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태풍을 기다리는 대붕(4)>
결국 창궁상단에는 장로전의 사람들이 나가기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외당의 당주인 진태산이 그 중심이 되기로 했다.
아버지는 자금에 숨통이 트인 덕분인지 연신 한숨을 길게 쉬었다.
문주와 당주들은 내부적으로 태을문을 정비함과 동시에 태을검제의 무공을 익혀야 했기에, 봉문을 한다 해도 한시도 쉴 수가 없었다.
다행히 장로 중에는 과거 태을문의 살림을 끌어나가기 위해 작은 상단이나 표국에서 근무했던 이들도 있었기에 큰 어려움을 없을 것이었다.
더구나 태을문엔 왕소소도 있고, 왕금산에 도움을 요청해도 되는 일이었으니까.
일이 어느 정도 정리되었음에도 장로들과 당주들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다들 태을검제의 진전을 보고 싶어 견디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이에 홍문기는 술과 안주를 주문하여 작게 축하연을 여는 겸 진전을 보기 위한 자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관심이 진전으로 돌아가 있는 사이, 슬쩍 대현전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곧장 왕소소를 찾았다.
봉문이 확실시되면서 문주님과 어른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무림맹이 결코 이렇게 일을 끝내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비록 모용강의 인정이 있었고, 용봉지회의 인정이 있었다고 하지만, 그 와중에 점창파와 화산파는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한 사람이라면 몰라도 두 사람이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은 각각 화산과 점창의 제일 기재다.
이 두 문파가 똘똘 뭉치면 주위에서 기웃거리던 이들 중에도 태을검제의 진전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나오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여론이 대세가 되면, 멀리 있는 모용강의 인정은 도움이 되지 않을 터.
최소한 태을문이 완전 봉문하여 외부와 연결이 끊길 때까지는 시간을 끌 필요가 있다.
“오라버니! 저 여기 있어요!”
쾌화당의 연무장에서 다른 사제들과 연습하고 있던 왕소소에게 다가갔다.
몇 달 못 본 사이 부쩍 자라, 벌써 소녀티를 벗어나려 하고 있었다.
‘여자애들은 일찍 큰다더니.’
모용설, 남궁선화, 성모란, 용봉지회 등.
강호에서 이름 높은 수많은 미녀들을 보았지만, 왕소소의 미모도 그녀들에 비해 조금도 처지지 않았다.
아니, 아직 성장이 더 남아있었기에 장차 기대해 볼 만도 했다.
‘딸 가진 아비들이 왜 그렇게 사위를 싫어했는지 알겠군.’
벌써부터 왕소소가 누군가에게 시집을 간다고 생각하면, 여동생을 빼앗기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듯했다.
“검술이 많이 늘었구나.”
“저, 열심히 하고 있어요. 조금 있으면 은호와 백 초식 이상 비무를 할 수도 있을 거예요.”
“은호는 사제들 중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녀석인데?”
“그러니까요. 그런데 부탁하실 일이란 게 뭔가요?”
“너희 집에 금원보가 많이 있겠지?”
왕소소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금원보뿐일까요? 금두꺼비도 있고, 금용도 있고, 금사슴도 있고…….”
“그래그래.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느냐?”
“두 개 하셔도 되는데? 세 개 하셔도 돼요.”
나는 백 냥짜리 전표 하나를 내밀었다.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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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슨 소리냐?”
모용설은 진소운과 있었던 이야기를 했다.
“……네, 제가 진소운 공자에게 실수를 했습니다.”
“허어…….”
모용강은 평소에도 웃음을 지우지 않는다.
특유의 익살스런 장난기 가득한 얼굴은 손자 손녀로 하여금 편하게 다가갈 수 있는 존재로서 느끼게 해주었는데.
하지만 지금은 마치 이뻐하던 강아지가 귀한 도자기를 깬 장면을 본 모습이었다.
“죄송합니다.”
“너도 분명히 용봉지회 그것들이 잘못한 것을 보지 않았더냐.”
늘상 모용강의 사랑을 독차지해 왔던 모용설은 그 어느 때보다 할아버지가 낯설었다.
“쯔쯧. 애써 이어줄 기회를 하나 만들어 놨건만, 지금에 와선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렸구나.”
“……?”
모용설도 모용재화도 모용강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지만, 그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강호의 삶이란 때론 경전대로만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모용강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차분했다.
“상대가 자신을 딛고 서려 할 땐, 결코 자신이 그런 만만한 존재가 아님을 증명해야 하느니라. 그런 경우 더욱 잔혹한 손속 또한 한 방법이 될 수도 있지 않더냐.”
