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는 일류무사(2)>
정말 죽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精), 기(氣), 신(神) 중에 신이 소멸할 것 같은 기분.
대부분 사람이 정과 기가 부족하여 신이 소멸하는 것과는 반대로, 정과 기는 내공과 원기 회복용 영약 등으로 어떻게든 움직이게 했기에 피폐해지는 건 신(神)이었다.
하지만 천하의 남궁진명과 사황봉의 봉주, 흑사방의 방주들이 호법을 서주는 와중에 누가 감히 좀 쉬었다 하겠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
덕분에 강호에 누구도 누리지 못할 호사를 누리긴 했다.
백도와 흑도의 모든 고수가 서로 나서서 호법을 서주고 타혈을 해줬던 사람은 나밖에 없을 테니.
그렇게 정신이 소멸할 것 같은 피로 속에서 몸을 또 어찌어찌 움직여 멸혼진으로 들어갔더니 결국 사달이 났다.
몇 걸음을 잘못 내디뎠던 것.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순간, 멸혼진의 새로운 진로가 보여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길을 걸었다.
본래라면 있을 수 없는 실수였지만, 어차피 멸혼진 안에서의 실수는 나밖에 알지 못하지 않던가.
유지량에게 슬쩍 물으니, 진법을 공부하는 방법의 하나로 진로를 먼저 파악하고 계산을 체화하는 방법이 있다고 했다.
다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태을진경의 효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삼라의 도를 깨우치는 공부인 태을진경을 익히기 시작하면서 주변에 들어오는 정보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되었고, 정과 기가 분리된 상태에서 신이 객관화되니 진법의 묘를 깨우친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할 뿐이었다.
어쨌든 결국 다 구했다.
그 안에서 섣불리 움직여 죽은 사람 제외하고, 다친 사람, 배고픔을 못 견뎌 죽은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구했다.
무림 역사상 한 명의 인원이 이렇게 많은 인원을 구했던 적은 없다는 말을 들었다.
솔직히 안에 있던 사람들이 죽는 게 신경 쓰이긴 했지만, 내가 이 정도로 목숨을 걸어가며 구할 건 아니었다.
적당히 거래해 가며 내가 취할 것을 취하면서 구해도 되는 상황.
얼마든지 태을문과 나에게 이득이 되는 상황으로 돌릴 수도 있었지만, 용소아가 무림맹을 거쳐 무당으로 도망쳤다는 이야기와 안쪽 진법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목숨을 걸어서라도 안에 있는 인물들을 다 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용소아에 대한 경외가 똥통에 처박힐 테니까.”
백도 문파의 태산인 무림맹이 결국 용소아의 손에 떨어진 것은, 무엇보다 강력한 무공과 그를 감싸고 있는 무림맹 최강 문파인 무당이라는 배경 덕분이었다.
더구나 마교와 접전을 벌일 때마다 타 문파들이 속절없이 죽어나갔던 반면, 용소아는 그 특유의 인간 같지 않은 능력으로 마교를 상대로 승리를 얻어왔다.
이 모든 것들이 경외로 발전되어 무림맹의 희망은 용소아 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했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까지지.”
흑·백 진영을 넘어 악양에 모인 사람들은 어느새 친구가 되었는지, 겸상을 하고 술을 마시며 자축을 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흑도 문파의 제자들이 백도 문파의 고수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반대로 백도 문파의 고수들이 흑도 문파의 감사를 전하기도 했다.
그러는 와중에 공통의 적은 단연 용소아로 승화되었고, 사람들은 술자리마다 안주 대신 용소아를 실컷 씹으면서 그에 대한 분노를 키웠다.
용소아가 워낙에 큰 똥을 싸고, 무당이 그걸 가리겠다고 무당파로 불러드려 꼭꼭 숨긴 건 오히려 악수가 되어버린 것이다.
생존자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무림맹을 비롯한 강호 전역에서 지원물품과 지원자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지만, 그 안에 무당은 없었다.
“앞으로 재밌어지겠군.”
단단한 저수지도 작은 구멍을 시작으로 무너지는 법이다.
백도 무림의 최강인 무당도 오늘을 기점으로 작은 구멍이 났다고 봐도 무관했다.
물론 작은 구멍이기에 얼마든지 막을 수 있겠지만, 그동안 봐온 그들의 꼬락서니를 봤을 때 과연 그런 행동을 할까? 의문이 들긴 하지만.
지금도 보면 개방을 중심으로 안쪽의 진법이 그렇게 무서운 진법은 아니지 않았는가 하는 요상한 소문이 돌락 말락 하고 있는데, 그런 소문을 입에 담는 사람이 나올 때마다 마령고원에서 고생했던 사람들에게 곤죽이 되기 일쑤였다.
그러자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소문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이제 좀 사람 꼬라지 같군.”
생존자를 모두 구한 이후로 우리는 지휘부와 야전지를 모두 철수하고 악양으로 이동했다.
