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지옥 정시 제 '一'관문(4)>
“이건 우리 하오문의 식객이라는 증표이네. 이걸 가지고 있으면 자네가 어디 있든 우리가 찾아갈 수 있을 걸세.”
여미미가 내민 것은 작은 흑패.
이걸로 어떻게 찾아온다는 거지?
“자네도 결국 우리 시야 안에 있을 수밖에 없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해도 흑패 안에는 하오문만의 천리추종향 원액이 들어있지.”
은은하게 풍기던 이 향이 천리추종향인가 보다.
“매일 아침, 새로이 정리된 정보들을 전달해 주겠네.”
“……그게 가능합니까?”
아무리 정보단체라도 한계가 있음이 분명한데. 매일 아침이라니.
더구나 내가 어떻게 움직일 줄 알고 매일 사람을 보낸단 말인가.
“참으로 이상하군, 자네는 우리에 대해 누구보다 속속들이 알고 있으면서, 반대로 우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것 같으니.”
하오문의 ‘식객’이 어떻게 정보를 전달받는지에 대해선 기술된 것이 없었으니까.
여미미는 여전히 내가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자네가 원하는 바를 이루도록 최선을 다할 걸세. 이미 자네의 운명 위에 우리의 운명 또한 얹혔으니.”
“……갑자기 그런 부담스러운 말씀 하지 마십쇼. 함께하자 했지, 운명까지 얹으란 말씀은 안 드렸습니다.”
여미미와 해령이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젓다가 입을 열었다.
“우선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저에 대한 소문을 좀 내주십쇼.”
“자네에 대한 소문? 이미 강호에 자네의 소문으로 가득하지 않은가?”
“그래서 부탁드리는 겁니다. 제 무공이 그리 뛰어나지 않다는 것을 소문 내주십쇼.”
“흠…… 그건 힘들지 않겠나? 이미 용봉지회를 상대한 소문이 세상에 퍼졌을 텐데.”
“용봉지회가 스스로 그 소문을 내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 소문의 진위를 믿는 데는 조금 시간이 더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으흠……. 그 소문이 조금 늦게 퍼졌으면 좋겠다 이거구만.”
“네. 그렇습니다.”
“알겠네. 그건 걱정 말게. 천하의 사람들이 흑염룡이 아니라 지렁이로 생각하게끔 소문을 내주겠네.”
“…….”
흑염룡이란 별호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지렁이로 불리고 싶은 것은 아니었는데. 나는 선택할 수 없는 양가감정 속에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
간밤에 객잔에서 홀로 잠을 자고, 간단한 요깃거리를 챙겨 화운산으로 향했다.
밤새 화운산에 있고 싶지 않으면 빨리 내려오라 말했지만, 그것이 가능할 리 없었다.
급박한 상황에 놓였던 소정대도 태을행공에 숙달되는 데 보름이나 걸렸으니까.
화운산을 벗어나는 데만도 최소 삼 일은 걸릴 것이었다.
당연히 화운산 중턱도 못 내려와 숲에서 잠을 자고 있을 거라 예상했는데.
“호오…….”
화운산 초입에 들어서자, 금·은·동 세 형제가 제법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것 아닌가.
“이제 거북이 정도는 되어 보이네.”
소정대원들이 봤다면 기함할 수준의 빠른 성취였다.
“하긴 그 녀석들은 워낙에 쓰레기 같은 오성을 가졌으니.”
드디어 금표가 내 앞까지 당도했다.
“허억, 허억, 허억. 사형…… 밤늦기 전에 내려갈 수 있다는 거, 거짓말이었죠?”
“물이나 마셔라.”
비에 쫄딱 젖은 듯 온몸에 땀을 흘리고 있는 금표는, 내가 건넨 물통을 한 번에 다 비워버렸다.
“밤을 새운 것이냐?”
“네… 솔직히… 허억, 말하세… 허억. 요… 허억. 사형… 허억, 행공 쓰고 있다는 거… 허억. 거짓말이죠?”
나는 객잔에서 가져온 만두를 내밀었다.
“만두 먹을래?”
“허억, 허억, 허억.”
