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지옥 정시 제 ‘二’관문(2)>
녀석들을 두고 가면서 가장 걱정했던 건 동룡이었다.
혹여라도 자신의 재능을 사용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버릴까 봐.
제 형들을 위해 그래 버릴까 봐 그게 가장 걱정이었다.
다행이다.
“대사…….”
얼마나 기특하게 생각하는지도 모르는지. 동룡이 멍하니 입을 벌리고 내 편을 바라본다.
“잘했다.”
나는 천하독행신을 펼쳐 전력으로 감철진에게 돌격했다.
그는 미친 듯이 돌격하는 나를 피해 궁시탄영의 수법으로 피한다.
그리고 난 곧장 종서강을 향해 달려갔다.
“빌어먹을……!”
내가 자신을 공격할 것이라 생각했는지 감철진의 입에서 욕지기가 튀어나오지만, 나는 이미 종서강에게 가까이 붙은 마당이었다.
쾅!
“크윽.”
종서강이 검을 맞부딪치자 삼 장이나 뒤로 물러난다.
“뭔 놈의 내공이…….”
예상치 못한 파괴력에 대경하는 것도 잠시, 종서강이 재빨리 자세를 잡는다.
나는 오직 종서강을 계속 몰아붙이며 일행과 떨어지게 만든다.
종서강의 보호를 최우선으로 해야 하는 황검문의 무사들이 길게 줄을 이으며 따라붙는다.
천라지망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다.
“……정말이지 운이 너무 좋군.”
내부가 진탕되었는지 입가에 피를 흘린 종서강이 애써 신색을 회복하며 말한다.
“그렇게 운으로 모두 치환해야 속이 편한가 보지?”
“저 마물이 이곳에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는 말인가?”
“애당초 내가 이따위 허술한 천라지망 따위 파훼하지 못할 거라 생각한 게 패착이다.”
“…….”
감철진을 비롯한 황검문의 무사 절반이 빠져나오면서 천라지망의 살기가 역류한다.
여태껏 살기를 내뿜던 이들이 고여있는 저수지의 물을 정면으로 받듯 살기를 뒤집어쓴 채로 두 눈을 붉게 물들였다.
채채채채채챙.
쌍천검결의 허와 실은 종서강의 눈을 어지럽게 하고, 감철진을 비롯한 무사들에 의지하고자 하는 마음이 종서강을 집중하지 못하게 한다.
단숨에 앞섬이 잘리고, 상투가 잘리고 왼팔에 긴 상흔이 새겨진다.
“크윽.”
“도련님!”
챙!
그리고 그제가 돼서야 감철진의 검에 의해 내 검이 멈춰 선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
대답하지 않는다.
넝마가 된 종서강은 원망 가득한 눈빛으로 감철진과 황검문의 무사들을 노려본다.
왜 자신이 이런 꼴을 당해야 하냐는 눈빛.
“……죄송합니다.”
감철진이 고개를 숙이자, 그제야 내게 시선을 돌리는 종서강.
그사이 썩은 표정으로 변한 황검문의 무사들이 종서강을 보호하기 위해 검진을 짜기 시작했다.
“문도들이 불쌍하군. 목숨을 구해준 은혜도 알지 못하는 도련님이라니.”
빠득.
종서강의 입에서 이가는 소리가 울렸다.
“아직도 여유를 부리고 있는가? 나라면 그 잘난 신법으로 사제들을 데리고 도망쳤을 텐데 말이야.”
종서강의 말대로 황검문의 빈자리를 다른 문파들이 채우기 시작했다.
급하게 보수된 천라지망은 이제 태을문의 문도뿐만 아니라 금린청선사마저도 노리고 있었다.
“후환을 남겨두면 귀찮을 것 같아서 말이지.”
“푸핫. 아직도 허세라니.”
종서강은 피가 줄줄 흐르는 팔을 부여잡고 웃었다.
“허세라. 나에 대해서 잘 조사했나 보지?”
“네놈의 사문이 새로운 무공을 가졌다는 것을 안다. 허나 일개 환검으로 이들을 속이진 못할 것이다.”
