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사람을 모으는 일류무사(2)>
얼마 전 안휘의 삼대 미녀로 꼽히는 남궁선화와 성모란을 보았지만, 그녀 앞에선 빛이 바랬다.
마치 그림에서 튀어나온 듯한 하얀 나신. 오밀조밀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이목구비. 흑단 같은 머릿결과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아슬아슬 은밀한 곳을 가리는 금붙이들.
남녀를 구분하여 누구도 그녀 아름다움 앞에서 이성을 유지할 수 없었다.
덜덜덜덜덜덜덜.
의식하지 않았건만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이 어려운 길을 들어 왔으니 보상해 주어야겠구나.
마치 수줍은 소녀처럼 손가락으로 입술을 매만지던 그녀가 양팔을 벌렸다.
동시에 거스를 수 없는 욕구가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칠주야 동안 잠을 자지 못했던 사람처럼, 이 잠자리를 눈앞에 둔 것처럼, 한 달간 아무것도 먹지 못한 사람이 산해진미를 눈앞에 둔 것처럼.
“……크음, 대단하구려. 그 오랜 세월 이런 식으로 침입자를 막아 온 것이오?”
-침입자라니 난 한 번도 그들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단다. 내겐 다 귀한 손님이었지.
내가 한쪽에 가득 쌓인 해골을 가리키며 물었다.
“손님 접대가 너무 과한 것 아니오?”
그녀는 입술을 삐쭉 내밀며 팔짱을 꼈다.
그녀가 작은 움직임을 보일 때마다 몸은 제멋대로 움직이려 하고 있었고, 그것을 자제시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태을진경을 끌어올려야 했다.
-죽을 때까지 이 몸을 원하는 걸 어찌한단 말이냐.
그녀가 요상하게 몸을 배배 꼬며 시무룩한 표정을 짓자, 간신히 운공하던 태을진경 마저도 뚝 하니 끊길 지경이었다.
‘대체 얼마나 강력한 영력이기에….’
아무리 성취가 낮다한들, 삼라의 진리를 기반으로 하는 태을진경의 움직임이 잠시 멈췄다는 것에 놀라 정신을 집중하고 필사적으로 운공을 이어갔다.
그녀는 왠지 신기한 물건을 본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직 이성을 유지하다니, 대단한 아이구나. 소림의 제자더냐? 무당의 제자더냐?
“둘 다 아니오. 대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 거요?”
-현혹탐색공이란다. 등선한 신선도 속세에 다시금 떨어지게 만든다는 희대의 무공이지.
“허.”
그녀의 입에서 천삼백 년 전 사라진 환락궁의 전설적인 색공 이름이 튀어나오자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월나라부터 살아온 거요?”
-평생 나이를 먹지 않는 여인은 싫더냐?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여인은 상대가 움직이지 못한다는 걸 확신하고 있었다.
-저 뼈들 사이엔 숭산의 노인네들의 뼈들도 있었고, 등선을 앞둔 무당의 도사도 있었느니라. 그러니 스스로를 너무 자책할 필요는 없다.
그녀의 손이 얼굴을 시작해 피부에 닿을 때마다 온몸에 피가 하부로 쏠리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허리춤에 착용하고 있던 금색의 단검을 꺼내어 단박에 심장을 찌르려 했다.
텁.
-어떻게?
자신의 손이 내 왼손에 잡혀있는 것을 보곤 대경하는 여인.
“소림의 노사들처럼 정신 수양은 되지 않았지만 이런 걸 가지고 있소.”
난 오른손에서 화르륵 타오르는 복마부를 보여주었다.
본래 목적지에서 방향을 틀어 굳이 귀신이 있다는 이곳으로 온 이유였다.
형산파에서 건네준 복마부가 여인의 마기를 흡수하여 태워버리고 일순간 마기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었다.
-잔재주를 부리는구나.
만화무적권을 펼쳐 순식간에 이십 개의 권형을 쏟아내었다.
충격을 이기지 못한 금붙이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떨어져 내렸다.
-음탕한 아이로구나.
여인은 아무런 타격을 받지 않은 듯 보였다.
달려드는 그녀의 신형은 분명 신법이나 보법의 성질의 것이 아닌 평범한 움직이었음에도, 극상의 신법을 구사하는 이 못지않게 빨랐다.
