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71화 (71/357)

#71. <지옥 정시 제 '一'관문(5)>

인간의 심력은 무력 못지않은 영향력을 끼친다.

머릿속 깊이 새겨진 상대에 대한 공포는 본인의 무력이 나아진 정도로는 극복되지 못하는 성질을 가졌다.

“대사형…….”

지금 금·은·동 형제가 그랬다.

지난 세월 태을문에 군림했던 계연석에 대한 두려움. 그 기억은 그들이 새로운 무공을 익혔다 해서 쉽게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저희 다른 곳으로 갈까요…….”

거북스런 계연석의 눈빛과 삐뚤어진 계철영의 얼굴. 그 압박을 견뎌내지 못하는 세 형제는 불안한 눈동자로 내 눈치를 살폈다.

“왜? 내가 보기엔 여기 객잔이 괜찮은 것 같은데.”

“아니…… 그게…….”

힐끔 계연석 쪽을 바라보던 동룡이 금세 눈빛을 피한다.

난 퉁명스럽게 말했다.

“너희 잘못한 거 있냐?”

“……그건 아닌데…….”

“빚진 거 있어?”

“…….”

“계룡상단은 계철영의 탈퇴를 이유로 그간 후원했던 모든 돈을 되돌려 받았다. 거기에 이자까지 더해서. 저들은 더 이상 우리의 채권자가 아니야.”

내 말에 짐짓 수긍하는 척 입을 앙다물지만, 흔들리는 눈동자는 별수 없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진소운.”

한때 우리 부생당주였던 계연승이다.

“오랜만이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

계연승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계룡상단은 그간 잘 지내지 못한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결국 계연승은 계철영을 키워내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계철영이 저런 상태가 된 이상, 계연승이 잘 지낼 리 만무했겠지.

“상단주님께서 잠시 보자하신다.”

내가 고개를 들어 계연석을 보았다.

핏발 선 눈동자. 상대에 대한 원한으로 가득한 날것의 모습. 아직 어린 금·은·동 형제가 두려워할 법했다.

“보고 싶으면 직접 내려오라 하십시오.”

“…….”

하지만 그게 어쨌단 말인가.

나에겐 한낱 우리를 도구처럼 쓰고 버리려 했던 자들에 불과한데.

“저희 고생한 거 보이지 않습니까. 이제 겨우 식사하려 하는 참입니다.”

“……식사를 함께하자는 말씀이신 거다.”

“왜요? 밥값이라도 내주신답니까?”

“……한때 그래도 내가 너희들을 가르쳤던 당주였다.”

“당주님. 당주님이 가르친 거라곤 계철영에게 굴복하라는 것밖에 없지 않았습니까.”

“……!”

계연승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진다. 상당히 신경을 긁고 있는데도 쉽사리 검을 뽑지 않는 모습이 신기했다.

진즉에 화산의 속가제자 운운하며 검을 뽑았을 법도 한데 말이지.

“…….”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계연승이 계연석을 쳐다본다.

잠시 우리를 가만히 보던 계연석이 고개를 끄덕인다.

“상단주께서 밥을 대접한다고 하시니 함께 올라가자.”

“……좋군요. 여기!”

나는 곧장 지나가던 점소이를 불렀다.

“우리가 방금 주문한 건 취소하고 이 객잔에서 가장 비싼 음식들로 여덟 가지 준비해 주게. 아! 계산은 저쪽에 계신 분들이 한다는 소리 들었지?”

“……아, 네. 알겠습니다.”

내 말에 계연승도 계연석도 불만 가득한 표정이었다.

“올라가자.”

“……사형, 저흰 여기서 먹으면 안 됩니까?”

“다음 수련을 생각해 봤는데 말이다. 이제 보법까지 숙달되었으니 물구나무서면서 걷는 건 어떠냐?”

“금표 형! 그게 무슨 말이야! 대사형을 혼자 보낼 순 없지!”

“맞아! 실망이야, 금표 형!”

