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사냥의 시간(4)>
다음 날, 창궁상단으로 양군백이 찾아왔다.
“정말 다행입니다. 제가 조금은 마음이 놓이는군요.”
양군백은 우리가 남궁세가, 철검문과 함께 동행 하는 것에 대해서 꽤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일단 인근 성들의 흑점을 있는 대로 다 긁어왔습니다.”
그렇게 양군백이 풀어놓은 봇짐 안에는 물건들이 잔뜩 들어있었다.
“다행히 자환단 3개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본디 무공이라 함은 내부의 진기를 쌓고 도를 이루어 득도의 경지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생겨난 진기의 활용 방식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득도에 이르는 과정 중엔 연단이 있는데.
이는 진기를 직접 쌓는 방식이 아닌 순수한 기의 결정체를 섭취하여 내부에 진기를 쌓고 득도의 경지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생겨난 약학이다.
오랜 시간 이 연단만을 연구하여 약학으로 일가를 이룬 것이 바로 도향문.
자환단은 도향문에서 나오는 내단 중에서도 상급 품질에 속하는 것이다.
“물론 소운님이 주신 내단에 비하면 가격이 안 맞기는 합니다만…….”
“괜찮습니다. 이리 급한 와중에 이 정도의 물건을 구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보다 제가 부탁드린 것은?”
“아, 그건 여기 있습니다.”
양군백은 봇짐들 사이에서 타원형의 작은 쟁반 같은 것을 4개 꺼내었다.
“이런 형태의 방호구는 잘 쓰지 않아서 직접 만드느라 내구력이 그리 강하지 않을 겁니다.”
“괜찮습니다. 임시방편으로 쓰는 것이니까요.”
난전이 끝나면 크게 쓸 일이 없을 물건이다.
난 먼저 쟁반을 왼팔에 부착해 보았다.
소정대 시절 쓰던 물건이었는데, 이리 장착하면 왼손도 자유롭게 쓸 수 있고, 작게나마 방패 역할도 할 수 있다.
단 하나 단점이라면 무사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는 점?
그런 사실을 아는 양군백이 복잡한 심경으로 나를 보다 말을 꺼냈다.
“……이건 제가 혹시나 해서 가져온 것입니다. 혹여 불쾌하시다면…….”
주춤거리면서 내미는 보따리에는 금색의 내의 모양의 갑주가 들어있었다.
“흑점에서 파는 물건 중 하나입니다. 고위 관료들의 암살을 대비해 만든 것인데. 동을 하나하나 얇게 조형하여 옷처럼 만든 것입니다.”
“금린갑이군요.”
“알고 계십니까?”
“잘 알고 있죠.”
전생에서 소정대 시절 실컷 써먹었던 물건이다.
양군백은 여전히 입술을 오물거린다.
“그…… 괜찮으신지…….”
“너무 좋군요. 총 몇 개를 구해오신 겁니까?”
“일단 세 개밖에 없어서.”
“딱 좋군요.”
“정말 괜찮으십니까?”
“목숨을 잃는 것보단 조금 창피한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이건 제 개인적인 선물입니다.”
“선물이요?”
“전에도 제가 친구비를 드린 적이 있지 않습니까.”
마령고원 때의 일을 이야기 하는 양군백.
그의 손안엔 작은 목갑이 들려 있었다.
목갑을 열자 퀘퀘하고 묵찐한 냄새가 훅 풍겨 오른다.
헌데 모양이 어디서 본 모양이다.
“독각흑섬의 내단이군요.”
“그 내단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어 온전하겐 못 챙겨 왔습니다. 그부분은 양해 부탁드립니다.”
“절 위해 가져오신 겁니까?”
“소운님이라면… 충분히 소화하실 수 있겠지요?”
나는 양군백의 배려에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이정도 금액이라면 그냥 친구는 아니군요. 절친한 친구 정도는 되야 겠습니다.”
내 말에 양군백이 만족한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
“…….”
“…….”
금표와 은호 형제의 얼굴이 찌푸려진다.
반대로 동룡이는 쟁반 모양의 방패를 제 팔뚝에 차보고 손을 휘휘 흔들어 본다.