절정에 이른 무인들은 허와 실에 대한 눈을 가진다.
그 아무리 뛰어난 환검과 변검도 절정의 수준 앞에선 그저 한낱 허상에 불과할 뿐.
“어째서? 이곳에 절정 무사라도 섞여 있나?”
“…….”
종서강은 꿀을 먹은 듯 입을 꾸욱 다물었다.
“하긴, 황검문의 비밀무사가 몰래 참전했다면 역대 시험을 모두 손쉽게 통과했다는 것도 이해가 되는군.”
“함부로 말하지 마라!”
종서강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왜 흥분하지. 스스로에게 당당하다면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지 않은가?”
“……뭣들 하나! 당장 저놈을 죽여라!”
“…….”
그나마도 존대를 하던 종서강의 말투가 반말로 바뀌었지만, 황검문의 무사들은 익숙한 듯 안색 하나 바뀌지 않고 검진을 이루어 달려들기 시작한다.
황혼일검진.
다수의 무사들이 한 개의 검처럼 움직인다는 다대일에 특화된 독특한 검진.
감철진을 필두로 황검문의 무사들은 마치 한 자루의 날카로운 검처럼 달려들기 시작한다.
“태을문엔 환검과 변검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
“우리가 우연으로 사선을 넘은 것이 아님은 이 검이 보여줄 것이다.”
[만해천지검결]
흑룡검에서 네 개의 환영이 떨쳐나온다.
흔한 환검이라 생각하던 감철진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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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아악!”
“커흑!”
“오, 온다!”
“천라지망을 유지해!”
사방에서 비명소리가 들린다.
지렁이 한 마리를 습격한 개미 떼처럼 천라지망을 구축한 칠백의 인원들이 금린청선사를 둘러싼 채 쉴 새 없이 공격한다.
금린청선사는 가장 가까이 있는 인간들부터 입안에 삼키고, 물어 죽이고, 몸으로 깔아뭉갠다.
더구나 가까이 다가가려 하면 입안에서 푸른 독액을 뿜어내는데, 처음 그 독액을 뒤집어쓴 무사는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성대가 녹아 죽어버렸다.
“거리를 벌려!”
“비검과 화살로 놈을 상대해라!”
비검과 화살은 인간에게 치명적인 암기에 속하지만, 금린청선사에게는 끄떡도 없었다.
단단하고 미끈한 금린청선사에 닿은 비검과 화살은 금린청선사가 피부에서 내뿜는 진액에 막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크억!”
“도, 도망쳐!”
“도망치지 마! 물러서는 자는 용서하지 않는다!”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다.
천라지망은 깨지면서 내부에 가득했던 살기가 사방으로 뻗친다.
동맹을 이뤄 천라지망을 펼쳤던 이들 중에 서로가 서로에게 검을 휘두르는 자들도 생겼다.
인세의 지옥이 이곳에 펼쳐졌다.
“허어…….”
그리고 금린청선사에 가장 가까이 위치해 있던 금표가 태연하게 탄식을 내뱉는다.
“금표형! 제대로 보법 밟아! 저 똥색 뱀이 사람 한입에 삼키는 거 못 봤어?”
“어차피 우리한테 관심 없는 것 같은데.”
천라지망을 이루는 무사들 중 그 누구도 분명 금린청선사 가장 가까이에 금은동 형제가 있었음에도, 그들이 공격받지 않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 없었다.
당장 눈앞에 금린청선사가 독액을 뿜고 거대한 동굴만 한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으니.
“뱀이 문제가 아니잖아. 우린 아직 천라지망 안에 있다고.”
“알았다고.”
잠자는 시간도 부족한 때에 진소운이 억지로 익히게 했던 보법.
‘그냥 불길한 이름의 보법이라 생각했는데.’
내공도 없는 상태였고, 워낙 비몽사몽간의 일이라 어떻게 익혔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나마 기억력 좋은 은호의 발을 죽어라 따라 하고 있을 뿐.
귀식행보라 불리는 이 보법은 자취를 감쪽같이 숨기게 해준다고 했다.
