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76화 (76/357)

#76. <관문을 뛰어넘는 흑염룡(4)>

잔치를 시작하자, 쌍막채에 끌려갔던 마을 사람들이 모두 동원되었다.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끌려온 이들은 모두 피골이 상접해 있고, 몸에 상처와 멍이 없는 자가 없었다.

우리 일행들은 쌍막채의 산적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것도 잊은 채, 그 모습을 보며 이를 갈았다.

“크흠.”

“커흠.”

그러던 와중 방두칠의 부하들 중에 얼굴이 사색이 되는 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살기에 노출되어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린 것이었다.

그 근원은 바로 다름 아닌 동룡.

아직 홍안도 벗지 못한 아이가 흘리는 살기라곤 믿을 수 없는 눈치였다.

나는 동룡에게 다가가 어깨를 짚었다.

“괜찮다. 우리가 구해줄 것이니.”

“……아, 네. 그럼요. 믿습니다. 대사형.”

동룡은 자신이 진득한 살기를 뿜어냈다는 것도 잘 모르고 있는 듯했다.

“…….”

동룡의 천살성을 알고 있는 금표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괜찮다. 녀석의 인성이 바르고, 마음이 여리니 살성에 인지를 빼앗기지만 않으면 문제가 없을 거다. 차후에 태을진경의 성취가 높아지면 살성에 취하는 일도 사라질 것이다.

며칠 전 밤에 이야기 해주었던 것을 다시금 인지시켜 주자, 불안한 눈빛 속에서도 고개를 끄덕이는 금표였다.

*

물경 오백에 달하는 인원들이 한 번에 달려들어 음식을 준비하자, 잔치 준비는 금방 끝났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을 앞에 둔 산적들은, 굶주린 마을 사람들은 신경도 쓰지 않고 저들끼리 먹고 마시기에 여념이 없었다.

“약속대로 데려가도 좋다.”

독안혈부의 말에 한곳에 모여있던 마을 사람들의 표정이 멍하게 변했다.

“그럼 앞으로도 좋은 거래를 지속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포권을 올리자, 더 이상 관심 없다는 듯 음식을 먹고 떠들기에 바빠진 독안혈부와 금면불도.

“여러분들은 저희와 함께 마을로 돌아가시면 됩니다.”

“……네? 그게 대체 무슨…….”

내가 말했음에도 마을 사람들은 쉽사리 발을 떼지 않은 채, 독안혈부와 금면불도의 눈치를 보았다.

“이미 이야기는 다 끝났습니다. 저희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시죠.”

“…….”

오백에 달하는 인원들은 내 말에 격하게 눈이 흔들리면서도 시종일관 독안혈부와 금면불도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한참이나 떠들던 두 사람이 마을 사람들을 보고 피식 비웃음을 흘리며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그제야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자리에 주저앉는 사람들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흐흑, 드디어 돌아가는 것입니까?”

“감사합니다. 무사님! 감사합니다.”

“이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우리를 향해 자리에 주저앉아 눈물을 뚝뚝 흘리는 마을 사람들.

그리고 그 뒤로 그런 마을 사람들을 보고 비웃고 있는 금면불도와 독안혈부가 보였다.

잔치를 즐기고 있던 산적들도 뭔가 음흉한 속내가 있는 듯 비웃음을 짓는 이들이 많았다.

“감사 인사는 집에 돌아간 다음에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더 이상 이곳에 있기 싫지 않으십니까?”

내 말에 힘없이 주저앉았던 사람들이 일제히 한시도 이곳에 머물고 싶지 않다는 듯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내려온 나는, 수레를 모아둔 곳에서 방두칠에게 말했다.

“방 대협께선 저쪽 길목으로 내려가십시오. 전 왔던 길로 돌아가겠습니다.”

“…….”

방두칠은 대답도 않은 채 인상만 찌푸리고 있었다.

결국 옆에서 지켜보던 백소령이 나섰다.

“진 공자 그게 무슨 말이지요?”

“천목산의 길은 이것 하나뿐입니다. 산적들이 산에서 도망치기 위해선 이 길을 사용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이쪽 편은 제가 맡을 테니. 방 대협 일행께선 반대편을 맡아주십시오.”