객잔을 비롯한 여곽 서른 개를 통째로 빌려 다친 사람과 구출 과정에서 피로를 쌓인 사람들에게 먼저 배정하였고, 나는 그중에서도 별채를 따로 받아 편하게 쉴 수 있었다.
자다가 깨면, 점소이를 불러 음식을 왕창 욱여넣고, 운기조식을 하고 다시 잔다. 그렇게 자다 배가 고프면 다시 일어나 이 행동을 반복한다.
그렇게 삼 일을 하고 나서야 조금씩 정신이 돌아오고 신체도 정상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깨어난 후엔 가장 먼저 내공부터 살폈다.
급박한 와중에 태을진경의 효능을 확인할 겨를도 없이 무아지경으로 운기를 하느라 몰랐는데, 내공은 벌써 이갑자에 다다라 있었다.
“……허.”
아마도 태을진경이 온몸을 쏘다니며 몸 안에 잠자고 있던 남은 영약의 기운을 모두 쓸어 담은 덕분인 것 같았다.
얼마든지 쓸 수 있는 내공과 그 내공을 쏟아낼 수 있는 완성된 무공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은 매우 생경한 것이었다.
“강호의 고수들과 용소아 그놈이 당당한 이유가 있었구나.”
이전 생에도 이번 생에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충족감.
계획했던 모든 일을 힘들이지 않고 해결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들 정도였다.
마령고원에서 석 달을 소비한 탓에 이제 시간은 석 달밖에 남지 않았고, 한시가 바빠 움직여야 할 시점이었다.
“그래도 충분히 가치 있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자축하며 먼저 장도원에게 방문했다.
“허허, 너 진짜…….”
미타성수를 본 장도원은 기함한 표정으로 헛웃음을 내뱉고 있었다.
“살아 돌아온 것도 감지덕지라 생각했거늘…….”
“다 어르신 덕분입니다. 이게 꽤 도움이 됐거든요.”
난 비룡조를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괜히 만들어 줬군. 이렇게 귀찮게 할 줄 알았으면 그냥 대충 만들어 주는 건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입가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는 장도원.
전생에서 장도원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자신의 물건을 잘 활용하는 주인을 만난 것만으로도 물건을 만든 사람은 즐거움을 느낀다고.
“삼 일 뒤에 오거라.”
“그렇게나 오래 걸립니까?”
“극음의 기운으론 어떤 것에도 밀리지 않는 녀석이다. 이걸 처리하는 게 단박에 되는 거로 생각하느냐?”
“알겠습니다. 돈은 얼마나 준비하면 되겠습니까?”
“됐다. 그깟 돈 받아봐야 쓸 데도 없는 거.”
“정말요?”
“이번에 네놈이 구한 아이 중에 내 손님이 좀 있었다. 그걸로 계산했다 치지.”
“어? 그럼 계산이 되레 안 맞지 않습니까?”
“뭔 소리냐?”
“지금 백도문파 흑도문파를 가리지 않고 제게 보답을 하겠다고 하는데, 최소한 보물 하나 정도는 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 썩을 놈이. 미타성수마저 처리에 실패해 날리는 꼴을 보고 싶은가 보지?”
난 그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얼른 그의 가게를 나왔다.
장도원은 장사하던 문마저도 닫고 작업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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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별채로 돌아가려던 때였다.
무림맹에서 지급하는 무복을 입은 일단의 무사들을 보곤 한쪽으로 비켜서려던 찰나였는데.
어쩐 일인지 스무 명에 달하는 그 인원들이 내 앞에 우뚝 멈춰 서는 것이었다.
“태을문의 진소운 맞는가?”
더구나 내 정체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습니다만.”
“같이 좀 가줘야겠다.”
그렇게 양쪽에서 팔을 잡으려는 무림맹의 무사들.
난 단박에 그들에게 양장을 쏘아 그들을 물러나게 했다.
예상밖의 공격에 세 걸음이나 물러난 무사들은 깜짝 놀라며 검을 뽑으려 하고 있었다.
“무림맹의 명을 무시하는 건가?”
“아직 누군지, 어디서 왔는지, 왜 왔는지도 밝히지 않았습니다.”
예전 같았다면 조용히 소란 없이 따라가는 것이 정답이라 생각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무림맹 악양 지부장 공석찬이다. 마령 고원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하면 무슨 말인지 알겠지?”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르겠습니다만.”
“이놈! 네놈의 사문인 태을문도 백팔봉의 한 봉을 차지하고 있다. 무림맹의 맹법을 무시할 셈이더냐?”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당최 그곳에서 제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공석찬이 무림맹의 무사들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동시에 네 사람이 달려들려 하고 있었다.
난 검을 뽑을 것도 없이 만화무적권을 펼쳤다.
퍼퍼퍼퍼퍼퍼퍽.
순식간에 뻗어나가는 수십 개의 권영에 휩싸인 무림맹의 무사들은 급소를 몇 대 맞고 숨을 못 쉬겠다는 듯 꺼억 대고 있었다.