그럼 이걸로 도망치면 되는 거 아니냐 물었더니, 은신술을 따로 익히지 않아 눈에 띄면 결국 걸린다고 하여, 하등 쓸모없는 것 때문에 잠도 못 자게 한다고 속으로 사형을 욕했었다.
죄송합니다. 사형.
제가 멍청하고 제가 바보입니다.
대사형의 은혜는 얼마나 하늘과 같은가.
이 불안전한 귀식행보 덕분에 저 똥색 뱀은 우리를 보지 못하고, 강렬하게 살기를 내뿜는 사람들을 상대로 죽어라 몸을 굴리고 입을 벌리고 있었다.
“……동룡아 넌 괜찮아?”
“……응. 괜찮아.”
“너 이 자식 이거 함부로 빼지 말라고 했지!”
금표는 얼른 동룡의 목에 탕마사령주를 걸어주었다.
동룡이 무슨 마음으로 튀어 나갔는지는 알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동룡이 아니었으면 진짜 우리 셋 중 하나는 독수비검이 되거나 금은동 세 형제에서 두 형제로 바뀔 수도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막내가 위험한 짓을 했다는 점은 마음에 걸려 한마디를 하는 금표였다.
“응. 미안.”
“너 또 한 번 위험한 짓 하면 그땐 진짜 놓고 간다.”
“알았어! 놓고 간다는 소리 좀 그만해.”
“어쨌든 이대로만 있으면 될 거 같은데 안 그래?”
천라지망도 서서히 깨져간다.
목을 옥죄던 짙은 살기는 서서히 옅어지고, 우릴 죽이겠다고 사방에서 달려들던 적들은 똥색 뱀을 상대하느라 여념이 없다.
“…….”
하지만 어쩐지 은호에게서 시원한 답변이 들리지 않는다.
“야 어차피 저 사람들이 뿜는 살기 때문에 우리는…….”
“아니 저거 봐.”
은호가 가리키는 곳.
청색의 옷을 입은 거도를 패용한 사내들이 결국 천라지망을 해제하고 앞으로 나선다.
그리곤 일제히 날아올라 도기를 마구 쏟아낸다.
키에에에엑--!
인간들 사이에서 무쌍을 찍는 듯 보였던 금린청선사가 처음으로 비명을 지른다.
화살비에도 끄떡없던 비늘이 후드득 떨어지고, 그 안으로 드러난 속살에서 피가 줄줄 흐른다.
“상처가 생겼다. 집중공격해라!”
청도방의 무사들의 일점 공격에 더욱 발악하는 금린청선사.
무사들은 피해를 두려워 피하면서도 그 와중에 화살을 날리고 비검을 던진다.
키에에에엑!
“뛰어!”
“제길!”
은호의 신호와 함께 금은동 세 형제가 태을팔만신보를 밟아 튀어나간다.
“저기 태을문의 제자들이다!”
“저놈들부터 잡아!”
청도방이 집중적으로 금린청선사를 상대하자, 한층 여유가 생긴 다른 문파의 무사들이 세 형제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한다.
“역시 누구 하나는 독수비검의 진전을 이을 팔잔가?”
“금표 형! 제발 이런 상황에서 재수 없는 소리 좀 하지 마!”
“맞아! 큰형 맨날 재수 없는 소리만 해!”
“…….”
검진을 짜며 구박을 받은 금표는 가장 앞에 서며 적들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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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이럴 수가.”
종서강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 무슨!”
말도 안 된다.
감철진은 황검문에서 장로급의 실력을 가진 고수다.
그런 고수가 황혼일검진을 이루었는데도 그걸 파훼했다고?
진소운은 조사대로 환검과 쾌검을 번갈아 가며 상대를 압박하는 수법을 사용했다.
거기에 변과 중을 넣어 상대를 더욱 혼란에 빠트린다.
같은 수준의 무사라면 상대하기 극히 까다로운 상대임은 분명하다.
어디까지나 같은 수준이라면.
황혼일검진이 부서진 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달려온 감철진의 상태도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이…… 게 무슨……. 일개 환검쟁이가…….”