답변하지 않는 나를 노려보던 금표는 만두를 낚아챈 후, 게 눈 감추듯 후루룩 먹어 치웠다.
금표가 조금 배를 채우고 지쳐 바닥에 쓰러진 사이, 은호가 당도했고, 마지막으로 동룡이 도착했다.
“허억… 허억… 허억… 대사형… 거짓말….”
“허억… 허억… 거짓말쟁이.”
두 형제는 제대로 말을 이을 겨를도 없이 나를 원망 가득한 눈으로 봤다.
“물 먼저 마실래? 만두 먼저 먹을래?”
난 그들에게 물과 만두를 건넸다.
*
걷는 속도는 조금씩 빨라지고 있었다. 거북이 속도로 움직이던 녀석들은 병아리가 걷는 속도만큼 걷기 시작했고, 그다음은 느린 소가 걷는 속도로 걷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속도가 조금씩 붙으면서 나는 관도가 아닌 산로를 선택했다.
그러자 세 형제의 속도가 다시금 느려졌다.
“빨리빨리 와라. 이러다 무림정시 다 끝나겠다.”
“하아… 하아… 그럼, 관도로 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겨우 걷는 거에 적응되어 가고 있었는데.”
산로는 관도와 다르다.
손과 발을 동시에 써야 하고, 움직임에 제약이 계속 걸린다.
그 와중에 행공까지 하려고 하면 정말이지 미칠 노릇이 따로 없을 터였다.
해가 뜨기 전 시작한 등산은, 해가 중천에 뜨도록 십 리도 움직이지 못해 진척이 없었다.
“산의 정상까지 찍지 않으면 점심도 거를 것이다.”
“……!”
“……!”
“……!”
방앗간 집 세 형제의 눈에 살기가 떠올랐다.
“오오, 벌써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살기를 뿜는 것을 익힌 것이냐? 역시나 이 대사형의 은혜는 하늘만큼 높고 바다처럼 넓구나.”
뭔가 할 말이 많은 듯 보였지만 입을 꾸욱 다무는 세 형제.
그 영향이었을까? 조금씩 세 형제의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삐이이이-
그때, 검은 새 한 마리가 창공을 유영하며 울음을 터트렸다.
그 목소리가 얼마나 멀리 퍼진 건지, 숲속의 날짐승들이 한 번에 날아오르고, 우리를 신기하게 보던 다람쥐들이 재빨리 은신처로 숨었다.
“저건 뭐지?”
숲 사이로 하늘을 보자, 커다란 매 한 마리가 하늘을 지배한 듯 날고 있었다. 그렇게 창공을 오가던 매가 갑자기 나에게 낙하하기 시작했다.
“호오? 사람도 사냥하는 건가?”
내 말에 세 형제가 움찔거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사람 팔길이보다 커다란 날개를 가진 매가 빠른 속도로 낙하하는 모습을 본 것이다.
“사형, 이쪽으로 오는 것 같은데요?”
“그러게요. 저… 저거… 사형!”
“씁! 행공!”
행공을 풀고 도망가려는 녀석들을 향해 은은하게 살기를 뿜자, 녀석들이 맹수의 눈빛에 놀란 짐승처럼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그리고 도망가지도 피하지도 못하고 동시에 눈을 꾸욱 감는 순간.
커다란 매는 갑자기 날개를 펴더니 속도를 줄이고 천천히 내게로 다가왔다.
“뭐지?”
내 어깨를 원하는 것 같기에 어깨를 내주자, 매가 내 어깨에 착 하니 앉았다.
세 형제는 그 광경이 신기한 듯 눈을 끔벅거리며 보고 있었고, 나는 매의 발목에 붙어있는 작은 대나무 통을 발견했다.
“허어, 전서구를 쓰는 게 아니라. 전서응을 쓰는 것인가? 가만…….”
매는 처음 보는 나의 머리에 자신의 깃털을 비비다가 내 가슴께를 톡톡 쳤다.
왕금산에게 받은 은왕패와 하오문에게 받은 흑패가 들어있는 곳이었다.
“대단하구나. 전서응에게도 천리추종향을 훈련 시킨 것인가?”
내가 흑패를 꺼내어 매를 쓰다듬어 주자, 매가 마치 주인을 만난 듯 아양을 떨었다.