“이놈! 감히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 있는 것이냐!”
“그러는 지부장께선 맹법을 앞세워 당최 무슨 일을 꾸미는 겁니까?”
“뭐라?”
“제가 기거하는 숙소엔 분명 남궁세가도 있고, 모산파도 있습니다. 그들을 통해서라면 이런 무력을 동원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요. 그러지 않고 이런 방법을 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타당하다면 따라가겠으나, 그러지 않다면 가지 않겠습니다.”
남궁선화로부터 들은 이야기.
용소아가 무당으로 피해 들어갈 때도 가만히 지켜봤던 것이 무림맹이었다.
그런 행태 때문에 남궁세가와 무당파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뻔했다.
이 일로 인해 남궁진명의 화가 머리끝까지 났고, 이후에 구출 작전에서 무림맹을 완전히 배제해 버렸다고 한다.
굳이 내가 여기서 무림맹이라고 숙이고 들어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애당초 마령고원의 진법에 어떤 장치가 있지 않았는가에 관한 의심이다.”
공석찬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지만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가 자세히 이야기했다.
“그 마령고원에 펼쳐진 진법이 태을문의 것이 아님을 입증할 수 있는 것이더냐?”
“파하.”
용소아도 뚫지 못하고, 모산파도 뚫지 못했는데 태을문의 제자가 뚫었으니 애당초 진법이 태을문의 것이 아니었느냐? 하는 의문.
기가 차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왔다.
“우리 태을문에 그 정도의 진법을 펼칠 능력이 되었다면 애당초 백팔봉의 말석에서 핍박받으며 살 이유가 있었습니까?”
“……그건 조사해 보면 알겠지.”
“그렇다면 정식으로 만통부의 명령서를 보여주십시오.”
“……뭐?”
“이런 중요한 일이라면 만통부의 재가를 받았을 거 아니오. 아니면, 지부장님께서 심증으로 조사를 하겠다는 겁니까?”
“…….”
당연하게도 명령서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이런 중요한 일의 명령서라면 제갈소명의 재가가 있어야 하는데. 그가 이런 음모론적인 의심을 심각하게 받아들일 리 없으니까.
“……자꾸 중언부언하는 것이 점점 이상하게 생각되는구나.”
난 문득 공석찬의 이런 논리 없는 행동에 떠오르는 바가 있어 물었다.
“혹시 지부장께서 무당파 출신입니까?”
흠칫.
제대로 숨기지도 못하는 그 표정을 보자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아아, 무당파 출신이라시면 그럴 수 있겠네요.”
무림맹의 도움을 청하러 갔던 용소아가 무당으로 갔음에도 제대로 나서지 않았던 이유.
“이는 사문과 관련 없는…….”
멀거니 물러서서 멸혼진 안의 증인들이 모두 사라지길 바랐던 이유.
그리고 지금에 와서 용소아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자 부리나케 나선 이유까지 모두 납득이 되었다.
“명령서 가져오십시오. 아니면 가지 않을 터이니.”
난 그렇게 공석찬을 무시하고 자리를 옮기려는 찰나.
결국 참을 수 없다는 듯 공석찬이 손을 썼다.
“흥.”
나는 지체 없이 만화무적권으로 대응하려 했다.
아직 태을검제의 무공이 어느 수준인지 몰랐고, 그게 과연 무당의 무공에 대응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지만, 하나 확실한 건 내 내공이 그보단 높을 거라는 것이었다.
그때 우리 둘 사이로 거구의 사내가 나타나 공석찬을 향해 태도를 내리쳤다.
팡.
거구의 사내는 태도를 휘두르고 가만히 서 있었건만, 공석찬은 무려 이장이나 공중에 뜬 채로 날아갔다.
“커흑, 누, 누구냐! 감히 무림맹의 지부장을!”
“지부장?”
거구의 사내가 태도를 어깨에 들쳐메며 말했다.
“일개 지부장 따위가 이 사황봉 차석두의 은인을 핍박해? 아가야. 이 아이를 데려가고 싶걸랑 가서 느그 맹주 데려오너라.”
흑도 무림의 손꼽히는 무력 집단인 사황봉의 봉주 차석두라는 말에 공석찬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그 옆으로 차분하게 걸어 나온 것은 남궁세가의 남궁진명이었다.
“분명, 무림맹이 참견할 일이 아니라 이야기했을 텐데.”
공석찬은 물론이고, 그 둘의 등장만으로 무림맹의 무사들은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결국 공석찬은 포권지례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급히 자리를 떴다.
“드디어 우리 은인 얼굴을 보는구만.”
“이보게, 나갈 때는 우리 호위들에게 말하라 하지 않았나.”
서로 이를 드러내도 이상하지 않을 백도와 흑도의 두 거목이, 친우인 듯 함께 있는 모습에 나는 당최 어떤 대처를 해야 할지 머리가 복잡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