“도망친다고요?”

백소령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천목산 전체에 불을 지를 겁니다.”

불을 지른다는 말에 백소령과 방두칠이 입을 쩍 벌렸다.

“……그거라면……. 그렇다 해도 이렇게 급하게 할 이유가 있을까요? 최소한 마을 사람들이라도 대피시켜 놓은 후에…….”

“쌍막채의 채주들과 주요 인사들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네?”

“그들은 잔치가 진행되는 동안 술을 한잔도 마시지 않았습니다. 아마 시간을 오래 끌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더불어 저희가 공격할 시간도 오늘을 넘겨선 안 됩니다.”

“……응?”

“아무튼 기다리고 계시면 산적들은 길을 따라 내려갈 겁니다. 아무리 많은 인원이라도, 좁은 길에서라면 방 대협께서 상대할 수 있겠지요?”

방두칠을 보며 말하자, 팔짱 낀 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산적들은 산을 잘 탄다. 그래서 산적질을 하는 것이지.”

“제아무리 산을 잘 타는 산적들도 화염산(우마왕이 살던 불이 꺼지지 않는 산)은 타 넘지 못합니다.”

“…….”

#

고기를 뜯고 있던 금면불도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뭐?”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들이 천목산 구석구석에 기름을 뿌리고 있었습니다.”

“기름을? 정체는 무엇이냐?”

“아쉽게도 발이 빠른 놈들이라.”

“이런 빌어먹을!”

금면불도가 자신이 먹던 고기를 냅다 던져 버렸다.

“그따위 보고를 할 거면 뭐 하러 네놈을 세워두느냐! 가서 개 한 마리를 풀어놓지.”

“죄송합니다.”

사태를 관망하던 독안혈부가 끌끌 웃음을 흘렸다.

“송형. 뻔한 거 아니겠소.”

“뻔하다고? 뭔가 의심되는 게 있나?”

“태을문의 진소운 녀석이 한 짓 아니겠소.”

“아까 그놈이?”

금면불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놈은 분명 쌍막채와 적대하고 싶지 않아 했었다.

그런데 그놈이 당최 무슨 연유로 기름을 뿌린다는 말인가?

“처음 녀석들을 인솔했던 놈의 보고를 들었는데, 녀석이 올라오는 중에 술통을 엎지른 척 길목 곳곳에 기름을 뿌리며 올라왔다더군.”

“뭐라? 설마.”

“불을 지르려는 생각 아니겠소.”

“이런 배은망덕한 놈을 보았나. 아무리 백도 놈들을 믿을 수 없다지만…… 방금 전 약속을 해놓고 뒤통수를 쳐?”

금면불도의 반응에 독안혈부가 익살스런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차피 우리도 모인 김에 빨리 끝내려 했던 참 아니오. 오히려 명분을 주었으니 더 좋아해야겠지.”

“클클, 멍청한 놈. 그냥 돈이나 다 내놓고 가버렸으면 되었을 것을.”

애초에 마을에서 이끌고 온 이들을 놓아줄 생각은 없었다.

무려 천에 달하는 무식한 산적놈들. 그놈들이 밥을 짓고 옷을 깁고 생활을 보조한다니. 개가 웃을 일이다.

애당초 천목산의 쌍막채들은 마을 사람들 없이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없는 구조였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돈을 줄 수도 없는 노릇.

“간만에 가족들과 해후나 좀 풀도록 놔두려 했건만, 제 놈들이 스스로 발목을 잡는군.”

“클클클. 오히려 우리로선 좋지 않소. 귀찮게 하루 이틀 기다리지 않아도 되고.”

“다들! 준비하라!”

금면불도의 쩌렁한 외침이 구릉 전체에 퍼졌다.

고기를 먹고 술 대신 물을 마시던 산적들이 일제히 병장기를 꺼내어 들었다.

#

허 촌장은 눈앞에 서 있는 인물들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상구야!”

그렇게 하지 말라는 말을 무시하고 뭔가를 준비하더니, 결국엔 쌍막채에 끌려갔던 사람들을 모두 데려온 것이다.

쌍막채가 다시 해코지할 것이라는 우려도 잠시 내려놓고, 1년 만에 보는 아들 내외에 허 촌장은 눈물을 쏟아내었다.

