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65화 (65/357)

#65. <태풍을 기다리는 대붕(3)>

나는 변호를 위해 한참을 이야기해야 했다.

풍백파검의 정체를 몰랐으며, 약초꾼 노인이 농담을 걸기에 농담으로 응수한 것이었다는 부분까지 말하자 조금은 안심을 하는 표정들이었다.

“너의 이름이 서서히 강호에 퍼지고 있다. 너 자신을 위해서라도 행동에 각별히 조심해야 할 것이니라.”

“명심하겠습니다.”

나는 풍백파검을 향해 이를 갈았다.

태을문에게 가장 중요한 시기인데, 이렇게 초를 쳐?

“다음으로 물어볼 것이 있다…….”

홍문기의 표정은 금세 찡한 얼굴이 되었다.

또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표정.

“진정 태을검제님의 진전이 맞느냐?”

노회한 장로들도, 당주들도 똑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네.”

“허어…….”

“흡!”

장로들은 눈을 감고 허연 수염을 쓰다듬는다.

당주들은 두 눈을 부릅뜬 채 깜빡이는 순간도 아까워하며 내 입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서…… 어떻게 발견한 것이냐?”

사실대로 말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기에, 마령고원에 들어갔다가 멸혼진에 빠져 우연히 발견했다는 꾸며낸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위험한 곳엘 홀로 들어갔던 것이냐?”

홍문기의 눈이 격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닙니다. 악양에서 철검문의 성모란 소저와 남궁세가의 남궁선화 소저와 인연이 닿아 함께했습니다.”

철검문과 함께했다는 것에 조금 놀란 표정들이었지만, 그 부분에 대해선 그리 문제 삼지 않았다.

하지만 걱정 가득한 표정은 여전했다.

“어찌 너 자신을 조금 더 생각하지 않는 것이냐? 네가 태을문을 위해 누구보다 노력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어떤 영약을 준다 해도 너와는 바꿀 수 없는 것을 모르느냐?”

“…….”

그래, 본래 이런 사문이었다.

나는 전생에 이런 사문을 얼마나 원망했던 것인가.

“……죄송합니다.”

강채석이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끼어들었다.

“문주님, 이렇게 좋은 날에 그만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소운이 덕분에 영원히 이어지지 않을 뻔했던 태사조님의 진전이 이어진 것이 아닙니까.”

잠시 나를 보던 홍문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태사조님께 인사는 잘 드렸느냐?”

“예. 최대한 예의를 다했습니다. 태사조님께선 돌아가시기 전까지 태을문에 남은 제자를 걱정하셨습니다.”

“그분의 마지막 소원을 네가 이루었다. 지금은 그것이 가장 기쁜 일이다. 너를 칭찬하지 않을 수가 없다.”

“과찬이십니다.”

이어, 태을검제가 그곳에 갇히게 된 연유를 말하였다.

세상에서 갑자기 사라졌던 지옥마제가 태을검제님과 함께 묻혀있었다는 것에 크게 놀람을 금치 못했고, 그곳에 결국 갇히게 된 이유가 당시 무림을 지배했던 이들 때문이라는 것에 분개했다.

“누구더냐! 누가 태을검제님을 함정에 빠트린 것이더냐.”

나는 대략 짐작이 가는 이들이 있었지만, 굳이 이야기하지 않았다. 지금 태을문은 그것에 신경 쓸 상황이 아니다.

복수의 화신은 나 혼자로도 충분하다.

원한을 품고 살아가는 삶이란 얼마나 지독하게 고통스러운가.

“누군가를 특정할 수 없을 겁니다. 그 당시 그들에겐 암흑마제가 두려운 만큼 태을검제님도 두려웠을 테니까요. 굳이 말하자면 당시 무림을 이끌어 가던 명숙들 모두가 범인이겠지요.”

“…….”

“…….”

