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50화 (50/357)

#50. <어둠을 엿보는 일류무사(3)>

정체불명의 청년에게 치료(?)받은 뒤로 모용상원은 어쩐지 몸 안에 새로운 기운이 감도는 것을 느꼈다.

아직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지만, 간신히 운기조식을 할 정도의 몸 상태는 된 것이다.

한 차례 운기조식으로 기력을 되찾은 모용상원은 자신의 눈앞에 놓인 작은 목갑을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절박한 심정으로 자신의 피(?)를 내주었던 젊은 협객은 먹을 것을 구하러 가겠다며 동굴을 떠났다.

“화후의 내단인 걸 모르는 건가?”

화후의 내단은 그 자체만으로도 뜨끈한 양기를 뿜어낸다.

무공을 익힌 자가 그 기운을 느끼지 못할 리 없으니 아마도 알면서도 못 본 척한 것일 것이었다.

“대체 무슨 의도라 봐야 할까.”

팔에서 가는 실 같은 것을 뽑아내어 계곡을 올라가는 모습이 꼭 거미의 그것과 비슷해 보였다.

청년이 두고 간 육포를 조금씩 떼어 씹으면서 모용상원은 청년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있었다.

#

객잔에서 배부르게 밥을 챙겨 먹은 진소운은 곧장 대장간으로 향했다.

“그건 곰 덫이야.”

진소운은 대장간 한편에 가득 쌓인 곰 덫을 보며 물었다.

“근데 재고가 꽤 많네요?”

“아랫마을 현령이 웅담 가격을 세 배로 쳐주겠다 하면서 인근에 모든 엽사가 모여들어서 곰들 씨가 말랐거든.”

곰곰이 생각하던 진소운이 물었다.

“이거 아주 민감하게 조정할 수 있나요?”

“민감하게? 얼마나?”

“토끼가 밟으면 작동할 정도로.”

“얘끼. 그렇게 조정했다 사람이 밟기라도 하면 큰일 나!”

“사람한테 쓰진 않을 거예요. 짐승들이 계절보다 빠르게 나타나 사람들을 해하고 있거든요.”

“그래도 안 돼.”

대장장이가 단호하게 고개를 젓자 진소운은 품 안에서 은자 두 개를 꺼내어 내려놓았다.

대장장이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정말 안 되나요?”

“…….”

은자 한 개를 더 내려놓자 대장장이가 말했다.

“토끼가 밟으면 작동할 정도로는 해줄 수 없지만, 다람쥐가 밟으면 작동할 정도로는 바꿔줄 수 있네.”

대장장이가 은자를 쓱 품 안에 넣었다.

#

모용상원에게 다시 돌아간 것은 하루가 지난 후였다.

덫을 놓는 일이 생각보다 시간이 길어졌던 탓이다.

다시 객잔에 들러 만두와 죽엽청을 사서 모용상원에게 가자.

모용상원은 하루 동안 꽤 불안했는지 반색하며 나를 맞이했다.

“혹시 나를 두고 간 게 아닌가 했네.”

“하하, 죄송합니다. 처리할 일이 있어서 말이죠.”

“킁킁. 이건 무슨 냄샌가?”

허기가 많이 졌던 탓인지 모용상원의 후각은 민감해져 있었다.

만두와 죽엽청을 내려놓자, 모용세가의 소가주라는 직책도 잊었는지 허겁지겁 만두를 집어 먹기 시작했다.

“이, 이건 무슨 만둔가? 내 생에 이렇게 맛있는 만두는 처음 맛보네.”

모용상원이 웃을 때마다 모용설의 얼굴이 조금씩 비친다.

과거에 많이 보지 못했던 그녀의 미소를 이런 식으로 보게 되니 감정이 묘하다.

“허기(虛飢)라는 만두일 겁니다.”

“그럴 리가 없네. 그럴 리가 없어.”

급하게 만두를 집어삼키던 모용상원이 결국 탈이 났다.

“크헉!”

내가 죽엽청을 건네자 가슴을 치며 꿀꺽꿀꺽 술을 넘기는 모용상원.

“크윽! 이것 또한 허기라는 죽엽청인가?”

“그렇습니다.”

