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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52화 (52/357)

#52. <어둠을 엿보는 일류무사(5)>

무강의 청명표국으로 향하던 모용상원은 순간 머릿속에 스치는 어떤 불안감에 짐짓 다리를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설마…….’

이내 머리를 저었다.

세상의 어떤 협사라도 처음 보는 이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건 쉽지 않다.

더구나 아직 약관도 되지 않은 청년이 자신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미끼가 되었으리라곤 쉬이 생각할 수 없었다.

모용상원은 전력을 다해 청명표국에 난입했다.

봉두난발의 넝마가 된 옷을 입고 달려오는 괴랄한 모습에, 정문을 지키던 무사들이 깜짝 놀랐지만 이내 며칠 전 이곳을 방문했던 모용상원임을 알아차렸다.

“소가주님!!”

표국임에도 내부엔 짐들이 하나도 없었다.

대신 표사들과 무사들이 잔뜩 모여 언제든 전투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체 어찌 되신 겁니까? 하남성의 모든 지부의 사람들이 소가주님을 찾고 있었습니다.”

“진소운! 혹시 진소운이란 사내는 안 왔는가?”

“누구요?”

안 좋은 예감이 어쩐지 들어맞는 기분이었다.

정말로 그 아이는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쳤단 말인가?

“……아니야, 그래선 안 돼.”

만약 둘 중 하나가 죽어야 한다면 그건 자신이어야 했다.

이미 진소운으로부터 한 번 목숨을 빚진 상황.

두 번이나 같은 일을 겪을 수는 없었다.

“소가주님. 괜찮으십니까?”

모용상원은 지부장의 안위를 묻는 말에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물었다.

“여기 몇 사람이나 모여있는가?”

“인근 지부의 모든 이들이 모여 총 삼백의 인원이 있고, 남궁세가에서도 백 명의 지원이 나왔습니다.”

“남궁세가?”

그제야 고개를 돌린 모용상원은 한쪽에서 도열해 있던 다른 복장의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맨 앞에 굳은 표정이 되어버린 남궁산과 하얗게 질려버린 남궁선화가 있었다.

“산이, 선화야.”

“……소가주님께 인사드립니다.”

“무탈하신 것 같아 천만다행입니다.”

“너희들까지 와줬었구나.”

남궁산이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혹시 말씀하신 진소운이 태을문의 진소운입니까?”

“그 아이를 아느냐?”

남궁산과 남궁선화는 서로 눈을 마주쳤다.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서호봉에서 신원 미상의 적들에게 습격받았네.”

“진 공자가 혼자 남은 건가요?”

본래 잘 나서지 않았던 남궁선화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남궁산은 한마디 하려다 사색이 된 그녀의 얼굴을 보고 관두었다.

자신이 어떤 무례를 저지르는지 신경 쓸 겨를조차 없어 보였다.

“……안 그러길 바라지만, 어쩐지 그리한 것 같구나.”

모용상원은 마지막 헤어질 때의 상황을 간략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 사람이라면…… 그런 선택을 충분히 하고도 남아요.”

“……안 그러길 바랐건만.”

“소가주님. 어서 움직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 가자.”

#

[넌 우리 중에 가장 살고 싶어 하니까. 너는 살아남아라.]

소정대를 떠났던 나는 계속 살아남았다.

그렇다고 평안을 얻었다는 건 아니었다.

강호를 떠나 심산유곡에 처박혀 있는 동안. 난 한순간도 평안하지 않았다.

아무도 만나지 않는 시간 동안 기억 속의 모두와 만나야 했다.

수없이 몰려드는 마교의 적들, 위기를 눈앞에 두고도 뒷짐만 서고 있는 무림맹의 위정자들.

바닥을 함께 구르며 정들었던 동료가 마인의 차가운 검날에 속절없이 죽어가고, 그런 동료의 처절한 죽음을 비웃던 마교의 개들까지.

나는 그 기억 속에서 수만 번 죽어야 했다.

하루는 금강봉신의 후계자인 고태가 염마귀안대의 검을 막아주는 기억이 떠올랐다.

수백 번 되뇐 기억이었기에 상대의 약점이 처음으로 보였다.

그 이전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딱 한 지점.

그곳에 검을 찔러넣으면 다른 결말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기억 속에 소천검법을 찔러넣는 상상을 부어 넣었다.

염마귀안대원은 사혈이 찔려 피 분수를 흩뿌리며 죽었다.

그러자 잠깐이나마 안도가 밀려왔다.

또 하루는 유운신공의 후계자인 야율재가 천마흑검대원을 날려버리는 기억을 떠올렸다.

