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신검을 놀라게한 일류무사>
“흑염룡 대협께서 먼저 가 있으라 하셨습니다.”
또다.
외당의 당주 진태산은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마차 두 대를 이끌고 나타난 단촐한 행단.
앞에선 열 서넛의 공자와 그의 호위로 보이는 여 검사.
가문이나 사문의 표식은 없었다.
하지만 거적때기와 옷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진태산이 보기에도 어린 공자가 입고 있는 옷의 모양이나 재질이 범상치 않아 보였기에 행동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흑염룡이라 함은……?”
진태산은 재차 확인을 위해 물었고, 공자는 지체없이 답했다.
“진소운 형님을 말씀드린 겁니다.”
“하아…….”
근래에 들어서 이 흑염룡이란 별호를 계속 듣고 있었지만, 도저히 적응되지 않았다.
‘하필 별호를 지어준 게 흑도의 거두라니.’
처음 별호를 접한 건 엄청난 규모의 행단에서였다.
쌀이 백 가마, 비단과 면이 백 필, 각종 장구류와 질 좋은 청강검이 이백 자루.
선물이라고 가져온 물건들 앞에 가장 기뻐해야 했던 외당의 당주는 의구심이 먼저 들었다.
‘왕가장에선 미리 얘기하지 않을 리 없고.’
왕가장이 아니라면 대관절 어디에서 이런 과한 선물을 보낸단 말인가.
“사황봉의 봉주께서 보내시는 겁니다.”
“에엣?!”
사황봉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기겁을 했다.
백도무림에 구파일방이 있다면 흑도무림엔 사문이방일봉이 있다.
사황봉이 바로 일봉을 차지하고 있는 흑도 무림 대표 문파였다.
“물건을 잘못 보낸 것 같소. 우린 합비의 태을문이요.”
당연히 물건을 가지고 돌아갈 거라 생각했던 표사는 서류를 확인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태을문의 흑염룡 소협 앞이라고 적혀있군요.”
“……태을문은 맞으나, 우리 문파엔 흑염룡이란 별호를 가진 자는 없소이다.”
역시나 흑도들 아니랄까 봐 새로이 자라나는 후기지수의 별호에 ‘흑’이나 ‘염’자를 붙이는 꼬락서니가 참으로 가관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표사의 말에 뜨악하는 심경이 되었다.
“……음, 태을문의 진소운 소협이 있지 않습니까?”
“서, 설마…….”
“네. 진소운 소협의 별호가 흑염룡이지 않습니까……. 아! 아직 안휘성 쪽에는 소문이 나지 않았나 보군요. 사황봉주께서 직접 진소운 소협에게 흑염룡이란 별호를 선물하셨습니다.”
이 빌어먹을 놈은 대체 뭘 하고 다니길래 흑도 무림의 거두에게 별호 같은 거나 받는단 말인가.
그렇게 듣게 된 마령고원의 일.
내막을 들은 진태산은 뭐라 입을 벌릴 수가 없었다.
“…….”
“흑염룡 소협께서 호남성 마령고원에서 하신 활약은 아마 천하의 어떤 후기지수와도 비교할 수 없는 업적으로 길이 회자될 것입니다.”
다 좋다.
생명 앞에 흑과 백을 가리지 않고 협의를 펼친 건 다 좋다. 자식을 낳아 그 자식이 세상에 이로움을 끼쳤는데 좋아하지 않을 아비가 어디 있다던가. 하지만.
‘그래도, 흑염룡이 뭐야, 이건 꼭 흑도 무림의 신성 같은 느낌 아닌가.’
별호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었다.
“어쨌든 알겠소. 허나, 우린 엄연히 백도 무림의 동맹인 무림맹의 소속된 일봉으로서 이런 과한 선물은 받을 수가 없소이다.”
가뜩이나 위태한 백팔봉의 직위가 사황봉의 선물로 인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할 수 있음이었다.
허나 표사가 하는 말은 또 한 번 진태산의 입을 뻐끔거리게 만들었다.
