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전설을 마주하는 이류무사(3)>
-십오 세에 처음 검을 잡아 삼십 세에 도(道)를 깨우쳤다.
-삼라의 근본으로 도을 세우니 그 공부를 가리켜 태을진경(太乙眞經)이라 이름 붙였다.
-익힘을 확인받고자 강호에 나서서 아홉 번의 확인을 받았다.
-아홉 번의 비무가 끝날 때쯤 도를 익히고자 하는 이들이 끝없이 줄을 섰지만, 도를 전할 자가 없었다.
-안휘의 한 산속에서 부모를 잃은 아이를 만나 익힌 것을 전달할 수 있었다.
-강호의 명숙들이 찾아와 어지러운 천하를 위해 나서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본래 열 번째 확인을 받고 싶었던 자가 강호에 자기 뜻을 관철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배움이란 스스로 익히고 스스로 성취하는바, 그의 뜻에 동의할 수 없었기에 그들과 함께 나섰다.
-열 번째 마주한 자의 익힘의 깊이 또한 만만치 않았다. 허나, 끝내 그의 배움을 꺾고 그의 나아감을 막아선 찰나,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무량(無量)의 미로 속에 갇혔다.
-열 번째 마주한 자가 말하기로, 강호의 명숙들이 배신을 한 것이라 말하였다.
-내 본래 나의 가르침으로 남을 해 할 생각이 없었거늘 나의 익힘이 그들에게 너무 위협적으로 보인 건 아닌가 생각했다.
-무량의 미로는 나와 열 번째 마주한 자의 힘이 합쳐져도 깰 수 없는 미지의 것이었다. 우린 이곳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다.
-무량의 미로에서 무한의 시간을 함께하다 보니 그와 뜻이 맞는 부분이 있었다. 이것이 곧 만류귀종이라 깨달았다.
-그와 공통된 뜻이 맞는 곳에서 무위를 하나 만들었다.
-지난밤 꿈속에서 홀로 남은 제자가 생각났다. 그 아이에게 가르침을 남겨주지 않은 것이 내내 가슴 아팠다.
-누군가 이 글을 본다면 그대를 연자라 생각하겠다. 그대는 나의 가르침을 익히고 뜻하는 바를 이루어라, 다만 그대의 세상에 태을문이 남아있다면 나의 것을 전해다오. 그것이 나의 마지막 바람이다.
공동의 바닥 절반에 태을검제가 써놓은 수기들을 읽어가며 나는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누군가를 원망할 수도, 복수심에 불탈 수도 있었음에도 그의 글은 담담하기 그지없었고, 그런 점이 내내 더욱 가슴 아팠다.
몇 번이나 반복되는 제자의 이야기, 자신이 가르침을 주지 않아 혹시 고난을 겪는 건 아닌가 하는 안타까움과 우려가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태사조께서 적어놓은 무리를 보니, 내 예상대로 태을심법과 소천검법을 제외하곤 태을문의 무공이 아니었다.
홀로 남은 제자는 사라진 스승을 기다리기 위해 오백 년간 갖은 오욕과 핍박 속에서 사문을 이어왔던 것이다.
전생에 무던히도 태을문을 원망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이따위 힘도 없는 문파를 왜 억지로 끌고 가는 거냐고, 이렇게 비굴하게 살 바엔 그냥 죽는 게 낫지 않겠냐고.
철없는 시절 한 생각이었지만, 그 순간의 나만큼 나 자신이 싫을 순 없었다.
“오백 년이었습니다. 무려 오백 년.”
태사조께선 자신의 생애 동안 만날 수 없는 제자에 대해 죽기 직전까지 고민과 걱정을 했고, 그 제자는 자기 스승을 오백 년 동안 기다려 왔던 것이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바닥에는 일기 형식의 수기들이 가득 쓰여있었고, 벽면에는 그간의 무공들이 상세하게 적혀있었다.
오백 년간 전달되길 기다리고 있던 무공이었다.
[태을심법]
[소천검법]
[대천검법]
[쌍천검결]
[태을진경]
[만해천지검결]
[만화무적권]
[태을팔만신보]
태을심법과 소천검법은 입문자를 위한 가르침이었다.
