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는 일류무사(3)>
밖에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로 몸이 회복되었다는 것이 알려지자마자 방문자들이 줄을 이었다.
“아까 봤지? 사황봉의 봉주 차석두라네.”
“흑사방의 방주 강맹지라네. 내 이름은 들어 봤겠지?”
“사룡문 문주 고길산이네.”
“혈창파 방주…….”
“도갑문…….”
본래라면 태을문의 제자인 내겐, 흑도 무림의 손꼽히는 고수들과 자리를 가지는 것이 매우 부담스러운 상황이었지만, 그들은 내 사정 따윈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들이닥쳤다.
“흑도 무림이 자네에게 큰 빚을 졌네.”
차석두의 말에 함께 모인 이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아니었다면 흑도 무림 전체에 얼마나 파란이 일었을지 상상도 가지 않는군.”
“아닙니다. 신념을 떠나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아닐세. 그 신념을 떠나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우리도, 백도의 위선자들도 잘 알고 있지. 일례로 무림맹이 미적지근하게 반응한 것도 어찌 보면 마령고원에 대다수 인원이 흑도 무림의 무사들이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
“그러니, 자네가 한 일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대단하고 엄청난 일이었네.”
차석두는 겸연쩍은 듯 볼을 긁었다.
“덕분에 위선자 놈 중에도 꽤 괜찮은 놈들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
“아하하…….”
당최 이 상황을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
마교가 나타나기 전까진 무림맹의 주적은 흑도와 사도들이었으니까.
“마음 같아선, 자네와 자네 사문의 사람들을 모두 초청해 성대한 잔치라도 벌이고 싶네만…….”
“네?”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고, 그걸 수습할 시간도 없이 차석두의 얼굴엔 아쉬움이 한가득하였다.
“……그랬다간 자네들이 큰 곤욕을 치르겠지.”
난 얼른 그들의 감사한 마음을 줄이기 위해 말을 이었다.
진짜로 흑도 문파에 초대받았다는 것이 알려지면, 가지 않아도 문제, 가면 더 큰 문제가 생길 테니.
“강호의 도리가 백과 흑을 구분하지 않고 지켜졌다는 점에서 전 충분히 대가를 받았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감사는 오히려 저에게 과공으로 느껴집니다.”
차석두를 비롯한 강맹지와 고길산 등의 얼굴에는 요상한 감정이 어려있었다.
당신네의 호의를 거절해서 보이는 분노인지, 대가를 치르지 않아도 되어서 즐거워하는 기쁨인지, 당최 그 험악한 인상들 때문에 알 수가 없었다.
“으하하하하. 정말이지 대단하군. 대단해. 어찌 백도에는 이런 인재들이 끝없이 샘솟는 것인가.”
차석두가 앙천광소를 터트리자, 다른 흑도인들도 다 같이 광소를 터트렸다.
“……하하.”
난 꼭 사냥꾼들 앞에 잡혀 와 언제 통구이가 될지 모르는 새끼 돼지가 된 심정이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은혜를 갚지 않는다면 그건 흑도의 이름을 떠나 인간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지. 이걸 받게나.”
그가 내미는 것은 손가락 두 마디만 한 호패였다.
“사황봉은 언제든 자네가 필요로 할 때 빚을 갚을 것이네.”
“……!!”
나는 속으로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건네는 호패는 그냥 호패의 성질이 아닌 보은패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것도 일파의 수장이 자신의 사문을 걸고 건네는 호패.
이건 사황봉이 언제든 빚을 갚겠다는 차용증과도 같았다.
강호에선 제아무리 흑도라도 이 호패에 대한 빚을 갚지 않았을 때, 최소한의 신의조차 없는 문파라 낙인이 찍혀 흑도 무림 사이에서도 살아남기 힘들게 된다.
더구나 보은패에 유효기간 따윈 없다. 대를 이어서 사황봉이 남아 있다면, 호패가 누구 손에 있든 사황봉은 한 번은 나서주어야 하는 맹약이나 마찬가지. 이 호패는 돈으로 갚을 수 없는 깊은 신뢰의 상징이기도 했다.
백도 문파의 제자인 내가 이걸 받아도 탈이 없을까? 라는 고민을 하는 동안. 다른 문파의 수장들도 나섰다.
“우리 흑사방도 마찬가지네.”
“나도…….”
