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91화 (91/357)

#91. <사냥의 시간(5)>

“확인했습니다. 창궁상단에서 통째로 빌린 배가 맞답니다.”

서른 중반의 남자의 말에 이제 막 약관을 지난 듯 보이는 청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 일대에 무사들을 배치시켜 주십쇼. 하루 거리라 했으니 슬슬 도착할 때가 되어가는군요.”

청년의 말에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곤, 무사들을 이끌어 진강 일대의 선착장 중 한 곳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후우…….”

“답답하십니까? 기풍 사형?”

함께 정시를 나선 장운제의 말에 이기풍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과 귀가 꽉 막혔으니 당연하지.”

“그러니까 말입니다. 왜 하필 이럴 때 본 산이 힘든 거랍니까.”

이기풍은 장운제처럼 순진하지 않다. 갑자기 본 산에 들어오는 후원금이 줄고, 전국에서 운영하는 사업체에 어려움이 생긴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것도 천하의 점창이?

“화산의 이야길 들어보니 저희뿐만이 아닌 것 같습니다. 녀석들도 선배들에 비해 못한 지원을 받고 있답니다.”

“흥! 녀석들도 줄을 잘못 선 거겠지.”

화산과 점창.

천하에 감히 누가 겁 없이 이 둘의 목을 죌 수 있단 말인가.

이건 단지 사문의 권력 싸움에서 밀려난 대가일 뿐이다.

본 산의 선배들 대신 속가무문의 무사들과 정시를 치르는 것도 서러운데, 돈마저 제대로 지원받지 못하니 마치 사문에게서 버림받은 것 같다.

거기에 더불어 구파일방으로 묶인 맹방이 돈 앞에서 이리 모질게 굴 줄 몰랐다.

“빌어먹을 거지 새끼들.”

한동안 받아 보던 개방의 전서구는 끊긴 지 오래.

덕분에 일관문과 이관문을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 이대로라면 무림학관에 입학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

무림학관에 입학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머리가 잠시 어질거린다. 그렇게 된다면 본 산의 사제들과 엄청난 격차가 벌어져 버린다.

“그나마 명현 도장님께서 도와주시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네 말이 옳다!”

천만다행으로 무림맹에 계신 명현도장님이 직접 정보를 보내주는 덕에 가까스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예전부터 명현 도장님은 사형을 이뻐하셨으니, 얼마나 애달아하실까요?”

장운제의 말에 이기풍이 고개를 끄덕인다.

기억도 가물가물할 정도로 예전 일이긴 하지만, 무림맹의 장로로 추대되어 가기 전 명현도장에게 몇 마디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근데 말입니다 사형…….”

주저하는 장운제의 말에 이기풍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런 말 조금 그렇지만 명현도장님의 그 정보 신뢰할 만할까요?”

“…….”

잠시 주저하던 이기풍은 이내 고개를 젓는다.

“그럼 명현 도장께서 헛소리를 하실 분이더냐?”

“그렇긴 하지만 그대로 믿기는 조금 무리가 있지 않습니까?”

“…….”

명현도장의 말에 따르면 태을문의 제자가 3명의 사제만을 데리고 시험을 치르는데, 일관문에서 관문패 아홉 개를 확보했고 이관문에선 관문패를 여섯 개나 확보했다고 한다. 그러니 화산, 무당과 협동하여 그들을 치라는 이야기.

보고서도 믿기지 않는 정보이긴 했지만, 정보의 발신지가 명현 도장이었기에 또 안 믿을 수도 없었다.

속가제자 중 가장 돈이 많았던 화양표국의 송백까지 연결하여 부족한 정보 부분을 채워주었으니 결국 믿고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화산과 무당과 협동하라는 말은 듣지 않았다.

태을문의 제자를 잡겠다고 화산과 무당까지 함께한다면 강호의 사람들이 점창을 뭐라 생각할까.

태을문의 제자들을 잡고 나오는 전리품을 나누는 것도 생각해 볼 일이다. 지금 이기풍은 사제 둘과 함께 움직이고 있다.

화산과 무당까지 합세하여 전리품을 나누게 될 경우, 사제들이 제외될 가능성이 높다.

“배는 준비하였느냐?”

