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89화 (89/357)

#89. <사냥의 시간(3)>

“전투준비!”

채채채채채챙.

기마에 오른 백오십에 무사들은 번쩍거리는 검을 뽑아 금방이라도 적을 쳐부술 기세.

숫자는 상대가 훨씬 많았지만, 그들이 탄 말, 그들이 입고 있는 남궁세가와 철검문의 문양 등이 기세를 압도했다.

“다행히 늦지 않았네요.”

내 옆으로 다가온 성모란과 남궁선화.

난 아직도 그들의 등장에 놀람을 금치 못했다.

“소주에 있었던 겁니까?”

“그럴 리가요.”

성모란이 남궁선화를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삼 일 밤을 새워 안휘성에서 넘어온 거예요. 당최 진 공자는 왜 안휘성에 안 있고 절강성까지 간 거죠?”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말들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남궁선화는 그저 고개를 끄덕인다.

“일단 이야기는 조금 뒤에 하기로 해요.”

“…….”

남궁선화와 성모란이 허리를 곧추세우곤 송백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이에요. 송백.”

송백의 표정은 찡그리지도 웃지도 못하는 미묘한 것이었다.

“이런 곳에서 두 분을 뵐 줄 몰랐군요.”

남궁선화는 그런 송백을 보지도 않은 채 주위를 둘러본다.

“화양표국이 평소 무관 지원을 많이 한다더니 다 이러기 위함이었나 보네요?”

“……표국은 본래 우수한 표사를 얻기 위해 지원을 멈추지 않는 법이죠.”

“이곳의 그 누구도 무림학관 정시를 치르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데. 이건 제 착각일까요?”

“…….”

“지금 일관문 패나 이관문 패를 확보하신 분들 있나요?”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

송백이 얼른 말을 잇는다.

“아직 관문패를 얻지 못하였기에 시험을 치르고 있는 겁니다.”

“그런가요?”

“네. 그렇습니다.”

남궁선화는 빤히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계속할 생각인가요?”

“저는 저자에게 관문패를 빼앗겼습니다.”

송백의 말에 남궁선화와 성모란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 와중에?’ 같은 느낌이었다.

한숨을 내쉰 남궁선화가 말을 잇는다.

“……다른 이들도 진 공자의 관문패를 빼앗기 위해 왔던 것 아닌가요?”

“…….”

“지금부턴 우리 남궁세가와 철검문도 상대해야 할 거예요.”

송백이 나와 남궁선화, 성모란을 번갈아 본다.

“어째서 남궁세가가 태을문의 편을 드는 겁니까? 더구나 철검문은 태을문과 서로 앙숙의 관계 아니었습니까?”

“그건 송 공자가 상관할 일이 아니에요.”

“아무리 남궁세가라 할지라도 강호의 일에 함부로 끼어들 순 없습니다.”

“우리 남궁세가와 철검문이 태을문과 협력하는 관계라면요?”

“…….”

“끼어들 수 있는 권리가 생긴 거죠?”

“진정 이러실 생각입니까?”

송백의 눈이 날카로워진다.

조금에 남아있던 호의마저 모두 떨어져 나간 듯 건조한 눈빛.

“제아무리 남궁세가와 철검문이라 한들 소주에선 화양표국을 무시할 순 없습니다.”

송백이 고개를 들어 성벽 위를 바라본다.

남궁선화와 성모란의 시선도 그를 따른다.

그곳엔 당황한 표정이 역력한 현령의 모습이 보인다.

“……그렇지요. 소주에서 화양표국을 무시할 순 없겠지요. 헌데 강호 내에서 남궁세가를 무시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

“현령의 임기가 끝나 다른 곳으로 이동하게 된다면, 그곳엔 화양표국의 영향력보단 남궁세가의 힘이 뻗치지 않을까요?”

“!”

“!”

화양표국이 소주의 왕이라면 남궁세가는 강호 전체를 주름잡는 세력을 가지고 있다.

성벽 위 현령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그가 소주에서 뼈를 묻을 것이 아니라면 언젠가 임기를 채우고 다른 곳으로 발령을 받아야 할 테니까.

“무림학관 시험 중에 일어난 일로 훗날 복수를 하면, 이 또한 부정행위에 처합니다.”