그러더니 이내 허공에 혼자서 검식을 작게 펼쳐본다.
방패를 어떻게 사용해야 검법을 더 활용할 수 있는지를 본능적으로 연습해 보는 것이다.
천살성의 본능이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강해질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을 찾는 것이다.
이미 검식의 진일보로 인해 검진이 깨어진 문제는 해결했다.
내가 검진에 섞여들어,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 내야 하는지를 보여준 것만으로 그 짧은 사이에 동룡이는 자신을 한 단계 발전시켰다.
내 예상보다 훨씬 빠른 시간이었다. 이대로라면 동나이 대에선 동룡이를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나머지 녀석들인데.
“꼭 차야 합니까?”
“저희에게도 나름 무사라는 체면이 있는데.”
금표와 은호의 투덜거림.
이것들이 이제 조금 손발이 맞기 시작한다고 멋을 따지고 있다.
이럴 땐 백 마디 말보다 한 번 보여주는 것이 더 확실하다.
나는 흑룡검을 뽑아 단매에 두 번 휘둘렀다.
쉬쉭.
찰칵.
그리고 동시에 금표와 은호의 앞섬이 쩍 벌어진다.
“이미 한 번씩 죽었구나. 아이고야, 이 갑옷을 입고 있었다면 죽지 않았을 텐데. 금표와 은호의 부모님께 뭐라 전달해야 할까.”
“…….”
동룡이 따라 우는 표정을 짓는다.
“흐흑, 형들…….”
“참으로 통탄하다. 그깟 멋 좀 부리겠다고 갑옷을 착용하지 않아서 죽었다 하시면 과연 부모님들이 뭐라 하실지. 참으로 고민이 많이 되는구나.”
“바보 멍청이 형들!”
“…….”
“……입겠습니다. 어차피 안에다 입으면 티도 안 날 텐데요 뭐.”
“……금색이라 부티도 나고 좋네요.”
나는 방패를 내밀었다.
“……아, 그건 진짜 쫌…….”
“……이건 너무 나간 거 같습니다. 대사형.”
“아이고야, 방패를 거부하다 팔 하나가 잘렸다는 이야기를 들으시면…….”
“찹니다. 차요.”
“아이고 든든하다!”
녀석들은 갑옷과 방패를 패용하고부터 고개를 들지 않았다.
남궁세가와 철검문의 무사들 사이에선 마치 죄인의 낙인이라도 찍힌 듯 고개를 푹 숙인 상태였고, 특히나 남궁선화와 성모란의 눈에 띄지 않으려 애를 쓰는 모습이었다.
소주를 나설 때쯤엔 혹여 사람들이 볼까 아예 남궁세가와 철검문 무사들 사이로 숨어버렸다.
성모란이 뒤편을 바라보다 말했다.
“거슬리네요.”
“……이 방패가 얼마나 효용성이 있는지 모르시는군요. 무사의 자존심보단…….”
“네? 아뇨. 그거 말고요.”
성모란은 뒤편을 가리켰다.
“가까이 오지도 않고 멀리 떨어지지도 않고 꼭 승냥이 떼 같잖아요.”
“…….”
북문을 나온 이후부터 계속 따라오기 시작한 송백 일행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차라리 처리하고 갈까요?”
“아마 우리가 가까이 붙으면 또 멀리 떨어질 겁니다.”
당초 태을문의 제자만 있었다면 일방적 사냥이 되겠지만, 지금은 남궁세가와 철검문의 정예무사들이 함께한다.
같은 절정 수준의 무사라도 무공의 수준과 이해의 깊이가 다른바, 지금에 와서 전투를 벌인다면 손해가 막심할 것이 분명했다.
“그것을 알기에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언제까지 기다린다는 얘긴데요.”
“저들이 먼저 달려들거나.”
내가 동편 숲을 가리켰다.
숲 안에선 서로 비슷한 복색을 한 무사들이 나무 사이로 보였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송백의 무리 말고도 우리를 노리는 새로운 집단이다.
“점창파의 무인들이 오기 전까지겠지요.”