여기서 대천검법이란 태을문에 본래 없었던 무경이 포함되어 입문을 완료하면 그다음부턴 도(道)의 근원을 깨닫는 행로자의 길에 들어선다.
그 시작이 되는 것이 [태을진경].
심법보단 더 깊은 깨달음을 추구하는 무경은 내가 본 어떤 무리보다 더욱 심오한 경지를 추구하고 있었다.
-태을진경을 깨닫는다면 천지의 조화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태을검제가 자신만만하게 써놓은 이야기가 거짓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고도의 가르침을 품고 있었다.
그 외 다른 무공들도 부족한 점이 없었다.
[만해천지검결]은 만검이라는 전설을 만들어 낸 검법서였고, [만화무적권] 또한 그에 못지않았다.
특히나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무공들을 한 번씩 맛본 나는 [태을팔만신보]가 절대 구파일방의 보법에 못지않을 거라 자신할 수 있었다.
“신법이 없는 게 아쉽구나.”
그런 아쉬움도 잠시, 과연 태을검제의 진전을 이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감히 상상이 안 된다.
태청신검이 검 하나로 무림을 지배하고, 흑사자 곽궁이 두 주먹으로 다시 그 무림을 부순 것을 생각하면 앞으로의 미래가 어떻게 바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살피던 나는 그제야 반대편에 있는 흑발의 장년인이 눈에 들어왔다.
태을검제와는 다르게 되레 검은 흑발과 피부를 유지하고 있는 모습.
그 기이한 모습이 너무도 신기하여 그의 앞으로 다가가니.
태을검제와 마찬가지로 여덟 글자로 자신을 소개해 놓았다.
암흑천지
지옥마제
암천이라 지칭되었던 사람은 오백 년 전 사라진 마교의 삼대 천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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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더냐?”
창제신검(蒼帝神劍) 남궁태하.
현 남궁세가의 가주이자 천하십대검수 안에 이름을 올린 고수.
내기를 담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그 앞에 무릎 꿇은 양군백과 웬 거지는 뇌성벽력이 치는 듯한 느낌에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오문 악양지부 양군백이라 합니다.”
“개방 악양 지부장입니다.”
자신을 개방의 지부장이라 밝힌 거지는 두려워하면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으려 최대한 애를 썼다.
창제신검은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너희들이 장보도를 팔았다지?”
하오문과 개방.
둘 다 정보 단체의 특색이 강한 만큼 자기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아야 했지만, 지금 벌어진 일 앞에선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
오천.
무려 오천의 숫자가 미타성수를 찾겠다고 들어갔다가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마령고원의 계곡 아래에는 수십 개의 방파가 천막을 치고 무리 짓고 있었다.
수없이 많은 사람이 오감에도 그들 사이에서 시끌벅적한 소리 따위는 없었다. 대신 언제 터져도 이상할 필요가 없는 묵직한 긴장감이 그들을 짓누르고 있었다.
저 안에 자기 가족과 친구들이 들어가 있다.
그리고 그들의 생사는 누구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그 분노를 참고 있는 것이었다.
“애초에 저희는 가는 길을 안내하기 위한 지도만 팔았을 뿐, 들어간 것은 그들의 선택입니다.”
개방의 악양 지부장이 짐짓 담대한 척 말하고 있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그의 손을 보며 양군백은 안타까운 마음을 금치 못하였다.
“그래서, 너희들은 잘못이 없다?”
“제아무리 남궁세가라 한들 개방의 방도를 이리 취급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뭐라?”
“저희는 정보 단체로서의 일을 한 것뿐입니다.”
“허나, 그 안에 어떤 위험이 있는지 제대로 알리지 않았지.”
“그건 누구도…….”
“그렇다면 넌 너희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이구나.”
“그게 무슨…… 커흑.”
순간 개방도가 숨을 들이 삼키듯하더니 피를 한 바가지나 쏟아내었다.
“꺼억, 꺼억.”
어느새 개방도의 단전 부위에는 선명한 주먹의 자국이 남아있었다.
언제인지도 모르는 순식간에, 단 한 수로 개방도의 단전을 박살 낸 것이다.