“난 복수 하겠다는 말 같은 거 한 적 없어요.”

“…….”

송백이 입술을 주억거린다.

그의 시선은 성벽 위의 현령을 향해 왔다 갔다를 반복하고 있다.

태을문이라면 능히 관의 힘으로 찍어 누를 수 있으나, 남궁세가와 철검문은 고작 현령의 위치로 어찌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으니.

어느 정도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현령이 손을 흔든다.

그러자 궁수들이 하나, 둘 시위를 내려놓기 시작했다.

그러곤 현령은 모습을 감추고, 포괘들은 성문 입구에 줄 서 있던 자들을 빠르게 내보내기 시작했다.

“끝난 것 같군요.”

현령이 이 전투에 끼어들지 않겠다는 신호를 보낸 순간.

무게추는 다시금 이쪽으로 기울여졌다.

“어찌할 건가요? 이대로 돌아갈 건가요? 계속할 건가요?”

남궁선화는 이전에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던 위압감 넘치는 모습으로 상대를 찍어 눌렀다.

“……관문패를 돌려준다면 생각해 보겠습니다.”

송백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간다. 남궁선화는 나를 바라본다.

난 당연한 이야기를 말했다.

“안 돌려줄 거야. 돌려줄 생각 없어. 돌아가!”

#

결국 송백은 빈손으로 돌아갔다.

애초에 정시 와중에 자신이 빼앗긴 걸 돌려달라는 이야기는 애들 어리광과 다름없었으니 송백도 더 이상 강짜를 부릴 수 없었다.

“대사형…….”

은호가 작게 속삭였다.

“앞으론 저분들과 함께 움직이는 겁니까?”

“글쎄다…….”

내 목소리가 조금 컸는지, 은호는 눈치를 주며 목소리를 더 줄인다.

“기왕이면 함께 움직이면 안 됩니까? 저희끼리 번을 서는 것도 한계가 있지 않습니까.”

지금 당장 우리에게 필요한 건 충분한 휴식과 영양 보충이다.

시험이 시작된 이래로 단 하루도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던 아이들은 피로가 이미 미치기 직전까지 달아있었다.

아니, 객잔에서의 모습을 봐선 약간 정신이 나간 것 같기도 하다.

“근데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겁니까?”

“근데 왜 아까부터 목소리를 줄이는 것이냐?”

은호는 남궁선화와 성모란을 힐끔힐끔 바라본다.

“괜히…… 목소리가 커서 심기를 불편하게…… 하면 안 되지 않습니까.”

“하아…….”

어쩐지 금표나 동룡마저도 평소와 달리 말이 없어졌다고 했더니, 남궁선화와 성모란의 앞이라고 바짝 긴장한 것이다.

“너희 대사형을 대할 때도 똑같이 대해주면 안 되겠느냐?”

“뭐가 좀 다릅니까?”

“……아니다. 되었다.”

우리는 곧장 남궁세가와 철검문의 무사들의 호위를 받아 소주에 위치한 창궁상단 지부로 향했다.

“일단 식사를…… 먼저 하기 전에 좀 씻으시는 게 낫겠네요.”

식사를 권하려던 남궁선화가 우리 모습을 보고 목욕을 먼저 권했고, 금은동 형제는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채로 욕실로 안내받았다.

“우와!”

“무슨 욕탕이 태을문 전각만 하지?”

“대단하다.”

표사들이 단체로 씻는 곳으로 보이는 욕탕의 중앙엔 커다란 나무로 만들어진 욕조가 있었고, 천장에서 이어진 물길에선 뜨거운 물이 연신 쏟아지고 있었다.

“꺄우!”

“어우…… 뜨거.”

욕탕에 몸을 넣은 금은동 세 형제는 마치 극락이라도 맛본 듯한 표정이었다.

“이렇게 삼 일만 쉴 수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

“진짜. 너무 좋다.”

“으…….”

금은동 형제가 욕탕에 몸을 넣자, 그들의 몸에서 말라붙은 피딱지와 흙가루 등이 무지막지 떨어졌다.