*

마을로 내려온 인질들은 저마다 자신의 집 방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마을 초입에서 소란이 커지자 소리를 듣고 나온 사람들이 쌍막채에서 내려온 인질들을 보고 울음을 터트리며 달려갔다.

이곳저곳에서 서로 부둥켜안으며 눈물과 콧물을 쏟았다.

내 의뢰인의 조부인 허 촌장도 돌아온 자식과 며느리를 부둥켜안고 폭포처럼 눈물을 흘렸다.

“킁. 흐윽. 흑.”

옆에 있던 동룡이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대사형, 정말 존경합니다. 흑.”

금표와 은호는 동룡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근데 우리는 지금부터다. 긴장을 놓지 마라.”

“아까 불을 지른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걸로 잡을 수 있겠습니까?”

“그거라면…….”

금·은·동 세 형제에게 답을 하려 할 때, 허 촌장이 다가왔다.

“고맙네. 진정 고마워. 그리고 미안하네. 관군도 무림맹도 우릴 외면했기에, 우리조차도 아무도 믿을 수가 없었어.”

내 손을 부여잡은 허 촌장의 얼굴엔 죄책감이 가득했다.

나는 손을 빼내어 다시금 그의 손을 잡았다.

“그게 어디 촌장님 탓입니까. 약자를 위해 나서지 않은 사람들 탓이지요.”

“…….”

허 촌장은 자글자글한 주름들을 마구 구기며 또 한 번 울음을 터트리려 했다.

“지금은 울 때가 아닙니다. 어르신.”

“그렇지…… 지금은 웃을 때지. 잔치! 잔치를 준비하겠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잔치를 할 때도 아니고요.”

“응?”

“지금 사람들을 이끌고 자리를 피해주시겠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인가?”

“아마 곧 쌍막채가 들이닥칠 겁니다.”

“응?”

쌍막채라는 말에 허 촌장과 마을사람들이 소스라치게 놀란다.

“저희가 금액을 지급하긴 했지만, 애당초 여러분들을 놓아줄 생각 따윈 없었겠지요.”

“그, 그럼 어찌한단 말인가. 우린 평생 이곳에서 살아왔네. 다른 곳에 갈 수도 없음이야.”

“그러니 잠시만 마을을 비우고 숨어계십시오.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

허 촌장과 마을 사람들의 눈엔 불신이 가득했다.

그럴 법도 하지, 가뜩이나 방두칠과 그의 일행들이 천목산 반대편으로 가면서, 우리는 달랑 4명만 남았으니까. 나라도 안 믿을 소리다.

“이거 받으십시오.”

나는 품 안에서 양군백에게 주려 했던 금전 오천 냥짜리 전표를 꺼내었다.

“……이, 이게 진짜인가?”

난생처음 금전 오천 냥짜리 전표를 보는 허 촌장은 얼이 빠진 얼굴이었다.

“일단 항주로 가시어서 사태를 지켜보십시오. 저희가 지면, 이 돈으로 다른 터전을 잡으시고, 저희가 이기면 이 돈으로 필요한 물품들을 사서 돌아오세요. 마을이 다시금 살아나게 되면 필요한 물건들이 많을 거 아닙니까.”

“…….”

“…….”

내 말을 함께 듣던 마을 사람들도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고 나를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 눈들.

결국 허 촌장이 입을 뗐다.

“왜…… 왜, 이렇게까지 해주는 건가? 우린…… 자네를 본 적도 없는데…….”

평생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어도 기댈 언덕조차 없던 이들은, 자신에게 호의가 전해지면 의심부터 하게 되는 법이었다.

나 또한 그랬기에 잘 알 수 있었다. 이럴 땐 많은 말이 필요 없다.

“전 다르니까요.”

“……그게 무슨…….”

“전, 무림맹과도, 다른 무사들과도 다르니까요. 단지 그뿐입니다.”

“…….”

나와 허 촌장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양군백이 하오문도 오십과 함께 달려왔다.

“소운님…….”

옷가지에 나뭇잎과 흙 자국이 가득한 이들.

내가 부탁한 일을 처리하러 갔던 것이다.

“죄송합니다. 쌍막채에게 들켜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군요.”