“네, 준비하긴 했습니다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송백에 따르면 그들을 추적하는 이들이 지난 열흘간 자지도 먹지도 못하고 계속 기습을 반복해 왔다고 한다.

이미 충분히 진이 다 빠진 상태일 터.

태을문을 상대로 이정도면 만반의 준비라 할만 했다.

“송백 사제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느냐, 남궁세가와 철검문의 무사들이 함께 움직이고 있다. 최악의 경우, 시험을 치르는 이들만 배에 태우려 할지 모른다.”

“그럼 삼관문 이후…… 아니 삼관문에 가기도 전에 탈락할 텐데요.”

“그러니 만반의 준비를 해야지. 죽 쒀서 개 줄 순 없는 노릇 아니냐.”

하남성으로 이동하던 화산파에게서 온, ‘왜 강소성으로 가냐’는 전서를 깔끔하게 무시했다.

그들이 하남성에서 기다리고 있다면 배에 태워 보낸 순간. 결국 화산과 무당의 아가리 속에 처박힐 뿐이다.

“그럴 순 없는 노릇이지.”

진강에는 점창파뿐만 아니라 정시를 치르는 듯 보이는 이들이 이곳저곳에 둘러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점창의 상대가 될만한 이들은 없어 보였다.

“슬슬 올 시간이 되었는데 말이죠…….”

하늘의 해를 보던 장운제의 말.

그리고 동시에 쉬이이익……펑 하는 소리가 울렸다.

“……뭐지?”

분명 신호용 폭죽이다.

“무엇을 위한 신호용이지?”

이기풍은 사방을 둘러 보았지만 신호용 폭죽에 의해 특별한 행동을 하는 이들은 없었다.

“사형! 배! 배가 떠납니다!”

“뭣!”

창궁상단의 배는 닻을 올리고 돛을 편 채 선원들이 노를 젓기 시작했다.

“분명 아무도 못 지나가게 막고 있었는데…….”

그때, 움직이는 배 옆으로 물에 흠뻑 젖은 두 여자가 줄을 잡고 배 위로 올라가는 것이 보인다.

배 위의 사람들이 깍듯이 대하는 것을 보니 보통의 신분이 아니다.

“이런……! 무사들을 버리고 움직인 것이로구나!”

“그게 무슨!”

“이럴 때가 아니다! 무사들을 둘로 나눠라! 저들의 배를 잡고 우리 배도 출발시킨다!”

“넷!”

멍청한 선택이다.

무사들을 놓고 가다니.

당장에 이곳을 벗어날 수야 있겠지만, 그래서야 삼관문 이후의 대여정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겠는가.

“그것도 여길 벗어날 때의 이야기겠지.”

그런데 창궁상단의 배가 뭔가 이상한 짓을 벌이기 시작했다.

두 여자를 필두로 선원들이 널빤지며 들통을 강으로 던지기 시작한 것이다.

“배의 무게를 줄이려는 생각인가?”

이기풍의 생각은 거기까지밖에 이어지지 않았다.

두두두두두두두두두.

뽀얀 먼지를 내며 일단의 기마들이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었다.

“사, 사형!”

배에 탈 준비를 하던 장운제가 기겁하며 이기풍을 불렀다.

“이 무슨…….”

“나, 남궁세가입니다!”

“뭐? 무사들을 버린 게 아니었나!”

#

마교가 강호정벌을 시작할 때 가장 골치 아픈 단체가 있었다.

철마흑풍대.

강호인들은 물론이고 관군들에게도 생소한 형태의 전투를 치르는 이들.

그나마 비슷한 이들을 찾아보자면, 저 먼 북방의 민족들이나 할 법한 마상전투를 치루는 자들.

무림맹의 입장에서 이들을 상대하기가 여간 까다로웠던 것은, 어떻게 막아야 할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무림인들이 대부분 사용하는 검과 도는 갑주를 걸친 말들에게 박혀 들지 않고, 말 위에서 마인들이 휘두르는 장창은 무인들의 가슴에 깊이 박힌다.

무엇보다도 말이 가진 무지막지한 돌파력.