“저들은 지켜보고만 있을까요?”
성모란이 숲속에 숨어있는 자들을 보며 말했고, 난 고개를 저었다.
“그 전에 먼저 시작할 겁니다.”
저들의 입장에서 지금은 남궁세가와 철검문이지만, 시간을 끌다 보면 무당, 화산, 점창까지 함께 상대해야 한다.
그리고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맞아떨어졌다.
“이런 건 좀 안 맞춰도 되는데.”
하남성을 향해 북진하는 와중.
첫날 노숙을 준비하기 위해 각자 솥을 걸고 밥을 짓고 있는 사이.
첫 번째 습격이 시작되었다.
“기습이다!”
채채채채챙.
사방에서 들이닥치는 습격자들.
번을 서던 이들이 습격을 빨리 알아차렸고, 신호를 받자마자 남궁세가와 철검문의 정예들답게 차분하게 적들을 상대했다.
“이런…….”
무사들의 수준 차이 덕분에 아군에 피해는 없었다.
다만 노숙을 준비하던 중에 습격을 받았기에, 준비하던 음식들 대부분이 엎어지거나 흙이 들어가 먹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일단 다시 준비하기로 해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밥을 준비하는 무사들.
솥에 김이 모락모락 올라올 즘, 번을 서던 무사들이 소리를 질렀다.
“적입니다!”
“에라이!”
“제길!”
다시금 무사들이 바닥을 박차고 나선다. 이번엔 밥에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지만, 난전을 끝내고 나니 역시나 또 음식들이 엎어져 있었다.
“휴…… 일부러 기다렸다. 습격하는 거죠?”
남궁선화의 작은 한숨.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애당초 정면 대결론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겁니다.”
서로 다른 조들의 습격이지만, 그들의 작전은 동일하다.
정신을 못 차릴 때까지 진을 빼놓고, 가장 약해져 있을 때 목적을 달성한다.
아직 배우지도 않은 차륜전의 기본을 실행하고 있는 거다.
“최대한 지부를 들러 삼관문이 있는 곳까지 가야겠군요.”
“그게 더 편할 겁니다.”
“사람들에게 더 이상 밥은 짓지 말라고 전달해 주세요. 육포나 건량으로 일단 배를 좀 채우라고.”
“예. 아가씨.”
나 또한 남궁선화와 성모란 옆에 자리 잡고 앉아 육포를 뜯고 있을 때.
후루룩.
쩝쩝.
꿀꺽.
한편에서 죽 같은 걸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
육포를 뜯던 무사들의 시선이 한곳에 쏠린다.
금은동 형제가 저들끼리만 잘 끓인 죽에 육포를 불려 거하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
그러다 눈이 마주친 무사들에게 죽을 권한다.
아직은 서로 어색한지 무사들은 육포를 내보이며 애써 무시한다.
“…….”
남궁선화와 성모란이 복잡한 시선으로 나를 본다.
나는 달리 할 말이 없어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녀석들이 식탐이 좀 강합니다.”
#
무림학관 정시는 상위권 점수를 받을수록 더욱 어려워진다.
애당초 시험이라 이야기하지만 시련에 가까우니, 점수라는 것도 결국 관문패를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지만.
어쨌든 관문패를 많이 가질 정도로 실력이 좋다는 건, 다른 응시생들의 견제를 받기도 쉽다는 것이다.
애당초 무림학관이 결과를 측정하는 건 응시생들의 손에 들린 관문패.
그 관문패가 시험을 통과하여 얻은 것이건, 상대의 것을 빼앗아 얻은 것이건 상관하지 않는다.
이런 규칙이 시험을 더욱 가혹하게 만든다.
때문에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제자들도 서로 협력하여 시험을 치른다. 그렇지 않다면 애당초 치를 수 있는 시험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보았을 때. 가장 가혹한 시험을 치게 되는 경우는, 응시생 본인의 능력이 가장 뛰어나기만 할 때이다.
시험을 우수한 성적으로 치러 많은 관문패를 획득하게 되어도, 그걸 지킬 힘이 충분하지 못하면 다른 수많은 응시생들의 표적이 될 뿐이니까.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우린 벽력탄을 들고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것과 다를 게 없지.”