“아…… 여기 쓰여있기로 물건을 받지 않으신다면, 정성이 부족한 것으로 생각하여 직접 제자들을 이끌고 태을문에 오시겠다고…….”
“어디에 서명하라 했소?”
“…….”
급격한 태세전환에 표사의 시선이 곱지 않았지만, 그래도 사황봉의 봉주와 만나서 술잔을 나누는 일 같은 건 없어야 하지 않겠나.
더구나 딱 한 번 선물을 받은 걸 가지고 백도 무림 명숙들이 태을문을 백안시하지 않겠지.
하지만.
“…….”
“흑사방의 방주께서 흑염룡 소협께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혈호문의 소문주께서 흑염룡 소협께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구룡방의 방주께서 흑염룡 소협께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끊임없는 선물의 행렬.
태을문 오백 년 역사에 다시 없을 재정적 부흥이 예상되는 때였지만, 진태산은 당장이라도 야반도주를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건 꼭 흑도 무림과 동맹이라도 맺은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그나마 다행이라면, 흑도 무림 문파들의 선물 공세가 이어진 후엔 백도 문파들이 방문했다는 것이다.
“상양문의 문주께서 태을문의 문주님께 좋은 제자를 길러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어이구~ 별말씀을요. 들어와서 며칠 묵었다 가십시오.”
흑도 문파들이 보내온 선물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했고, 선물을 보내온 문파도 흑도 무림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나 최소한 ‘흑염룡’ 어쩌고 하지 않는 게 어디인가.
진태산은 기꺼운 마음으로 그들을 굳이, 부득불, 싫다는 사람 앉혀가며 태을문에 며칠 묵게 한 뒤 평소엔 절대 열지 않았던 연회까지를 열어 대접하고 돌려보냈다.
최소한 이렇게 인식이 되도록 해놓으면 흑도 문파와 내통하는 것 아니냐는 의심은 조금 피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겨우 한숨 돌리고 있을 때쯤.
학사풍의 인원 스물이 태을문에 방문했다.
“어쩐 일로 저희 사문에…….”
“아! 제 소개가 늦었습니다. 전 모산파의 유지량이라 합니다. 진 소협께 진 빚을 갚기 위해 사문에서 파견되었습니다.”
“어…, 어…, 어…….”
진태산은 잠시 머리가 정지된 채 아무 말 하지 못했다.
모산파라니.
모산파라면 백팔봉의 그 모산파란 말인가?
모산파가 비록 구파일방에 들지 못했지만, 중요도로 따진다면 오대세가의 제갈세가 못지않게 중요하다.
특히나 그들의 기문진법은, 제갈세가의 기문진법을 설치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좋은 대안이 되지 않던가.
그런 모산파가 어찌 태을문까지 방문했단 말인가?
“진 소협께서 태을문에 기문진법을 설치해주길 원하셔서 왔습니다.”
함지박만 하게 벌어진 진태산의 입은 다물어질 줄 몰랐다.
“에? 아니 대체 무슨 돈으로?!”
이 겁대가리 없는 놈이 칠채보주 하나로 천하를 살 작정인지, 겁도 없이 모산파를 고용했단다.
기특한 마음도 잠시 천하의 죽일 놈으로 신분 하락을 하려던 찰나, 유지량의 입에선 믿지 못할 말이 흘러나왔다.
“아, 비용은 저희 사문에서 다 부담할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그런 일련의 과정속에 진태산은 이제 더 이상 진소운의 별호에 놀랄 기운이 사라졌고, 누군가 진소운을 찾아온다 해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진태산은 마음을 차분히 하곤 앞의 잘생긴 공자에게 말했다.
“공자께선 무슨 일로 태을문에 방문하셨습니까?”
“어, 어우. 말 낮추십쇼. 한참 손아랫사람이지 않습니까.”
행동하는 모습이며, 말투며 고관대작들이나 할 법한 교양이 깃든 태도였다.
“험험, 알겠네. 그 흑염룡이라는 작자가 공자에겐 무슨 일을 시켰나?”
“……작자는 좀 심하지 않으십니까?”
“응?”