어느 정도 배가 찼는지 그제야 내가 하나도 먹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는 얼굴을 붉힌 채 만두를 슬쩍 밀어주는 모용상원.

“전 음식을 구하는 길에 객잔에서 배를 채웠습니다.”

“…….”

모용상원은 잠시 갈등하는 눈빛을 보이다간 이내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곤 만두에 손을 내밀었다.

“젊은 친구에게 심히 부끄럽군.”

그렇게 포장해 온 만두 4인분을 모두 먹은 후에야 모용상원은 조금 기력을 차린 듯 보였다.

“모든 것이 의문이지만 그 무엇보다 궁금한 것이 있네.”

머쓱한 표정으로 모용상원이 말했다.

“말씀하시지요.”

“내 정체를 아는가?”

“정신이 들지 않으셨을 때 ‘모용’이란 단어를 내뱉으신 걸로 봐서. 모용세가의 한 분이 아니실까 추측해 봤습니다.”

“맞네. 난 모용세가의 소가주인 모용상원이라 하네. 그런데…… 자넨 대체 누군가?”

“진가 소운이라 합니다. 합비 근처의 작은 무문의 제자입니다.”

“합비라면…… 철검문 말인가?”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보단 조금 오래된 태을문입니다.”

“아……! 태을문…….”

모용상원은 머쓱한지 입맛을 다시며 머리를 긁적인다.

“백팔봉의 일원인……. 미안하네. 합비라면 단연 태을문인데.”

“아닙니다. 철검문의 위세가 그만큼 대단하기 때문이겠죠.”

모용상원은 왠지 죄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이, 이것 참. 은인을 앞에 두고 정말이지 추태란 추태는 다 부리는군.”

“은인이라뇨. 그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런 말 말게. 타인을 위해 이 정도까지 할 수 있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네.”

“태을문의 가르침은 ‘언제나 자기 능력이 닿는 한 사람들을 이롭게 하라’입니다. 저는 그저 가르침대로 했을 뿐이니 자꾸 저를 높이신다면 제가 부끄러울 수 있습니다.”

“……허어. 정말이지 난생처음으로 ‘모용세가’라는 이름이 작게 느껴지게 하는 사람은 처음이네.”

모용상원은 마치 신기한 생물을 보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자네는 이곳까지 어떻게 알고 내려온 것인가?”

댁의 시체에서 화후의 내단을 꺼내 가려 했다곤 이야기할 수 없었다.

“철검문의 위세가 대단해지고 있는 와중에 본 문에 제가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던 중. 약초꾼 어르신이 무강의 서호봉 절벽에 벽화초가 난다는 이야기를 듣고 절벽을 수색하던 중에…….”

“그러다 나를 발견한 것이었구먼!”

모용상원은 신난다는 듯 맞장구를 쳤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무문을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 제자라니. 자네 문파의 문주가 부럽구먼.”

“그저 받은 것을 되돌려드릴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고개를 주억거리던 모용상원이 다시금 말했다.

“그나저나 나 때문에 귀한 약초를 구하지 못했으니 어쩐다.”

모용상원은 한참이나 품 안에서 손을 꼼지락거리다가 이내 결심을 했는지 목갑을 턱하니 꺼내었다.

“……대신 이거라도 받아주겠나?”

“…….”

“자네도 알겠지만 이건 화후의 내단일세. 자네의 무공 성취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지만. 이것만으로도 일류의 경지에는 능히 오를 것이고, 사문의 제자들과 함께 나눈다면, 태을문이 철검문에 못지않은 강맹한 문파로 자리매김하는 데 초석이 될 수 있을 거네.”

화후의 내단을 내미는 모용상원의 모습이 전생의 모용설과 겹쳐 보였다.

[이건 청면환이 아닙니까?]

[그런데요?]

[되었습니다. 선배님께서 위급하실 때 드십시오.]

[당신과 나 지금은 소정대의 대원일 뿐이에요.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생존을 위한 동료고요. 그리고 언제까지 그 ‘선배님’이란 말을 쓸 거죠?]

모용상원의 행동을 보며 모용설의 마음씨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난 과거 거절하지 못했던 청명환을 새기며 화후의 내단을 다시 밀어내었다.

“대가를 바라고 한 행동이 아닙니다. 그러니 거두어 주십시오.”