무당, 화산, 점창이 태을문의 제자들을 노린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놀라긴 했지만, 십여 개의 관문패를 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성모란은 거의 기절할 뻔했다.
‘역대 정시 최고 기록이 몇 개였더라?’
바로 전 기수 때. 천년에 한 번 나온다는 천재 검수 용소아가 무림학관에 최고 점수로 입학했다.
그 당시 그가 가진 일관문 패의 숫자가 다섯 개. 이관문 패의 숫자가 두 개. 삼관문 패는 본래 하나밖에 가질 수 없으니 총합이 여섯 개였다.
그것도 무당파의 정예무사들과 함께 달성한 기록.
그런데 진소운은 지금 총 열일곱 개의 관문패를 가지고 있다. 각기 금은동 세 형제를 위한 여섯 개를 제외하고도 본인 혼자 열 한 개를 확보할 수 있다고 하니 기함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
덕분에 천하의 모든 응시생들이 진소운을 노리고 있다는 이야기도 이해가 갔다.
물론 그렇다 해서 그와 떨어질 생각을 한 건 아니었다.
마령고원에서 이미 한 차례 목숨을 구원받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이유가 되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왜인지 계속 함께하고 싶다는…….
“…….”
자신도 어떤 마음 때문에 이리 하는지 모르기에, 남궁선화에게 미안한 마음만 가질 뿐이었다.
“……아, 아하하. 괘, 괜찮아요. 언니. 어차피 삼관문을 넘어서고 나면 당연하게 겪을 일이었잖아요?”
솔직하게 속마음을 이야기하자 어쩐지 어색하게 말을 더듬으며 왠지 얼굴을 붉히는 남궁선화.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소주를 떠난 지 일주일.
그 하얗고 고운 남궁선화의 얼굴에도 점점 피곤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나마도 남궁선화는 양호하다.
철검문과 남궁세가의 무사들은 더욱 사정이 좋지 않았다.
시도 때도 없이 몰려드는 습격.
특히나 밥을 먹을 때 습격하는 바람에 멀쩡한 음식을 먹은 지 너무 오래되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괴로움은 언제 어디서든 습격받을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에 무사들은 번을 서는 차례가 아니어도 잠을 자지 못했고, 밥을 먹어야 하는 순간에도 사방에 진동하는 피비린내와 적들의 잘린 신체 때문에 음식조차 제대로 섭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근데 진짜 궁금하긴 해요.”
“뭐가?”
“왜 태을문의 제자들은 멀쩡해 보일까요?”
“…….”
그들만 특별 취급을 받는 것도 아니다.
되려 숫자가 적기에 고생도 더 많이 한다.
번도 똑같이 서고, 전투도 똑같이 수행한다.
“동룡이에게 물어봤는데. 되려 함께 있는 사람이 많아서 더 쉽다고 하더라고요.”
이미 금은동 형제들과 꽤나 친해진 남궁선화와 성모란은 말을 편하게 했다.
“더 쉽다고?”
“네. 자기들끼리 있었을 땐 진짜 죽는 게 나은 것 같았다고.”
“…….”
하긴 생각해 보면 태을문의 제자들은 조금 다르긴 하다.
밥을 하다가 습격을 맞이하게 되면 금은동 세 형제는 밥을 제 일 순위로 보호한다.
심지어 어떤 때는 세 형제가 번갈아 밥을 먹으면서도 검진을 유지한다.
처음 그 신기한 장면을 봤을 때, 성모란은 적의 검이 자신의 심장에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봤다.
전투가 길어져 끼니를 지날 때면 달리는 와중에라도 꼭 주머니에서 육포를 꺼내어 입에 밀어 넣는다.
사방에 핏물이 흐르고 잘린 손가락이 흩어져 있는데도 개의치 않는다.
남궁세가와 철검문의 무사들도 태을문 제자들의 끼니를 향한 집착을 기가 질린 표정으로 보는 것이 일상이었다.
잠은 어떠한가.