꿀꺽.
양군백은 군침을 삼켰다. 개방의 악양 지부장이면 못해도 일류 무사다. 그런 자가 손써 볼 틈도 없이 단전이 부서졌다는 건, 강호의 사람들이 평가하는 창제신검의 실력이 과소평가되어 있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가서 개방 악양 지부의 부지부장을 불러와라.”
“네.”
남궁세가의 무사 하나가 개방도를 끌고 가버리자 장내엔 양군백만이 남아있었다.
“묻겠다. 지도를 팔았느냐?”
“사, 살려만 주십시오.”
“그곳에 진이 펼쳐져 있다는 것을 표기하였느냐?”
“네. 분명히 표기하였습니다.”
“그 진에 대한 정체는?”
“그건…… 저희 조사로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무책임하게 지도를 팔았다 이것이더냐.”
양군백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세상 어느 누가 지도를 팔면서 진법 안에 들어가 볼 생각까지 하겠는가? 애당초 진법에 들어가 볼 수 있다면 장보도를 만들어 팔 게 아니라 영약이든 보물이든 자신이 가지고 말지.
“죄, 죄송합니다. 저희 문파는 진법을 연구할 만한 자본도 인원도 없음에…….”
“안에 미타성수가 있는 것은 확실하느냐?”
“…….”
사실 그 점도 확실치는 않았다. 있으면 좋은 거고 없어도 어쩔 수 없는 거고.
다만 장보도를 만들기 위해 증언했던 자를 믿는 수밖에 없는 것 아니던가.
“부, 분명 그 안에 다녀온 자가 미타성수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남궁세가의 직계인 막내딸이 저 안에 들어갔다.”
“…….”
“그리고 연락이 되지 않은 것이 벌써 한 달이 넘었지. 근데 저 안에 미타성수라는 물건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다고 하는구나. 내가 너희를 살려두어야 할 이유가 있느냐?”
꿀꺽.
양군백은 창제신검이 말하는 ‘너희’라는 말이 단지 악양 지부만을 말하는 건 아닐 거로 생각했다.
만약 자신의 분이 풀릴 수만 있다면 하오문 전체를 없앨 수도 있는 사람이 아닌가.
양군백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절박한 심정으로 말했다.
“요, 용소아를 봤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무슨 상관이지?”
“용소아 그가 분명 미타성수를 확보하기 위해 그 안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3주가 지난 시점에서 악양에 있는 객점에서 식사하는 모습이 저희 문도에 의해 목격되었습니다.”
문도라고 이야기했지만 점소이였다.
하도 거지 같은 꼴을 한 사내가 하나 들어와 만두와 소채 죽엽청을 걸신들린 듯 먹고 금전 하나를 두고 가버려, 이상함을 느낀 그가 하오문에 신고했던 것이다.
“용소아가 확실하더냐?”
무당의 상징인 태극 문양이 검갑에도 새겨져 있다고 했으니 용소아라 추측하는 것이었다.
무당의 기보인 선풍검은 용소아밖에 쓰지 못하는 것이기에.
확실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추측이라고 감히 말할 수가 없었다. 양군백은 남궁태하의 진노를 받아낼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면 정보상으로서 도박아닌 도박을 해야 하는 상황.
“네, 아마도 그가 대표로 그 진법에서 나와 무림맹에 도움을 청하러 간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잠시 생각하던 창제신검이 으름장을 놓았다.
“오늘부터 넌 이곳에서 저 안쪽에 관련된 정보 모두를 가져와라.”
“아, 알겠습니다.”
창제신검이 축객령을 내리자 양군백이 어찌 본문에 도움을 요청하여야 할지 어지러운 마음으로 자리를 비켜섰다.
남궁진명이 어두운 안색으로 다가왔다.
“다 제 불찰입니다. 아버님.”
“못난 것. 네놈이 얼마나 미덥지 않았으면 그 어린 것이 저 사지에 들어갈 생각을 다 했겠느냐!”
“죄송합니다.”
일갈을 내뱉던 남궁태하의 얼굴이 금방 진정되었다.
손녀를 잃은 자신의 슬픔이 어디 자식을 잃은 아비의 슬픔에 미치겠는가.