그렇게 하나하나 쌓이는 호패들.
탁자 위에는 무려 스무 개에 달하는 호패들이 가득했다. 실제 참가했던 문파들은 더 많았지만, 그들 사이에서도 대표를 선발하여 추린 것으로 보였다.
“어…….”
“이것까진 거절하지 말게, 그건 제아무리 흑도라도 우릴 인면수심의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니까.”
그의 말에 잠시 고민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정마대전 일어나면 백도건 흑도건 싸그리 다 죽는다. 미친 마교놈들 앞에서 백과 흑이 무슨 상관이랴.
나는 머릿속에 담아온 조사님의 진전을 다시금 떠올렸다.
이제는 타 문파들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기반도 서서히 생기지 않겠는가.
“정체성을 떠나 강호의 선배님들의 호의를 어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감사합니다. 요긴하게 쓰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흑도 문파들이 모두 나간 뒤엔 정신을 챙길 사이도 없이 백도 문파들의 대표가 들어왔다.
상대적으로 백도 문파의 참여 숫자 자체가 낮았기에 흑도 문파들처럼 많지는 않았다.
“사황봉 봉주가 왔다 갔나 보군.”
남궁진명이 탁자에 가득 쌓인 호패들을 보며 웃었다. 내가 치워야 할까 말아야 할까 고민하는 와중에, 그가 내 심경을 알고 손을 저었다.
“괜찮네. 봉주 차석두가 자네에게 어떤 보답을 하는 게 좋겠냐 묻기에 내가 알려준 거니까.”
사황봉주와 남궁세가의 소가주가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고?
“그들이 악양을 휘젓고 다닌 덕분에 일 처리가 쉬웠지. 상인 놈들이란 거, 남의 불행을 기회로 삼지 않던가?”
사정은 이랬다.
마령고원에 수만의 사람들이 모이고 물자가 부족해지자, 가장 가까운 도시인 악양에서 물자를 수급해야 했는데.
상인들이 기회를 틈타 물자의 가격을 한참 올렸고, 백도 문파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바가지를 쓰려고 하자 흑도 문파들이 상단이건 표국이건 마구 휘젓고 협박하여 다시 가격을 안정시켰다는 것.
완벽한 흑·백의 합동 작전이었다고 말하는 남궁진명의 말에 난 그저 헛웃음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하… 하…….”
이번 일로 무림맹에 단단히 원한을 쌓은 남궁세가는, 무림맹이 보란 듯이 흑도 무림의 고수들과 관계를 쌓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그처럼 거침없이 행동할 수 있느냐? 그건 아니었다.
그는 남궁세가의 소가주였고, 나의 사문은 태을문이었으니까.
그는 걱정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이번에 한 행동을 가지고 흑도와 내통했다거나 하는 말을 할 사람은 없을걸세. 만약 그런 존재가 있다면 내 손으로 죽여주지.”
“……네??”
“농담이네.”
나는 살벌한 농담에 입을 꾹 다물었고, 그는 재밌다는 듯 쿡쿡 웃었다.
“제왕검법을 손으로 잡았다더니 배포가 그리 커 보이지 않는구먼?”
남궁진명의 말에 주위에 동석해 있던 사람들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대협, 그게 사실입니까?”
“아, 글쎄 그렇다니까요. 우리 산이 놈이 얼마나 놀랐는지. 그 자리에서 검을 떨어뜨릴 뻔했답니다.”
사람들은 신기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남궁진명의 말이 혹시 남궁산에게 실례가 되지 않을까 그의 눈치를 살폈는데.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입가에 미소마저도 짓고 있었다.
“자자, 아직 기다리는 사람들이 더 있으니 얼른 자리를 비켜줍시다.”
아직도 더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고?
내가 속으로 비명을 지르는 사이, 형산파의 무사가 앞으로 나섰다.
“나는 하민중의 대사형 되는 사람이네. 우리 막내 사제를 구해주어 고맙네.”
하민중과는 아버지뻘 되어 보이는 장년인이 포권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나는 하마터면 그를 아는 척할 뻔했다.
형산파의 다음 장문인이 되는 그는 무림맹 안에서도 공명정대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칠살멸혼 대협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나를 아나?”
“풍문으로 대협의 위명을 많이 들었습니다.”