그곳에도 약점이 보였고 섬뢰검법을 휘둘러 상대의 멱을 따는 상상을 부어 넣었다.

그렇게 선명하게 떠오르는 하루의 지옥 같은 기억 속에 대응할 수 있는 상상을 더하자,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게 잠들 수 있었다.

그렇게 하루, 십 일, 백 일, 천 일.

소정대가 맞닥뜨렸던 모든 적을 상대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상상을 부어 넣어 대응하는 연습을 했었다.

다시 쓸 일도 없을 전략을 평생 고민했었다.

그것들을 고민하는 동안은 고통 속의 나날을 보내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그땐 고통을 벗어나기 위한 헛된 짓에 불과했건만.”

단지 내 스스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했던 그 고민이 이렇게 사용될 날이 올 것이라곤 상상도 못 했다.

사방에 흩어져 있는 염마귀안대의 시체들.

과거, 이리 많은 수의 염마귀안대의 시체를 본 적이 있었던가.

“그 잡놈들이 봤다면 술과 고기를 가져와 잔치를 벌이자고 지랄지랄 했겠지. 미친놈들.”

스물에 달하는 인원을 죽였다는 감상에 젖기도 전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염마귀안대의 시체를 산에 묻고 일부만 남겨두었다. 태을문의 제자인 내가 모두를 처리 했다는 이야기를 한다면 괜한 의심만 살 것이 분명했기에.

대충 일을 끝내자 긴장이 풀렸다.

“청룡환이 만능은 아니구나.”

싸움이 끝난 직후부터 피로감이 몰려왔었다.

마기로 가득한 녀석들의 내공과 선천지기를 모두 빨아들였지만, 역시나 몸 안에 들어온 것은 정순한 진기였다.

하지만 그 때문인지 단전에 내공은 아직 절반 이상 있었지만, 견딜 수 없는 수마가 몰려오고 있었다.

아마도 청룡환이 마기를 해독하면서 몸에 거부할 수 없는 피로가 쌓인 것 같았다.

“잠깐, 아주 잠깐 자는 건 괜찮겠지?”

어쩐지 지금 잠을 자면 과거의 소정대 녀석들을 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꼴 보기 싫었던 그놈들의 얼굴을, 지금은 잠깐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네놈들이 보고 싶은 게 아니다. 모용설 소저가 보고 싶은 게지.”

난 잠시 바위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

“진소운 공자!”

“진소운 공자!”

산의 밤은 어둡다.

그 어둠을 뚫고 수백 개의 횃불이 서호봉 곳곳을 밝히고 있었다.

“이쪽 길이네.”

모용상원은 자신이 왔던 길을 되짚어가며 사방 십장으로 사람들을 산개했다.

혹여 습격자들이 남아있을 수도 있고, 진소운이 어디에 어떻게 숨어있는지도 몰랐으니까.

모용상원의 가장 가까이 달리던 남궁산이 물었다.

“소가주님,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반대쪽의 남궁선화도 너무나 듣고 싶어 하는 눈치.

“서호봉에서 습격자를 만나 죽을 위기에 처했었네. 그때 진소운이란 친구가 내 목숨을 구해줬지.”

“…….”

“그런데 그 친구와 함께 무강으로 오는 길에 날 습격했던 이들이 기다리고 있던 게 아닌가.”

“……헙!”

남궁선화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소운이의 임기응변으로 녀석들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보다시피 내 상태가 영 좋지 않았던 탓에 우린 서로 갈라져 도망치기로 했네.”

“그럼…….”

“한데…… 내 머릿속엔 그 아이가 나를 위해 미끼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네. 불안하게.”

모용상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남궁선화의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남궁산이 뭐라 하려다 말고 이내 입을 다물었다.

당장 자신도 선화와 같은 심경이었으니까.

“여기 싸움 흔적이 있습니다.”

앞서 보내었던 표사들이 한곳에 모여있었다.

모용상원이 재빨리 다가갔다.

맨 처음 소운과 흩어져 도망친 지 얼마 되지 않은 곳이었다.

“피의 양이 꽤 많습니다…….”

“흐음.”

모용상원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이곳에도 흔적이 있습니다!”

“이곳에 다량의 피가 묻어 있습니다.”

다음 흔적을 찾은 무사들을 쫓아가자, 그곳은 정확히 진소운과 모용상원이 헤어진 곳이었다.

“기어코 일을 저질렀구만! 일을 저질렀어!”

모용상원의 감정은 안타까움이라기보단 분노에 가까웠다.

자신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한단 말인가. 어차피 한번 죽었던 목숨, 소식을 전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충분했을 텐데.