난 그들에게 천목산 곳곳에 기름을 뿌려 달라 부탁했었다.

하지만 워낙 산 자체가 크고, 위쪽에선 아래쪽이 다 내려다보이는 구조다 보니 일이 여의찮게 흘러간 모양.

“일단 도망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 쌍막채가 병장기를 들고 산에서 내려오려 합니다.”

양군백의 말에 내가 허 촌장을 보며 말했다.

“들으셨죠? 저희가 자유롭게 싸울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십시오.”

“아, 알겠네.”

쌍막채가 내려온다는 소리에 마을 사람들은 가산을 챙길 새도 없이 우르르 달리기 시작했다.

“소운님, 소운님도 일단 피하시죠. 화공을 노리신 건 알지만, 애초에 천목산 전체에 불을 내기는 여의찮은 구조입니다.”

천목산은 쌍막채의 행패로 사람들이 나무를 하지 못하여 수풀림이 빽빽하긴 했지만, 계곡과 샘이 많다.

그 점은 나도 잘 알고 있는바.

나는 대답 대신 하늘을 살폈다.

구름의 이동이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불화살을 준비해 주시겠습니까?”

“……진정하시려는 생각이십니까?”

애당초 기름은 작은 불씨에 불과하다.

“네. 오늘 쌍막채를 모두 불구덩이 속에 처넣을 생각입니다.”

“…….”

“불만 지펴 주신 다음,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돌아갈 땐 함께 돌아가시죠.”

내 고집에 결국 양군백이 하오문도들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자, 다들 불화살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우와아아아아아아!”

산 정상에서 길을 가득 메운 이들이 병장기를 들고 내려오는 것이 확연히 보였다.

“발사!”

양군백의 외침과 함께 불화살이 천목산 곳곳에 떨어지고 작은 불씨들을 만들기 시작한다.

“사형……, 저 불로 천목산을 태울 생각이십니까?”

“이 일대는 재작년부터 유독 가뭄이 심했지, 특히 올해는 유달리 더.”

“네?”

“그리고 가을에 가장 조심해야 할 건 산불이란다.”

나는 머릿속 장서고에서 절강성 항주지부의 보고서를 꺼내었다.

빌어먹게도 방두칠이 인질을 구했다는 이야기를 빼먹어 나를 애먹였던 보고서.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보고서에 작성하는 자의 주관적 견해가 들어가는 건 원래 있는 일이니까.

다만, 그럼에도 주관적 견해가 쓰일 수 없는 부분들이 있었다.

[무림맹 항주 지부 일간 보고서. 경자월 갑인일.]

[날씨 - 갑자기 격한 서북풍이 불어 절강성 곳곳에 자연 산불이 났다.]

휘이잉.

심상치 않은 바람이 일대를 휩쓸었다. 널찍한 무복을 입은 이들은 바람에 휩쓸려 몇 발자국 겨우 움직일 정도의 강풍.

“기름은 그저 불씨에 불과하다.”

불화살이 닿은 숲속에서 검은 연기들이 모락모락 피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작은 불씨도 강한 바람을 만나면 큰 산 하나 정도는 너끈히 태울 수 있지.”

불길이 번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검은 연기만 미약하게 피어나던 숲은 일순간에 불바다로 변한다.

생각보다 빠르게 번지는 불길을 보며 양군백이 놀란 눈으로 나를 봤다.

“소운님…… 설마…….”

펑!

퍼퍼펑!

더불어 양군백이 천목산 곳곳에 숨겨둔 기름통에 불이 붙으면서, 산불에 더욱 박차를 가한다.

길목을 따라 내려오던 산적들이 갑자기 피어나는 매캐한 연기에 주춤거리기 시작한다.

“멍청한 놈들 뭘 망설여! 뚫고 나가!”

거듭되는 호통에 산적 하나둘이 연기를 뚫고 나간다.

“어억!”

“불길이 벌써?”

“이, 이건 못 지나갑니다!”

하지만 연기를 지나자 거대한 불길이 앞을 떡하니 막아선다.

화르르륵.

“대사형…… 저긴…….”

자신들이 옮기던 수레에서 떨어진 통들이 박살 난 곳을 알아본 은호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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