“날 더 부끄럽게 하는군……. 내 사제가 자네에게 못된 말을 했다는 것을 들었네. 그럼에도 구분하지 않고 구해주어 고맙네.”
“별말씀을요. 별로 상처받을 만한 말도 없었습니다. 부디 얼른 회복하시라 전해주십시오.”
칠살멸혼 송정무는 묘한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자네는…… 여러 가지로 놀라운 사람이군.”
뜻을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송정무.
“……이건 문주님께서 자네에게 전달해 달라 하신 선물이네.”
그가 건넨 건 손바닥보다 조금 큰 두툼한 가죽 주머니였다.
“이건……!”
“본문에서 만든 복마부(垘魔符) 백 장이라네.”
“!”
“!”
나보다 이야기를 듣던 다른 이들이 더욱 놀랐다.
형산파의 무공이 가지는 제마 효능은 정마대전이 일어나기 전에도 유명했다.
복마부는 형산파의 비기 중 가장 뛰어난 효능을 지닌 부적으로, 마사요독(魔詐擾毒) 몰아내는 효험이 있었다.
다만, 이 부적을 만드는 것이 어찌나 까다로운지, 강호에는 실제 소환단의 숫자보다 복마부의 숫자가 더 적을 거라는 이야기가 돌기도 했었다.
“이렇게나 주셔도 되는 겁니까?”
복마부 한 장이 금전 10냥의 가치를 가진다.
그런 복마부가 한두 장도 아니고 백장이라면 과거부터 만들어 왔던 복마부 전부를 가져왔다는 이야기.
“본래 진법을 해진하기 위해 가져왔네. 하지만 너무 강력한 진법이라 쓸 생각도 하지 못했지. 문주님께서 그 진법 속에서 제자를 구한 자네에게 인색하게 굴지 말라 하셨네.”
부담 없이 준다는데 거절할 필요가 있을까?
더구나 정마대전이 일어나면 복마부는 마교도들에게 톡톡한 효과를 보이며 장당 금전 100냥의 가치까지 뛰어오른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언제 한번 형산에 오겠는가?”
“……?”
“아니지. 자네도 슬슬 무림맹에 올 시기가 됐겠군.”
“……아마도 그렇겠지요.”
“그래, 그럼 무림맹에서 보세.”
송장무를 다음으로 산동악가, 양가장의 사람들이 호패를 두고 갔다.
“지량이에게 듣자 하니 기문진법에 관심이 많다 들었네.”
태을문의 방어를 위해 기관진식과 기문진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정마대전이 벌어지고 기관진식과 기문진법이 설치된 문파와 설치되지 않은 문파의 피해는 어마어마한 차이를 보여줬다.
하지만 이 기관진식이나 기문진법 자체가 엄청난 금액이 들어가는 건 둘째 치고, 이걸 설치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곳이 손에 꼽을 정도이기에, 돈이 있어도 설치하기 힘든 경우가 다반사였다.
해서 이번에 교분을 쌓은 유지량에게 기문진법의 설치 비용과 필요한 물건들을 넌지시 물었는데, 그게 저 윗사람의 귀까지 들어간 모양이었다.
“해서, 태을문에 기문진법을 설치해 줄 생각 이네만 어떻게 생각하나?”
내 입이 함지막하게 벌어졌다.
“이를 말씀이십니까. 먼저 부탁드리고 싶은 바였습니다. 한데 기문진법의 설치에 비용이 꽤나 많이 들어간다 알고 있습니다. 어마 정도를 예상해야 할까요?”
기관진식은 진작 제갈천기를 고용하여 설치하려 했던 덕분에 미리 자금 확보가 되었지만 기문진법은 생각하고 있지 않았었다.
“그 비용 말일세. 자네가 무량불괴멸혼진……. 그 안에서 얻은 것들과 서로 교환하는 건 어떻겠나?”
“얻은 것 말씀입니까?”
“길을 잘못 디딘 적이 있다고?”
유지량에게 슬쩍 지나가면서 했던 이야기도 함께 올라간 모양이었고.
어차피 나는 손해 볼 것이 없고, 무량불괴멸혼진으로 태을문에 설치될 기문진법이 더 강력해질 수 있다면 그건 더 좋은 일이 아니던가.
“알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니, 오히려 우리가 잘 부탁해야지.”
유지량을 끝으로 사람들이 나가고 장내엔 남궁진명과 남궁산만이 남아 있었다.
