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75화 (75/357)

#75. <관문을 뛰어넘는 흑염룡(3)>

우선 화막채의 산적들에게 이야기한 신고식부터 처리하기 위해, 전서응을 통해 하오문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틀 뒤, 내가 주문한 대로 수십 대의 나무통을 실은 마차가 마을에 들어섰고, 그 행단을 이끈 사람을 보고 나는 놀람을 금치 못했다.

“원래 악양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끌끌 웃음을 흘리는 이는 악양의 흑점주이자 하오문주의 11번째 제자인 양군백이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덕분에 간만에 소운님을 뵈니 반갑기 그지없습니다.”

살갑기 그지없는 양군백의 태도. 악양에서와 달라진 내 직위가 이제는 하오문의 ‘식객’임이라는 사실을 포함해도 과한 부분이 있어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어찌 보면 나 때문에 하오문의 문주 자리가 날아간 건데. 그걸 알려나?’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양군백은 여전히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었다.

“부탁드린 건 가져오셨습니까?”

양군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안내로 간 마차의 한구석에는 4개의 상자가 나란히 놓여있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상자를 열자 금전 오십 개가 들어있었다.

“통상 상단이나 표국의 신고식에는 금전 이십 냥 정도 쓰입니다만, 이렇게 많이 준비하신 이유가 있으십니까?”

세 번째와 네 번째의 상자를 열자, 금원보가 스무 개씩 들어있었다.

상자 하나당 금전 천 냥의 돈이 들어있는 것이었다.

“천목산에 마을 주민들이 끌려가 있다고 하더군요.”

“아…… 설마…….”

내 의도를 알아챈 그의 얼굴에 수심이 깊어졌다.

“……소운님께서 작전이 다 있으시겠지만, 걱정하지 않을 수 없군요.”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다.

“천목산에서 새로이 채주 자리에 오른 금면불도와 독안혈부, 이 두 사람은 포악하고 욕심이 많은 이들입니다. 아마 인질을 구해내 오셔도 며칠 지나지 않아 다시 패악질을 부릴 겁니다.”

“계속 말씀해 주세요.”

“더구나 쌍막채는 다른 녹림칠십이채보다 두 배는 커다란 규모를 갖추고 있고, 그 인원 또한 천여 명에 다다릅니다. 지금이라도 다른 산채를 찾아보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그는 마치 전쟁터에 끌려가는 제 동생을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제가 이미 의뢰를 받아버렸습니다.”

“의뢰요?”

“네. 허 촌장님의 손자가 의뢰를 하더군요.”

“의뢰라면 금액을 이미 받으셨다는 말입니까? 대체 얼마기에.”

“은전 한 냥입니다.”

“네?”

양군백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복잡한 심경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게 당부하신 일과도 연관이 되어있는 것이겠죠?”

“네.”

“……부디 다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그의 걱정에 감동하며 품 안에 넣어둔 금전 오천 냥짜리 전표를 꺼내었다.

금전과 술, 사람을 쓰는 비용 모두가 포함된 금액이었다.

“…….”

양군백은 잠시 전표를 보다 고개를 저으며 전표를 밀어냈다.

“혹시 적으십니까?”

“아닙니다. 충분한 금액이 맞습니다.”

“한데 왜?”

“이번 일은 제가 소운님께 드리는 선물로 하고 싶어서 말입니다.”

“네?”

아무리 하오문의 식객이 된다 한들, 주고받는 거래에 철저한 것이 하오문이다.

어찌하여 그는 돈을 받지 않겠다 하는 건가?

“해령 사저는 어렸을 때부터 제 모친처럼 저를 돌봐주신 분입니다.”

“아.”

“그런 사저께 악재가 겹겹이 덮쳤을 때는 심경이 말로 다 할 수 없었지요.”

양군백은 소매 속에 숨겨둔 손을 꺼내어 정중하게 포권을 쥐었다.

“사저를 살려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양군백의 모습은 악양에서 봤을 때와 달리, 속이 다 보이는 진실한 모습이었다.

#

“금표 형, 대체 대사형은 무슨 생각인 걸까?”

“글쎄, 그보다 너 제대로 힘 안 주냐?”

“애당초 이런 일은 술을 가져온 사람한테 시키면 되잖아.”

금표, 은호, 동룡은 사력을 다해 커다란 통이 실린 수레를 밀고 있었다.

“끄앙, 대사형이 뭔가 생각이 있을 거라고 난 생각해.”

“동룡이 넌 대사형이 팥으로 된장을 쑨다고 해도 믿을 거잖아.”

“그거 맞는 말 아니야?”

“망할, 둘 다 제대로 힘 줘라 진짜, 나도 놓아버리기 전에.”

“제길! 대사형이란 인간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이깟 기름들로…….”

은호가 내 옆에서 그렇게 투덜거리고 있었다.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지?”

“어? 대사형? 언제 오셨어요?”

“흥.”

나는 슬쩍 지풍을 날려 바퀴의 걸쇠 하나를 부러뜨렸다.

툭.

“어어!”

“무, 물러나!”

“피해!!”