최대한 돌려 말했음에도 장내의 인물들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아마도 대략 다들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지금에 와선 얼마나 큰 존재가 되었는지 잘 알 것이고

그럼에도 자신들이 겪은 치욕의 오백 년이 결국 누군가의 계략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은 쉽게 떨쳐 낼 수 없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분위기를 환기시킬 겸 말을 이었다.

“진짜 중요한 것은 이제 어찌 날아올라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과거를 돌아보며 살기에는 아직 미래에 산재한 문제들이 많다.

나의 말에 홍문기가 고개를 끄덕인다.

“네가 옳다.”

“여기, 태을검제님의 진전을 기록한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적었으니 훗날 비급으로 만들기 위해선 정리가 필요할 것입니다.”

나는 품에서 직접 작성한 서책을 꺼내 내밀었다.

그것은 가장 가까이 있던 부생당의 당주의 손을 통해 홍문기에게 전달되었다.

일반 서책보다 몇 배나 두꺼운 것을 홍문기는 조심스레 열어보았다.

내가 작성해 둔 것은 태을검제의 진전과 전언뿐이었다.

지옥마제의 진전과 두 사람이 함께 만든 비전은 작성하지 않았다.

이런 비밀은 아는 사람이 최소한 인 것이 가장 좋았다.

그 안에서 태을검제와 지옥마제가 함께 무공을 만들었다는 건 그것만으로 또 불필요한 명분거리를 만들어 낼 테니.

“……흠.”

서책을 잠시 살피던 홍문기가 금세 서책을 다시 덮었다.

“내 이런 상황은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어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소. 다들 지혜를 나눠주시길 바라오.”

갑작스레 되찾은 강력한 무공.

그리고 그것을 소화하기엔 턱없이 약한 태을문.

경험하지 못한 문제는 나이를 불문하고 해결을 불가하게 만든다.

“……글쎄요.”

“문주님의 의견을 따르겠습니다.”

장로들도 당주들도 딱히 어떤 이야기를 꺼낼 수가 없었다.

“일단은 태을검제의 진전이 돌아왔음을 공표하고, 강호에 알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럼 용봉지회 같은 사태는 또 안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강채석이 몸이 근질근질한지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젊은 당주들은 강채석의 생각이 좋다 느끼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홍문기를 비롯한 진태산과 장로들은 걱정이 많은 눈치.

잠시 고민하던 홍문기가 기대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소운이 네 생각은 어떠하느냐?”

“제자는 그저 말씀하신 것을 따를 뿐입니다.”

내 대답에 홍문기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속없는 이야기라도 괜찮으시다면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그래! 넌 대제자의 직분을 가지고 있다. 어떤 의견이라도 탓하지 않을 터이니 편하게 이야기해 보거라.”

나는 태을검제의 진전을 발견한 순간부터 계획했던 것들을 이야기했다.

“우선 태을문은 봉문을 하는 겁니다.”

“…….”

사람들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봉문이라 함은 대개 대항할 수 없는 적들에게 항복을 선언하는 행위와 같았다.

강호의 문파로서 존재하지 않겠다는 의미라 강호의 인사들에겐 치욕적인 행위로 생각되는 것이었다.

더구나 봉문 시에는 반드시 현판을 제거해야 한다.

무림문파가 이 현판에 얼마나 목숨 거는지를 생각하면, 봉문이란 말은 곧 죽음과도 같은 의미였다.

“……봉문 말이더냐?”

이제 새로운 날개를 가지고 날아올라도 모자랄 판에 봉문이라는 이야기를 하니 의문이 가는 것은 당연지사.

“네.”

“우린 이제 막 태을검제님의 진전을 받지 않았느냐?”

“그렇기에 봉문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태을문의 모두가 태을검제님의 무공을 익혀야 합니다.”

“……그것은 봉문하지 않음으로도 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느냐?”

그 미약한 힘으로도 500년의 시간 동안 봉문 한번 하지 않았던 태을문이다.

홍문기에게도 봉문이 얼마나 거북스러운지는 알 수 있는 부분.