“…….”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모용설.
그런 한편으론 모용강이 왜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는지 조금 의문이 들기도 했다.
물론 그것을 물어볼 수는 없었지만.
“만약 내가 그런 상황이었더라면 난 화정산 그놈의 단전을 부숴버렸을 것이다.”
“…….”
“쯔쯧. 무림맹에 가면 조금 생각이 유연해지나 했건만, 더욱 뻣뻣해졌구나.”
“…….”
“네 아비를 살려준 놈이다. 내가 더 말하지 않아도 네 잘못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겠지?”
“네. 잘 알고 있습니다.”
“가서 정중히 사과하고, 그 녀석에게도 너에게도 앙금이 남지 않도록 만들어라.”
“네…….”
“그리고 이제 그 용봉지회 따위는 그만둬라. 네가 계속 그곳에 있다간 이대로 굳어버릴 것 같으니. 나와 함께 이번에 본가로 돌아가자.”
“……알겠습니다.”
모용강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중얼거렸다.
“선화 그 아이와도 인연이 있다던데, 남궁태하 그놈이 벌써 노리고 있는 건 아니어야 할 텐데…….”
물론 여전히 모용재화와 모용설은 할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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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설은 곧장 자신의 이야기를 용봉지회에 전달했다.
이야기를 들은 일명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용봉지회의 긴급소집 때를 제외하고 활동에 강제성이 없다.
용봉지회가 무림맹 지부와 백팔봉의 감사 활동 이외의 별다른 활동을 딱히 하지 않는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용봉지회를 구성하는 인물 하나하나가 각 문파와 무림맹에 너무 중요한 인물들이라 미리 자율성을 준 것이었다.
따라서 이번 용봉지회의 활동에선 무당의 용소아와 남궁세가의 남궁산, 아미파의 혜연이 빠졌었다.
종벽기와 화중산의 상태도 좋지 않은 상태에서 모용설까지 빠진다고 하면, 실상 용봉지회의 활동이 멈췄다고 봐야 했다.
“일정에 차질이 생기겠군.”
“미안해요.”
“괜찮네. 다 사정이 있는 것이지.”
일명이 침중한 얼굴로 말했다.
“어쩔 수 없지 않나. 태을문이 예상과는 다르게…….”
말을 하던 청성의 소제호가 종벽기와 화정산의 날카로운 눈빛에 말을 흐렸다.
특히 종벽기의 원한이 뼈 깊었다.
“그 빌어먹을 애송이…….”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이에게,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패했다.
더구나 모용강의 등장으로 패배를 반전시킬 방법도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이제는 되려 모용강이 어떤 해코지를 하는 건 아닐지 걱정해야 하는 상황.
“내, 내…… 반드시……. 아아!”
말을 하던 종벽기가 관자놀이에 울리는 극심한 고통에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의 한쪽 머리는 마치 거대한 뿔이 자라난 것처럼 커다랗게 부어있었다.
종벽기를 치료하던 당서희가 종벽기의 머리채를 잡아 다시금 바닥에 끌어내렸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 못 들은 것이야? 부작용으로 평생 두통을 달고 살고 싶지 않으면 가만히 있는 것이 좋을 것이야.”
“…….”
당서희는 심보가 뒤틀리면 같은 무림맹의 사람에게도 독을 쓰는 정신 나간 인간이다.
종벽기는 합죽이가 되어 이만 부득부득 갈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보는 일명의 미간이 쉬이 펴지지 않았다.
‘용소아…… 정도라고 봐야 할까…….’
일명은 진소운에게서 용소아를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기분을 맛보고 있었다.
“어쩌면…… 강호에 파란이 일겠군.”
“뭐가 말인가요?”
“태을문의 평가를 다시 해야겠다는 말이네.”
“빌어먹을 이렇게 끝낼 수는 없어.”
일명의 이야기를 듣고 종벽기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당서희가 종벽기의 마혈에 침을 꽂아버렸다.
“어극!”
“움직이지 말라는 말 듣지 못한 것이야? 분근착골의 고통을 맛보고 싶은 것이야?”
“아, 아니. 아니네. 내 가만히 있지…….”
종벽기가 재빨리 화정산에게 도움을 청했다.
“정산, 자네도 이야기해 보게. 이게 이렇게 넘어갈 일은 아니지 않은가?”
“…….”
화정산은 침잠한 눈으로 말없이 앉아있을 뿐이었다.
