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지옥 정시 제 '一'관문>
용봉지회의 내부를 반으로 갈라 놓고 나온 나는, 마지막으로 봤던 종벽기의 아득한 얼굴에 웃음 지었다.
“인망이라곤 하나도 없는 놈 혼자 남았으니 태을문을 도모하기는 힘들 것이다.”
화정산이나 종벽기나 전생의 나에게 개새끼인 점은 동일하다.
더구나 오늘 일로 화정산에 대한 원한을 잊은 것도 아니다.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
어쨌든 나쁜 짓 하기로 죽이 척척 잘 맞던 망할 연놈들 둘을 갈라놓았으니, 그 둘이 사이를 회복하는 데만도 한세월이 걸릴 것.
그사이 태을문은 차근차근 준비를 마치면 그만이었다.
“음?”
익숙한 기척이 느껴져 발걸음을 서서히 늦췄다.
“진 공자…….”
모용설이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불렀다.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답했다.
“설 소저. 필요한 것이 있으십니까?”
“어…… 그게…….”
고개를 숙이고 바닥을 툭툭 차는 모용설.
나는 전생에 보지 못했던 그녀의 행동에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편하게 말씀하셔도 괜찮습니다. 제 손님이시니까요.”
“저…… 어제 일을 사죄드리고 싶어서요.”
“어제요?”
“네…… 제가 괜한 말을 했습니다.”
“음?”
나는 내 기억 속에서 그녀가 나에게 실수한 것이 있나 되짚어 봤지만, 그녀가 그녀다운 모습을 보였을 뿐. 내게 실수한 일은 없었다.
“어떤 거 말씀이시죠?”
“……화정산을 너무 몰아붙인 거 아니냐고……. 강호가 돌아가는 방식을 모르고 얕은 지식으로 이야기했어요. 사과드리고 싶어요.”
모용설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랬구나, 그녀는 수줍을 때 이렇게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구나.
나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하하하, 무슨…… 그거야 당연하게 할 수 있는 말 아닙니까.”
“……네?”
“제게 이유가 있었다고 한들 제가 심하게 몰아붙인 점은 분명 있었습니다. 소저가 한 말이 잘못되었다 생각하지 않습니다.”
“…….”
“전 오히려 소저의 말 덕분에 용봉지회에 실망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용봉지회가 힘의 논리에 의해 이상적인 도덕에 대해 무시해 버린다면, 그건 곧 우리가 흑도와 다를 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모용설이 멍하니 입을 벌린다.
어린 그녀의 얼굴엔 참으로 다양한 표정이 있다.
전생의 내 기억 속엔, 그저 힘없이 입가에 미소를 짓는 표정과 눈물을 참으려는 슬픈 표정밖에 없었는데.
이런 모습 하나하나가 내겐 너무 기꺼웠다.
“소저. 전 소저의 그런 모습이 좋습니다.”
“네? 그, 그게 무슨…….”
혼자 벼락이라도 맞은 듯 깜짝 놀라 토끼 눈을 뜨는 모용설.
다양한 표정 변화를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이래서 그녀에게 경국지색이란 별명이 늘상 따라다녔던 것인가?
그녀가 이런 모습을 잃은 건 언제부터였을까?
그것이 만약 모용상원의 죽음 이후부터였다면, 난 내가 모용상원을 구한 대가를 모두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아…… 그 올곧은 모습이 좋다는 거였습니다.”
내 말에 모용설은 어쩐지 실망한 표정을 짓는다.
“아……네.”
내겐 아직 모용설에게 갚아야 할 빚이 많았다.
“죄책감일랑 갖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제가 소저를 변화시킨 것 같아 미안해지지 않겠습니까.”
모용설의 두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린다.
한참이나 그런 표정을 짓던 모용설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다시 얼굴을 붉혔다.
“아…… 저, 그리고 아버지를 구해주셨다 들었습니다.”
“아하하. 좀 천천히 아셔도 되었는데.”
나는 머쓱함에 머리를 긁적였다.
“죄송합니다. 진작 감사의 인사를 드렸어야 하는데. 그런 줄도 모르고…….”
모용설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나는 얼른 모용설을 일으켜 눈을 맞추었다.
“소저. 전 언젠가 받았던 것을 되돌려주었을 뿐입니다. 소저가 이리하시면 제가 부끄럽습니다.”
“……어, 저… 손을 좀…….”