하지만 이내 천정에서 떨어지는 뜨거운 물로 인해 욕조에 물이 가득 차고 오염된 물은 금세 투명한 물로 바뀌었다.

그렇게 목욕을 실컷 즐기던 금표는 뭔가 떠오른 듯 나에게 물었다.

“사형, 그럼 전국에 지부가 있는 문파들은 시험을 치르는 동안 습격에 대해선 안전하겠네요.”

“그렇겠지.”

“헐…….”

같은 시험을 보지만, 태을문의 제자는 안휘성…… 아니, 합비를 떠난 순간 항상 습격에 노출되어 있다.

반대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와 같이 전국에 직·간접 지부가 있는 문파들은 습격의 걱정이 없는 숙소를 이용할 수 있게 된다.

“진짜 말도 안 되는 시험이네요.”

애당초 약한 자는 물론이고 어지간히 힘이 있는 자도 쉬게 통과할 수 없는 시험.

그렇기에 사람들은 무림학관 정시를 지옥 정시라 불렀다.

투덜대는 금표와 달리 깊은 생각에 빠져있던 은호가 나를 지그시 보더니 물었다.

“대사형은 남궁 소저 성 소저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으신 겁니까?”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지. 왜 그러느냐?”

“말이 안 되는 것 같아서요. 저분들도 시험을 치르고 있는 중 아닙니까? 근데 ‘굳이’ 대사형을 구하겠다고 성까지 넘어왔다는 게 이해가 안 갑니다.”

철썩.

나는 욕조의 물을 때려 은호의 얼굴에 잔뜩 끼얹었다.

“우웩. 대사형! 여기 땟물 안 보이십니까?”

“같은 말이라도 ‘굳이’는 왜 붙이는 것이냐?”

“저분들 입장에선 그럴 만하지 않습니까?”

사실 나도 의문인 부분이었다.

하오문에게 듣기론 초반부터 습격당하여 적들을 피해 은신해 있었다 들었는데. 시험을 치르기에도 바쁜 와중에 나를 구하러 왔다는 것이 쉬이 납득이 되지 않았다.

“아!”

은호의 말에 덩달아 고민하던 금표가 손가락을 튕긴다.

“그거네. 그거면 말이 되잖아.”

“응?”

은호는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금표가 알아차렸다는 사실에 의심 가득한 눈초리.

“사랑.”

“…….”

“…….”

“…….”

욕실에는 처음으로 물소리만이 울렸다.

은호는 대뜸 일어나 금표의 머리를 욕탕 안에 처박았다.

꼬르르르륵.

“케엑! 왜, 왜 이래!”

“어디 말 같은 소리를 해야지. 사랑? 이거 뭐 전투 중에 주화입마라도 걸린 거야 뭐야.”

나도 은호와 같은 생각이었다.

꼬르르륵.

“우웩. 하지 마. 물 끄르륵. 물, 먹는다고!”

“천하의 남궁세가의 영애인 남궁선화 소저한테 대사형이 가당키나 해? 배경 없지, 인물 별로지, 성격도 이상하지. 가진 거라곤 쥐뿔 기억력밖에 없는데. 뭐가 좋다고 남궁선화 소저가 사형을 연모해?”

“…….”

이어지는 은호의 말이 이상하다.

“더구나 성모란 소저? 참나!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원수처럼 으르렁거리던 사이야! 더구나 성모란 소저의 가문은 남궁세가에 비해 떨어지나? 미색도 그렇고 무공의 성취도 그렇고, 두 분이 우리 사형을 발가락의 때만큼이라도 생각하는 거 같아?”

“……은호야.”

“네? 아! 대사형, 걱정하지 마세요. 금표 형은 제가 확실히 교육해서 소저들 앞에서 헛소리 못 하게 하겠습니다. 저희와 동행 할 수 있도록 잘 설득해 주세요.”

나는 득의양양해 하는 은호에게 말했다.

“……너 이 욕탕의 물 다 마셔볼래?”

“……히끅.”

#

“반가워요.”

식사는 조촐하게 이루어졌다.

식당 한 편에 마련된 작은 공간 안에서 남궁선화, 성모란, 그리고 나와 금은동 형제만이 자리했다.

“여, 영광입니다!”

“바,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오....”

