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사람을 모으는 일류무사(6)>
사람들은 환호했다.
결말을 알 수 없는 막막한 미래에서 벗어나고, 자신들이 언제 누려왔었는지 가늠도 되지 않을 평범한 삶으로 돌아왔다는 것에 대해.
지금, 이 순간만큼은 화전민과 마을 사람의 구분이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돼지와 소를 잡아 와야겠다며 마을로 달려갔고, 금목산에 남은 사람들은 잔치를 준비한다며 부서진 집기들 사이에서 솥과 그릇 등을 꺼내왔다.
어느샌가 술 단지가 생겨나고, 사람들은 안주도 없이 다디단 술을 마시는 것처럼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이리 오게나, 우리 무사 나리.”
약초꾼 노인은 마치 자기 자식을 맞이하듯 내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고, 허 촌장은 내 앞에서 계속 눈물을 흘렸다.
사람들이 흥겹게 놀고 있는 동안, 이 잔치에서 제외된 제갈세가의 사람들은 철갑흑망대사를 살피고 있었다.
“이게 무슨……!”
제갈정은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렵다는 듯 아직도 얼이 빠져있는 상태였다.
“대체 무슨 짓을 꾸민 것이냐!”
흥겨웠던 자리에 찬물이 뿌려진 듯, 주변으로 삽시간에 냉기가 내려앉았다.
웃으며 술을 마시던 사람들이 경멸 어린 시선으로 제갈세가를 하나둘 노려보기 시작했다.
“어떻게 잡았는지 소상히 밝히거라.”
나는 허 촌장과 강 옹의 손에서 벗어나 제갈정 앞으로 나섰다.
“철갑흑망대사는 무림인들이 기피하는 마물 중의 하나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애당초 못 잡는 것이 아니다. 최대한 기피하고 싶은 대상이다.
“잡기가 까다로운 데 반해, 영단은 없고 내부 장기와 살점들 대부분이 인간에게 해가 되는 독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죠.”
독성 있는 먹이로 상대를 잡는다는 개념은 사냥의 오랜 전통 중의 하나였지만, 철갑흑망대사는 애당초 독을 품고 있어 면역이 있는 만큼, 그 방법도 쓸 수 없었다.
“그건 알고 있다.”
“그래서 해독했습니다.”
“해독?”
“멧돼지의 배 속에 넣었던 약초들이 철갑흑망대사의 배 속에서 녹아들면서 서로 섞이는데, 서로 섞인 약초들이 철갑흑망대사에겐 강력한 독이 되죠.”
정마대전으로 수없이 많은 무사를 잃은 강호에서는, 무사들이 해야 할 일을 민간에서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단지 해독약초를 먹인 것만으로 잡을 수 있다고?”
“무작정 먹인다고 되는 건 아닙니다. 순서도 각기 정해져 있고요.”
철갑흑망대사를 해독으로 잡는 방법은 정마대전이 한창 벌어지던 중 신의방에서 발명한 독살 방법이었다. 당연하게도 아직은 나오지 않은 개념이다.
“말도 안 돼…….”
제갈정은 분한 듯 이를 물었다.
제갈세가의 무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철갑흑망대사를 잡은 것에 대한 기쁨보다는 자신들에겐 어려운 문제를 상대방이 쉽게 풀어버리자 느끼는 억울함이 더욱 가득한 것이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방법으로 사냥을 한다고!”
제갈정의 말에 동조하듯 제갈세가의 술사와 무사들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하지만 제갈정이 못 보고 있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마을 사람들의 표정이었다.
“…….”
“…….”
이제는 아예 불구대천의 원수를 만난 것 같은 표정이 되어가는 마을 사람들. 분노를 넘어 살의까지 흩뿌리고 있었다.
그동안 자신들의 괴로움을 단박에 해결해 준 사람의 행동을 부정하는 어투가 그들에게 과히 좋게 들릴 리 없었다.
