀고 나갈 무력과 세력을 갖추고 있으며, 작은 희생에 연연하지 않고 대의를 세운다.
어쩌면 이런 강력한 모습에 매료되어 사람들은 그를 따른 게 아닌가 싶다.
“가만 생각해 보니, 어쩌면 마교보다 위험한 게 그 놈일지도 모르겠구나.”
그동안의 목적은 단지 무림맹의 영향 아래서 태을문을 지키면 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도 무림맹을 움직이는 이들이 결국 우리를 지옥으로 밀어 넣는다면 무의미해지는 이야기.
‘어쩌면, 용소아와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싸워야 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당장 멸혼진에 날 처 넣은 것만 생각해도 사지 육신을 모두 떼어내도 분이 안 풀릴 것 같다.
하지만 광천신장도 흘려내는 괴물을 상대로 소천검법 밖에 익히지 않은 내가 무슨 수로 놈을 상대한단 말인가. 갑자기 들불처럼 타오르던 분노가 사그라든다.
“내 인생도 이 멸혼진처럼 앞이 보이지 않는구나.”
아무튼 중요한 건 멸혼진을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나가지 못하면 일갑자의 내공도 무의미해지는 것이고, 용소아에게 복수하는 기회도 잡지 못할 것이니까.
당장 자리에 앉아 운기행공을 하자, 어느 정도 내공이 다시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 눈을 감은 사이에 진법은 전혀 다른 풍경을 품고 있었다.
사방의 안개들은 모두 사라지고 이제는 껌껌한 어둠만이 사방을 가로막고 있었다.
사람들의 비명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총 이백십만 개에 달하는 진로 중에 백팔십만 개의 진로만 외웠다.
조금만 더 외웠다면 진로의 형태를 찾을 수 있었건만 결국 그런 준비 없이 멸혼진 안으로 들어와 버린 탓에, 나머지 삼십만 개의 진로는 스스로 채워야 했다.
더구나 문제는 내가 어떤 진로에서 시작하는지 파악할 수 없다는 것.
진로를 파악하려면 진법을 계산할 수 있거나 상단전을 열어야 하는데. 나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사제들에게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이 또 생기겠구나.”
계산할 수 있는 술식을 당장에 생각해 낼 수는 없으니 선택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다시 자리에 앉아 가부좌를 틀고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소주천을 돌 때마다 온몸에 잠자고 있던 영약의 기운들이 하나둘 깨어나기 시작했다.
세맥의 찌꺼기를 태우고 혈도를 타동하는 힘찬 기운은 중극혈에서 지양혈로 옮겨가고 신도혈을 거쳐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묻고 있었다.
그리고 난 백회혈을 향해 내기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갑자기 맨 처음 내공심법을 배울 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진소운, 절대 상단전을 개방하려고 하지 마라. 절대.
보통의 무림인들도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선 상단전을 절대 건드리지 않는다.
하물며 멸혼진 안에서야 당연히 누가봐도 미친짓.
천하의 미친놈들 잔뜩한 마교놈들도 지금 내 모습을 보면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해야 한다.’
정심단 덕분에 주화입마를 한 번은 막을 수 있으니 할 수 있는 미친 짓.
슬금슬금 대기하던 내기가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한다.
여기가 맞냐고 나에게 몇 번이나 물어본다. 여기로 들어가는 게 진짜 맞냐고.
나는 의념을 보내어 내기를 단숨에 끌어 올린다.
쾅.
머릿속에서 거대한 충격음과 함께 뇌성벽력이 울린다.
쾅.
신경이 다 타오르는 것처럼 온몸이 저릿하게 떨리는 와중에, 정신이 끊어질 것처럼 고통이 물밀듯 밀려온다.
커흑.
온 혈도를 울리는 충격에 내부가 엉망진창이 되어 입가에 핏물이 흐른다.
쾅.
모공 하나하나를 바늘로 찌른 듯 갑갑함과 고통이 연이어 이어지던 와중에, 고통인지 희열인지 모를 기이한 감각이 머리에 느껴졌다.
솨아아아.
마치 계곡물이 흐르는 것 같은 소리가 머릿속을 울리며 전신을 뒤덮고 있던 고통이 한순간에 시원한 청량감으로 바뀌었다.
머릿속에 감돌던 청량감은 온몸을 쏘다니며 막혔던 혈들을 뚫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이 거력은 남은 영약들의 기운들을 모조리 빨아들여 더더욱 힘을 북돋웠다.
‘그만, 그만.’
좋은 기분도 좋은 기분이었지만, 더 이상 내가 내공을 제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 만큼 내기가 커지기 시작했다.