욕실에선 절대 위축된 모습 보이지 말자는 둥, 세 형제가 발가벗은 상태에서 기개를 선보이더니만, 언제 그랬냐는 듯 금은동 세 형제는 마치 목각인형이라도 된 듯 부자연스럽게 움직였다.

남궁선화와 성모란이 그 모습을 보고 귀엽다는 듯 입을 가리고 웃는다.

“호호호.”

“진 공자의 사제들이 이렇게 귀여운 줄 알았으면 진작 만나러 올 걸 그랬네요.”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른 채 히죽히죽거리며 뒤통수를 계속 긁적이는 금표.

과거 철검문을 그렇게 욕했던 은호는 성모란의 앞에서 없는 꼬리라도 흔들고 있는 모양새.

동룡이는 홍당무가 된 채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고.

이 나이대의 남자 녀석들이 이성 앞에서 의연한 모습을 보이기 힘들기야 하겠지만 녀석들은 그 정도가 심했다.

‘하긴, 성모란과 남궁선화 앞이니.’

두 사람은 왕소소와 더불어 안휘성 내에서도 미모로 소문난 존재들.

그렇게 생각하면 또 이해가 안 가는 바도 있다.

매일 왕소소를 봤던 이 녀석들이 미녀에 대한 면역이 없을 리도 없고. 왕소소의 성격탓인가? 아니면 꾸민 것과 꾸미지 않은 것에 대한 면역은 또 다른 것인가?

“그만하고 앉아라.”

“……눼.”

“……눼에.”

“…….”

금표와 은호는 감히 불경스럽게도 내게 불만 가득한 시선을 보낸 뒤 자리에 앉았다.

역시나 욕탕의 물을 더 먹였어야 했다.

“배고프실 텐데. 식사 먼저 들어요.”

창궁상단의 배려로 겨우 여섯이 앉은 자리엔 음식이 11가지나 나와있었다.

낮에 객잔에선 걸신들린 듯 음식을 퍼먹던 녀석들이 어쩐지 젓가락을 이용해 조금씩 맛을 보는 거 아닌가.

나는 녀석들을 무시하고 두 사람을 보았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남궁선화와 성모란은 서로를 바라보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저희가 온 것이 반갑지 않나요?”

“그럴 리가요. 덕분에 가장 위급한 순간을 벗어났습니다.”

두 사람이 아니었다면 화양표국이 그리 쉽게 물러났을 리 없다.

“두 분도 피해가 커서 은신해 있었다고 들었는데 말입니다.”

“그런 이야기도 들었어요?”

일관문이 끝난 시점에서 남궁세가와 철검문의 조를 건든 이들이 있었다는 것이 새삼 놀라웠기에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고생은 모란 언니가 많이 했죠. 괜히 저 때문에.”

내막은 이랬다.

정시 시험 시작 전까지 남궁태하와 남궁산이 나오지 않았고, 남궁선화는 결국 스무 명 밖에 안되는 무사를 데리고 시험을 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성모란은 남궁선화를 버리지 않고 그녀와 함께하면서 시험을 치루려 했다.

성모란의 무사들로 인해 두 사람은 일관문을 겨우 통과할 수 있었지만, 곧장 공격을 받기 시작했단다.

“그게 저희 방계였던 거 있죠.”

결국 남궁세가였기에 남궁세가를 칠 수 있었던 것.

그들은 이관문은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끈질기게 남궁선화와 성모란을 쫓았고, 그 와중에 그나마 없던 무사들도 부상으로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단다.

“그래도 천만다행이에요. 할아버지가 나오셔서.”

창궁운위검법을 완성시킨 남궁태하는 곧장 방계를 모두 불러들여 가문을 재정비했다고 한다.

일관문이 끝난 직후, 남궁세가의 방계가 남궁선화를 끈질기게 쫓은 건 남궁태하를 막아서기 위함이었던 것.

남궁태하는 가문을 정리하자마자 남궁선화에게 영단과 함께 추가로 남궁세가의 무사 팔십을 함께 보내줬다고 한다.

“숨 좀 돌리나 했는데. 진 공자가 무당, 화산, 점창에 표적이 되었단 소릴 들은 게 아니겠어요.”