펑.
가까스로 그녀의 신형을 밀어냈지만 마치 고양이처럼 공중에서 몸을 한 바퀴 돌아 다시금 짓쳐 드는 여인의 움직임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쾅, 쾅, 쾅, 쾅, 쾅.
나는 그녀의 우악스런 손길에 고양이가 가지고 노는 공처럼 사방으로 뒹굴었다.
“대체 무슨 조화를 부리는 것이오?”
움직임도, 공격 자세도 무공이 아닌 성질의 것이었건만, 파괴력은 철검문에서 받아냈던 성모현의 것을 아득히 넘어서고 있었다.
-나를 찾아오는 이들 중 고수 아닌 자들이 있었던 것 같더냐.
이 험지를 뚫고 들어올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평범을 뛰어넘은 수준일 터.
그런 그들이 죽음을 맞이했다는 건, 그녀의 힘이 결코 평범치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복마부의 효력이 점점 사라지고 몸이 굳어가기 시작했다.
다시 복마부 하나를 꺼내어 손에 쥐려는 찰나, 벽을 박찬 그녀가 귀신처럼 쏘아져 왔다.
“이런!”
필사적으로 몸을 뒤틀고 연화(蓮花)의 수법으로 그녀의 몸을 달려오던 방향으로 밀쳐내었다.
그와 동시에 손에 쥐려 했던 복마부가 그녀의 몸에 딸려 들어가 버렸다.
-꺄아아아아악!
처음으로 그녀가 소름 끼치는 비명을 지르며 자기 몸에 붙은 작은 불씨를 탁탁 쳐냈다.
복마부는 금방 떨어졌지만, 어쩐지 복마부가 붙어있던 자리는 탱탱한 살점 대신 바짝 말린 미라로 변해있었다.
“그게 본 모습이었구려.”
-…마음이 변했다. 네놈을 잘근잘근 씹어 먹어야겠다.
그녀의 두 눈에서 시뻘건 안광이 번뜩이며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치솟아 올랐다.
더 이상 아름다운 모습은 모두 사라지고 지옥의 악귀가 현현한 모습으로 짓쳐 들었다.
“이번에 내가 선물을 좀 거하게 받았소.”
난 양손에 복마부를 쥐고 만화무적권을 장형으로 뻗어내었다.
권형에 비해 위력이 확 줄었지만, 순식간에 허공에 십여 개의 장형이 생겨났다.
예상대로 무공을 익히지 않은 여인은 어느 것이 진짜인지 어느 것이 허상인지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었다.
-꺄아아아아악!
팔과 다리에 불이 붙은 여인.
발을 동동 구르며 불을 끄려는 사이, 다시 두 장의 복마부가 어깨와 등에 붙었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악-
쇠를 긁는 듯한 소리와 함께 온몸이 불에 타기 시작했다.
-안 된다! 안 돼! 이건 모두 내 것이야! 이곳에 있는 것도 모두 내 것이야!
몸에 불이 더 이상 커지지 않자, 그녀는 보물 더미에 몸을 던져 빼앗기지 않으려 발버둥 쳤다.
“이제 그만 시간의 순리대로 사시오.”
마지막 복마부를 머리에 붙이자, 그녀의 몸은 한 장의 부적이 된 것처럼 삽시간에 타오르고 순식간에 재가 되어 사라졌다.
-원통하다…… 원통해.
월향의 몸이 재로 사라진 후 자리엔 검은색의 구슬이 하나 남아있었다.
“내단이라기엔 형태가 이상한데?”
구슬을 손에 쥐자 막대한 기운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어?”
끝도 없이 밀려드는 기운은 인간의 생명의 근원을 담당하는 선천진기였다.
“허. 이것이 불로불사의 비밀이었나.”
온몸의 구석구석을 선천지기가 채우자, 미타성수로 내몰지 못했던 불순물마저 모공을 타고 기화했다.
기운이 넘쳐나니 두려움이 사라졌다.
전생을 통틀어 그동안 봐왔던 강자들, 태청신검은 물론이고 사황봉의 봉주, 더 나아가 마교의 소교주 흑사자 곽궁도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을 기운이었다.
“이곳에서 이런 기연을 얻는구나.”