“모용강 선배님 덕분에 용봉지회는 설득할 수 있었습니다. 그분이 직접 공표한 이상 대외적으로 태을검제의 무공에 의문을 가지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진정 태을검제님의 무공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없을까요?”

“…….”

“가령, 예를 든 것에 불과합니다만, 500년 전 태을검제님을 지옥마제와 함께 지옥에 처박았던 자들의 후예들은 어떨까요? 그들 또한 태을검제님의 기록이 허황된 소문에 불과하다고만 생각할까요? 그리고 우리가 실제 태을검제님의 진전을 이어 익히고 있다는 것을 허락할 수 있을까요?”

이곳저곳에서 앓는 소리가 나왔다.

강력한 무공에 대한 강호인들의 집념이 얼마나 강한지 안다.

그들은 이미 나를 통해 태을검제의 무공을 간접적으로나마 느꼈다.

절대 간과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여기 계신 어른들께서 현판에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계시는지 모르지 않습니다. 하나, 아무리 현판이 중요하다 해도 저에겐 태을문의 어른들과 어린 사제들이 더 중요합니다.”

불꽃 앞에선 반나절도 되지 않아 흔적도 없이 재로 사라질 물건에 불과하다.

“보물을 가졌다고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그것을 지킬 수 있어야 보물의 주인이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

장내의 사람들이 일제히 나를 바라봤다.

그들의 눈은 홍문기의 눈처럼 격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 방점을 찍었다.

“수풀 사이를 자유로이 오가는 메추라기는 매일 둥지에 웅크리고 있는 대붕을 비웃습니다. 하지만 태풍이 오면 대붕은 목숨을 걸고 날아올라 천하를 뒤덮습니다. 우린 지금 태풍을 기다려야 하는 순간입니다.”

말을 끝으로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내게서 집중되어 흔들리던 시선들은 이내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듯 아래로 숙여졌다.

내 이야기에 한참이나 눈을 감고 있던 홍문기는 진태산을 보고 물었다.

“외당주.”

“네.”

“우리 새로운 문주를 뽑는 게 어떠한가?”

“네?”

“예?”

갑작스러운 말에 당주들도 장로들도 대경하여 홍문기를 보았다.

“어린 제자가 문을 이끄는 문주보다 더 멀리, 잘 보고 있으니 하는 말일세. 그냥 저 녀석에게 태을문을 넘겨주고 장로전에서 편하게 쉬는 게 나을 거 같군.”

얼굴 만면에 한가득 미소를 짓고 있는 홍문기.

그제야 홍문기의 말이 농담이란 걸 알게 된 사람들의 표정이 하나둘 풀어졌다.

“끌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시오, 홍문주. 장로전이 워낙 좁아 홍문주를 비롯해 그대의 사형제들이 기거할 공간은 부족하다오.”

“그렇습니까?”

홍문기는 나를 보며 물었다.

“어떠냐 소운아? 네가 장로전을 새로 지어주면 문주 자리를 주마.”

태을문의 문주 자리를 동네 골목대장 자리쯤으로 이야기하는 홍문기의 말에 내가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전 아직 천하를 오가며 구경하고 놀아야 하므로 좀 더 문주님께서 고생해 주십시오.”

“고얀 놈……. 어린 시절엔 그렇게나 성실하고 착한 아이였건만…….”

잠시간의 농담으로 분위기는 한층 풀어진 상황이었다.

홍문기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소운이의 말이 맞습니다. 당장은 외부에 알리는 것보다 태을검제님의 진전을 어떻게 제자들에게 전달할지가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선 우리들이 먼저 진전을 제대로이어야지요.”

“……하지만 문주, 봉문은…….”

장로들 사이에서 봉문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이들이 아직은 남아있는 것 같았다.