“어이쿠, 저도 모르게 잡아버렸군요.”
난 은근슬쩍 잡았던 손을 아쉬운 마음으로 놓아주었다.
“소저. 제겐 소저와의 만남이 아주 소중합니다. 그래서 편히 만났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네? 그게 무슨…….”
“하지만 소저가 제게 미안한 마음을 느끼거나 마음의 짐을 가지고 있으면 편하게 만나기 힘들지 않겠습니까?”
“그, 그렇죠.”
“그러니 편히 대해주십시오. 그것이 저에게도 더 좋습니다.”
이제는 완전히 홍시가 되어버린 모용설이 겨우 대답한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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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 완성된 겁니까?”
다음 날, 나는 제갈천기와 함께 유지량을 찾았다.
가볍게 인사를 나눈 유지량은 곧장 기문진법이 설치되고 있는 현장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봉문이 결정된 이상, 외부의 침입자를 막기 위해선 기문진법과 기관진식의 완성이 무엇보다 급하다.
기문진법은 일부러 태을문의 본래 토지보다 더 넓은 지역에 담을 세워 만들어지고 있었다.
내가 말한 대로 아버지는 태을문 주변의 맹지를 사들이고 그 크기만큼 담을 먼저 쌓아, 그곳에 기문진법을 설치하는 방식으로 공사를 진행 중이었다.
“아직 3할에 불과합니다.”
“그래요?”
생각보다 진척도가 낮은 듯해 의문을 제기하자, 유지량이 끌끌 웃었다.
유지량은 어쩐지 마령고원에서 나왔을 때보다 더욱 수척해져 있었다.
“흠……. 생각보다 늦군요.”
“왜 그러십니까?”
“조금 빨리 진법을 가동해야 할지도 모르거든요.”
“그렇습니까? ……그건 큰 문제가 안 될 겁니다.”
“3할이면…… 아직 진법을 가동하기엔 무리 아닙니까?”
“본래 기문진법만 설치했다면 이미 8할 이상 완성되었을 것입니다만…… 이번엔 새로운 방식으로 만들기로 했습니다. 덕분에 지금 상태로 가동해도 어느 정도는 구동이 가능할 겁니다.”
“새로운 방식이요?”
유지량은 대답 대신 제갈천기를 보았다.
제갈천기는 커다란 종이를 펼치며 보여주었다.
“제가 구상한 기문진법과 기관진식이 하나로 합일된 것입니다.”
“두 가지를 하나로 합쳤다고? 그게 가능한 일이더냐?”
이런 일은 전생의 제갈천기에게도 없었던 일이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가성비 측면에서 도움이 될 수 있는 기관진식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 왔으니까.
“유지량 대협 덕에 기문진법 속에 기관진식을 설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천기의 말에 유지량을 보자, 그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제 덕보단 천기 공자의 뛰어난 실력 덕분입니다. 저희 사문의 술사들도 처음에 의문을 표했지만, 천기 공자가 내민 설계도에 결국 두 손을 모두 들 수밖에 없었거든요.”
간략히 이야기하면 이렇다.
기관진법과 하나로 합쳐진 기문진법은, 기문진법 안에 기관진법을 설치함으로써 인간의 개입 없이 침입자들을 처리해 버린다.
진법에 들어온 사람들은 기문진법에 조해가 있어도 기관진법에 대해 알지 못하면 빠져나갈 수 없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라는 것.
“사문에선 이런 새로운 방식에 대해 놀람과 동시에 이 개념을 더욱 승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항상 제갈세가에 한 수 밀렸던 모산파다.
천기의 기관진식을 통해 그들을 넘어설 가능성을 봤다는 이야기였다.
“이게 다 ……천기 공자 덕분입니다.”
유지량은 엄청나게 피곤한 얼굴로 웃으며 제갈천기를 보고 있었다.
내가 기특한 마음에 천기의 머리를 쓰다듬자, 녀석이 강아지처럼 머리를 데굴데굴 굴린다.
이럴 때 보면 역대급 천재라는 말이 잊히기도 한다.
“더불어 진 대협께도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세상을 보는 눈이 더 넓어졌습니다.”
“그것들이 결국 저희 태을문에 도움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를 말입니까. 안 그래도 저희도 매일 공부하랴, 진법을 개량하랴 하루가 부족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음…… 이럴 때 예전 약속을 지키면 민폐일까요?”
유지량이 부쩍 어깨를 움츠린다.