더 이상 기관진식이고, 영약이고 다 필요 없었다.
이 구슬이면 천하를 지키고 마교의 모가지를 모두 잘라낼 자신이 있었다.
“어디.”
검을 들어 통로를 대각선으로 두 번 휘둘렀다.
어떠한 초식도 없이 그냥 휘둘렀음에도 검기가 검강처럼 어리며 우레와 같은 소리를 내었다.
콰과과광. 쾅. 쾅.
기관진식들이 모두 잘려나가고, 통로는 들어왔을 때의 두 배의 크기가 되었다.
더 이상 금은보화도 필요 없었다.
절대적인 힘을 가진 자는 어떤 것에서도 자유롭지 않던가.
그것이 금력이라 한들 지금의 나를 옭아맬 수는 없었다.
거침없이 통로를 향해 발을 밟는 순간.
움찔.
갑자기 온몸의 선천진기가 빠져나가며 무기력하게 축 처지기 시작했다.
손에 쥔 구슬에선 그저 작은 한기만 올라올 뿐이었다.
“…….”
다시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난 전능하다! 난 무적이다! 마교건 무림맹이건 내 아래서 평화를 유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신감이 차오른다.
다시 당당하게 두 걸음 걸어 나갔다.
“…….”
난 주위를 둘러보았다.
전투 중에 흩날린 금붙이들을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하나도 남김없이 싹싹 긁어모아야 겠구나.”
난 어떤 것에도 자유롭지 않으니 금력도 꼭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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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산을 내려와 다시 악양으로 향했다.
보물이 담긴 석관 두 개는 비룡조에서 꺼낸 천잠사를 길게 늘여 어깨에 멨다.
이 시기 북방에선 많은 전쟁이 일어났고,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을 자기 고향으로 보내는 풍습이 있었기에 석관을 맨 모습을 이상하게 보지 않았지만 기피하는 모습은 있었다.
그렇게 석관을 매고 악양의 포목점에 들어서자, 안에서 천을 구매하던 귀부인들이 저마다 이맛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대체 뭐야?”
“뭐 하는 거야? 저런 사람 들어오지 못하게 막지 않고.”
“장사를 하겠다는 건지 말겠다는 건지.”
부인들과 담소를 나누며 비싼 비단을 팔아먹던 양군백이,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입을 쩍 벌리며 후다닥 튀어나왔다.
“드디어 왔구나!”
양군백은 갑자기 석관을 부여잡으며 엉엉 눈물을 지었다.
부인들은 그의 갑작스런 행동에 어느 정도 예상이 갔는지 안쓰런 표정이 되었다.
“군역을 위해 북방에 끌려갔던 동생놈입니다. 돈이 없어 제대로 된 표국을 구하지 못해 이제야 도착했습니다.”
양군백이 시냇물처럼 눈물을 흘리자, 귀부인들도 덩달아 눈물을 짓기 시작했다.
“잘 오셨습니다. 아주 잘 오셨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양군백이 내게 눈을 찡긋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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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온다 간다 하지 않는 분이시라지만, 그래도 이번엔 꽤 놀랐습니다.”
양군백이 차를 마시며 말했다.
“하나도 안 놀라는 것 같던데요?”
“고관대작의 부인들이 오가는 곳에 석관이라뇨. 소운님도 장난이 참으로 심하십니다.”
지난번에도 그랬지만 범상치 않은 인물이다.
“그나저나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부탁할 일도 있고, 이것도 좀 처리해 주십쇼.”
난 석관을 쳤고. 양군백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시체는 그냥 깊은 땅속에 묻는 것이 나았을 텐데 말입니다. 혹시 화골산이 필요하십니까?”
난 대답 대신 가볍게 석관을 열어주었다.
“헙!”
양군백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 아래 것도 똑같은 물건입니다.”
내 말에 양군백은 믿지 못하겠다며 석관 가득 차 있는 보물과 나를 번갈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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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군백은 일일이 보석들을 바닥에 깔아 하나하나 펴놓았다.
내가 낙엽 모으듯 마구 석관 안에 집어넣은 것과 비교되는 모습이었다.
“정말이지 소운님은 놀라운 분이시군요.”
“얼마나 받을 수 있겠습니까?”