“……대가가 부족하게 느껴지는 거라면 걱정하지 말게. 내 입으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부끄럽지만 모용세가 소가주의 목숨은 값싸지 않네. 결코 이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야.”

“모용세가의 소가주님께서 직접 영약을 찾으러 나오실 정도라면 매우 중요한 곳에 써야 할 일이 있으신 것 아니겠습니까? 가령 무림학관의 정시라거나.”

“……!”

“자식을 위하는 아비의 마음을 중간에 가로채는 건 태을문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저는 선배님의 마음만을 받겠습니다.”

나의 과거, 그들의 미래에 이미 대가는 모두 받았다.

난 이제 빚을 갚을 수 없는 모용설의 미래에 조금의 불행도 남기고 싶지 않다.

이어 여전히 갈등하고 있는 모용상원에게 쐐기를 박았다.

“저희 같은 약소 문파에 화후의 내단이 들어온다면 태원 천가장과 같은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산서성 성도 태원에는 10대째 내려오는 유명한 무가가 있었는데, 바로 천가장이라는 곳이었다.

시조인 천인세가 창안한 독문무공인 천가도식은 무림의 10대 도법 안에 들 정도로 뛰어난 무공이었고, 무림사의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있을 때마다 활약한 바도 적지 않아 무림맹의 백팔봉에 들여야 하나 말아야 하나 설왕설래가 많을 정도였다.

어느 날 태원 천가장에서 희대의 영약인 공청석유를 확보했다는 소문이 돌았고, 강호 무림 전체에 무사들이 태원으로 모였다.

당시 태원천가장의 위세 또한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수천의 무사들이 모인 상황에서도 태원천가장의 방비는 튼튼해 보였다.

하지만 불가해한 이유로 화재가 나고 그 불이 크게 번지는 와중에 정체를 숨긴 무사들이 천가장에 침입했고, 그날로 천가장은 멸문지화를 당했다.

후에 천가장의 공청석유가 어디로 흘러갔다는 소문은 확인되지 않았다.

그렇게 태원 천가장은 흉수도 모른 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동안 내가 확보한 영약들을 사문의 사람들에게도 비밀로 한 채 복용한 이유가 여기 있었다.

“……흐음.”

“제 뜻은 이미 정했으니 선배님께서 마음을 접어주십시오.”

“알겠네. 자네의 뜻을 존중하겠네. 하지만 그와 별도로 필요한 것을 말하게. 내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소원을 들어주지.”

“전 괜찮…….”

“아아, 내가 자네의 부탁을 들어준다고 자네에게 입은 은혜가 사라진다 생각지 않네. 이는 엄연히 나의 마음이 감사함을 표하지 않으면 스스로에게 떳떳할 수 없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야. 이건 내 뜻이니 자네 또한 따라주게.”

“…….”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달리 말할 만한 것이 없었다.

영약은 소화를 못 시킬 정도로 많이 먹었고, 앞으로도 계속 먹을 것이다. 문파의 지반이 되는 재화가 부족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아!’

머리에 번뜩 좋은 생각이 스쳤고, 모용상원을 바라보자 모용상원 또한 기대하는 눈빛이 되었다.

“저희 태을문의 제자에게 청명환을 하나 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청명환?”

모용상원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곤 화후의 내단을 내려다본 후 내 얼굴을 보고 다시 물었다.

“청명환이 본 가의 귀한 영단이긴 하나, 화후의 내단과는 비교할 수 없을 터인데?”

“화후의 내단은 가지고 있으면 화를 불러일으키겠지만, 청명환을 선배님께서 주신다면 누구도 탐내지 못하겠지요.”

“……!”

모용상원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어렸다.

“알겠네. 내 반드시 모용세가의 이름으로 자네에게 주겠냬.”

지금의 나에게 청명환을 먹는 건 큰 의미가 없다. 어차피 앞으로 자잘하게나마 복용할 수 있는 영약이 넘쳤고.

이럴 기회에 사제들의 공력을 높이는 것이 더 효율적이었다.

“그것보단 문주님께 드리어 제자들에게 줄 수 있도록 부탁드리겠습니다.”

“……어째서?”