동룡과 은호가 벌떡 일어났고, 금표가 두 사람을 배신자 보듯 하다가 느릿하게 일어났다.

계연석은 이 층 전체를 빌려놓은 상황이었다.

낭인들은 삼삼오오 모여 음식과 술을 마시고 있었고, 그중 연추악, 한금탁, 담철각이 앉은 탁자 위엔 가장 비싼 음식과 술이 놓여있었다.

난 계연석의 탁자로 가기 전, 세 형제에게 빈 탁자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너흰 여기서 먹어라.”

“아! 알겠습니다! 다녀오십쇼! 대사형!”

금표가 신난 듯 포권을 쥐었다.

난 계연석과 계철영이 앉은 자리에 마주 앉았다.

“오랜만입니다.”

“……신수가 훤하구나, 계룡상단을 버리고 왕가장에게 기생하더니 살림살이가 좀 나아졌느냐?”

“정확히는 태을문이 계룡상단을 버린 게 아니라, 계룡상단이 제멋대로 태을문에서 도망쳐 나간 것이죠. 계철영은 그 대가를 치른 것이고요.”

“아으, 아우, 아으.”

계철영은 뭐가 그리 분에 찬지 연신 침을 흘리며 나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그래, 왕가장의 돈맛은 좀 다르더냐?”

“모르셨습니까? 태을문에서 최근에 광산을 발견했습니다. 아, 창궁상단의 합비 지부도 가지게 되었죠. 이제 예전처럼 돈 가지고 유세 부리는 인간들을 참아줄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왕가장주께선 애초에 계룡상단주와는 인성부터 다르시지만.”

“…….”

“아참, 그리고 태을검제의 진전을 되찾은 건도 들으셨겠죠? 하하,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지. 그랬다면 계철영도 태을검제의 진전을 이어 무림 정시를 직접 참가했을 수도 있을 텐데 말입니다.”

계연석의 눈에는 자신이 코앞에서 놓친 기회에 대한 열망이 어려있었다.

평범한 사람도 계연석의 입장이 되어본다면 억울할 텐데, 욕심 많은 그라면 얼마나 지옥 같은 하루를 보낼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됐고, 무슨 일 때문에 부르신 겁니까? 우리가 이렇게 사이좋게 앉아서 밥을 나눠 먹는 사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폐인이 된 아들을 이끌고 무림학관 정시를 치르러 나온 시점부터, 계연석의 욕망은 그를 지옥에 빠트린 것과 다름없었다. 지옥에 살고 있는 인간을 괴롭히는 취미 따위는 없다. 그냥 그렇게 살으라지.

“……태을문은 내게 빚이 있다.”

이건 또 무슨 참신한 개소리지?

“태을문이 가장 힘들 때 손 내밀어 준 것이 계룡상단이었다.”

과거 돈을 가지고 유세를 부리던 계연석은 없다.

상단도 금력도 아직 건재했겠지만, 계철영이 저리되며 정해놨던 미래의 계획이 모드 흩으러지고, 낭인을 이끌고 무림학관 시험을 나서야 했던 계연석에게 과거 금력으로 쌓아 올렸던 위엄 따윈 사라진 지 오래다.

“태을문이 왕가장의 손을 잡을 수 있었던 것도, 지금 광산과 창궁상단 합비 지부를 가지게 된 것도 모두 계룡상단의 덕이다.”

나는 그의 개소리들을 가만히 들어주었다.

“…….”

“돈을 갚았다 해서, 이자를 냈다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인정에 대한 빚은 인정으로만 갚을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에 확신이라도 하듯 계속 이야기를 이었다.

“네놈의 빚. 네 사형제들의 빚. 네가 갚아라.”

“……?”

한쪽 탁자에서 나온 음식을 먹던 금·은·동 형제도 손을 멈추고 이편을 바라본다.