인간은 낼 수 없는 이 육중한 무게의 강력한 돌파력은, 말에 의한 돌격이라는 상상치 못한 전략 앞에 당황한 무인들이 상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직 10년이나 이른 전략이라 이 말이지.”

내 뒤를 따르는 무사들도 내 말에 따라 달리곤 있지만, 하나같이 잘 모르겠다는 표정.

“공자님! 이대로 계속 달리는 겁니까?”

“계속 달려요! 멈출 생각 말고 그냥 강 위를 달리겠다는 생각으로!”

“…….”

이럴 땐, 과정의 합리성보다 결과의 달콤함을 알려주는 것이 더 낫다.

“그러면 소저들과 무림학관까지 갈 수 있을 겁니다.”

“““네!”””

남궁세가와 철검문의 무사들이 우렁차게 외친다.

#

“사, 사형, 속도를 줄이지 않는데요?”

“뭐?”

말을 타고 강이라도 건널 생각이란 말인가?

채채채채채채챙-.

맨 앞 검은 무복을 입은 자신 또래의 청년을 필두로, 백여 기의 말을 탄 무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기 시작했다.

“전원 돌격!”

“““와아아아아아!”””

이미 진형이 흐트러져 버린 속가무문의 무사들은, 뭉치지도 퍼지지도 못한 채 기마의 기세에 놀라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흐, 흩어지면 안 돼! 마, 막아!”

이기풍이 본능적으로 저 기마 무리를 막아야 한다 외쳤지만,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이기풍이 바닥을 박찼다.

한 수.

딱 한수로 진형을 흩트리면 된다.

그 옛날 명현 도장에게 칭찬을 받았던 사일검법이 흩뿌려진다.

맨 앞 검은 무복을 입고 검은색의 검을 든 자의 요혈을 향한다.

“그 종벽기보다 못한 성취군.”

“뭐?”

그의 입에서 상상도 하지 못했던 대단한 선배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순간 이기풍의 검식이 흔들렸다.

그리고 검은 무복의 무사는 정확히 흐트러진 부분에 검을 비집고 들어왔다.

퍽!

“커흑!”

“사형!”

이기풍의 몸이 날아들었던 것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반대로 날아갔다.

채채채채채챙.

이어 기마 무리가 주변에 알짱거리던 무사들을 일 검에 밀어내고는 곧장 강으로 돌격했다.

어찌하려고 저러나? 라는 의문은 금방 풀렸다.

맨 앞에 선 검은 복색의 청년을 기준으로, 기마 무리들 모두가 말에서 뛰어올랐다.

촤악- 촤악- 촤악-

그들은 곧장 배에서 사방에 뿌려둔 널빤지와 들통을 밟고 배에 오르기 시작했다.

진강에서 남궁세가와 철검문, 그리고 태을문을 노리던 이들 모두가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

말도 안 되는 작전이라고 생각했다.

“말을 버린다고요?”

“네.”

“차라리 홍택호를 돌아가는 게 낫지 않겠어요?”

남궁선화는 진강에서 점창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자신들을 기다린다는 말을 들었을 때 처음 떠올렸던 우회 작전을 생각했다.

하지만 진소운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되면 제때 삼관문을 이행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말을 버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죠?”

“그래서 유인 작전을 쓸 겁니다.”

남궁선화와 성모란이 먼저 진강에 도착하여 물속을 통해 배로 향한다.

두 사람이 도착함과 동시에 배를 출발시켜 점창파의 진영을 흩트려 놓는다.

그리고 후발대는 출발한 배에 오른다.

언뜻 듣기에는 그럴듯하지만, 그럴듯하게 들리는 것과 실제 작전을 수행하는 것에는 큰 괴리가 있다.

하지만.

“이게 되네요.”

그리고 그 그럴듯한 작전이 실제로 이뤄지는 장면을 보면, 알고 있던 상식들이 날아가는 것 같다.

“……그러게 말이야.”

성모란도 멍하니 강 위의 널빤지를 밟고 날아오르듯 뛰어내리는 진소운을 바라본다.

배에 안착한 진소운은 곧장 준비된 널빤지를 들고 던지기 시작한다.

그러면 미처 널빤지를 밟지 못해 강물에 빠질 뻔한 무사들의 발아래 척척 도착한다.