반면, 제갈천기는 눈을 반짝이며 나를 보았다.
나는 품에서 멸혼진 안에서 겪었던 경험들을 적은 서책을 건네주었다.
“무량불괴멸혼진의 종반부엔 본래의 길이 아니었음에도 다시 본래의 길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에 관한 깨달음과 기록들을 적어놓은 것인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군요.”
서책을 보는 유지량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반면 제갈천기는 금세 기록들을 보며 신나는 눈치였다.
“유 대협, 이렇게 된 이상 진법에 무량불괴멸혼진의 효능을 함께 넣는 건 어떨까요?”
“네?”
“더 좋을 것 같은데요?”
“네?”
유지량은 계속 못 들은 척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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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홍문기의 부름에 대현전으로 향했다.
전날의 축배 자리가 꽤 길었는지 홍문기와 강채석, 아버지의 얼굴엔 피곤함이 가득 담겨있었다.
“날아오를 준비를 해야 한다 말씀드렸는데. 아주 드러누우시겠군요.”
내 말에 강채석이 홍문기에게 고하듯 말한다.
“이것 보십쇼. 문주님. 저놈 저 말하는 버르장머리 좀 보시라니까요. 아주 당주 알기를 기르는 개 보듯 하지 않습니까.”
홍문기는 나와 강채석의 관계를 아는지라 쿠쿡 대며 웃을 뿐이었다. 그리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번에 모용강 대협께서 교환제자를 데려가겠다 하셨다. 더불어 그 교환제자들의 청명환 섭취도 돕겠다 했고.”
“그렇군요.”
“네가 생각하기에 두 명의 제자로 누굴 보내는 것이 좋겠느냐?”
“두 명이요? 청명환은 세 개를 주신다 하지 않았습니까?”
홍문기가 입가에 빙그레 미소를 짓는다.
“사대 제자들의 대사형인 너도 포함해야 하지 않느냐.”
“어…….”
내 난감한 표정에도 홍문기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사제들을 위해 양보하지 말거라. 파검께서 직접 지도해 주신다 하셨다. 이 기회를 놓친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아니…… 그것이 아니라. 저는 갈 수 없습니다.”
“응? 어째서?”
“무림학관 정시를 봐야 하니까요.”
“뭐?!”
“뭐, 인마!”
진태산과 강채석이 벌떡 일어났다.
“시간이 안 맞지 않겠습니까?”
내 말에 홍문기마저 기가 찬 표정이 되었다.
“제가 반년 전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태을문의 미래를 위한 계획이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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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용봉지회가 떠났다.
문주님을 비롯한 어른들에게 인사를 하고 떠나는 용봉지회에게 직인을 해달라 달라붙는 사제들은 없었다.
적대감이 가득한 눈길을 보내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어 모용강과 선발된 세 명의 제자들이 떠날 준비를 했다.
홍문기는 끝까지 정시 시험을 반대했지만, 무림학관을 통과해야 훗날 사제들이 무림맹에 갔을 때 그들을 보호할 수 있지 않겠냐는 말에 결국 무언의 답으로 허락했다.
나는 금·은·동 형제가 모용세가에 갈 줄 알았건만, 결국 강유성을 비롯한 다른 두 아이가 교환제자로 보내졌다.
그들 또한 나를 따라 정시를 보겠다는 말에 문주님이 머리를 부여잡았다고 한다.
나는 당연히 문주님이 금·은·동 세 형제가 정시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줄 알았건만, 어떻게 설득한 것인지 그들까지도 정시 시험을 보게 했다는 말에 궁금증이 생기긴 하였다.
“대사형…… 제가 진정 가도 되는 것일까요?”
강유성이 다른 사제들 사이에서 눈치를 보며 불안한 듯 말했다.
사실 강유성을 추천한 것은 나였다.
배분으로 보나 기간으로 보나, 강유성이 불리한 쪽으로 치우치는 것은 사실.
하지만 그것을 완벽하게 뛰어넘는 재능과 노력이 있었다.
무려 독학으로 검치의 경지까지 올랐다.
그 검치가 어린 시절 파검에게 교육을 받으면 어떤 존재가 될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유성아. 넌 네가 교환 제자로 가는 것이 혜택이라 생각하느냐?”
“……아닌가요?”
“아니다. 교환제자로 가는 것은 책임을 지기 위해 가는 것이다.”
“책임이요?”