“용소아 그놈이 무림맹에 갔다면 무림맹도 이 일에 대해 모르지 않을 터. 악양 지부에 방문하여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알아보거라.”
“네. 여긴 제가 지키고 있겠습니다. 그러니 아버진 세가로 돌아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갑작스러운 말에 남궁태하가 인상을 찌푸렸다.
“갑자기 무슨 소리더냐?”
“창궁상단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합니다. 장로원을 움직일 생각인 것 같습니다.”
“이런! 쳐 죽일!”
창제신검이 기운을 끌어올리자, 일대에서 일을 보던 무사와 하인들이 일제히 오금이 저린 듯 털썩털썩 주저앉았다.
“상원이 이놈이 똥오줌을 못 가리는구나.”
애당초 남궁선화가 미타성수를 찾아 나선 이유가 뭐였던가.
방계의 압박에 직계의 세력이 약해지고 무림학관의 시험에서 가문의 도움을 받기 힘들어질 것 같아지자, 저 스스로 해결해 보겠다고 나서서 이 사달이 일어난 것 아니던가.
자신도 그동안 방계를 짓누를 방법으로 방계의 주력 검술인 창궁대연검법의 파쇄식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시간이 한참이나 모자랐다.
더구나 잘못했다간 가문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기에 차마 다른 사람의 도움조차 받지 못했던 것.
창제신검이 손자인 남궁산을 바라봤다.
“네가 말한 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느냐?”
어느 날, 제갈소명이 다른 아이에게 준 입관패를 돌려받겠다며 나간 남궁산은, 빈손으로 돌아왔음에도 꽤나 기쁜 기색이었다.
워낙에 자존심이 대단한 아이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음에도 즐거운 얼굴로 들어오자,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더니 그 아이가 자신이 연구하고 있는 검술과 비슷한 검술을 구사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참이었다.
“사람을 보내 알아보았으나 할 일이 있어 외출한 뒤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 일에 어찌 사람을 보냈느냐, 네가 직접 갔어야지.”
“죄송합니다. 선화 때문에 차마 갈 수 없었습니다.”
“크흠…….”
급박하게 돌아가는 와중에 선화까지 실종되면서 직계의 사람들은 누구 하나 멀쩡하게 정신을 챙기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비웃기라도 하듯, 직계가족이 가장 위급한 순간에 방계가 움직이고 있었다.
창제신검이 남궁진명을 보며 말했다.
“내가 홀로 가겠다. 넌 이곳에서 이들과 함께 있어라.”
“아버지, 혼자서는 안 되십니다.”
“네놈은 이 아비를 못 믿는 것이냐?”
천만에 말씀.
되려 무사들과 같이 가지 않아 방계가 최후의 도발을 하게 되면 창제신검이 검을 뽑아 들 것을 우려한 것이다.
“넌, 이곳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끝내 선화가 나오지 않을 경우, …책임이 있는 자들을 세상에 남겨놓지 말거라.”
“……아버지.”
“한 가족이라 생각하던 이들이 가족의 불행을 볼모로 일을 벌인다면 더 이상 가족이 아니다. 난 가족이 아닌 자들을 정리할 것이다.”
남궁태하의 말에 남궁진명은 남궁세가 내에 혈풍이 불어닥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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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좌는 대(大) 천마신교의 삼대 천마이다. 이것 말고는 본인을 표할 방법 따윈 없다.
-기억의 시작부터 신교의 교도였고, 끝내 천마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마신의 가르침 하에 천하를 통일하기 위해 강호에 나섰다.
-빌어먹을 답답한 새끼와 함께 요상한 진법에 갇혔다. 처음엔 위선자들 앞에 서다 배신당한 놈을 비웃어 주었지만, 끝내 본좌도 갇혔다는 것을 알고는 절망했다.
일기를 읽던 내가 잠시 눈을 비볐다. 잘못 본 것이 아닌 분명 ‘빌어먹을’이 맞았다.
마교에서 천마까지 올라갔다더니 생에 마지막 남기는 일기에서도 욕지기를 멈추지 않고 있었고, 동시에 태을검제와 달리 쓰다 말기를 반복했는지 중간중간 끊긴 부분도 많았다.