백회혈을 뚫을 때보다 더욱 크게 엄습하는 기운은, 내 의념에도 멈출 줄을 모르고 온몸을 쏘다니며 제멋대로 길을 넓히다 어떤 지점에서 멈춰 섰다.
‘설마.’
내공은 막혀있는 중단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머리를 마구 비비며 길을 뚫으려 했다.
컥.
막혀있는 곳을 억지로 뚫어내려 하니 오장육부가 뒤집히며 핏물을 쉬지 않고 쏟아내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주화입마를 피할 수 없는 상황.
‘어차피 상단전도 뚫었겠다 정심단도 있으니……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쾅.
내공의 흐름과 의념의 방향이 일치되자 녀석은 더욱 신난 듯 중단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쾅.
온몸이 들썩일 정도의 커다란 충격과 함께 결국 중단마저 뚫리고, 내공은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이 온몸을 쏘다녔다.
그렇게 한참을 구석구석 누비던 기운이 단전에 자리 잡은 후에야 눈을 뜰 수 있었다.
“후우…….”
단전에 느껴지는 내공은 대략 100년의 내공.
상단과 중단이 개통되고 내기의 흐름에 막힘이 없다.
순식간에 오룡봉성(五龍奉聖)의 경지를 이룬 것이다.
눈으로 보이는 것은 더 선명해지고 오감으로 들어오는 감각들이 나를 객관화시킬 수 있게 만들었다.
쉽게 말해 고수들이 보지 않고 사각에서 날아오는 물건을 잡아채는 경지에 다다른 것이다.
“천운이 도왔구나.”
정심단이 없었다면 애초에 시도할 생각도 하지 못했을 위험천만한 도박.
덕분에 중단 전까지 뚫어내며 몸 안에 남아있던 영약의 기운도 모두 흡수할 수 있었다.
오감이 열리자 진의 흐름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팔괘, 십이간, 육십갑자, 삼백육십오개의 변화에 따른 진로.
흐름을 느끼면서 머릿속에 채워진 진로와 비교하여 내가 어디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파악한다.
어느새 사방의 운무는 다시 붉은색으로 변화되어 있었다. 그리고 확신했다.
“갈 수 있다.”
한 방향을 향해 발을 옮겼다.
뿌옇게 막혀있던 붉은 안개들이 순식간에 멀어지며 길을 연다.
진로를 제대로 잡았다는 뜻이었다.
다시 한 발.
붉은 안개가 노란 안개로 바뀌었다.
다른 진로에 들어섰다는 증거.
다시 한 발.
또 한 번 안개가 훅하고 밀려나며 길을 연다.
그러다 마주친 어둠.
이 길은 아직 모산파의 술사들이 계산해 내지 못한 길이었다.
그럼에도 동굴에서처럼 돌아가거나 뒤로 물러날 순 없었다.
진로는 다시 시작되고, 결국 종국에는 또 똑같은 장막에 걸리게 된다.
“미처 채우지 못한 진로를 채워야 해.”
상단전에 내기를 보냄과 동시에 머릿속 장서고의 한쪽 벽면을 모두 멸혼진의 진로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끝도 없이 높은 벽면 전체를 다 채우자, 왼쪽 하단에 삼십만 개의 진로가 들어가야 할 자리가 나타났다.
애당초 계산으로는 채울 수 없는 자리.
나는 다른 진로들의 공통된 법칙을 유추하여 새로운 진로들을 기억하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미친 짓이 분명했지만, 어쩐지 가능할 것 같은 말도 안 되는 기분에 일을 멈추지 않았다.
상단전을 뚫은 덕분일까, 각각의 묘를 따라 부족한 숫자들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한 개의 진로가 또 다른 한 개의 진로를, 그렇게 만든 두 개의 진로가 다시 네 개의 진로를 기록해 나간다.
상단전을 통해 기운을 받은 머리는 억지로 과부하를 생성하고, 점막이 얇은 코에선 몰리는 피를 담아내지 못하고 줄기줄기 쏟아낸다.
코피로만 작은 호리병을 다 채울 수 있겠다고 생각할 즈음.
“다 됐다.”
이백십만이천사백 개의 진로가 완성되자 더 이상 눈앞의 어둠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척.
갑자기 세상이 밝아지며 환한 빛무리가 느껴졌다.
다시 한발 떼자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안개가 옅어지고, 주위에 죽어있는 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멸혼진의 끝에 다다랐다 느끼는 순간.
눈앞엔 그 끝이 보이지 않는 하얀 벽이 솟아났고.
난 그 벽의 한 부분을 밟았다.
화악.
하얀 벽이 걷히며 다시 컴컴한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하아, 하아.”
눈앞엔 종유석처럼 매달린 얼음이 푸른색을 비추며 동굴을 밝게 빛내고 있었다.