“그래, 교육받지 못한 다른 사제들을 대신하여 앞서겠다는 책임. 그 책임을 이수하기 위해 가는 것이란다.”
뒤에서 함께 이야기를 듣던 사제들의 고개가 미미하게 끄덕여진다.
“……아.”
“그러니, 하루의 시간도 낭비하지 말고 수련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그사이 태을문에 남은 제자들은 태을검제님의 진전을 배우고 있을 테니까.”
“목숨을 걸고 일각까지 아껴서 배우고 오겠습니다.”
“……아니, 뭐 목숨까진 걸지 말고. 누이들이 있지 않으냐.”
내가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사이, 태을문의 어른들과 모두 인사를 나눈 모용강이 모용설, 모용재화, 그리고 부러진 팔에 부목을 댄 종벽기를 이끌고 다가왔다.
“사제들이 대사형보다 낫구나. 최소한 어린 사제들은 대사형처럼 놀러 다닐 생각만 하지 않으니.”
“제가 놀러 다니는 겁니까? 저 또한 최선을 다하는 중입니다.”
“끌끌. 열심히 해야 할 것이다. 내가 데려가는 저 세 아이가 대사형 머리채를 잡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장난스레 웃음을 짓는 모용강으로 인해, 내 표정 관리가 되지 않는다.
태을문의 가장 중요한 순간이 모용강의 장난 때문에 감동이 박살 나 버리지 않았던가.
“하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뭐냐?”
“혹시 기행 중에 누군가에게 맞으신다면, 그건 기행의 신분으로 맞는 것입니까. 모용강 선배님 본연의 신분으로 맞는 것으로 치시는 겁니까?”
“허허, 이놈 보소. 네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홍 문주!”
“아! 아니! 그냥 궁금해서 여쭙는 겁니다!”
모용강의 입가에 익살스러운 표정이 지어진다.
“기행의 신분으로 맞는 것이다.”
“오호! 그렇습니까?”
“그런데, 기분이 너무 나쁘면 모용강의 모습으로 맞기도 하지.”
“기행에 진심이신 분이라 들었는데, 실망스럽습니다.”
“크흐흐. 네놈이 함께 가지 못하는 것이 아쉽구나.”
잠시 모용설에게 시선을 주었던 모용강이 나에게 말했다.
“나 또한 물을 것이 있다.”
“무엇입니까?”
“혼례를 약속한 처자가 있더냐?”
“……갑자기 그건 무슨 소리십니까?”
“그냥 물어보는 것이다. 네 아비가 미리 잡아둔 혼례 자리가 있는지.”
“선배님, 저희는 태을문입니다. 합비에선 태을문 무사에게 시집올 바엔 표국의 쟁자수에게 시집을 가는 게 낫다는 소리가 있습니다.”
“없다는 말이구나. 그럼 마음에 둔 처자는?”
“왜 자꾸 그런 걸 물어보십니까?”
난 순간적으로 나도 모르게 모용설의 얼굴을 슬쩍 훔쳐보았다.
모용설도 뭔가 반짝이는 눈으로 이편을 보고 있었고, 눈을 마주치자 휘릭하며 눈을 피했다.
“끌끌, 없다는 말이구나. 하긴 너같이 비루한 놈을 누가 봐주기나 할까.”
“선배님? 다음 기행은 어디로 가십니까? 꼭 알고 싶습니다.”
“한동안 세가에 있을 것이다. 오래간만에 가르쳐야 할 아이들도 있으니. 껄껄.”
한참 광소를 짓던 모용강이 갑자기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놈, 나에게 갚아야 할 빚이 있다는 것 기억하고 있겠지?”
“…….”
모용강이 종벽기를 막아설 때 했던 약속이었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지금 쓰지 않으련다. 지금 썼다간 우리 쪽이 훨씬 기울 테니. 하지만 분명히 기억하고 있거라. 넌 내가 침 발라 뒀다.”
“……?”
괴협답게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내뱉는 모용강.
나는 모용강이 출발하려 하는 모습에 얼른 모용설과 모용재화에게 포권을 쥐었다.
“조심히 가시고, 또 뵐 수 있길 바랍니다.”
“……아 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모용설은 아직도 내게 미안함을 다 지우지 못했는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포권을 쥐었다.
“진 대협! 이번엔 대화를 나누지 못했지만, 이 모용재화 다음엔 반드시 진 대협과 긴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모용재화가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며 말했고 난 만감이 교차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그에게 아무런 이야기도 못 해줬군.’