내 질문에 양군백이 고민에 빠져 한참이나 계산을 하다 말했다.
“금전 이만 냥 정도면 어떻겠습니까?”
“…….”
“마음에 드시지 않으십니까?”
정확히 그 반대였다.
내가 계산한 보물의 무게와 가치는 대략 만 냥.
하지만 흑점이 매입할 때 통상 물건의 가치를 심 할만 잡아주는 것을 생각하면, 흑점의 입장에선 오히려 손해를 보고 주는 것이었다.
“정확히 시세의 두 배에 달하는 가치군요. 흑점이 이런 식으로 계산을 하던가요?”
“은혜를 갚는다 생각해 주십시오.”
양군백은 양손을 소매 속으로 숨기며 두 팔을 정중하게 들어 보였다.
“이런…….”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아뇨. 내가 부탁할 일이라고 한 게 그 ‘은혜’와 관련이 있어서 말입니다.”
하오문은 이번 일로 내게 큰 빚을 졌다.
남궁세가를 비롯한 흑도 무림 세력들은, 지도를 팔아먹은 개방과 하오문에 책임을 물려 했었으니까.
“……이 정도의 값으로 모두 갚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일정 부분 양해를 부탁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어느 정도 이해되는 부분이긴 했다.
결국 내가 나옴으로써 일단락되긴 했지만, 구파일방의 소속인 개방과 달리 하오문은 어느 정도 피해를 보았던 게 사실.
“제 말에 오해가 있었던 듯하군요. 전 하오문의 ‘식객’이 되고 싶다는 이야기였습니다.”
“…….”
하오문은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기거하여 숙식을 해결하는 손님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하오문에서 식객이라 이야기하는 사람은, 하오문이라는 문파가 자신의 이익을 따지기 전에 대상자의 이익을 가장 먼저 생각해 주는 귀한 손님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어찌 아셨는지 모르겠지만, 그건 저 같은 사람의 권한이 아닙니다.”
“하오문주님의 11번째 제자인 양군백 대협께 권한이 없다면 하오문에서 누가 권한을 가지고 있단 말입니까?”
“!!”
어찌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가? 하는 영문 모를 혼란과, 나를 죽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모습.
“이런 걸로 서로 눈치 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나 또한 하오문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분야가 있기에 식객이 되고 싶다 하는 겁니다.”
“……어찌 아셨냐는 물음은 무의미하겠지요?”
난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정말이지 이리 자주 놀라면 수명에 좋지 않다고 하던데. 정말 나쁜 친구분이시군요.”
“개방.”
“……?”
“개방을 드리겠습니다. 대신 제가 강호를 언제든 파악할 수 있도록 눈과 귀가 되어주십시오.”
내가 알고 있는 미래의 기록이 조금씩 미묘하게 틀어지고 있었다.
앞으로 이렇게 틀어지는 일들이 미래에 어떤 효과를 나타낼지 확인하기 위해선, 천하의 정보를 수집해 줄 상대가 필요했다.
“…….”
“지금 이 자리에서 결정할 수 있는 건 아니겠지요?”
역사상으로도 하오문의 식객 자리를 얻은 이는 손에 꼽힌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초절정을 뛰어넘어 탈인의 경지에 오른 이들.
말 그대로 하오문이 협조하지 않으면 하오문을 소멸시킬 수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오문주님께 이야기해 주시는 것으로 은혜를 갈음하겠습니다.”
“…….”
“그리고 이건 제 선물입니다.”
나는 이 시기 개방의 일 개년 계획서가 작성된 문서를 건네주었다.
“…….”
쉽사리 믿지 못하는 눈빛. 하지만 조금만 조사해 보면 문서의 내용이 진실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을 터였다.
“그럼 계산을 마저 할까요? 방금 말한 대로 은혜는 갈음했으니 일만 냥만 주셔도 됩니다.”
“……은인을 상대로 거래를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받아주십시오.”
끝까지 빚을 지워놓지 않겠다는 작전.
그렇게 양군백은 품 안에서 작은 금액으로 나눠진 무기명 전표 다발을 내놓았다.
“……그래도 문주님께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처음부터 모든 걸 얻을 생각은 없었다.
차근차근 상대에게 나의 존재를 알리는 동시에, 내게도 상대를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니까.
“더할 나위 없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