“우리 철영이와 함께해라. 함께 도우며 무림학관에 들어가라. 나는 이미 이름난 낭인 백 명을 구했다. 이건 네게도 절대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닐 것이다. 그것으로 나의 인정을 갚아라.”

“…….”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어째서 계연석은 자신이 하찮게 생각하는 태을문, 특히나 계철영을 폐인으로 만든 원인이 있는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그리고 답이 나오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아, 용봉지회 때문이겠군.’

용봉지회의 사건은 대외적으로 퍼지지 않았다.

태을문 내에서도 입단속을 시켰고, 용봉지회가 스스로 실수한 일을 사방에 퍼트리고 다닐 리 없으니.

하지만 태을문을 계속 지켜봤던 사람이라면…… 언젠가 태을문에게 복수를 할 생각을 하고 있던 사람이라면…….

‘알 수밖에 없겠지.’

그리고 용봉지회의 화정산과 종벽기를 상대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던 내가 자신들에게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을 것이고.

그러면 계연승의 태도도, 그가 참을성을 발휘했던 것들도 모두 이해가 된다.

“푸흐흐흐.”

일련의 생각들이 정리되자 웃음이 튀어나온다.

“……!”

가볍게 웃었는데, 이 층의 분위기는 삽시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

연추악과 함께 앉은 낭인들도 술잔을 넘기다 손을 멈추었다.

금·은·동 세 형제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언제라도 검을 뽑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게 진짜 인정을 좀 보이시지 그랬습니까.”

“…….”

“후원하며 아이들에게 좋은 말 한마디씩 해주시고, 잔치를 열면 먹을 것을 아끼지 말고. 철영이가 잘못하면 돈으로 해결하는 게 아니라 와서 사과를 좀 하시지 그러셨어요.”

“……아으, 우으, 아아.”

“인정을 빚졌다고요? 인정을 준 적이 있어야 우리가 빚지는 거 아닙니까?”

“…….”

“무림학관 수시에 지원하기 위해 들어왔으면, 최소한 태을문과 어울릴 생각이라도 하셨어야죠. 태을문의 무공이 해악이 된다고 심법은 절대 익히지 않았던 건 대체 누구 생각이었습니까? 그런 행동을 해놓고 인정이요?”

“…….”

“까는 소리 적당히 하십쇼. 인정은 되려 우리가 베푼 겁니다. 계철영. 목숨도 빼앗을 수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상단주께서 태을문에 빚을 지신 겁니다.”

연추악과 한금탁, 담철각이 자리에서 일어나 이편으로 다가온다.

“어이, 젊은 친구 말이 좀 심하네?”

“신경 끄십시오. 낭인들은 고용주가 시킬 때나 움직이는 겁니다.”

“허어, 이놈 보소.”

그 광경을 보던 계연석이 작게 고개를 젓자, 낭인들은 침을 뱉고 뒤로 돌아섰다.

“……함께하지 않을 생각이냐?”

“만약 계철영이 무림학관에 들어가야 저도 무림학관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면……, 전 무림학관 따윈 포기할 겁니다.”

“…….”

계연석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난…… 우리 철영이가 무림학관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태을문이 무림학관에 들어가는 꼴. 역시 가만히는 두고 보지 못한다.”

“…….”

“내 모든 것을 다 던져서라도 너와 태을문을 막아설 것이다.”

툭.

동룡이가 음식을 먹던 수저를 자신도 모르게 놓쳐버렸다.

“지금 선전포고하신 거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

“전 태을문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목숨도 내놓을 생각이 있습니다.”

난 핏발선 계연석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러니 상단주께서도 태을문을 건드릴 땐 그 정도 각오를 하셔야 할 겁니다.”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연추악, 한금탁, 담철각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노려보았다.

“애송이, 강호의 격언에 쉽게 적을 만들지 말라는 말 들어보지 못하였느냐?”

“격언 중엔 어리다고 상대를 우습게 보지 말라는 말도 있지요.”

난 세 형제를 보며 물었다.

“다 먹었느냐?”