“……응?”

“……네?”

“???”

금은동 형제는 처음 듣는 소리라는 듯한 반응.

남궁선화는 내게 되물었다.

“모르셨어요?”

“전 알고 있었습니다. 굳이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죠.”

“……미친…….”

“……아니, 대사형…….”

“…….”

볼멘소리가 터져 나온다.

“후식으론 욕탕 물이 좋으려나?”

“…….”

“…….”

“…….”

다시 입을 싹 닫는 금은동 형제를 보며 남궁선화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나는 가볍게 화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설마 그 이야기를 듣고 오신 겁니까?”

남궁선화와 성모란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당연히 와야죠.”

“당연한 일이잖아요.”

난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두 분께 괜한 짐을 얹어 드린 거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도 두 분 덕분에 살았습니다.”

“당연한 일이죠. 우리 목숨도 살려주셨잖아요.”

“언니, 전 두 번이에요.”

서로 꺄르르 웃는 모습에 이번엔 금은동 형제가 영문을 모르고 두 소저를 바라봤다.

“아…… 이 이야기도 안 한 거예요?”

“……뭐 말할 시간도 없었고 말이죠. 얘들도 수련하느라 정신이 없었을 겁니다.”

“그래도 사형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아야죠.”

하며 마령고원에서의 일, 남궁세가로 가는 길에 있었던 일, 등등을 이야기해 준다.

음식을 먹던 금은동은 어느새 음식을 먹은 것도 잊은 채 이야기를 모두 들었다.

“이렇게 됐던 거예요.”

“…….”

“남궁선화 선배님과 성모란 선배님 두 분 모두 마령고원에 계셨던 겁니까?”

두 여자의 끄덕임에 금은동 형제가 입을 쩍 벌렸다.

마령고원의 일은 흑도 문파가 태을문에 선물 세례를 하면서 어느 정도 알게 된 것 같지만, 그 안에 누가 있었는지는 몰랐나 보다.

머릿속에 정리가 끝난 건지, 어색한 점잔을 떨던 세 형제가 우왁하고 소리를 질렀다.

“역시 사형! 이유가 다 있었군요!”

“거봐 형! 내가 분명 연유가 있을 거라 했잖아.”

“혹시 그 마령고원에서 구조되는 와중에 연모의……. 읍읍!”

동룡이 이상한 말을 하려 하자, 은호가 재빨리 입을 막았다.

그러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희가 조금 피곤한 거 같은데 먼저 올라가 봐도 되겠습니까?”

“……? 아, 그래요. 오늘은 푹 쉬고 내일 보도록 해요.”

금은동 세 사람이 나가자 시비가 차를 들고 들어왔다.

찻물의 진한 증기가 서서히 사라질 때쯤.

남궁선화가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걱정이 없어 보이시네요?”

“걱정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기가 막힌 듯 탄식을 내뱉는 남궁선화.

성모란이 말을 이었다.

“무당, 화산, 점창, 이 세 곳이…….”

그리고 지그시 나를 본다.

“진 공자 한 사람을 노리고 있다면…… 미안한 말이지만 이미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

“진 공자도 삼관문 이후엔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잘 알고 있지요?”

아비규환(阿鼻叫喚) 대여정(大旅程).

아마 최종 관문을 통과하고 나면 진짜 지옥 정시가 시작될 터.

일관문 이관문 삼관문 동안 죽었던 인원 수엔 상대도 되지 않을 많은 사상자가 나올 것이다.

시험에 참석하지 않은 채 삼관문이 끝나길 기다리는 이들도 있으니.

더구나 대놓고 구파일방 중 세 개의 문파가 나를 노린다 당당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잘 알고 있지요. 그래서 묻습니다만…….”

남궁선화와 성모란은 이미 각각 일관문패와 이관문패를 하나씩 얻었다고 한다.

이대로면 삼관문을 통과해 무림학관 시험에 합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미리 예정되어 있던 그들의 삶의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다.

“혹시 저희와 함께 움직이실 생각이십니까?”

나의 위험을 들었던들, 한 번의 걱정과 우려 섞인 말로 애써 무시하고 자기 길을 가면 될 일이다. 그럼 자신에게 예정되어 있는 미래를 그대로 밟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괜한 호기로, 정의감으로 어설프게 나섰다간 인생의 경로가 완전히 뒤바뀌어 버릴 것이다.