그의 청춘은 방황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좌절과 고통 속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 것이 그의 미래이건만, 정작 나는 내 일이 바쁘다고 그에게 한마디도 해주지 못했다.
나는 얼른 목소리를 최대한 낮춰 그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재화 공자. 내 말 잘 들으세요.”
“네?”
“너무 검에 목메지 마세요.”
“……??”
영문을 모르겠다는 모용재화의 표정. 하지만 가주인 모용강이 두 눈에 불을 켜고 있는 상황에서 내가 해줄 수 있는 이야기는 이것뿐이었다.
“모두가 검으로 대성해야 하는 건 아닙니다.”
모용강이 수상한 듯 이편을 바라보는 순간 나는 얼른 포권을 쥐며 말했다.
“나 또한 그러길 바랍니다.”
모용재화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
인사가 끝나는 걸 본 모용강이 곧장 태을문을 나섰다. 뒤처지려 하는 종벽기의 머리를 한번 때리는 것은 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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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짐을 챙겨 연무장으로 나갔다.
그곳엔 강채석과 얼굴에 피곤이 가득 담긴 아버지가 서 있었다.
일하는 재미에 밤새는 줄도 모르시나 보다. 저러다 몸이 상하면 어쩐다…….
“아버지, 보약을 좀 해 드시는 게 어떻습니까?”
“……!”
나의 효심에 감동한 아버지가 나를 껴안으려 달려들었고, 강채석이 금·은·동 형제가 오는 것을 보고 그런 아버지를 말렸다.
똑같은 검은색의 무복과 간소한 봇짐을 가지런히 옆에 둔 모습이었다.
“무복은 맞춘 것이냐?”
금표가 말했다.
“저흰 흑염룡 대협의 사제 아닙니까.”
“아…… 미리 말해두고 싶은데, 난 그 별호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금·은·동 형제가 동시에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갸웃거린다.
“무려 룡이 들어간 별호입니다. 사형. 흑룡검도 들고 계시고요.”
“……그러니까 말이다. 분명 좋은 별호인데 마음에 들지 않는단 말이지.”
“배가 부르셨군요.”
“뭐 인마? 헌데 굳이 왜 나를 따라가려 하는 것이냐? 이젠 태을문에 강력한 무공도 생겼다. 이곳에 남아 무공을 익히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느냐? 무림학관 정시는 진정 장난이 아니다.”
단 한 번의 실수만 있어도 목숨이 위험하다.
괜히 지옥 정시라 불리는 것이 아니다.
“사형께서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형제자매를 위해 피를 흘리는 것이 진정한 태을문도임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응??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금시초문의 이야기다.
절대적인 기억을 가진 내가 헷갈릴 리 없다.
“또한 사문을 위해선 목숨도 바쳐야 하는 것이 태을문도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니, 그런 소리 한 적 없다니까.”
금·은·동 형제는 내 기억력도 무시하고 저들끼리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리고 무공이야 절대 기억력을 가지신 사형이 직접 가르쳐 주시면 되는 거 아닙니까. 아무튼, 사형이 시키신 일은 다 했습니다. 매일 화운산을 다섯 번씩 오갔고, 알려주신 검진도 다 맞춰봤습니다.”
“난 세 번이라 말했다.”
“다섯 번을 하면 저희를 놓고 가겠단 말씀 못 하실 거로 생각했습니다.”
아닌 말로 세 형제의 몸은 외공을 익힌 무사처럼 단단해 보였다.
“그거야 보면 알 일이지. 내 성에 차지 않는다면 함께 가지 않을 것이다.”
“지금 시작하면 되겠습니까?”
“그래.”
그러자 세 형제가 봇짐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기 시작했다.
강채석이 물었다.
“안 데려가려고 그러냐?”
“대체 문주님은 무슨 생각으로 저 아이들에게 시험을 치라 허락하신 겁니까?”
“넌 모르나? 저 녀석들이 말하길, 다른 문파는 수십 명의 무사를 끌고 시험을 치는데 넌 혼자 치를 수 있겠냐고. 자신들이 꼭 대사형을 무림학관에 넣고 오겠다고 이야기했다더라.”
“…….”
아니, 넣긴 누굴 넣겠다고…….
“데리고 가거라. 그간의 수련이 결코 미비하지 않으니.”
“……무슨 말입니까.”