-염병할 진법은 난생처음 보는 것이었고, 마신님의 가호를 받은 본좌 조차도 뚫을 수 없었다.
-놈이 하는 심상 수련인가를 따라 해보다가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생각해 보니 나도 신교의 배신자들에게 당한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빌어먹을 도사 새끼 덕분에 알지 않아도 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제자를 그리워하는 놈을 보니 꼬숩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게 왜 키워야 할 제자는 안 키우고 여기까지 기어 나온 건지.
본좌는 무려 9명의 제자를 키웠다. 근데 그 9명 모두한테 배신당했다. 다시 생각해도 열받는다.
-할 일도 없고 만날 수 있는 사람이라곤 도사 놈밖에 없으니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놈도 마신님이 만든 세상의 법칙에 대해 알고 있었다. 녀석을 포교해 보기로 했다. 잘되지 않았다.
-녀석과 함께 무공을 하나 만들었더니 나도 뭔가 나만의 것을 남기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천마경은 결국 신교의 뿌리에서 시작한 것이니 내 것이 아니기에.
-나를 배신한 제자들을 단죄하기 위한 무공을 하나 만들었다. 이미 천마의 경지에 오른 내가 보기에도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물건이다.
이 물건에 역마경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물건을 발견할 놈은 부디 내 제자 놈들의 앞길을 막아주었으면 좋겠다.
-누군지 몰라도 이 글을 보는 놈은 마신님의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천마신교에 투신해라.
[역마경]
[천하독행신]
역마경은 마공을 제압하는 공부였다.
천마경을 근간으로 두는 마공의 특성 중에 역린이 될 부분을 공략하여 마공을 제압하는 무공.
천마신교의 삼대 천마가 만들었다고 믿어지지 않는 공부였다.
그것보다 내 눈을 더욱 사로잡은 것은 태을검제와 지옥마제가 손을 잡고 만든 것으로 보이는 천하독행신.
한번 달리면 천하에 따를 자가 없다는 광오한 이름의 신법.
그 안에 감추고 있는 무리는 신법 자체가 하나의 패도적인 파괴력을 가진 무공이란 것이었다.
앞으로 나아서면 막아설 수 있는 것이 없고, 뒤로 물러설 땐 잡을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렇게 무공들을 모두 머릿속에 집어넣은 뒤에 지옥마제에게 다가갔다.
무려 오백 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것에 신기함을 느꼈던 탓이다.
툭.
하고 그를 건드는 순간.
그의 몸이 천천히 가루가 되어 사라지고 그 자리엔 붉은색의 환이 놓여있었다.
봉황이 새겨진 붉은 팔찌 안쪽에 양각되어 있는 글자가 이 팔찌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려주고 있었다.
[천마지존환]
이 팔찌가 왼쪽 팔에 차고 있던 청룡환과 비슷한 모양새를 한 것 아니었나 의심하는 사이.
뒤쪽에서 파스스하는 소리와 함께 태을검제의 신형이 사라졌다.
난 태을검제에게 구배지례를, 지옥마제에게 목례를 올린 후 흑룡검을 뽑아 공동의 한가운데 섰다.
“대천검법.”
대천검법은 변검과 환검의 검술이다.
애당초 소천검법이 쾌검의 궤를 가지면서도 그리 속도가 빠르지 않은 이유에 대해선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본래 소천검법과 대천검법은 만해천지검결을 익히기 위한 교두보에 불과했다.
후웅.
후웅.
사방으로 환검과 변검이 흩날린다.
그 사이 소천검법이 합쳐지니, 어떤 것이 진검이고 어떤 것이 환검인지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처음 대천검법만 익히고 나가야겠다 생각했던 나는 며칠을 태을진경과 만해천지검결에 쏟아부었다.
밖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 자체를 완전히 망각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 막 태을진경과 만해천지검결의 입문을 떼었을 때.
촤르르르.
차차차차.
세 개의 검이 사방을 점하고 무형의 상대를 가루로 만든다.
검의 영향을 더욱 늘리자 사방으로 퍼진 검들이 바닥과 벽의 무경들을 하나하나 지워간다.