격전의 현장을 살피던 남궁산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너무 많은 피가 흩어져 있습니다.”

“만약 한 사람이 흘렸다면?”

“……살아남지 못했겠지요.”

“시체……, 아니! 흔적! 흔적을 찾아라! 진소운에 대한 흔적도, 습격자에 대한 흔적도 좋다! 모두 찾아라!”

“넷!”

표사와 무사들이 그 어느 때보다 기민하게 움직인다.

모용세가의 소가주.

그가 지금 어떤 의미로든 무거운 마음을 먹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아…….”

남궁선화가 더 이상 견디기 힘들다는 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남궁산이 겨우 그녀의 팔을 잡아 쓰러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정신 차리거라. 아직 아무것도 나온 것이 없다.”

“하지만, 오라버니…….”

“그 친구를 모르더냐? 그 친구가 그리 쉽게 끝날 사람이었다면 진작에 끝났을 것이다.”

“…….”

“사람들이 보고 있다. 일어나거라.”

“……네.”

두 사람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모용상원이 이상함을 느끼고 물었다.

“자네들은 진소운과 어떤 인연이 있는가?”

자신이야 생명의 은인이라 할 수 있으니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사이였다.

한데 남궁세가의 두 아이도 자신과 비슷한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닌가.

“마령고원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아십니까?”

“내 너무 늦게 들어 미안하네. 다행히 은인이 있었다고?”

“네. 그 은인이 바로 진소운 공자였습니다.”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무량불괴멸혼진에 수없이 들어갔다는 이가…….”

“네.”

“허어…….”

남궁선화가 다리가 풀릴 뻔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마령고원에서 백도와 흑도를 가리지 않고 모두를 구한 협사가 바로 진소운이었다니.

“정말이지…… 어찌 나를 구해선…….”

이제는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까지 드는 모용상원이었다.

차라리 그 절벽 아래서 일찍 죽었다면, 진소운이 화후의 내단을 가지고 돌아가 무림에 길이 남는 협객이 될 수 있었을 텐데.

이대로 정말 진소운이 죽어버린다면 자신이 무림에 엄청난 해악을 끼친 것이 아닌가.

“이깟 중년의 목숨이 뭐라고.”

모용상원은 남궁세가의 아이들이 보건 말건, 상관 않고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그리고 그때.

“여, 여기!!”

“사, 사람 아냐?”

“사람이다! 여기 사람이 있습니다!”

숲의 반대쪽에서 들려온 작은 목소리.

모용상원, 남궁산, 남궁선화.

세 사람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람처럼 바닥을 박차고 튀어 나갔다.

“어디! 어디 있느냐!”

모용상원이 표사들과 무사들을 마구 헤치고 앞서 나갔다.

그러자 작은 공터 한편에 피범벅이 되어 바위에 기대고 앉은 진소운이 보였다.

“살아있습니까?”

“괜찮은 거죠?”

“살아있는가?”

남궁산과 남궁선화와 모용상원의 질문 폭격에, 맨 처음 진소운의 생사를 확인했던 표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숨을 쉬고 있습니다.”

모용상원이 다가가 진소운의 맥을 짚었다.

다행히 맥은 힘차게 뛰고 있다.

상처를 입은 건 아닌가 싶어 팔과 배 다리의 옷을 걷어 확인해 보았다.

다행히 피딱지가 묻어있는 것 외엔 상처는 없었다.

그리고 그즈음 진소운이 깨어났다.

피로가 많이 쌓였는지 반쯤 뜬 눈으로 말했다.

“하아, 오셨습니까?”

진소운의 태평한 반응에 모용상원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 친구야! 대체 어떻게 된 건가! 설마 나를 위해 미끼가 되었던 거야?”

“아…… 그게 이쪽에 덫을 설치해 놓은 게 좀 더 있어서 그걸 활용할 수 있겠다. 생각하다 보니.”

“하아! 그래서?”

“조금 상대하다 보니 다행히 녀석들이 도망가더군요.”

“허허. 그렇게 살았으면 바로 돌아와야지. 어찌 여기서 자고 있나!”

“죄송합니다. 너무 피곤해서.”

진소운은 이 많은 무사와 표사들이 자신 때문에 움직였다는 사실에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사과했다.

모용상원은 그런 진소운을 껴안으며 말했다.

“아니야! 아니야! 살아있으면 되었네. 정말 다행이야! 암 다행이고말고.”

“억, 왜, 왜 이러십니까.”

갑자기 잠이 확 깬 진소운이 빠져나가려 버둥거렸지만, 모용상원은 쉽사리 놓아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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