“보거라.”
강채석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자, 금·은·동 세 형제는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리고 하얀 솜으로 귀를 막았다.
“아니, 저러고 무슨 검진을 펼친답니까?”
내가 기함하며 묻자, 강채석이 되려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가 서로 보지 않고 듣지 않고 말하지 않아도 세 사람의 합이 딱딱 맞아야 한다고 했다며?”
“아니 그건…… 그냥 그 정도로 맞추라는 것 아닙니까.”
“허……. 넌 앞으로 말조심 좀 해야겠다. 잘 보기나 하거라. 재밌을 터이니.”
나는 설마 하는 눈빛으로 세 형제를 바라봤다.
“시작하겠습니다.”
금룡이 검갑으로 바닥을 세 번 친다. 그러자 세 아이가 동시에 검을 삼방으로 발검한다.
챙-
다시금 검을 회수하여 각자 한 번씩 자리를 바꾸고, 이번엔 강하게 검을 내려친다.
그 뒤 다시금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 동시에 앞으로 튀어 나가며 검진을 펼쳤다가 다시금 모여들어 서로의 등을 보호한다.
과거 제갈천기가 무림맹의 공식 무공인 백호검법을 기반으로 만들었던 백호검식이 세 형제에게서 펼쳐지고 있었다.
“초반에는 잠을 아예 안 자더라. 목검으로 검진을 펼치는데, 매일매일 상처가 나지 않는 날이 없었다. 그러다 이주가 안 돼서 손과 발이 척척 맞기 시작하고, 두 달째엔 말하지 않고도 합이 맞았으며, 넉 달째엔 귀를 막고도 검진을 펼치더라. 눈까지 가린 건 나도 못 봤다.”
“…….”
“저 녀석들이 무슨 생각으로 저리 열심히 하는지 모르겠다만, 저 정도 집념이면 족히 열 명의 무사 노릇은 할 것이다.”
나는 가슴속에서 무언가 찡하게 올라오는 것을 애써 누르며 말했다.
“……열 명뿐입니까. 족히 백 인분은 하겠군요.”
곧이어 백호검진을 마무리 한 세 형제가 안대를 벗고 자신들의 위치를 확인한 후에 서로 환호했다.
“보셨지요? 사형? 약속 지키셔야 합니다.”
“알았다. 짐 챙겨라. 문주님께 말씀 전해주십시오.”
“조심해라. 위험할 거 같으면 그냥 도중에 포기하고. 이제 태을문에겐 많은 가능성이 있다.”
“입관패를 가지고 돌아오겠습니다.”
나는 피곤에 절은 아버지를 보며 말했다.
“다녀오겠습니다.”
“……망할 놈.”
아버지가 최근 원수가 생기셨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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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은·동 형제와 태을문을 나선 나는 곧장 합비의 무림맹 지부에 당도했다.
지부 인근엔 다양한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무림맹 담벼락 한쪽엔 똑같은 공지가 주르륵 붙어있었고, 각종 병자기를 찬 젊은 남자들이 그 방을 보며 욕지기를 내뱉었다.
“허! 이런 미친놈들!”
“이게 말이나 돼!”
“사람을 뽑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이러니 맨날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 놈들만 들어가는 게지!”
“에이! 젠장!”
앞선 사람들이 시험 내용을 확인하곤 침을 뱉고 가버린다.
“…….”
그 연유를 모르는 금·은·동 형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조금씩 조금씩 앞사람이 빠질 때마다 전진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드디어 우리 일행이 방을 확인했을 때.
금표가 격하게 떨리는 눈동자로 물었다.
“이거 농담이지요?”
은호가 너털웃음을 뿜는다.
“하하, 형도 참 당연히 농담이겠지. ……그치요?”
동룡이 눈을 껌뻑껌뻑 대며 내 대답만 기다리고 있었다.
“…….”
나는 달리 해줄 말이 없었다.
무림학관 정시가 괜히 지옥정시가 아니니까.
● 무림학관 정시 一관문
민생안전
시험- 1개 이상의 산채 소탕.
내용- 민생의 안전을 위협하는 산적들로 인해 천하가 혼탁하다.
이에 무림의 기지를 잇기 위해 나선 이들이라면 주저 없이 정의를 바로 세우라.
조건-
● 무림맹이 지목한 산채 규모 이상만을 소탕할 것.
더 큰 산채를 토벌할수록 더 많은 점수를 책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