“무엇을 걱정하시는지 알고 있습니다. 무공이 없을 때도 500년간 단 한 번도 떼어지지 않은 현판이었죠. 허나, 소운이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메추라기의 놀림에 대붕이 연연한다면 그건 대붕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

“또한, 태사조께서 기껏 저희를 위해 무공을 남겨주셨는데, 자존심 때문에 이것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면 후에 얼마나 부끄러워해야 할까요.”

말을 꺼낸 장로는 다시금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문주 말이 옳소. 내 잠시 잘못 생각했소이다.”

어느 정도 의견이 일치되어 가고 있는 상황에서 아버지가 찬물을 끼얹었다.

“저는 반대입니다.”

“어째서인가?”

“지금 태을문에 돈이 없습니다.”

“아…….”

“문주님께서 얼마 전에 진짜로 표국을 만드는 것을 생각해 보자 하시지 않았습니까.”

강채석이 불쑥 나섰다.

“철광석 광산에서 돈이 나오고 있지 않나. 그것이면 충분하지 않은가.”

“지금 태을문에 기거하는 사람이 얼마나 된다 생각하는가? 모산파가 돈을 받지 않고 기문진법을 설치해 주고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인건비에 한한 것 아닌가. 자잿값이나 그들의 체류비는 우리가 내야 하지 않겠는가. 더구나 창궁상단에선 철광석 유통에 대한 답을 아직 해주고 있지 않아. 이 정도면 거절이라고 생각해야겠지. 결국 왕가장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네.”

강채석이 나를 돌아봤다.

“역시 저 녀석을 왕가장에…….”

진태산이 강채석의 말을 끊고 홍문기에게 말했다.

“앞으로 돈 들어갈 곳이 넘쳐날 겁니다. 무공을 얻었다고 끝이 아니지 않습니까. 제자들에게 태을검제님의 진전을 잇게 하려면 영약도 구해야 하고요. 그러기 위해선 어떻게든 돈을 버는 수밖에 없습니다.”

“흐음…….”

현실의 벽에 부딪히자 홍문기는 다시금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때 장로들이 나섰다.

“그럼 우리가 따로 나가 표국을 운용하는 건 어떤가?”

“……마음은 감사하지만, 저희가 어찌 편히 밥을 먹고 잠을 잘 수 있겠습니까.”

장로전의 평균 나이가 육십 대다. 타 문파처럼 강맹한 무공을 익힌 것도 아닌 이들이 삶의 터전에 나가 일을 할 수는 없었다.

다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거라면 어떻게 해결이 될 것 같습니다.”

“응?”

“그게 무슨 말이냐?”

가장 반가워 한 건 역시나 무공에 미쳐있는 강채석이었다.

나는 품속에서 봉투와 편지 대연신단 두 개를 꺼내어 부생당의 당주에게 넘겨주었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물건을 이어 넘겨받은 홍문기는 편지를 읽다 눈을 부릅떴다.

“이 무슨…….”

“왜 그러십니까?”

“자네도 읽어보게.”

홍문기가 아버지에게 편지를 건네준 후, 허겁지겁 권리서를 꺼내어 펼쳤다.

이어 아버지의 눈도 토끼 눈이 되었다.

“……이, 이게 어찌 된 것이냐?”

“대체 무슨 내용이 적혀있기에 그런 것입니까?”

강채석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남궁세가에서 창궁상단 합비 지부를 넘겨주겠다고 하는군.”

“합비는 창궁상단의 본부 아닙니까? 지부가 따로 있었습니까?”

“그 본부를 지부로 바꾸었다는군. 그걸 넘겨준다고 하네.”

“네?”

“에?”

다들 설명을 바라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신검 님의 손녀딸을 구해준 보답으로 받은 것입니다.”

“…….”

“…….”

장 내의 모든 이들은 입을 쩍 벌린 채 말없이 나를 바라봤다.

특히 아버지가 아주 감동한 듯 눈에 핏줄까지 세워 나를 보고 있었다.

‘응? 이가 갈릴 정도로 감동받으신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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