방금 전에 말을 놓으라며 공손한 모습을 보이더니, 금세 태도가 완전히 뒤바뀐다.
그 옆에선 여 검사의 기세도 심상치 않다.
“마령고원에서 오천에 가까운 인명을 구하시고, 융중산 일대 마을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철갑흥망대사를 잡으신 분입니다! ‘작자’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하찮은 분이 아니시란 말입니다!”
예의 바르던 공자는 숫제 부모의 원수라도 만난 듯하였고, 여 검사는 이내 등에 맨 쌍검이라도 뽑을 기세였다.
진태산은 침을 꼴깍 삼키며 그들을 말렸다.
“미, 미안하네. 내 진소운 그 녀석이 하도 예상하지 못한 짓을 해서 말이 거칠게 튀어나왔네. 기분 나빴다면 사과하지.”
“…….”
“…….”
사과의 말을 하자, 어쩐지 두 남녀의 표정이 요상하게 변했다.
서로 눈을 마주치곤 진태산을 돌아본 공자가 조심스레 묻는다.
“저,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진소운 대협과 어떤 관계인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아, 나 말인가? 나 진소운 애비 되는 사람이네.”
“!”
“!”
토끼 눈이 된 두 사람은 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박았다.
“죄, 죄송합니다! 감히 은인의 부친께 막말을 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용서해 주십시오.”
“어, 어?”
대체 저 비단옷이 더러워지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금방이라도 바닥을 뒹굴 것 같은 모습에 도리어 초조해진 진태산이 그들을 일으켰다.
“괜찮네. 괜찮아. 아니지. 내 아들을 두둔해 주었으니 내 기분이 더 좋네. 일어나시게.”
“정말 죄송했습니다. 아버님.”
“정말 죄송했습니다.”
공자와 여검사가 다시금 예의 바른 태도로 돌아가는 걸 보고 진태산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정말. 괜찮다니까.”
그러자 공자가 한 걸음 나와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버님, 전 평생 진소운 대협을 형님으로 모시기로 결의했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아버님도 편히 대해주십시오.”
“어…… 의형제를 맺었단 말인가?”
“네. 그렇습니다. 본래 주군으로 모시고자 했는데, 형님께서 부득불 거부하셔서.”
공자는 뭔가 굉장히 아쉬워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야기를 듣던 진태산이 피식 웃었다.
진태산의 입장에서도 진소운 그놈이 누군가의 군주가 되는 것보단 이런 똘똘해 보이는 아이의 형님이 되는 것이 더 좋았다.
진소운과 달리 뭔가 똑부러지는 면도 보이는 것 같고.
그나마 자신이 몰랐던 진소운의 행동 중에 이 아이와 의형제를 맺었다는 것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허허, 내가 듣기에도 주군보단 형제가 더 좋겠구나. 나 또한 아들이 하나 더 생긴 느낌이라 기분이 든든하구나.”
“형님의 아버님은 곧 저의 아버님과 마찬가지입니다.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진소운 그놈보다 네가 훨씬 낫구나. 말만으로도 고맙다.”
“반드시 행동으로 실천해 보이겠습니다.”
아직 어린아이 티를 벗어내지 못한 공자가 어른 흉내를 내는 것이 썩 귀엽다.
“그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천기, 천기라 불러 주십시오.”
“천기라. 좋은 이름이구나? 성은?”
“네. 제갈가입니다.”
“………응? 제말(?)이라는 성씨가 있었던가?”
“제갈세가입니다. 아버님.”
“…….”
“혹시 아버님의 성함이…….”
“제갈에 현 자, 운 자를 쓰십니다.”
“아…… 그럼 할아버님이…….”
“제갈에 소 자, 명 자를 쓰십니다.”
“…….”
설마 하던 의심은 제갈소명의 이름을 듣자 확신이 되었다.
“아하! 그럼 할아버님께선 무림맹에서 일하시겠구만?”
“네.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더 이상 놀랄 일이 없을 거라던 진태산의 사고는 이어지지 않았다.
“아버님?”
“네?”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습니다.”
“……?”