제갈현운이 그걸 눈치채고 제갈세가의 사람들을 자중시키려 할 때. 내가 마을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잠시 집중해 주십시오.”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모였다.
제갈현운도 말을 내뱉으려다 입을 다물고 나를 바라봤다.
“사실 제가 철갑흑망대사를 잡았던 이유는 제갈세가의 부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며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
“무림맹을 통한 처리가 자꾸 늦어지자 제갈세가의 한 분께서 보다못해 사람들을 구해야겠다며 제게 철갑흑망대사를 잡아달라 부탁하셨습니다.”
이제는 제갈세가의 사람들마저도 무슨 소리냐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분께서 말씀하시길 철갑흑망대사 한 마리가 수백의 사람들의 생활을 망가뜨리고 있다. 더 이상 무림맹을 기다릴 수는 없다. 이야기하셨지요.”
나는 잠시 말을 쉬어 좌중을 집중시킨 다음 제갈정을 가리켰다.
“제게 감사를 표하는 것도 좋지만 여러분들이 진정 감사해야 할 분을 모르시는 건 아닌가? 걱정되어 말씀드리는 겁니다. 태상장로님. 잠시 나와주시겠습니까?”
사람들의 시선이 제갈정에게로 모였다.
어안이 벙벙한 제갈정은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다 천천히 내 앞으로 나왔다.
“바로 이분이 저에게 철갑흑망대사를 꼭 잡아달라 부탁하신 분입니다.”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커지기 시작했다.
그때 제갈정이 이를 악물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뭐라고?”
제갈정은 사람이 소심한 데 반해 명예욕이 드높다.
젊은 날 무림맹에 의무 복무를 마친 후 곧장 세가로 돌아왔던 것도, 그 시대에 날고 기는 용봉(龍鳳)들 사이에서 두각을 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번 일로 태상장로님의 이름이 호북성 전체에 쩌렁쩌렁하게 울리겠군요. 민초를 항시 살피는 협객으로 말입니다.”
“…….”
제갈정은 생각만 해도 좋은지 찌푸린 미간과 달리 입가가 씰룩 씰룩거렸다.
난 그 모습을 보곤 화전민 마을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아 참, 그리고 사냥하는 도중에 화전민 마을이 피해를 받은 것도 모두 제갈세가에서 보상해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뭐?”
제갈정이 나에게 뭐라 한마디 하려고 하는 찰나.
“아이고! 장로님!”
허 촌장이 울면서 앞으로 튀어나왔다.
“역시나 저희를 버리지 않으실 줄 알았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허 촌장이 오열하자 제갈정도 어색하게 억지로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허허, 왜 일어나시오. 내…… 내가 이야기하지 않았소. 분명 도와주겠다고.”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최소한 먼저 간 아들과 며느리에게 부끄럽지 않게 손녀를 키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애틋한 모습에, 지켜보던 마을 사람들도 하나둘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하긴, 천하의 제갈세가가 그냥 넋 놓고 봤을 리 없지.”
“맞아. 어찌 되었든 우리도 제갈세가 덕분에 먹고사는 거 아닌가?”
분위기가 반전되자 마을 사람들이 슬그머니 제갈세가의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거기 무사님들. 여기 술 좀 맛보셔요. 내가 작년에 담근 건데 맛이 괜찮아.”
“어이! 가서 돼지랑 소 좀 더 잡아! 무사들이라 많이 먹을 거 아냐!”
제갈세가의 사람들도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그저 자연스럽게 행동하기 시작했다.
“보상이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냐.”
“그냥 해 주십시쇼. 화전민 마을 건물 몇 개 짓는 거 얼마나 한다고 돈도 많으시면서.”
“…….”
“그리고 보기 좋지 않습니까?”
내가 마을 사람들과 제갈세가의 사람들이 어울리는 광경을 가리키자, 제갈정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태상장로님. 이 늙은이의 술 한잔 받아주십시오.”
허 촌장이 다가와 술을 올리자 머뭇거리던 제갈정이 술을 마셨다.