사실 이런 선물들을 받으면서 가장 기대했던 차례이기도 했다.
과연 오대세가의 일좌를 차지한 남궁세가는 어떤 것을 준비했을까?
분명 지난날 대연신단을 준 때는 그걸로 입을 닦지 않겠다 이야기했는데. 그 이상을 기대하면 너무 도둑놈처럼 보이려나?
내가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남궁진명이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전표인가?’
사실 보은패로 호패를 받은들, 그 호패를 얼마나 잘 활용해 먹겠나.
특히나 흑도들에게 도움을 받았다간 쉽게 넘어가지 못할 텐데.
그런 면에서 남궁세가의 호패도 마찬가지.
이럴 땐 차라리 깔끔한 금전 박치기도 나쁘지 않다.
“이미 대연신단까지 주신 마당에…….”
나는 슬쩍 한번 거절하는 척해 보았다. 물론 여기서 거둬들인다면 평생 저주할 생각이었다.
“그때도 말하지 않았는가, 천하의 남궁세가가 내 딸과 무사를 모두 구해준 은인에게 대연신단 한 알로 빚을 모른 척하겠나?”
“하하, 그렇죠.”
그런 말을 하면서 슬쩍 봉투를 당겼는데, 슬쩍 열린 봉투 사이로 보이는 종이가 일반 전표랑은 좀 다른 게 아닌가?
내 반응을 눈치챘는지 남궁진명이 너털웃음을 뿜었다.
“푸허허, 확인해 봐도 좋네.”
“……아, 그게.”
“사실 내가 전할 말은 그걸 봐야 할 수 있는 거네.”
난 불안한 마음이 되어 재빨리 봉투 안의 종이를 꺼냈는데.
내가 예상한 것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 적혀 있었다.
【……꼭 방문해 주게나.】
내용물은 전표가 아닌 편지였다. 그것도 남궁세가에 들르라는 가주의 초대장.
“아버님께서 자네를 꼭 한번 보고 싶다고 하시더군.”
“…….”
남궁진명의 아버지면 남궁세가의 가주인 창제신검 남궁태하다.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높은 경지에 도달해 있음은 둘째 치고, 무림의 배분으로 봐도 초대장을 보낼 정도의 위치가 아니다.
이런 경우, 대체로 사문으로 초대장을 보내어 그 사문의 대표자가 아랫사람에게 명하는 식으로 전달하는 것이 배분에 맞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창제신검이 자신을 한껏 낮춰가며 태을문의 제자에게 정식 초대장을 보낸 것이었다.
“어, 그게…….”
어마어마한 초대장을 받았지만 되려 부담이 가중되었다.
“죄송합니다. 제 행동이 옳았다곤 하나, 창제신검님께 이런 초대장을 받을 정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최대한 겸손하게 잘 돌려 이야기 했지만, 남궁진명과 남궁산은 여전히 입가의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아아, 그렇게 부담스러워할 필요 없네. 아버지께서 자네에게 따로 볼 일이 있다 하셨거든.”
“네?”
이번 생애도 지난 생애도 창제신검과 만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분명 그럴진대 그 사람이 날 어떻게 알고 만나자 하는 것인가?
“아버지의 보물인 칠채보주를 자네가 뺏었다면서?”
“!!”
뜬금없는 이야기에 대체 상황이 어찌 된 것인지 남궁산을 노려보며 답변을 구했지만, 남궁산 이 양반이 갑자기 천장을 보며 휘파람을 부는 게 아닌가.
“아, 아니, 그, 그것이…….”
“더구나 아버지께선 자신의 손자가 대연신단에 천잠사까지 모두 뜯겼다는 이야기를 들으시곤 하마터면 졸도하실 뻔했다네.”
점점 이야기가 점입가경이 되고 있었다.
“그러니 부담 없이 방문하게나.”
이 양반이 지금 장난하나?
“아참, 자네가 방문하지 않는다면 아버님께서 친히 자네를 찾으러 가시겠다 하는군.”
와서 맞지 않으면 쫓아가서 때리겠다. 이건가?
그 소름이 끼치는 이야기에, 내가 얼른 대답했다.
“급한 일을 마치는 대로 꼭 방문하도록 하겠습니다.”
최소 찾아가서 맞으면 한 대라도 덜 맞겠지.