그리고 곧장 녀석의 발목에 있는 대롱에서 하오문이 보낸 자료들을 꺼내 훑어보기 시작했다.
“사형,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내게 정보를 주기로 한 사람이 보낸 것 같구나.”
금표가 신기해하며 매에게 다가서려 하자, 매의 눈빛이 사납게 변하며 꽥하니 소리를 질렀다.
“……엄청 사나운데요?”
“전서구와 달리 전서응은 야생의 습성을 지우지 않는다. 때문에 훈련하긴 힘들지만, 사냥당할 위험이 적다는 이점도 있지. 함부로 만지지 말아라. 철응으로 보이는데, 사람 손가락 정도는 금방 잘라낼 수 있는 녀석이니까.”
내 말에 금표가 핼쑥한 표정으로 손을 거뒀다.
“흠…….”
나는 자료를 모두 보고 문방사우를 꺼내 내가 필요한 자료 몇 가지를 더 적은 후, 철응의 발목에 달린 대나무 통에 넣어주었다.
그러자 녀석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안다는 듯, 다시금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뭐였나요?”
은호가 내가 받은 자료가 무엇인지 궁금한 표정.
“현 상황에 대한 간략한 정보였다. 현재 무림맹에게 지목된 산채 중에 이천사백 개가 사라졌다고 하는구나.”
“벌써요?”
아직 정시가 시작된 지 사흘밖에 되지 않았단 점을 생각하면, 무척이나 빠른 속도였다.
“너희들이 빨리빨리 행공을 안 익히니까 이런 불상사가 일어나는 것 아니냐! 너희 때문에 내가 무림학관 시험에서 떨어지면 책임질 테냐?”
금표와 은호는 어이를 상실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나마 동룡의 눈동자엔 아직 독기가 빠지지 않은 상태. 뭔가 ‘죽인다…….’ 같은 소릴 한 것 같긴 한데. 우리의 경쟁자에게 하는 소리겠거니 생각했다.
떡 한 조각을 나눠 먹기 위해 몇 날 며칠이나 나를 기다렸던 착한 동룡이가 감히 대사형을 죽이겠다는 소린 하지 않겠지.
“상단주님! 철영 공자님이 상태가 이상합니다!”
“뭐라!”
갑자기 들려온 낯익은 목소리와 이름에, 우린 동시에 시선이 산 아래쪽 관도로 향했다.
그곳엔 낭인 백여 명을 이끈 행단이 있었고, 선두엔 계연석이 있었다.
계연석은 누군가의 부름에 혼자 뒤로 움직이고 있었고, 그 옆엔 한때 우리 부생당의 당주였던 계연승이 함께였다.
“상행이라도 나가는 걸까요?”
계룡상단은 자체적인 표국 없이 물건의 최종 유통 권한만 가지고 있기에 표행도 하지 않았다.
더구나 행단에는 짐마차가 세 대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계연석과 계연승이 움직인 곳은 짐마차 사이에 있는 철제로 된 마차.
계연석이 창문을 두드리자 그 안에서 나온 것은 얼굴이 이상한 방향으로 뒤틀린 계철영이었다.
“허어…….”
“헐…….”
“어째서…….”
그래도 근 오 년 가까이 함께 지냈던 이었기에, 기괴한 모습으로 변한 계철영을 바로 알아보는 세 형제들.
“아으, 아으. 아아.”
계철영은 심지어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조금만 참거라, 이 산만 넘으면 이 마을이 있으니, 그곳에서 조금 쉬었다 가자.”
“아우, 아우. 아우.”
비틀어진 입술 사이로 침이 주르륵 흐른다.
계연석은 그런 계철영의 입가에 묻은 침을 닦아준다.
“아무 걱정 말거라. 넌 반드시, 반드시! 무림학관에 들어갈 것이다.”
계연석이 다시 선두로 나가 무리를 이끌자, 행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지나가길 한참.
금·은·동 세 형제는 얼이 빠진 상태로 한참이나 멈춰있었다.
사실 나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계연석이 폐인이 된 아들을 이끌고 무림학관 정시를 치르려는 장면은, 그의 소름 끼치는 열망이 투영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도 모르게 닭살이 돋을 지경.