적들은 공격하지 않음에도 살기를 내뿜어 긴장감을 올리거나 한밤중에 시끄러운 소리를 내어 깊은 잠을 못 자게 한다.
하지만 태을문의 세 형제들은 번을 설 때가 아니면 서로의 수혈을 짚어주어 동시에 잠에 빠져든다.
“……저거 너무 위험한 거 아닌가요?”
성모란의 물음에 육포를 뜯던 진소운이 고개를 들었다.
“뭐가 말입니까?”
“수혈 짚어주는 거요.”
“큰 소리가 나면 결국 깨지 않습니까.”
“그러니까요. 작은 소리는 무시하고 자게 되니까…….”
“서로를 믿는 것이겠죠.”
“네?”
“저희의 이 전투는 계속될 겁니다. 그리고 잠을 계속 못 자면 언젠가 적의 검에 맞겠죠. 그러니 주위의 무사들을 믿고 자는 겁니다. 그럼 최소한 잠이 부족해서 적의 검을 맞을 일은 없을 테니까요.”
그리고 그제야 저 세 형제의 이상한 행동의 연원이 누군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사람 예전부터 평범하지 않은 줄은 알았지만…….’
성모란이 무슨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지도 모르는지, 진소운이 태연하게 말했다.
“성 소저. 저 수혈 좀 짚어주시겠습니까?”
아마도 금은동 형제의 저런 모습은 진소운의 영향이 크리라.
금은동 형제에게 듣기로, 진소운은 문 내에서 사형제들에게 신처럼 추앙받고 있는 듯했으니.
“……그래요.”
성모란이 진소운의 수혈을 짚자, 진소운이 죽은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인다.
그 모습을 보던 지그시 바라보던 성모란이 남궁선화를 보며 말한다.
“선화야 나도 수혈 좀 짚어줄래?”
“……네. 언니.”
성모란은 근 일주일 만에 처음으로 깊은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
“점창이 진강을 막고 있다는군요.”
단양을 지나 진강을 반나절 거리에 둔 상황에서 우리는 행군을 멈췄다.
하오문의 전서응이 긴급히 전달한 전문 속에는 우리가 갈 수 있는 모든 길이 막혀버렸다는 소식이 담겨 있었다.
나는 남궁선화, 성모란과 함께 각각 남궁세가 무사들의 대표와 철검문 무사들의 대표가 참석한 긴급회의에 들어갔다.
“진강에만 도착하면 좀 쉴 수 있겠다 생각했는데.”
진강에서 배를 타고 홍택호를 가로질러 사홍까지 단박에 도달한다는 것이 당초 우리의 계획.
진강에는 창궁상단에서 미리 준비해 둔 배가 있으니, 최소한 그 배 안에서만큼은 편하게 쉴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우리가 배를 탄다면 그걸 보고 쫓아올 이들도 분명 있을 겁니다.”
“그래도 최소한 밥은 편안히 먹을 수 있을 거 아녜요.”
성모란이 지긋지긋하다는 듯 고개를 내젓는다.
빌어먹을 습격자들은 때때로 밥솥만 걷어차고 도망가기도 했으니까.
그렇게 삼 일 연속 당하고 나면 이제 밥 지을 의욕도 생기지 않는다.
“우선은 진강에서 기다리고 있는 점창이 가장 큰 문제네요.”
안 그래도 송백 일행이 점차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다. 그 거리가 벌써 30장.
앞뒤로 적에게 둘러싸인다면 그 결과는 전혀 좋지 않을 것이다.
“그나마 화산과 무당이 없는 게 다행입니다.”
하오문에 의하면 점창과 화산은 지근거리에 위치하기에 당연히 함께 움직이리라 예상했건만, 의외로 화산과 무당이 함께 움직이고 점창은 따로 떨어져 우리를 향해 움직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작전이 모두 틀어져 버렸다.
화산은 안휘성에서 하남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한다.
삼관문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우리를 잡겠다는 전략.
본래 작전이라면 최소 하남에 입성하기 전까진 문제가 없었을 것이었다.
“어쨌든 안휘성으로든 하남성으로든 돌아갈 길은 없습니다.”