“저희와 움직인다면 두 분께서 합격이 요원해질 수도 있습니다……. 아니, 합격 못 할 확률이 더 높겠죠.”

“…….”

“…….”

목숨을 구해준 은혜를 갚는다는 건 정말 고마운 일이지만, 애당초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었기에 그들에게 강요할 마음은 없다.

더구나 이미 일부 대가는 차고 넘칠 정도로 받았다.

혹여라도 그들의 마음에 강제하는 것이 있다면 그러지 말라고 말하는 중이었다.

혈기로 나서기엔 손해 볼 일이 너무 크니까.

“저는 두 분께서 이리 생각해 주신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아니 되려 저희와 함께하시지 않길 바랍니다. 두 분께서 저 때문에 큰일을 당하신다면, 신검님도, 철검문주님도 뵐 면목이 없으니까요.”

“…….”

“…….”

조용히 식은 차를 넘긴다.

남궁선화와 성모란이라는 패를 손에 쥔다면 짤 수 있는 전략들이 무궁해진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나는 용소아처럼, 무림맹처럼, 그들을 도구로 쓰고 싶은 생각 따윈 없다.

완연히 내 사람으로 여겨 내가 책임지는 것과, 나를 위한 도구로 쓰는 것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으니까.

그들은 아직 내게 있어 도구와 내 사람의 경계에 서 있는 사람들.

“참으로…….”

오랫동안 침묵하던 성모란이 그 붉은 입술을 연다.

“진 공자다운 말이네요.”

“언니, 분명 진 공자가 이렇게 말할 거라고 이야기했죠?”

두 사람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서로 눈을 마주친 후 고개를 끄덕인다.

“우린 공자의 소식을 듣는 동시에 똑같은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니 이 일을 빚을 갚는다든가 은혜를 갚는다는 면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맞아요. 애당초 우린 진 공자와 함께하고 싶었으니까요.”

무게추가 한쪽으로 기운다.

그들의 말에 내 선택 또한 확고해졌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희야말로 이번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너스레를 떠는 남궁선화의 모습에 긴장된 분위기는 순식간에 풀어졌다.

“근데 무당, 화산, 점창은 왜 콕 집어 진 공자와 태을문을 노리는 거죠? 용봉지회가 태을문을 방문했을 때, 화산과 점창의 제자들과 반목이 있었다는 건 들었어요. 근데 무당은 왜죠?”

대답을 듣기도 전에 성모란이 말을 이었다.

“용소아 그 자식 때문인 거죠? 그 자식 혼자 멸혼진에서 빠져나갔었잖아요. 그 때문에 그 자식은 욕먹고 진 공자는 추앙받았으니까.”

“그것도 영향이 없다 할 순 없겠습니다만, 아마 정확한 이유는 제가 가진 관문패 때문이겠지요.”

남궁선화와 성모란이 동시에 고개를 갸웃거린다. 생김새는 이리 서로 다른데, 행동은 꼭 자매 같고 쌍둥이 같다.

“몰랐던 겁니까?”

“뭐가요?? 관문패를 하나씩 가지고 있는 거 아닌가요?”

“……?”

“전 일관문패 아홉 개, 이관문패 여섯 개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 아까 송백에게 하나씩 뺏었으니 각각 열 개, 일곱 개겠군요.”

“네?”

“넷?!”

남궁선화와 성모란이 벼락이라도 맞은 표정으로 입이 쩍 벌어졌다.

“전 애당초 무당, 화산, 점창뿐만 아니라 강호 전체가 저희를 노리고 있다 상정하고 있습니다.”

“…….”

“…….”

얼이 빠진 듯 넋이 나간 표정의 두 사람.

진짜 모르고 왔던 건가?

나는 얼른 말을 덧붙였다.

“무사의 명예와 가문의 이름을 걸고 저희와 함께 하신다 한 약속.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무사의 명예 건 적 없는데….”

“……어…언니 혹시 내가 아까 가문 걸었어요……?”

낙장불입(落張不入).

손 뗐으면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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