“음? 이거 맛이 좋군.”
“제가 산수유 열매를 가지고 담근 놈입니다. 입에 맞으신다면 매년 한 동이씩 보내드리겠습니다.”
“허허.”
그러곤 약초꾼 노인과 함께 셋이서 술을 주거니 받거니 시작했다.
“허어…….”
그 모습을 본 제갈현운이 작게 탄식을 터트렸다.
“자네 대체 뭐 하는 사람인가?”
마치 처음 보는 생명체를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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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자네가 손쉽게 철갑흑망대사를 잡을 때부터 태상장로님의 행동은 예상했던 바였지. 절대 천기를 놓아주실 분이 아니거든.”
제갈현운과 진소운은 제갈천기가 갇혀있는 금옥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제갈정은 결국 마지못해 제갈천기의 파견을 허락해 버렸다.
마을 사람들 모두 앞에서 대접받은 만큼 후안무치하게 무시하고 억지를 부릴 순 없었다.
덕분에 제갈현운은 진소운에 대해 궁금증이 더욱 커졌다.
“근데 자네가 하는 행동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네. 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꾸미고 있었던 건가?”
“감시한다고 찾아오실 때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겁니다.”
“허허! 흑염룡이 머리가 무흔신 투의 발보다 빠르다고 하더니.”
“…….”
별호를 이야기하면 작게 미간을 찌푸리는 진소운의 모습도 더욱 이뻐 보이고 있었다. 아직 자신에겐 ‘용’이란 별호는 과분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무튼 그렇다고 해도 어찌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태상장로님을 받들 생각을 하게 만들었는가? 장로님이 그런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면?”
제갈현운은 오랜만에 친한 지기라도 만난 것처럼 질문을 끝없이 했다.
진소운은 귀찮아하는 기색 하나 없이 차근차근 설명해 주고 있었다.
“태상장로께서 패용하신 재물이나 옷가지 등을 보고 과시욕이 있는 분이라 느꼈고, 허 촌장을 대하는 과정에서 명예욕도 높은 분이라 느꼈죠. 한데 융중산 인근에 사는 마을 사람들은 제갈세가에 대한 적대심이 꽤나 크더군요.”
“다 내 부덕의 소치이지.”
“뭐…… 꼭 그렇기야 하겠습니까? 아무튼 감시하러 오셨다는 분이 술사에 무사에 전쟁을 치르러 가는 것도 아니면서 격식이란 격식은 모두 차리고 오신 걸 보고, 사람들에게도 경외받고 싶어 하신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행동한 거고요.”
일련의 과정에 대한 해석을 듣자 더욱 상대에게 감탄이 나온다.
세상의 삼라의 원리란 모를 때는 그저 당연하지만, 알게 되면 경탄할 수밖에 없다.
지금 제갈현운의 심정이 딱 그랬다.
“……내가 볼 땐 말일세. 자네는 태을문의 제자가 아니라 제갈세가의 제자가 돼야 했던 게 맞는 거 같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정말, 태상장로님을 구워삶을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니. 내 직접 겪어 보고도 믿어지지 않아.”
“……음, 확실히 총군사님과는 매우 다르시더군요.”
“……응?”
갑자기 튀어나온 제갈소명의 직책에 제갈현운이 걸음마저 멈췄다.
“자네, 아버지…… 아니, 총군사님을 아는가?”
“아, 예. 일전에 철검문에서 한번 뵌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도 멀리서 보고 파악한 건가?”
“아뇨. 그때는 따로 만나 이야기도 하고…….”
“입관패!”
제갈현운이 경악하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진소운도 그걸 어찌 아냐는 둥 두 눈을 번쩍 떴다.
“자네가 그 입관패의 주인이었군!”
“……어찌 아셨습니까?”
알 뿐인가. 이것 때문에 무림의 명사들 사이에서 난리가 났었다.
자신의 가문의 사람들에게도 입관패 한번 주지 않았을 정도로 사람 보기가 박하기 그지없다는 제갈소명이 인정한 존재가 과연 어느 문파의 제자인가에 대해서였다.