“……들어가실까요? 공자님?”
“……?”
진태산은 진정으로 자신의 원수 같은 아들이 대체 뭘 하고 다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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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가 왜 이리 가렵지?”
청룡환과 적봉환에 관한 연구를 하다 귀를 팠다.
“내 안 좋은 이야기를 할 사람은…… 미래의 소정대와 현재의 아버지밖에 없는데…….”
소정대는 아직 안 만났고, 지금의 아버지에게 난 하늘이 내린 효자였으니 둘 다 가능성이 없었다.
“……어쨌든 이것들을 어떻게 활용할지 좀 더 연구해 봐야겠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청룡환을 남발해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제아무리 강호에서 이름을 드높이고 사람을 구하는 협객이 된다 한들, 상대의 진기를 흡수하는 광경을 사람들이 목격하는 이상, 금공을 익힌 마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될 터.
더구나 마기를 흡수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피로감이 꽤나 크다.
“분명 방법이 있을 거 같은데.”
적봉환은 마기를 정화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이것과 잘 활용하면 마기를 흡수함에도 피로감을 겪지 않으면서 진기를 흡수할 수 있다는 것이 현재의 가설이었다.
‘그것만 가능하다면….’
장차 정마대전이 벌어진다 한들 이전처럼 속절없이 뒤로 물러나지만은 않을 거란 예상이었다.
다만, 아쉽게도 마기를 익힌 자들을 상대로 시험해 볼 기회가 없었다.
“앞으로 못 만날 사이도 아니고. 마인이야 넘쳐나서 문제지 부족해서 문제가 되던가.”
더 이상 고민을 멈춘 나는 다리를 몸을 한번 쭉 펴며 고급스런 분위기의 방을 한번 쓱 둘러 보았다.
지금 나는 청명표국에 기거하고 있었다.
간밤에 수습한 염마귀안대의 시체는 모용세가의 무사들이 가져갔고, 그들이 썼던 무공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고 한다.
결국 모용상원은 일부 시체를 모용세가로, 일부를 무림맹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마교의 오백 년간의 부재는 한동안 그들의 정체에 관한 혼란을 부추길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조금이라도 그 흔적을 찾았으니, 전생에 비해 조금은 더 빨리 경각심을 가질 수 있겠다는 작은 희망? 물론 중간에 보고가 누락될 가능성이 더 컸지만.
“일어나셨습니까?”
밖에서 시비가 물었다.
“……네.”
곧이어 세 명의 시비가 차례로 대야와 옷가지 등을 가지고 들어왔다.
“본가의 소가주님께서 저녁부터 연회를 시작하시겠다고 필히 참석하시란 말씀을 하셨습니다.”
처음 모용상원이 자신의 가문으로 가자는 걸 말리고 말리며 다음에 반드시 가겠다는 약속으로 무마하자, 결국 청명표국에서 연회를 열겠다는 제안을 해왔다.
‘본가가 아님에도 부득불 연회를 열겠다는 건…….’
모용상원은 나를 자신의 은인으로 공표할 생각이 분명했다.
무공의 고하를 떠나 생명을 빚진 은인이란 공표는, 모용세가가 태을문에게 빚이 있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나 마찬가지.
통상 호패로 거래하는 것이 개인 간의 빚이라면 이런 연회의 자리는 공적인 상징성이 더 컸다.
‘소가주님이라면 이런 결정을 쉽게 내려선 안 되는 것 아닌가?’
도우러 왔던 남궁세가들까지 참석시켜 연회를 여는 것은, 그만큼 확실하게 공표하겠다는 모용상원의 의지나 마찬가지.
그런 모용상원의 마음에 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준비하겠다고 전해주십시오.”
“네.”
헌데 용무를 마친 시비는 나가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세수는 다 하셨습니까?”
“아주 개운하게 했습니다.”
“그럼 가시지요.”
“네?”
갑자기 문을 열고 다섯 명의 시비가 더 들어오더니 나를 이끌고 간 곳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목간통이었다.