“그냥 안 넘어가면요?”
서사령의 질문에 종벽기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당연히 무림맹에 보고해야지. 출처 불문의 무공이 나왔다는 것을!”
“하지만 모용강 어르신께서 벌써 공언하셨는걸요.”
종벽기가 모용설을 응시했다.
“흥! 우리의 임무가 뭔지 잊었나? 외압에 영향받지 않고 감사·감찰 활동을 하는 것이네. 안 그런가 정산?”
“…….”
종벽기의 말에 화정산은 대답하지 않았고, 대신 모용설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모용세가가 가만히 있을 거 같나요?”
“그런 건 어차피 상관없는 일이라 말하지 않았나. 모든 건 무림맹에서 결정할 일이니까. 맹의 결정을 모용세가라고 무시할 수 있나?”
종벽기와 모용설의 신경전을 보며, 일명의 눈이 다시금 가라앉았다.
종벽기의 말엔 어느 정도 현실성이 있다.
종벽기와 화정산이 나선다면 점창과 화산이 동시에 움직인다. 거기에 더불어 오늘의 일이 보고된다면 무공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날 것이고, 그 지경까지 가면 천하의 파검이라 할지라도 혼자서는 막아서지 못한다.
본래 명분이란 그런 것이니까.
“흐음…… 괜찮을까요? 진 공자 그 사람 성격이 절대 만만치 않은 것 같은데.”
하얀 손가락으로 붉은 입술을 매만지며 말하는 서사령의 모습에, 종벽기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며 더욱 자신 있게 말했다.
“두고 보라지. 내 반드시 그렇게 만들겠네. 점창과 화산이 먼저 나서면 아마 다른 문파들도 관심을 가질 테니.”
일명이 예상한 그대로를 계획하는 종벽기.
자신의 사문 또한 이곳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아는 일명이었다.
금강반약장을 파괴해 버린 태을문의 무공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있을까?
그때, 모용설이 뒤를 바라봤다.
뒤이어 서사령, 황보연까지 뒤를 바라봤다.
이윽고 담장 너머로 양손에 보퉁이를 든 청년이 걸어 들어왔다.
“진…… 공자…….”
모용설의 말에 종벽기와 화정산의 눈매가 날카롭게 변했다.
종벽기는 당서희에게 마혈을 풀어달라 애원했지만, 그녀는 말없이 진소운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문주님께서 불편하신 점은 없는지 여쭈시라 하셔서 왔습니다.”
얼굴엔 미소가 지어져 있고, 태도는 당당하다.
마치 하루 전에 있었던 필사의 비무 따위는 모두 잊은 듯한 모습이었다.
일명 또한 입가에 미소를 띠고 앞으로 몇 걸음 나섰다.
“덕분에 아주 편안히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거 괜히 실례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군요.”
“용봉지회를 맞이하는 것은 모든 무림문파의 영광 아니겠습니까. 오래 계실 순 없겠지만, 계시는 동안 모쪼록 편히 지내주십시오.”
진소운의 말에 용봉지회 인원들의 눈동자가 격하게 떨렸다.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기엔 너무 필사적으로 싸우지 않았던가?
“소협께선 괜찮으신지요.”
“저 또한 이곳저곳 아프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역시 화산의 검은 매섭기 그지없군요.”
“…….”
화정산이 진소운을 무섭게 노려봤다.
그 옆의 종벽기 또한 굳은 몸으로 노려보고 있었지만, 무섭다기보단 우스꽝스러웠다.
“일명 스님께 죄송하지만, 제가 곡차를 좀 가져왔습니다.”
곡차(曲茶)란 승려들의 은어로 술을 이야기한다.
“허허, 곡차 말입니까?”
“저의 사제 중에 왕가장의 아이가 있는데, 그 아이에게 부탁하여 금분명주를 조금 구해왔습니다.”
금분명주는 왕가장에서 직접 생산하는 귀한 술이었다. 합비의 명물이긴 하지만 아무나 맛보긴 힘들었다.
보퉁이를 풀자 그 안에서 화려하게 장식된 술병이 다섯 개나 나왔다.
“……그래도 이곳까지 오셨는데 이곳 명물은 조금 맛보셔야 하지 않을까 해서 말이지요.”
“감사합니다. 저는 못 마시겠지만, 다른 이들은 즐길 수 있겠군요. 참으로 태을문에 여러모로 신세를 집니다.”
“별말씀을요. 저흰 다 무림맹의 기지 아래 모인 동도가 아니겠습니까. 하하하하.”