“그, 그, 남궁산이 자네를 찾아가지 않았던가?”
제갈현운은 이제 말까지 더듬고 있었다.
본래는 용봉지회 소속이었던 남궁산의 간곡한 요청에, 그의 여동생을 평가하고 줄지 말지를 결정하기 위해 가져갔다 들었다.
허나, 중간에 제갈소명의 인정을 받은 자가 입관패를 가져갔고 남궁산이 그걸 되돌려 받기 위해 집을 나섰다는 것까지만 들었다.
과연 안휘성의 신성인 남궁산을 상대하는 사람이 누군지에 관한, 사람들의 이목이 쏠려있었다.
“네.”
“설마 빼앗겼나?”
“전 제 것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허어.”
지금까지 봐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고 있었다. 한데 모르는 모습을 보자니 더욱 놀라 자빠질 지경이었다.
“그러고 보니, 왕가장의 딸을 구했다는 태을문의 제자가 그럼…….”
겸연쩍다는 듯 뒷머리를 긁는 진소운.
대답하지 않아도 그게 무슨 뜻인지 정도는 알아챌 수 있었다.
왕가장의 현 장주인 왕금산이 사위로 들이고 싶어 안달이 난 존재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게 지금 눈앞의 이 청년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자네 대체 정체가 뭔가?”
“태을문의 제자입니다.”
그게 문제이다.
태을문의 제자인데 해낸 일도 하는 행동도, 언행도, 생각도 모두 범상치 않다.
태을문의 무공으로 이 정도 활약을 한 존재라면, 만약 더 강한 무력을 갖췄을 땐 어떤 모습이 될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가만, 제갈세가의 무공도 나쁘지 않은데…….’
그런 생각까지 이어가던 제갈현운은 딸자식이 없는 자신의 처지가 통탄스러웠다.
“정말이지, 자네 부친과 자네 사문의 문주님이 너무나도 부럽군.”
“문주님은 몰라도 아버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실 겁니다. 하하.”
너털웃음을 터트리는 걸 보니, 아버지와의 관계도 좋아 보였다.
정말이지 뭐 하나 부족하지 않고, 보면 볼수록 탐나는 존재였다.
‘그래, 마침 천기를 데려갈 것이니 그동안 계속 연을 만들어 놓으면 되겠지. 뭣하면 집 안 사람 중에 시집갈 때가 된 아이들도 있으니…….’
그렇게 제갈현운이 자신만의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을 때.
두 사람은 금옥에 다다랐다.
금옥 주변을 지키던 무사들은 제갈천기의 파견이 결정 난 순간부터 모두 물러간 상황이었다.
“천기야, 손님 오셨다.”
끼이익.
오랫동안 열리지 않았던 경첩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열렸고, 그 안에서 옷을 단정하게 입은 제갈천기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포권을 쥐고 있었다.
“소인 제갈천기 주군께 인사 올립니다.”
“…….”
“…….”
영문을 알 수 없는 제갈천기의 행동에 진소운과 제갈현운은 서로를 바라봤다.
제갈천기가 최대한 우렁차게 말했다.
“그 옛날 유비 현덕께서 저희 태사조님을 얻기 위해 삼고초려를 하셨을 뿐입니다. 한데 저 같은 무림 말학을 쓰겠다고 철갑흑망대사를 잡으셨으니 제가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주군으로 평생 모실 테니 내치지 말아 주십시오. 흑염룡 대협.”
제갈현운은 갑작스러운 천기의 행동에 당황하면서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나고 자랐던 자신의 가문에서 평생 부정만 당하며 살았던 자신을 쓰기 위해 위험을 마다하지 않았다 하였으니, 저 상처받은 마음이 얼마나 크게 위안받았을까.
“…….”
제갈현운은 아들의 장래가 걸려있을지도 모를 중대한 사건 앞에, 아무 말 없이 진소운만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