“태을문의 대제자인 제가 받는다면 그건 어쩌면 편애가 될 수도 있지만, 문주님이 선택하여 다른 제자가 받는다면 다른 사제들에게도 동기부여가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허어!”

모용상원의 표정이 얼이 빠진 사람처럼 변했다.

그러더니 뜬금없는 말을 한다.

“……자네 혹시 어린 시절 혼례를 약속한 사이가 있거나 그런가?”

나는 질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없습니다만, 왜 그러십니까?”

모용상원은 어쩐지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네. 청명환은 걱정하지 말게. 내 감사의 마음을 담아 세 개의 청명환을 자네 문주님께 전달하겠네.”

#

“참으로 신기한 기물이군.”

모용상원과 내 몸을 묶은 후, 비룡조를 이용해 계곡을 올라오자 모용상원이 신기한 듯 말했다.

하지만 이내 오랜만에 햇살을 본 모용상원의 관심은 금세 비룡소에서 멀어졌다.

“너무 좋군. 너무 좋아! 다시 한번 이런 햇살을 느낄 수만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고 했는데. 그걸 자네가 이루어 줬네.”

모용상원은 기지개를 켜며 햇살을 만끽했다.

“너무 무리하지 마십시오.”

마기의 기운은 모두 흡수했지만, 단전은 아직 온전치 못한 상태였다.

“걱정하지 말게. 당장 뛸 수도 있을 거 같으니. 자네 앞으로의 일정은 어떤가?”

“인제 그만 사문으로 돌아가야 할 시기가 되었습니다.”

중간에 남궁세가까지 들를 시간까지 생각하면 빠듯할지도 몰랐다.

“딱히 바쁜 게 아니라면 무강의 우리 상단에서 며칠 쉰 후에 모용세가로 함께 가세.”

“모용세가는 훗날 방문하겠습니다. 저 또한 문파에 가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 일이라는 게 무림학관 시험과 관련된 일인가?”

“……네.”

모용상원은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렇겠지. ……그래도 며칠 정도는 쉬었다 갈 수 있겠지?”

“그건…….”

“그렇게 하도록 하게. 이렇게 무리하게 움직이고 쉬지 않으면 피로가 쌓여 몸에 무리가 가네.”

“알겠습…….”

말을 하던 중 기이한 느낌에 휙 하니 고개를 돌렸다.

아직 해가 쨍쨍한 낮이건만 바람이 부는 소리를 제외하곤 숲에는 아무 소리도 울리지 않았다.

“왜 그러는가?”

모용상원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듯 보였다.

“혹시 소가주님을 습격한 자들이 검은 무복에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른 자들이었습니까?”

“음? 어찌 그걸…….”

“저기.”

내가 한쪽 숲을 가리키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을 보며 억지로 내기를 끌어올리는 듯 미간을 찌푸리는 모용상원.

역시나 아직은 단전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

“선배님을 습격한 자들이 맞습니까?”

“잘 모르겠군.”

잠시 뒤, 숲속에선 아무런 기류도 풍기지 않는 이들이 스무 명이나 나타났다.

“…맞군. 저들이네.”

나는 대답 대신 흑룡검을 뽑았다.

모용상원은 착잡한 표정이었다.

“은인에게 정말 미안함만 가득하군. 은혜는 하나도 갚지 못하고 나 때문에 이런 일까지 당하게 되었으니.”

“선배님. 그런 말씀은 나중에 하시죠.”

“그래.”

모용상원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스물에 달하는 인원은 전방에만 서 있었음에도 사방 십 장에 관한 구역은 그들이 모두 지배하고 있었다.

어딘가로 도망갈 수 있는 틈 따윈 보이지 않았다.

“대체 너희의 목적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끈질기게 따라붙는 것이냐!”

“…….”

“하나 묻겠다.”

모용상원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모용세가의 소가주를 잡으러 온 것이 맞는가?”

“…….”

여전히 대답이 없는 적건의 복면인들.

그때 모용상원이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 아이를 살려 준다면 순순히 목을 주겠다. 거래에 응하겠는가?”

내가 모용상원을 말릴 사이도 없이 적건의 사내 중 가운데 선 자가 앞으로 나섰다.

“불가!”

쇠를 긁는 듯 거칠고 음습한 목소리였다.

그는 우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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