“……저렇게까지 해서라도 시험을 봐야 하는 건가요?”
금표는 처음으로 자신이 무슨 시험을 치르고 있는지 체감한 표정이었다.
“무림맹을 중심으로 힘의 논리에 의한 강호의 서열 관계가 정립된 지 오래다. 더 많은 부와 권력을 원하는 계연석이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무림학관에 넣고 싶어 하는 욕망은 당연한 것이지.”
“하지만, 저 상태로…… 시험을 칠 수 있을까요? 아니, 설사 시험을 치른다 해도 학관에 다닐 수 있을까요?”
우습게도 무림맹은 조력자에 대한 제한은 철저히 했지만, 수험 당사자에겐 별다른 제한을 두지 않았다.
학관에 입학하여 생활하는 것은 차후의 이야기지만, 학관 내에 들어갔을 경우 무료로 무림맹의 의료지원을 받을 수 있다.
비록 무공은 회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학관 이수만 잘한다면 무림맹에서 한자리 정도는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 면에서 계연석의 선택은 틀리지 않은 것인지도 몰랐다.
“저들 걱정을 할 때가 아니다. 행단을 이루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지 못했느냐?”
“……그게 무슨 소립니까?”
“행단의 선두에 계연석과 함께 서 있던 이들은 염라부 연추악, 무풍마간 한금탁, 삼수귀원 담철각이다. 이 세 사람은 낭인들 중에서도 특급 낭인으로 손꼽히는 사람들이다.”
“……무풍마간 한금탁…… 그 사람은 흑도인 아닙니까?”
기이한 낚시대로 사람의 코 가죽을 꾀어 허공에 뱅글뱅글 돌리다 죽인다는 그의 일 수는, 흑도인들도 무서워하는 절기다.
“낭인으로서 흑도에서 활동했을 뿐, 돈을 준다면 언제든 백도로 전향할 수 있는 사람이지.”
“사형, 제가 듣기로 분명 일류 이상의 고수들은 조력자로 참여할 수 없다 들었는데요.”
“그것이 문제인 점이지. 낭인인 만큼 그들의 실력이 정확히 집계가 되지 않고, 소속이 없는 자는 한 수 아래로 보는 무림맹이기에 그들을 충분히 일류 고수로 판단할 수도 있으니까.”
“그런 억지가…….”
“그러니 빨리 제대로 걷기나 하거라. 가뜩이나 경쟁이 어려워지는데, 더불어 너희들 때문에 점점 속도가 느려지고 있지 않으냐?”
내가 세 형제를 추궁했지만, 이번엔 아이들의 눈동자는 쉽게 죽지 않았다. 되려 열기를 가득 담은 모습이랄까.
그리고 세 형제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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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연석 행단과 마주칠 것을 대비해 마을 두 개를 그냥 지나친 우리의 속도는, 일반인이 산을 넘는 수준까지 올라섰다.
나는 세 형제가 서서히 행공에 적응하는 모습을 보며 다시 관도로 내려갔다.
“이제 산로로 가도 됩니다.”
“그럼요. 자신 있습니다!”
“힘들지도 않은 수련을 무엇 하러 하겠느냐. 이제 보법을 쓰면서 가보자.”
“…….”
“…….”
“행공을 쓰면서 보법을 쓰게 되면 이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특히나 태을팔만신보는 신법의 특성도 가진 희대의 보법. 너희들은 이것을 익히기만 하면, 얼마든지 적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쉬지 않고 달릴 수 있을 것이다.”
“……사형, 저희 벌써 일주일째 노숙에 씻지도 못했는데, 오늘은 조금 평범하게 가면 안 되겠습니까?”
“그래? 어쩔 수 없구나. 가서 적당한 객잔에서 조금 쉬자.”
금·은·동 세 형제의 입이 함지박만 하게 귀에 걸렸다.
“그리고 태을문으로 다시 돌아가자. 나는 대사형으로서 너희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 없으니, 수련이 하기 싫다면 그냥 다 같이 돌아가는 수밖에 없지. 저런, 사련이가 우리들을 모두 책임지려면 정말이지 너무~ 힘들겠구나.”