바퀴가 빠지며 와지끈 수레가 부서지고, 동시에 수레 위에 실려있던 통들이 데굴데굴 굴러 내려가 부서지며 통 안 가득했던 액체를 사방에 흘렸다.

천만다행으로 금·은·동 형제가 끌던 수레가 맨 뒤에 있던 터라 부상자는 없었다.

“쯔쯧, 녀석들 그거 하나 제대로 못 끄는 것이냐?”

“행공을 안 썼으면 얼마든지 옮길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럼 수련의 의미가 없지 않냐?”

그렇게 사제들과 투덕거리고 있을 때 방두칠이 다가왔다.

“진짜 이걸로 인질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방두칠의 부하들은 표사들과 함께 이미 수레를 천목산 위쪽으로 옮기고 있었다.

장장 서른 개나 되는 수레가 단 하나의 길로 올라가는 장관이 펼쳐지고 있었다.

“정작 쌍막채를 토벌하지 않으면 이런 짓들은 다 무의미해질 텐데.”

“어쨌든 인질은 없는 편이 좋지 않습니까?”

“…….”

그렇게 술을 가득 실은 행단이 천목산에 난 길의 끝에 다다랐을 때. 산적들이 길을 막고 나타났다.

“멈춰라!”

바로 며칠 전 마을을 습격했던 산적들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시간 약속을 안 지키는 놈이군.”

미리 사람을 보내어 신고식을 치르겠다고 말한 덕에, 산적은 우리가 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보다시피 전달할 물건들이 많아 좀 늦었습니다.”

산적은 수레에 가득 쌓인 고기와 술통을 보며 꽤나 만족스런 표정이었다.

“우리야 상관없지만 쌍막채의 채주님들은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분들을 위한 선물은 따로 준비해 두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금부터 물건은 우리가 옮기겠다.”

“네.”

산적의 말과 함께 수풀에서 수백의 인영들이 갑작스레 튀어나왔다.

“와아아아!”

우레와 같은 함성으로 나타난 이들은, 마치 산적질을 하듯 전광석화처럼 수레에 실린 물건들을 들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깐.”

난 내 앞에 놓인 상자에 손을 대려 하는 산적의 손을 흑룡검으로 막아섰다.

“뭐야!”

“이건 내가 직접 채주님께 전달할 물건입니다.”

“그딴 개소리는!”

탁.

검집으로 그의 손을 쳐내자, 산적이 손을 부여잡고 금방이라도 도를 꺼내 들 기세를 보였다.

“그만해라. 채주님의 물건에 함부로 손대지 마라.”

나와 이야기를 나눴던 이가 말하자, 도를 뽑으려던 산적이 이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따라와라.”

#

천목산을 이루는 거대한 두 봉우리 사이에 있는 구릉.

쌍막채는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이 구릉에 모여 잔치를 벌이곤 했다.

“와아아아아!”

“와아아아아!”

천여 명의 인원이 구릉 안에서 소리를 지르자 대기가 쩌렁하게 울렸다.

금·은·동 형제와 방두칠 부하들은 물론이고, 천상천하유아독존으로 살아왔던 방두칠조차 얼굴이 살짝 사색이 될 정도로 압도적인 인원이었다.

“사형, 이거 정말 괜찮은 겁니까?”

금표는 불안함을 숨기지 못했다.

비록 복장이나 병장기가 통일되지 않았지만, 저들 하나하나가 모두 무공을 익힌 고수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미 쌍막채는 백팔봉의 문파들과 비교해 봐도 중간 수준은 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만!”

쩌렁한 사자후가 구릉을 가로지르자, 환호성을 지르던 산적들이 동작을 멈추고 가장 상석에 앉은 두 사람을 바라봤다.

“태을문의 진소운이라고?”

호랑이 가죽 위에 커다란 의자가 놓여있었고, 그 의자 옆으로 손바닥 두 개 넓이는 될 법한 거대한 도가 기대어져 있다. 금면불도 송고악이었다.

“무림말학 진소운 선배님들께 인사드립니다.”

정확하게는 흑도 나부랭이들에게 선배님 따위 칭호를 쓴다는 건 말이 안 되지만, 나는 악인에게도 예를 보이는 협객이니까.

“쿠쿡. 흑염룡이라면야 선배님이란 칭호가 그리 이상하지도 않지.”

그 옆에 곰 가죽 위에 앉은 애꾸눈의 남자가 바로 금목채 채주 독안혈부였다.

“그래, 흑염룡 후배께서 산적 나부랭이들이 지내는 곳엔 어쩐 일이신가? 거기다 쌍막채 모두를 한자리에 부르고?”

“혹시, 무림정시 시험을 치르기 위해 우리를 부른 것인가?”

“크하하하하.”

“크하하하하.”

독안혈부의 말에 구릉이 쩌렁쩌렁하게 울린다.

무슨 일 때문에 모이라 했는지 다 알면서도 저리 시치미를 떼고 있는 건 몸값을 더 올려보려는 수작.

“선배님들도 잘 아시다시피 태을문이 어디 무림학관 정시가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당초 말씀드린 대로 신고식을 치르려 합니다.”