지금 안휘성으로 방향을 틀면 화산과 무당을 만나고, 하남성으로 향하려면 점창을 뚫어야 한다.
그사이 계속되는 다른 조들의 습격과 추격을 생각하면 그나마 진강을 이용하는 것이 가장 쉽고 편한 길이었다.
“진강에서의 일전이 가장 중요하겠군요.”
남궁선화의 목소리가 낮게 깔린다.
진강에서 지금껏 겪어왔던 것보다 더욱 치열한 전투가 일어나리라 예상하는 것이다.
성모란이 겪었던 것처럼, 남궁선화 또한 자신의 무사들을 잃을 가능성도 있다.
최악의 경우엔 남궁선화와 성모란 자신들의 목숨까지도 위험해질 수 있는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상황.
“괜찮아! 걱정 마! 어차피 우리가 이길 거야! 남궁세가와 철검문이 함께하는데, 무서울 게 뭐가 있어!”
성모란의 씩씩한 목소리가 되려 두려워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남궁선화도 애써 미소를 짓고 고개를 끄덕인다.
“다른 방법도 있습니다.”
말을 꺼낸 것은 남궁세가의 무사 대표인 강서표. 남궁선화와 함께 마령고원에 들어갔던 인원이다.
“무사들을 두고 가시는 겁니다.”
“…….”
남궁선화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다.
진강의 배를 이용하자면 물을 타고 올라가 몰래 배에 오를 수도 있다.
하지만 진강에 기다리고 있는 이들이 이를 모르지 않을 터.
이들을 붙잡고 있기 위해선 미끼가 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강서표는 자신들을 미끼로 쓰는 이 작전을 에둘러 두고 간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상대는 점창 입니다. 모두가 가려다 아무도 함께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아니, 아녜요.”
남궁선화가 고개를 젓는다.
지금껏 쫓아오는 추격자들, 진강에 얼마나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적들까지 다 합하면, 진강 포구에 남는 인원들은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
“아가씨. 이 강호에서 힘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큰 괴로움을 가져오는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지금은 무림학관에 들어가는 것만 생각하셔야 합니다.”
얼마 전까지 방계와의 신경전으로 제대로 된 지원도 못 받고 정시를 치르던 그녀다.
강서표는 남궁선화가 뭐라 말을 잇기도 전에 나를 보며 말했다.
“공자님, 죄송한 말씀이지만 이번에도 아가씨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
“진강은 저희가 어떻게 해서든 뚫어내겠습니다.”
이미 이야기가 끝난 건지 철검문 무사 대표인 초무빈이 이어 말한다.
“더불어 다른 배가 출항하는 것을 막으려면 저희도 필요할 겁니다.”
“초 대주님!”
“아가씨, 문주님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학관에 입학하셔야 합니다.”
배의 출항까지 막는다 치면, 진정 남궁세가와 철검문의 무사들 모두가 목숨을 걸어야 한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강서표와 초무빈이 나를 바라본다. 남궁선화와 성모란과 달리 내가 당연하게 작전을 받아들일 거라 예상한 듯했다.
“하지만 당장…….”
“당장의 문제는 그렇지만, 삼관문 이후가 가장 큰 문제 아니겠습니까. 지금 여러분이 없어지면 두 소저는 정말 위험에 처할지도 모릅니다.”
“…….”
“…….”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나는 남궁선화를 바라봤다.
“선화 소저.”
“네?”
“이런 상황에 갑자기 이런 걸 물어봐서 미안합니다만…….”
“네? 지, 지금요……? 뭐, 뭔데요?”
남궁선화의 얼굴에 들뜬 당혹감이 어린다. 하지만 한편으론 기대감 가득한 표정이 되었다.
성모란의 표정은 더욱 심상치 않다.
“…….”
뭔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내 입을 어떻게든 막고 싶어 하는 표정.
난 지금 그들의 감정을 하나하나 배려할 틈이 없었기에 말을 이었다.
“혹시 우리들이 타고 있는 말 값이 얼마나 됩니까?”
“……네?”
“……응?”
남궁선화와 성모란이 이번에도 쌍둥이처럼 고개를 갸웃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