세 개의 검 중 환검은 없다.
모든 검이 실제이고 제각기 움직이고 있다.
거기에 환검을 더한다.
세 개의 검들은 여섯으로 늘어난다.
어지러이 움직이는 검들은 다시 한번 벽과 바닥을 쓸며 지옥마제의 일기와 무경을 지운다.
실제의 검이 세 배로 늘어나니 실제 검이 아니다.
이 특이한 검법에 태을검제는 ‘만검’이라는 호칭을 붙였다.
허상이되 허상이 아니고 실제이되 실제가 아닌 검.
난 내가 만든 광경을 쭉 둘러보며 살폈다.
벽과 바닥에 빽빽하게 적혀있던 글자들은 단 하나도 남지 않고 모두 칼끝에 사라졌다.
태을진경과 만해천지검결의 초입을 이해한 것만으로 이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상대가 이 검을 상대하고자 한다면 어느 것이 실제이고 어느 것이 환영인지 구분할 수 없을 것이다.
“실로 만검천하라 불릴 만한 무공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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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궁선화는 고개를 돌려 성모란을 바라보았다.
깡 말라버린 두 볼, 퀭하니 들어간 눈두덩이와 힘없이 깜빡이는 눈꺼풀.
마지막 힘을 짜내어 말을 꺼낸다.
“미안…… 언니…….”
천천히 움직이는 성모란의 눈동자, 몇 번이나 달싹이던 메마른 입술이 말을 한다.
“아냐……. 괜찮아…….”
그녀들은 지금 죽어가는 와중 마지막 힘을 짜내어 이야길 하고 있었다.
공동안에 갇힌 지 한 달이 되었을 때쯤. 더 이상 들어오는 인원은 없었다.
그리고 더 이상 들어오는 이들이 없자 식량도 모두 떨어졌다.
공동의 틈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식수는 챙겼지만, 공동에서 자라는 이끼들은 사천 명에 달하는 인원의 끼니론 한참 부족했다.
식량에 의해 싸움이 나고, 그 식량마저도 떨어지자 하나둘 싸우는 것도 멈추었다.
내공이 약한 자들은 하나둘씩 죽어가고 있었고, 남은 자들도 자신들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 정도는 예측하였다.
“정말…… 미안…….”
남궁선화는 자기 죽음보다 자신 때문에 이곳에 갇힌 성모란에 대한 미안함이 더욱 컸다.
여자 형제가 없던 자신에게 먼저 다가와 주고, 자신의 어려움을 위해 선뜻 나서준 사람.
그런 사람을 이런 사지로 끌고 왔다.
“포기…… 말자…….”
성모란은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고 있었다.
과연 먼저 나간 용소아와 무림맹을 믿는 것일까?
아니면 또 다른 누군가 저 진법을 뚫고 들어올 것이라 생각하는가?
하지만 기이하게도 성모란의 시선은 출구의 반대편으로 향하고 있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용소아와의 일전으로 멸혼진으로 끌려들어 간 그 남자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성모란이 연모하는 상대.
머리가 비상해 보이는 것 말고는 특별해 보이지도 않았던 그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 것일까?
문득 남궁선화도 그를 생각하며 그가 빨려들어 간 멸혼진 쪽을 바라보았다.
꾸물꾸물.
너무 오래 굶은 탓일까?
얼마 전부터 환영이 보이기 시작했다.
때론 고기로 나타나기도 했고, 남궁세가의 입구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런 지금 환영은 멸혼진을 가르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잔인하네.’
어쩜 환영은 지금 자신이 가장 바라는 것으로 자신을 절망에 빠트리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
그 환영 속에서 한 남자가 나타났다.
자신들처럼 피폐해 보이긴 하지만 두 눈엔 정광이 번쩍이고, 느릿하긴 했지만 걸음은 당당한 사내.
성모란이 가장 그리워했던 그 남자였다.
남궁선화는 성모란을 놀려야겠다는 생각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성모란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언니도 보고 있는 걸까?’
다시 환영을 향해 고개를 돌렸을 때, 환영이 이편으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말을 걸었다.
“괜찮으십니까?”
진소운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