금·은·동 세 형제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
“…….”
그중 가장 어린 동룡이 참다못해 말했다.
“대사형!”
“왜 그러느냐?”
“태을팔만신보 이렇게 밟는 것 맞습니까?”
동룡이 바닥을 밟으며 물었고, 금표와 은호가 배신감에 치를 떠는 듯 눈까지 파르르 떨었다.
“아니다. 내가 다시 알려주마. 어떻게, 동룡이는 계속 가겠다고 하는 것 같은데, 금표와 은호는 돌아가겠느냐?”
“……당연히 같이 갈 겁니다.”
“네! 그리고 전 노숙을 좋아하니까요!”
뭔갈 중얼거리며 내가 찍은 족적을 따라 밟던 세 형제에게 말했다.
“태을팔만신보까지 자유롭게 펼칠 수 있게 되면, 다음에 나오는 마을에서 가장 좋은 객잔을 잡아주마.”
“네?”
“진짜입니까?”
“사형, 돈 없잖아요.”
금표, 은호, 동룡이 차례로 말했고, 나는 품 안에서 전에 왕금산에게 받았던 금전이 가득 찬 전낭을 보여주었다.
“누가 돈이 없다고?”
짤그렁 짤그렁.
누런 황금을 본 아이들의 눈빛이 다시금 날카롭게 돌아왔다.
‘이게 바로 채찍과 당근의 기법이란 거지.’
좋은 객잔에서 고급 음식을 먹으며 뜨끈한 물로 몸의 피로를 풀고 싶다는 아이들의 욕망은 강렬해서, 불과 삼 일이 지나지 않아 행공을 쓰면서 태을팔만신보를 펼칠 수 있는 경지까지 올라섰다.
벌써 10일째.
연일 계속되는 노숙으로 인해 개방도인지 태을문 제자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아이들.
그나마 나를 따라 검은 무복을 입은 것을 다행이라 생각해야 하나.
“사형! 사형! 제가 알아 왔습니다. 이 마을에서 제일 가성비 좋은 객잔이 바로 저곳이랍니다!”
황산에 도착하자마자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 가장 가성비 있는 객잔을 알아낸 은호가 은궁객잔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곳은 고급 객잔으로 분류되는 곳으로, 일박에 은전 1냥짜리 객잔이랍니다.”
나는 은궁객잔 옆에 있는 신식 건물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것도 객잔이 아니더냐?”
“금궁객잔이란 곳인데 그곳은 무려 은자 닷 냥이나 줘야 한답니다.”
“그래? 그럼 거기로 가자.”
“네?”
“약속하지 않았더냐? 이 마을에서 가장 좋은 객잔을 잡아주겠다고.”
“하, 하지만 사형. 넷이면 은자 20냥입니다.”
말을 하는 은호의 음성이 벌벌 떨렸다.
“너희들의 수련에 성과가 날 때마다 이런 호사는 계속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피로를 풀고 다시 열심히 수련할 생각만 해라.”
그렇게 말하며 내가 금궁객잔으로 향하자, 쭈뼛거리던 세 사람이 쫄래쫄래 뒤따라왔다.
“어서 오십시오!”
내가 들어서자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다가서던 점소이는 금·은·동 세 형제의 꼴을 보고 얼굴이 천천히 구겨지기 시작했다.
나는 재빨리 금전 한 냥을 꺼내어 건넸다.
“몇 주간 노숙하느라 아이들 꼴이 말이 아니네. 방과 목욕물, 그리고 음식과 새로운 무복을 좀 준비해 주게.”
얼굴이 일그러지려던 점소이의 입가가 다시금 활짝 피어오른다.
“친절히 모시겠습니다. 식사 먼저 하시겠습니까?”
“부탁하지.”
“이쪽으로 오십시오.”
내가 점소이의 인도에 따라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은호가 내 옷자락을 잡고 말했다.
“대사형, 저기…….”
은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은 객잔의 이 층 난간.
“…….”
그곳에서 눈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계연석과 얼굴이 기이한 방향으로 뒤틀린 계철영이 이편을 보고 있었다.
“태을문…….”
이 층에 있는 계연석의 이빨 갈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