허와 실의 구분이 확연해지는 절정부턴 환검은 무용지물이 된다.
그래서 무림의 호사가들은 환검을 사용하는 무사를 낮춰 불러 환 겁쟁이라고 한다.
“그냥 환검이 아닙니다.”
감철진은 평소와 달리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뭐?”
“그냥 환검이 아닙니다. 환검처럼 보이는 진검입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도련님…… 일단 피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도망이라니!”
별 볼 일 없는 문파의 제자가 일관문패 여덟 개를 가지고 있다.
우연인지 의도인지 알 수 없지만, 영단을 가지고 있어 보이는 마물도 출현했다.
여기서 태을문의 제자가 두려워 도망쳤다간, 강호의 사람들의 시선은커녕 스스로에 대한 경멸감에 잠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
“황검문의 문도들은 모두 집결하라!”
종서강의 목소리가 쩌렁하게 울린다. 금린청선사를 상대하던 청도방도, 그와 함께 천라지망을 가까스로 유지하던 문파의 무사들도 의문 가득한 눈으로 종서강을 응시한다.
“어서 모이래두! 이놈을 잡아야 한다! 이놈이 일관문패를 가지고 있다!”
“…….”
하지만 섣불리 움직이는 황검문의 무사들은 없었다.
“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문도들의 행태에 종서강의 얼굴이 붉어진 찰나, 결국 감철진이 한숨을 쉬고 작게 내뱉었다.
“모두 모이라!”
그의 말과 함께 천라지망을 겨우 떠받들고 있던 황검문의 무사들이 일제히 감철진과 종서강의 주위로 내려앉았다.
“허…….”
다음 대를 이을 자신의 명령에는 꼼짝도 안 하던 이들이 감철진의 말 한마디에 벼락같이 움직이자, 어처구니없어하던 종서강은 이내 때가 아님을 깨닫고 화를 삭였다.
그러곤 득의양양한 웃음을 애써 지으며 진소운을 바라보았다.
“제법 한 수를 가지고 있군. 허나 지옥정시는 잔머리와 잔재주만으로 통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십에 달하는 황검문의 무사들이 앞에 섰건만, 진소운은 긴장한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무슨 소릴 하나 했더니만.”
“이제라도 일관문 패를 넘긴다면 없던 일로 하겠다.”
“하, 너희 문파의 문도 오십이 넘게 사상자가 생겼는데. 그냥 넘기겠다고? 너희 문파의 무사들이 이걸 그냥 넘어갈까?”
“…….”
진소운의 실력은 진짜다.
그럼에도 종서강은 자신이 있었다.
실제로 금린청선사는 청도방에 의해 서서히 잡혀가고 있었고, 아직 함께하는 무사들은 오백이 넘게 사방에 퍼져있었다.
제아무리 진소운이 뛰어난 실력을 가졌다 한들, 이곳에서 도망치거나 이겨낼 가능성은 없다.
“이곳에서 죽고자 하는 것이냐?”
“죽어? 우리가? 아까 내 이야기를 잘 듣지 못한 건가? 난 일부러 막간산에 들어온 거다.”
“그래, 덕분에 우린 이관문도 쉽게 넘기게 되었지.”
진소운이 이내 검갑에 검을 집어넣는다.
종서강이 반색하며 물었다.
“포기한 것이냐?”
“포기? 푸흣.”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 생각하는 것이냐?”
“그렇지 않다면 내가 왜 여기 왔겠어.”
쿵. 쿵. 쿵. 쿵.
갑자기 지축이 흔들린다.
끄르륵. 끄르르륵.
“끄억!”
“이건 또 뭐야!”
“제기랄!”
멀리서 비명이 들리기 시작한다.
일전을 준비하던 황검문의 무사들의 눈이 이제 토끼처럼 부릅떠진다.
“내가 준비한 게 저 뱀 하나일 거라 생각해?”
독각흑섬.
뱀을 잡아먹는다는 검은 두꺼비가 머리에 긴 뿔을 달고 사방에 독기를 뿌리며, 거대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폴짝폴짝 뛰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