음식은 절반 정도만 먹었지만, 자리가 불편한지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일어나자.”

#

계연석 일행은 그날 먼저 출발했다.

우리는 예정대로 목욕을 마친 후에 하루를 쉬고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출발 준비를 마쳤다.

난 출발하기 전 아이들을 모았다.

“어제 일을 잘 보았겠지?”

“…….”

무거운 감정의 교류가 기억났는지 아이들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강호란 그런 것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다 하더라도, 내가 약하면 나의 소중한 사람을 지킬 수 없다.”

“명심하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세 형제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봇짐 속에서 목갑 두 개를 꺼내었다.

“문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내려주신 것이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남궁세가의 대연신단이다.”

“네?!”

세 형제의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그간 너희들에게 태을진경으로 행공을 죽어라 수련시킨 이유는, 일전에 말한 이유와 더불어 이 영단을 소화 시키기 위해서다.”

세 형제의 내공은 아쉽게도 10년 대 언저리다.

심법에 재능이 뛰어난 은호가 그나마 12년의 내공을 가지고 있었고, 금표와 동룡의 내공은 그 10년도 채우지 못했다.

“너희 내공은 대연신단의 영기를 버틸 수준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 너희는 이 영약을 먹는 순간. 지금까지 해왔던 것 이상으로 죽어라고 행공을 운용해야 한다.”

“……사형.”

“왜 그러느냐?”

“두 개밖에 없는데 어떻게 나누어 먹습니까?”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금·은·동 형제는 자신은 못 먹어도 서로에게 나눠 줄 정도로 양보심이 투철한 아이들이었는데. 영약 앞에선 별수 없는 건가 싶었던 거다.

“사람은 네 명인데 두 개밖에 없으니 차라리 그 영약은 사형이 모두 드시는 게 어떻습니까?”

“…왜 계산이 그렇게 되는 거냐?”

금표의 말에 은호가 말을 이었다.

“금표 형 말이 맞습니다. 저희는 어차피 먹어도 소화하는 데 한참 걸릴 거고, 괜히 사형 발목이나 잡겠지요. 그냥 사형이 다 드십쇼.”

“저도 형들 의견이 맞다 생각합니다. 안 그래도 전 약이 몸에 잘 안 받는 체질이라 어렸을 적에 보약도 잘 안 먹었습니다.”

너스레를 떠는 녀석들을 보다 나는 대연신단 두 개를 반씩 쪼개었다. 그러자 청아한 향기가 방 내부에 가득 퍼졌다. 나는 멍하니 그 광경을 보는 녀석들에게 반쪽씩 건네주었다.

“…….”

녀석들은 대연신단을 보고 군침을 삼키는 한편, 함부로 그것을 입에 가져다 댈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문주님께 나를 무림학관에 넣고 오겠다고 말했다면서?”

“어…… 그게…….”

“아하하.”

“…….”

나는 머쓱해하는 녀석들을 보며 말했다.

“나는 나 홀로 무림학관에 들어갈 생각이 없다. 너희 모두와 함께 무림학관에 들어갈 것이다.”

“…….”

“…….”

“…….”

내가 꽤 감동적인 말을 했지만, 녀석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사형, 솔직히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내가 혼자서 무림학관에 들어간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냐?”

“……대사형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응. 가능할 거로 생각해요.”

대체 녀석들은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나를 믿고 따라오너라.”

“……그러고 싶긴 한데, 저희는…… 솔직히 너무 약하지 않습니까. 어제 낭인들 사이에서 고개도 못 들었습니다.”

“솔직히 무서웠어요.”

나 또한 전생에서 무림맹으로 의무 복무를 나가 처음 느꼈던 감정.

“걱정마라. 너희가 무림학관에 들어갈 땐, 아무도 너희들의 눈을 마주치지 못할 것이다. 내가 그리 만들 것이다.”

“…….”

금·은·동 세 형제는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행공을 쓰며 보법이 숙달된 뒤에도 산을 다시 오르지 않았다.