내 말에 남궁진명이 만족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산도 다시 고개를 돌려 나를 보고 있었고. 내가 그를 노려보며 해명을 요구하고 있을 때 남궁진명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자네에게 부탁이 하나 있네.”
“말씀하시지요.”
“누굴 좀 들이려고 하네만 자네가 그분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주었으면 좋겠군.”
남궁진명이 ‘그분’이라는 말을 할 정도의 인물이 과연 누굴까?
더구나 내가 굳이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인물?
짐작할 수 없는 대상에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고, 뒤이어 문을 열고 조심히 들어오는 노인과 성모란의 모습에 그가 왜 이런 이야기를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오랜만이네.”
그는 바로 철검문주였다.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나는 포권으로 답했다.
“…….”
대답 없이 바라보기만 하는 철검문주.
지난번에 봤을 때에 비해 사람이 많이 초췌해 보였다.
얼굴 전체의 살집이 푹 죽었고, 두 눈은 퀭하니 들어가 그 고약해 보였던 얼굴이 더욱 심술 맞게 변해 있었다.
“평안하지 못했느니라.”
“아…… 그러시군요.”
“가문을 물려받아야 할 손자는 금옥에 들어가고, 구중검은 빼앗겼으며 철검문의 이름은 땅에 떨어졌는데 어찌 평안하게 보낼 수 있었겠느냐?”
사전에 이야기했던 것과 달랐는지 남궁진명이 처음으로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허나, 그것들은 모두 나의 허물, 나의 잘못으로 인한 것. 너의 잘못이라 하면 네가 그것을 들춘 것뿐이겠지.”
말리려던 남궁진명의 손이 스르르 내려갔다.
“그런데 그 원망의 대상이 내 하나 남은 손녀의 목숨을 구했구나. 이러면 더 이상 너를 원망할 수도 없는 일 아니더냐.”
그는 상대를 탓하는지 스스로를 자책하는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모란이가 멸혼진 안에 갇혀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하늘에 맹세했느니라. 모란이만 돌려주신다면 내 목숨을 드리겠노라고.”
철검문주가 갑자기 무릎을 꿇고 바닥에 엎드렸다.
“!”
“!”
“!”
장내에는 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남궁진명과 남궁산, 손녀인 성모란까지 함께였다.
나는 대경하여 얼른 철검문주를 일으키려 했다.
“일어나십시오. 저는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자네에겐 당연한 일일지라도 내겐 그렇지 않네. 내 목숨까지도 건 마당에, 무릎 꿇는 것 따위가 무슨 상관인가.”
그는 애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은인에게 사죄를 드리오. 부디 이 노부가 벌인 지난 날의 죄를 용서해 주시구려.”
그가 지닌 명성과 세월의 무게를 내려놓은 모습에 얼어버린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문주님의 진심 어린 사죄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그만 일어나 주십시오. 계속 이러시면 제가 모란 소저를 구한 것이 되레 흉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시지요. 문주님. 이런 부담을 지워준다면 차후 태을문과 철검문의 관계가 계속 어색해지지 않겠습니까?”
남궁진명까지 나서자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는 철검문주.
그는 품에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호패를 꺼내어 내려놓았다.
“앞으로 합비에서 태을문의 위치를 침해하지 않겠네. 더불어 앞으로는 두 사문이 좋은 관계를 만들어 나가도록 내 노력하겠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내가 포권지례를 올리자, 철검문주도 동시에 포권을 쥐고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성모란은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보였지만 할아버지가 보이는 거대한 무게에 압도되어 함부로 입을 열지 못하고, 대신 나가는 내내 내 쪽을 바라보았다.
“휴우. 정말이지 대단하군.”
남궁진명은 진땀을 뺐다는 듯 한숨 돌렸다.
“그러게 말입니다. 저분 입장에서 저런 행동을 하기란 쉽지 않으셨을 텐데.”
내 말에 남궁진명이 무슨 이야기를 하냐는 듯 말했다.
“난 자네를 이야기한 거네.”
“네?”
“이제 막 약관이 된 나이에 백도 문파는 물론, 흑도 무림 고수들에게 보은패를 받고 철검문주님께 큰절을 받을 수 있는 인물이 어디 있겠냐 말이야. 내 아들은 물론이고, 그 용소아도 자네 나이 땐 무공으로 이름만 날렸을 뿐이지. 안 그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