소운이 호탕한 웃음을 보였지만, 남자들은 누구 하나 웃지 못했다.
어쩐지 몇 살이나 어린 소운에게 밀린 듯한 느낌이 컸던 탓이다.
반면 그런 소운을 보는 여자들의 눈은 반짝였다.
“진 공자, 어쩜 그렇게 강할 수 있죠? 태을문의 무공이 그 정도라는 사실에 무척이나 놀랐답니다.”
섭혼서시 서사령이 봄꽃같이 포근한 말투로 이야기하는 것에, 종벽기는 아차 싶은 표정이었다.
섭혼서시 서사령이 은근히 자신은 이 일에서 발을 빼겠다는 의견을 전달한 것이다.
“…….”
더불어 진소운에게 무공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까지 줘버렸다.
아니나 다를까 진소운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사실 그 부분에 대해선 화 대협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
“사실 저희는 힘들게 태사조님의 무공을 되찾았지만, 이것을 어찌 세상에 알려야 걱정하던 중이었습니다. 그저 공표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랬다간 어떤 시비에 휘말릴지 모르니 말입니다. 오늘처럼 말이죠.”
놀란 일명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근데 마침 화정산 대협께서 ‘태을검제의 검식을 보고 싶다.’ 이야기하셔서 좋은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 그건…… 크흠.”
화정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그의 본래 의도가 조롱이었다는 걸 밝히는 순간, 추락하는 것은 화정산 본인일 테니까.
“따라서 제가 무리한 것도 있었고, 그로 인해 대협께서 상처를 입은 것도 사실입니다. 이에 문주님께선 은인에게 상처를 입히신 것에 대해 큰 우려를 하고 계십니다.”
‘은인’이라는 말에 화정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다.
일명은 그런 단어를 아무렇지 않게 툭툭 내뱉는 진소운을 신기한 생물 관찰하듯 보고 있었다.
진소운이 화정산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다른 손에 있는 작은 보퉁이를 내려놓고 화정산에게 밀어주었다.
“……이게 뭐지?”
“저희는 워낙에 작은 문파라 문파 내의 영약이나 원기를 회복할 물건이 없습니다. 그 대신입니다.”
“……흥 태을문에서 뭘 준비했든…….”
툴툴 거리는 표정으로 거칠게 보퉁이를 열어보던 화정산의 표정이 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고태미가 흐르는 보합을 열자 그 안에서 우각과 황금으로 조각된 매화나무가 나온 것이다.
평소 화려한 금은보화 장식을 많이 걸치고 다니는 서사령의 두 눈이 번쩍 뜨일 정도였다.
“허어…….”
“몇 달 전에 우연히 입수한 물건인데, 아마도 이런 인연을 만들기 위함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이것으로 화정산 대협이 회복할 수 있는 영약을 구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인연?”
“잘 모르시겠지만, 과거 저희 부생당의 당주가 화산파의 속가제자였습니다. 결국 화산의 도(道)가 돌고 돌아 저희 태을문에게도 닿아있었던 것이지요.”
“…….”
“그런 와중에 제가 이리 실수를 저질렀으니, 문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슬프셨겠습니까.”
화정산은 이미 할 말을 잃었고, 옆에서 몸이 굳은 채 보고 있던 종벽기의 얼굴은 울긋불긋해졌다.
“화정산, 그따위 것은 돌려줘 버리게. 그깟 게 뭐라고 우리가 용서해야 한단 말인가?”
종벽기의 말에 화정산이 매운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자넨 조용히 하게!”
“뭣?!”
“자네가 괜히 끼어든 탓에 일이 이리 커진 것 아닌가!”
종벽기의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붉게 달아올랐다.
“허엇!”
더구나 진소운에겐 모용강이란 거대한 후원자가 떡하니 버티고 서있다.
그 괴팍한 성격이며, 고강한 무공이며, 거대한 가문이며, 적으로 돌리기엔 투자에 비해 위험이 너무 크다.
어쩌면 화정산이 이제껏 말이 없었던 것은, 어떻게 빠져나갈 방법이 없을까 구상하던 중이었을지도 몰랐다.
종벽기는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진소운을 노려봤다.
“애송이! 이것으로 끝난 거라 생각하지 마라!”
그러자 진소운 또한 차가운 눈으로 종벽기를 응시했다.
“나 또한 하고 싶은 말이오. 오늘의 일은 태을문이 길이길이 기억할 것입니다.”
“나 점창의 종벽기다! 내가 무서워할 것 같으냐!”