“어, 이건…… 아니, 잠깐! 그럼 세수는 왜! 잠깐! 거기 옷 벗기지 마시오!”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시비들이 옷가지를 벗겨 목간통에 넣고 구석구석 솔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목욕을 억지로 끝내고 나오자, 검은 비단으로 만들어진 옷을 내게 입히고 머리에는 기름까지 칠해 단정하게 정리하였다.
동경을 바라보자 거기엔 처음 보는 곱상한 얼굴의 공자가 서 있었다.
“허허, 용 됐구나 진소운.”
전생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
어쩌면 정마대전을 겪기 전까지 꿈꾸던 영웅의 모습처럼 보였다.
고강한 무공에 멋진 모습으로 강호를 질주하는 그런…….
“소정대 놈들이 봤으면 배꼽을 잡고 자지러졌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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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고 시비가 연회장으로 안내를 했다.
연회장에는 이미 표국의 표사들과 모용세가의 무사들, 그리고 남궁세가의 무사들이 먼저 자리하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오! 왔는가!”
내가 들어서자 모용상원이 벌떡 일어났고, 동시에 모용세가의 무사, 남궁세가의 무사, 청명표국의 표사들이 자리에서 일제히 일어났다.
“……!”
연회가 끊긴 듯 적막감이 감도는 연회장.
“이리 오게나.”
그들의 갑작스런 행동에 잠시 얼이 빠져있던 나는, 모용상원의 손짓에 그의 옆자리로 가 앉았다.
척.
그리고 일제히 자리에 앉는 모용세가, 남궁세가, 청명표국의 사람들.
나는 이제는 슬슬 무서워질 지경이었다.
“다들 인사하게, 이쪽은 죽을 뻔한 나를 위해 몇 번이나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인, 구명지은의 은인 진소운 소협이네.”
모용상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모용세가, 청명표국의 무사들.
그들이 일제히 포권을 쥐며 우렁차게 외쳤다.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흑염룡 소협.”””
예상치 못한 행동에 내가 벙찌자, 모용상원이 눈을 찡긋하며 옆구리를 툭툭 쳤다.
“……아, 예. 저도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그들의 위압적인 모습에 잠시 얼이 빠져 바보같이 포권을 마주 쥐자, 그들이 일제히 자리에 앉았다.
모용상원은 뭔가 뿌듯해하는 표정이었고, 모용세가의 무사들도 스스로에게 만족해하는 모습이었다.
‘감사의 자리라는 게 이렇게 낯간지러워질 줄 알았다면 이것도 어떻게든 피하는 건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
남궁선화 앞쪽에 앉은 남궁세가의 무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희 또한 지난번에 하지 못했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너네까지 왜 그러세요.’라는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궁세가의 무사들도 벌떡 일어나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모용세가의 무사들보다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흑염룡 소협!”””
“……예, 다, 당연한 일을 한 거였습니다.”
나는 정말이지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차라리 염마귀안대와 다시 싸우면 싸웠지, 이런 감사의 연회 자리는 두 번 다시 하지 않겠다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이제 다 끝난 거지요?”
“푸하하하. 자네 얼굴이 아주 홍시가 되었군.”
겨우 연회가 시작되고, 사람들이 나에게 관심이 조금 멀어지자 나도 슬슬 음식을 주워 먹을 수 있었다.
허나 그때 남궁선화가 젓가락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놨다.
“……괜찮습니까? 소저?”
연회 시작할 때부터 심기가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는데. 뭔가 연회에 불만이라도 있는 건가 하는 심정으로 묻자.
“사람이 왜 그렇게 무모한 거죠?”
“……저, 말입니까?”
“네. 그쪽이요. 아무리 소가주님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그런 곳에 혼자 뛰어드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어요.”
“…….”
나의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남궁선화가 하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이런 자리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어찌 되었든 소가주의 감사 자리가 아니었나. 그런 예의를 모르지 않을 남궁선화일 텐데도 그녀는 표정을 고치지 않았다.
결국, 남궁산이 나섰다.
“선화야. 진 공자가 걱정되는 건 안다만, 이 자리에서 적절하지 않은 이야기다. 소가주님께 사과드리거라.”