“흐음.”

“이번에 저희 태을문에서 커다란 상단을 하나 인수했는데, 앞으로 항주와 소주에 오갈 일이 많을 거 같아서 말입니다. 그래서 소소하게나마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금표와 은호가 작은 상자를 각기 하나씩 들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금면불도와 독안혈부는 일반적인 신고식에서 쓰이는 금액의 두 배가 들어있는 상자를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후배님께서 신고식에 술과 고기를 가져와 정성을 보인 것은 고마우나, 겨우 이런 일 때문에 우릴 한자리에 모은 것은 상당히 기분을 상하게 하는군.”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애당초 내가 화막채와 금막채의 산적들 모두를 한곳에 모아달라고 했을 때, 상대방의 반응도 이와 마찬가지였으니까.

“사실 진짜 제안 드리고 싶은 것은 따로 있었습니다.”

금표와 은호가 다시 커다란 상자를 연다.

각기 금원보 스무 개가 든 상자들이, 구릉에 비친 햇살을 받으며 광채를 사방으로 뻗어낸다.

사방에서 재잘거리던 천여 명의 산적들도 그 순간만큼은 벙어리가 된 듯 군침을 흘리며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이 인근의 마을을 돌던 중 마을 사람들이 이곳에서 노동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쿵.

금면불도가 발을 구르자 그 여파가 은은하게 내 쪽까지 전해져 왔다.

“그래서?”

“저희 사문엔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라’라는 사훈이 있기에 차마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모쪼록 괜찮으시다면 이곳에 와있는 사람들을 데려갈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내가 포권지례를 올렸지만, 상대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쿠쿠. 재미난 놈이구나.”

독안혈부가 자신의 붉은 도끼를 집어 들고 날을 매만졌다.

“감히 쌍막채를 상대로 거래를 제안하다니.”

“세상 대부분은 모두 거래가 되지 않겠습니까.”

“허나, 상대의 자존심을 건드는 것은 거래가 되지 않지. 넌 그 대가로 이곳에서 목을 내놓아야 할 수도 있음이다.”

“예로부터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잡는 것은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라 했습니다.”

“뭣이!”

독안혈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구릉의 오른편에 앉은 산적들도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나 병장기들을 꺼내어 들었다.

금표·은호·동룡과 방두칠의 부하들도 그 기세에 깜짝 놀라 저마다 병장기를 꺼내 들려 했다.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태을문은 변변찮은 무공 하나 없이 남궁세가의 창궁상단을 인수했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커질지 예상할 수 없지요. 이런 좋은 거래처를 놓치고 한순간의 탐욕에 시선을 빼앗기는 것은 바보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하하, 네놈은 목숨이 세 개라도 되느냐?”

“쌍막채의 채주나 되시는 분들께서 어리석은 선택을 하시지 않으리란 확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맹랑한 놈이구나.”

독안혈부가 도끼를 휘휘 돌리며 말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상자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아무리 금막채 채주라 한들, 금전 천 냥 앞에서 쉬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는 노릇.

“네 말대로 그 돈과 함께 사람들은 풀어줄 수 있다. 허나, 그들이 다시 이곳에 오지 않는다는 보장은 할 수 없다.”

돈은 돈대로 받고, 풀려난 사람들은 다시 잡아 오겠다는 이야기였다.

‘누가 도적놈들 아니랄까 봐.’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차후의 일은 제가 신경 쓸 바가 아닙니다.”

“뭐?”

“응?”

내 말에 우리 일행들도, 독알혈부와 금면불도도 토끼 눈을 뜨고 바라봤다.

“저희는 선을 행할 뿐, 다시금 재앙이 닥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꿀 먹은 벙어리처럼 멍하니 있던 독안혈부가 앙천광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하하하.”

“크하하하하하!”

그러자 동시에 오른쪽에서 병장기를 꺼내 들었던 산적들이 독안혈부 그림자라도 되는 양 동시에 같이 웃음을 터트린다.

“재미난 놈이구나, 백도 거죽을 쓴 흑도 신성이 나타났다더니 과연 소문대로구나.”

아냐, 감히 누구랑 누굴 비교해.

“좋다. 데려가라. 단!”

잠시 뜸을 들이는 독안혈부.

“잔치를 위한 음식은 만들고 데려가라!”

“와아아아아!”

잔치란 말에 술 냄새를 맡은 산적들이 사방에서 소리를 내질렀다.

-이것으로 다 되었다고 생각하느냐?

그때, 쩌렁한 전음이 고막을 때리는 바람에 깜짝 놀라 귀를 막을 뻔했다.

고개를 돌리니 방두칠이 입술을 달싹이고 있었다.

무식한 내공만큼이나 전음도 조절이 되지 않고 있었다.

-일단 구해내지 않았습니까?

-덕분에 기습할 기회를 잃었다.

-기습하실 생각이었습니까? 천 명을 상대로?

천강무극체의 특성 중 하나가 무식한 머리인가? 어째 머리가 몸의 반도 못 따라오누.

-…….

-잠자코 보기나 하십쇼. 일은 다 준비되어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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