“미타성수…….”
그렇게 긴장이 풀리자마자 정신을 잃으며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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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정신이 들었을 땐, 피곤이 모두 풀린 듯 온몸이 가벼웠다.
더불어 단전엔 절반 정도의 내공이 차 있었는데, 운기조식을 하지 않았던 걸 생각하면 상단전과 중단전을 개통하면서 자연적인 축기의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누가 보면 혈겁을 벌인 줄 알겠네.”
청색의 무복은 뱉어낸 피와 쏟아낸 코피로 얼룩져 핏물을 가득 머금었다.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는데.”
동굴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수백 명의 사람이 멸혼진 안에 스스로 들어갔지만, 이곳까지 도달한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이야기였다.
“하하, 이게 사실이었구나.”
미타성수 쟁탈전이 논란이 되었던 것은 오천 명의 사람이 희생된 것도 문제였지만, 종국엔 미타성수가 발견되지 않아서였다.
덕분에 혹자는 하오문이 강호의 혼란을 가져오기 위해 뿌린 거짓 정보라는 말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이렇게 눈으로 보게 되네.”
천정에서 길게 내려온 미타성수는 그 자체로 빛을 내뿜고 있었다.
난 얼른 품에서 송곳을 꺼내고 특별히 제작된 수통을 가져다 대어 미타성수를 툭툭 쳤다.
쩌저적.
미타성수가 똑 떨어지며 수통 안으로 들어갔고, 이어 송곳이 쩌저적 얼어붙기 시작하여 재빨리 송곳을 던졌다.
미타성수의 음기가 어찌나 강한지, 송곳을 잡고 있던 손바닥이 이미 꽁꽁 얼어있었다.
내기를 끌어올리자 손이 천천히 녹으며 물이 줄줄 흘렀다.
정말이지 인세에 다시 보기 힘든 기이한 광경이었다.
“그나저나 태을검제가 봉인된 곳도 분명 이곳일 텐데.”
당초의 목적은 태을검제의 흔적을 찾으려 했던 것.
동굴 안으로 들어선 이후, 벌어지는 일련의 사태들은 내 의심을 더욱 부채질했다.
“절대 깰 수 없고, 절대 사라지지 않는 무량불괴멸혼진법.”
세상은 과연 무엇을 봉인하기 위해 삼십 장에 달하는 절대 진법을 펼쳤던 걸까.
-태양의 주인들은 암천과 만검을 인세와 분리하기로 결정하였다.
애당초 멸혼진은 강력한 공력으로 해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혼마저도 인세와 분리시키는 진법을 펼친 것은 그 대상의 영향이 그만큼 대단했다는 이야기.
-초의 쟁반 옆. 하늘과 땅이 맞닿는 지옥. 그 끝에 암천과 만검을 봉인하였다. 그러자 천하가 태평하였다.
태을검제의 전설은 사실이었고, 이를 봉인하기 위해 무량불괴멸혼진이라는 절대적 진법을 펼친 것이었다.
“분명히 있을 것이다. 내 태사조님의 흔적이.”
난 들어왔던 길의 반대편 멸혼진을 향해 발을 디뎠다.
이제는 훤히 아는 동네 골목길을 가듯 주변을 가리는 안개와 어둠도 전혀 두렵지 않았다.
한 발 걸을 때마다 안개가 멀리 밀려난다.
길을 안내하듯 갈라진 안개들 사이로 다시금 하얀 벽을 마주한다.
벽 일부를 비집고 그 안으로 몸을 밀어넣자, 온통 암흑만이 가득한 공동이 나타났다.
잠시 눈을 감고 내공을 끌어올려 안력을 돋우자, 사방 십 장에 이르는 공간에 두 개의 인영이 양 끝에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다.
한쪽의 인영은 하얀 머리칼을 가진 노인의 인영이었고.
반대편의 인영은 검은 머리칼에 턱수염을 기른 장년인이었다.
나도 모르는 끌림에 이끌려 노인의 앞으로 다가가자, 노인을 중심으로 바닥에 써진 빼곡한 글자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글자들 맨 상단에 가장 깊게 새겨진 여덟 개의 글자.
만검천하.
태을검제.
복부를 치고 뭔가가 울컥 올라왔다.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지난 오백 년간 태을문의 사조들이 겪어왔던 오욕의 시간들, 그 시간 속에 녹아있었던 서글픔의 감정이었다.
오금에 힘이 풀리고 무릎을 꿇었다.
그대로 엎드려 흐르는 눈물을 닦을 시간도 없이 끄윽 거리며 말했다.
“태을문 18대 제자 진소운, 태사조님을 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