“하지만…….”
그때 모용상원이 말했다.
“아니네. 잘했다. 선화야.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네가 한 거니 사과할 필요 없다.”
모용상원은 불쾌할 법도 한데 호탕하게 웃었다.
“하지만 선배님…….”
“아니! 이번엔 분명 선화의 말이 맞다. 소운이 자네. 자네가 뛰어난 기억력을 가지고 있어 덫의 위치를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고 한들, 확실히 무모한 행동이었네.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말게나. 자네가 상대를 귀하게 여기는 만큼, 자네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항시 명심하게.”
“……명심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모용상원은 잘난 자식을 바라보는 아비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렇게 모용상원 덕분에 연회의 분위기가 자연스러워지려는 찰나, 남궁산이 심각하게 고민을 하다 입을 열었다.
“어쩌면 무모한 게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응?”
천하의 모용상원과 그의 호위무사가 상대할 수 없었던 적들이었다.
그럼에도 남궁산은 당연한 듯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진 공자의 머릿속엔 모든 계산이 들어있었을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제가…… 어떠한 이유로 태을문에 방문하여 진 공자와 비무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자네와 소운이가?”
남궁산의 이야기에 연회에 참석한 모든 무사들이 대화를 멈추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네.”
“결과는?”
옆에서 듣고 있던 남궁세가의 무사들이 침을 꿀꺽 삼키고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제가 패배했습니다.”
“응?”
“허?!”
이야기를 듣던 이들은 감탄보단 의문의 탄성을 자아냈다.
“자세히 이야기해 보게.”
“전 당초 3성의 내공만을 쓰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애초에 전력을 다한다면 공평하지 못할 테니까요.”
모용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아니, 자네의 3성이라면 이미 과한데.”
“그런데 비무 도중 그 약속을 저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허어!”
“음!”
이번엔 놀람의 탄성이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왔다.
“그래서 패배했던 거구만.”
“아니, 그게 아닙니다. 사실 그 이후에도 전 계속 비무를 했습니다. 분명 승부는 졌어도 비무는 이긴 것인데. 비무 자체를 제가 이겼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거든요.”
“그러면…….”
“결국 8성의 내공까지 모두 끌어올렸지만…… 결국 제가 졌습니다.”
“자네가 말인가?! 어떻게!”
모용상원이 동그란 눈으로 남궁산과 나를 번갈아 보았다.
“검기가 둘린 검을 손으로 잡더군요.”
“에엑!”
무사들 사이에서 기함이 터졌다.
“소, 손으로 말인가?”
“저도 깜짝 놀라 검을 멈췄고, 진 공자의 검이 제 목을 겨누고 있었죠.”
“허허…….”
은인을 보는 듯하던 무사들의 눈빛이 미친놈을 보는 듯 바뀐 건 순식간.
모용상원은 어쩐지 고개를 저으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뒤의 이야기가 더 걸작입니다.”
“응?”
“후에 찾아가 물었습니다. 손가락이 잘릴 수도 있었는데. 비무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한 것인지.”
남궁산은 그때가 생각난다는 듯 나를 응시했다.
“문파의 사제들이 보고 있어 그랬다고 하더군요. 남궁세가의 무인을 이기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니 사문의 무공에 희망을 가질 거라고.”
이내 장난스런 미소를 짓는 남궁산.
“더불어 제가 놀라 검을 멈출 것까지 계산했다고 합니다.”
“뭣! 핫하하하하하!”
모용상원이 통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자네가 우리 소운이에게 아주 크게 한 방 먹었구만!”
“네, 아주 머리가 띵한 한 방이었습니다.”
“하하하하하!”
나는 머쓱한 기분에 어쩔 줄 몰라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시선을 돌린 쪽에서 이미 많은 무사들이 형용할 수 없는 많은 의미를 품은 강렬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
다시 눈을 돌리자, 흔들리는 당근을 바라보는 토끼의 표정으로 남궁선화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열감이 부담스러워 물조차 넘기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다시 감사의 연회에 참석하면 사람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