“……무서워해야 할 겁니다. 모용강 선배님께서 그대를 데리고 간다고 하였으니.”
“억! 그, 그게 무슨!”
“그분의 기행을 방해했으니 그 대가를 치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참, 또한 점창파의 문주님께 서신도 보내신다고 합니다. 돌아가서 징계도 각오를 하셔야 할 겁니다.”
종벽기의 얼굴이 누렇게 뜨고, 화정산의 입에선 안도의 한숨이 내쉬어졌다.
“……문주님께 후배가 버릇없는 행동을 했다는 점을 반성하고 있다고 전해주겠나?”
화정산의 말에 종벽기와 용봉지회의 인물들이 기함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되려 고마워하신다고요. 화산의 신매화검이 가장 흠모하는 고수가 태을검제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크흠…… 그랬지.”
“태을문에게 이보다 더 큰 칭찬이 어디 있겠습니까.”
“커흠…… 무슨 그런 말을. 자네의 검식을 보니 나 또한 그간의 내 생각이 맞았다 확신하게 되었네.”
화정산이 속도 없이 진소운과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며, 종벽기의 얼굴이 점점 기괴하게 변해갔다.
그리고 그 일련의 과정을 모두 지켜보던 일명은 가슴속에 서늘한 감정을 느껴야 했다.
‘무서운……자구나.’
진소운이 비무에서 보여주었던 그 모습은 단지 되찾은 진전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었다.
마치 불구대천 원수를 만난 듯한 모습.
끝내 피를 보고자 했던 집요함.
헌데, 마치 그런 행동이 진심이 아니었다는 거짓말을 그럴싸하게 하고 있었다.
모용강으로 인해 용봉지회와 태을문의 관계는 문제없다 봐도 무방하다.
문제는 결국 사건의 가장 큰 피해자인 점창과 화산이 문제인데, 그 두 사람에게 모두 보상을 한 게 아니라 화산에게만 넉넉한 보상을 하며 과거의 인연까지 들먹이고 있었다.
이로 인해 화정산은 진소운에 대한 원한을 풀 수밖에 없었고, 홀로 남은 종벽기는 명분은커녕 자신의 잘못이 더 커지게 생긴 것이다.
‘무공도 만만치 않았는데, 그보다 심계가 더욱 뛰어나.’
용소아가 대단한 점은 그가 뛰어넘을 수 없는 재능을 가진 점이다. 하지만 무서운 존재는 아니다.
용소아는 위정자가 되지 못하기에 두려운 상대는 아니다.
반면에 진소운은 사람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깊은 심계를 가지고 있었다.
‘앞으로 강호가 태을문……, 아니 저 청년 때문에 크게 들썩이겠구나.’
진소운이 다시금 편안한 얼굴로 용봉지회 인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전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렇게 진소운이 돌아서려 할 때.
“그대 잠깐 멈춰야 하는 것이야.”
당서희가 진소운을 불렀고, 용봉지회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당서희를 바라봤다.
그녀가 처음 보는 낯선 이에게 말을 경우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대 나와 마무리 지어야 할 일이 있는 것이야.”
“아…. 그것 말씀이군요.”
진소운이 처음으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금용암기 일은 그냥 넘어가기로 한 것이야. 신검 님의 서신도 있었고, 오늘의 일에 대한 것도 사과의 의미를 담은 것이야.”
용봉지회는 알지 못하는 어떤 이야기들.
하나 확실한 것은 당서희 또한 종벽기의 일에 함께 나설 생각이 없음을 보여주었다.
“가, 감사합니다.”
“대신 다음에 나랑 비무 한번 해야 하는 것이야.”
“!!”
당서희가 비무를 하자는 것은 관심의 표현이었다.
“오늘 말입니까?”
“오늘은 때가 좋지 않은 것이야.”
그걸 알 리 없는 진소운은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한 수 가르쳐 주십시오.”
“그럼 약속한 것이야.”
그렇게 진소운이 문밖으로 나갔다.
“저도 이만 가볼게요.”
모용설이 대답을 듣지 않고 나섰다. 누가 봐도 진소운을 따라나선 모양.
“어머나, 설 이한테 저런 적극적인 면이 있었나.”
서사령이 붉은 입술을 가리며 쿡쿡 웃었다.
“……이거 참 여러모로 당황스럽군.”
“…….”
“…….”
세상 부러운 것 없던 용봉지회 남자들은 난생처음 겪는 묘한 패배감에 입을 꾸욱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