“진짜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네요.”

남궁세가와 철검문의 무사들은 정예 중의 정예다. 성취로 따지자면 일류를 지나 절정의 문턱에 자리한 사람들.

진소운의 간단한 도움만으로 대부분의 인원이 배 위에 안착한다.

“진 공자! 사제들이!”

문제는 태을문의 금은동 형제들.

어째선지 진소운은 금은동 형제들을 가장 마지막에 위치해 놓았다.

금표와 은호가 열심히 신법을 펼치며 널빤지를 밟지만, 그때마다 발목까지 첨벙첨벙 물에 잠긴다.

더구나 동룡은 이미 물에 빠진 채로 수영을 하고 있었다.

“제가 갔다 올게요!”

남궁선화가 곧장 나선다.

“아닙니다.”

말과 함께 진소운은 밧줄을 금표와 은호에게 던지고 동시에 왼손을 동룡에게 뻗는다.

그의 손에서 은색의 작은 새의 발톱 같은 것이 쏘아져 나가 동룡을 잡아챈다.

“흡!”

그리고 동시에 끌어당긴다.

금표와 은호, 동룡은 물에 흠뻑 젖은 채로 배에 탑승했다.

“그러니 미리미리 신법 연습을 해두라 하지 않았더냐.”

“사형! 아무리 그래도 15년 내공에게 초상비를 바라는 건 도둑 아닙니까?”

“쯧.”

인상을 찌푸리고 있지만, 금은동 형제의 입가엔 미소가 어려있다.

그들뿐만이 아니다. 남궁세가의 무사들도 철검문의 무사들도, 누구 하나 부상 없이 배에 탔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지 실없는 웃음을 내뱉고 있다.

슈욱- 슈욱- 슈욱-

그때, 창궁상단의 배를 향해 화살들이 쏟아졌다.

“저들도 배를 띄웠어요.”

점창을 비롯한 송백과 오는 내내 잠을 못 자게 했던 이들이 일제히 포구에서 배를 띄워 따라온다.

더러는 작은 나룻배에 몸을 실어 노를 젓는 이들도 있다.

포구 전체에 정박해 있던 배들이 경쟁하듯 강으로 나온다.

“이대로라면 잡힐 거예요.”

역시 돌아가는 것이 정답이었나 생각하는 순간.

“……응?”

주변의 공기가 팽팽하게 진동한다.

퍼퍼펑.

진소운의 무복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른다.

그를 중심으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강대한 기파가 퍼져 나오는 것이다.

“지, 진……공자.”

우르르르르르르릉.

꼭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다. 태산을 무너뜨리고, 대지를 뒤덮을 만한 강대한 파괴력이 그의 손안에서 꿈틀거린다.

압도적인 기파에 숨이 막혀 답답해하는 순간. 진소운의 손에선 거대한 장의 무리가 쏟아져 나간다.

콰콰콰콰콰콰쾅.

작은 나룻배는 이 강대한 폭풍을 추진력 삼아 제 가벼운 몸을 앞으로 쭉쭉 날린다.

그리고 아직 포구에서 벗어나지 못한 거대한 배들은 폭풍에 직격당해 산산이 부서진다.

콰콰콰콰콰쾅.

포구 일대에 개미처럼 뭉쳐있던 배들 사이로, 갑작스레 용오름이 솟구치듯 배와 사람이 뒤엉켜 사방으로 날아오른다.

퍼퍼퍼퍼퍼퍽.

강대한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는 처참한 사고 현장만 남아 있을 뿐이다.

“진 공자…….”

“이러면 쫓아오지 못하겠지요?”

“그렇긴 한데…… 이런 힘이 있었다면 진작 쓰지 그랬어요…….”

왠지 그간의 고생이 다 쓸모없어지는 기분.

“이 무공의 단점이 그겁니다. 쓰고 나면 쓰러지거든요.”

“네?”

“저 좀…….”

그 말과 함께 진소운은 수혈이라도 짚인 사람처럼 스르르 쓰러진다.

남궁선화는 저도 모르게 그를 품에 쏙 안았다.

“누, 누가 좀 도와….”

난생처음 사내를 안아 본다는 생각에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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