대신 이번엔 검진을 펼치며 관도를 걷게 했다.

단순히 검진을 펼치는 것뿐만 아니라 이동까지 함께한다.

처음엔 발이 꼬이고, 검진이 절로 풀리는 등의 일이 계속 있었지만, 서서히 검진을 유지해 가는 시간이 길어졌다.

거기에 더불어 틈틈이 내가 흑룡검을 휘둘러 검진을 때리니, 검진의 숙달 수준이 빠르게 오르기 시작했다.

눈과 귀를 막고 검진을 외웠던 아이들답게 숙련도는 금세 올랐다.

“쩝쩝. 사형. 근데 이렇게 느긋하게 가도 되는 겁니까?”

세 형제가 노상에서 밥을 먹는 동안 하오문에 전달할 편지를 써서 철응의 발에 묶어 보낸 나는, 녀석들을 향해 살기를 뿜었다.

“……윽!”

“…….”

“크흑.”

금표와 동룡이가 토할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은호는 아무렇지 않아 한다.

“하아… 밥 먹을 땐 그냥 좀 먹으면 안 됩니까?”

“대연신단은 얼마나 녹였느냐?”

“……절반 정도요.”

“그러다 부지불식간에 싸움이 벌어지면, 그 기운이 역류할 수도 있다.”

“……하아, 알겠습니다.”

그나마 태을진경을 익힌 덕에 대연신단은 내 예상보다 빠르게 녹여내고 있었다.

“사형, 진짜 이러다 일(一)관문도 통과 못 하는 거 아닙니까. 산채가 몇 개나 남았답니까?”

“팔백구십팔 개가 남았다는구나.”

무림학관의 첫 번째 시험이 산채토벌이란 소식을 듣고, 발 빠르게 움직인 산채들이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바람에 산채 소탕에는 속도가 더 들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보름 만에 벌써 삼천백 개의 산채가 사라진 건 기함할 만한 노릇이었다.

“이러다 진짜 저희는 산채 구경도 못 하겠습니다. 저희 수련에 시간을 너무 많이 쓰는 것 같은데……. 솔직히 저희가 얼마나 준비되어 있는지도 모르겠고요.”

난 금표의 우려에 피식 웃어 보였다.

“아마 곧 너희들의 실력이 얼마나 되는지 시험할 수 있는 기회가 올 것이다.”

이제는 행공을 쓰고, 보법을 밟으며 백호검진을 펼치고 있음에도 불편해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쌍천검결을 이용해 허초와 실초를 연속으로 때려 보아도 능숙하게 막아낼 수준은 되었다.

“사형, 근데 방금 우리 실력을 보여줄 기회라는 게 무슨 이야기인가요?”

“금궁객잔을 나선 후에 철응을 통해 두 가지를 부탁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계연석의 동태 파악.”

세 형제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오늘 아침 계연석 행단의 고수 세 명이 보이지 않는다고 연락이 왔구나.”

내가 무림학관 정시에 관한 모든 정보를 알고 있으면서도 하오문의 ‘식객’의 자격을 원했던 이유는, 다름 아닌 그 안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해도 이렇게 빨리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돈이 다 떨어진…….”

말을 잇던 금표가 이상하다는 듯 전방을 바라봤다.

관도의 끝에서 세 남자가 길을 막고 서 있었다.

기이한 낚시대를 어깨에 멘 사내가 앞으로 나왔다.

“왜 이리 늦게 움직이는 것이냐? 너희들 때문에 우리 의뢰주가 혼자 가버리지 않았느냐.”

그 옆으로 거대한 도끼를 든 사내와 소매를 길게 늘어뜨려 손을 가린 사내가 걸어 나왔다.

“……저자들이 여긴 왜…….”

분명 계연석과 함께 움직였어야 할 염라부 연추악, 무풍마간 한금탁, 삼수귀원 담철각이 길을 막고 서 있었다.

“아마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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