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암흑 속 가장 날카로운 칼(2)>
“이런 대단위 전투는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자가 승리합니다.”
처음 이상함을 느낀 건 화양표국의 송백이었다.
진소운에게 일관문과 이관문 패를 빼앗긴 데다, 기대했던 본산 사형들의 병신짓으로 인해 그들을 놓쳐버리고 초조함에 밤잠 이루지 못하던 그는 결국 오늘에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물경 천에 달하는 인원입니다. 그들 모두가 무인인 시점에서 제아무리 남궁세가나 철검문이라도 살아날 방법 따윈 없습니다.”
듬직하게 말하는 자는 전방에서 군관 생활을 하였던 자다.
위소 출신으로 수천의 병사들을 통설했던 경험이 풍부하고, 대단위 전투를 경험해 봤기에 더욱 믿음이 간다.
“염 대장만 믿겠습니다.”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그는 그간의 일에서 단 한 번도 나서지 않았다. 하지만 송백이 관문패들을 빼앗기고, 점창파의 사형들이 물귀신이 되는 모습을 본 뒤 넋을 놓았을 때 비로소 그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진강에서 놓쳤던 이를 숙천에서 따라잡았고, 신현에서는 이미 앞질러 그들을 기다릴 수 있었다.
군대식으로 병력을 꾸려 효율적으로 행군하는 방법을 몰랐다면 불가능했을 일.
이젠 이 아수라장이 된 전쟁터를 지켜보고 있다가 태을문과 남궁세가, 철검문의 관문패를 빼앗은 자들만 습격하면 끝날 일이다.
그리고 삼관문으로 향하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뭐지?”
전투가 시작되고, 물경 천에 달하는 인원들이 피운 횃불은 복양 평원에 축제라도 벌린 듯한 모습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저기 저거…….”
송백이 가리킨 곳은 마치 구멍이 난 것처럼 어둠이 내려앉아 있다.
“저기만 횃불이 없는 거 좀 이상하지 않아?”
송백의 말에 염 대장은 지그시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전쟁에 숙달되지 않은 이들이 진형을 유지 못 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모습입니다.”
“그런가……?”
여태껏 신뢰의 모습만 보여주던 자였다. 송백은 이전처럼 자신의 고집을 내세울 자신이 없었다.
“엇?”
헌데 또다시 거대한 횃불의 물결에 구멍이 뻥 하고 생긴다.
“여, 염 대장! 저기 봐! 저기 또 구멍이 생겼다고!”
송백의 가리킴에 염 대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도련님, 전쟁에 대해 모르시면 가만히 있으십쇼. 밤 전투 중에 횃불이 꺼지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기엔 저곳은 전투의 한복판도 아니다.
전장으로 따지면 자신들이 있는 위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
그 순간.
송백의 눈이 번쩍 떠졌다.
거대한 구멍, 그곳에서 나온 어둠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무수한 촛불들이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한순간 꺼지듯, 횃불들이 연달아 꺼지며 어둠의 길을 만들어 낸다.
“저, 저기!”
“도련님!”
“저기 보라고 새끼야!”
“……!”
어둠의 길은 곧장 송백 일행이 있는 곳으로 향한다.
“흡!”
이상함을 깨달은 염 대장은 곧장 옆에 있던 무사의 횃불을 빼앗아 들고 전방으로 뛰어든다.
쑤아악.
하지만 염 대장은 어둠에 삼켜져 흔적조차 남지 않는다.
“이, 이 무슨…….”
말을 끝내기도 전에 사방에 어둠이 내려앉는다. 그리고 그제야 들리는 비명.
“크아악.”
“사, 살려…….”
“히익! 귀, 귀신!”
살을 꿰뚫는 소리가 이토록 크게 들리는 건 처음이다.
근원을 알 수 없는 공포에 도망갈 생각마저 망각해 버린 송백은 품 안에 손을 넣어 신호탄을 잡았다.
그저 이 어둠을 피하고 싶다는 가장 본능적인 행동.
푸쉭.
하늘에 쏘아져 밤을 밝혀야 할 신호탄은 어둠 속을 향해 날아가다 폭발했다.
송백은 신호탄이 보이는 광경에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입을 쩍 벌렸다.
-----!
어둠 속에서 보이는 것은 피부가 모두 벗겨져 내장과 심장의 움직임이 훤히 보이는 괴물.
괴물 손에서는 검으로 보이는 뼈가 불쑥 튀어나온다.
‘시체가…… 움직……?’
송백은 생각을 완성하지도 못한 채 어둠 속에 완전히 먹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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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생기거든, 그곳에 검기든 권기든 날리는 겁니다. 그냥 검으론 상대할 수 없습니다.”
남궁선화는 서른 번째인지 서른두 번째인지 모를 적을 베며 생각했다.
그게 쉽냐고.
단전은 이미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창궁대원들과 창궁검진을 펼쳐 항전해 보았지만, 무적이라 자부심 가졌던 검진도 끝도 없이 밀려드는 횃불과 인파에는 당해낼 수가 없었다.
“아가씨!”
창궁검진이 파쇄되고, 창궁대가 뿔뿔이 흩어졌다.
걷는 걸음마다 바닥에는 수십의 부상자들이 가득하건만, 아직도 검과 횃불을 들고 달려오는 이들은 하나도 줄지 않은 것 같다.
“아가씨! 검진으로 들어오십시오!”
부상에도 불구하고 부득불 따라왔던 강서표가 발악하듯 외쳤다.
“강 대주님! 창궁대는 이미 와해됐어요!”
“다른 걸 펼치시는 겁니다!”
“뭐요?”
다른 검진? 제왕검진을 이야기하는 건가? 그건 아직 익히지 않았는데…….
“백호검진 말입니다!”
아아. 그제야 남궁선화의 머릿속에 따뜻한 밥 한번 먹어 보겠다고 익힌 검진이 떠오른다.
“하지만, 주변엔…….”
“제가 할게요!”
어느새 고개를 돌리니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동룡이 말한다.
“대체 언제…….”
“아가씨! 어서!”
대체 언제 와 있었던 거냐고 말할 시간도 없이 강서표와 동룡이 그녀의 주위로 자리를 잡는다.
“발진!”
남궁선화와 강서표는 동룡의 외침에 검을 휘두르기 시작한다.
채채채챙.
가까스로 적들이 날리는 검을 쳐내고 요혈에 검을 찔러넣는다. 부상을 입은 적이 바닥에 쓰러진다.
그 틈 사이로 다음 적이 밀려 들어온다.
동룡의 인도에 따라 자리를 바꿔 잠시 쉬는 시간을 갖는다.
신기한 일이다.
창궁검진만큼의 파괴력은 없지만, 유연하다. 힘이 덜 든다.
검진이란 것이 한번 깨지면 다시 자리를 잡기란 거의 불가능한 것이지만, 세 명이서 짜는 검진이라 해진과 개진이 손바닥 뒤집듯 간단하다.
더 신기한 건 동룡이다.
이십 년이 채 안 되는 내공밖에 없는 동룡은 검진을 형성하자 창궁대원 못지않은 실력을 발휘한다. 아니 오히려 지금은 백호검진을 이끌고 있다.
“금표랑 은호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동생 같은 아이들이 떠오른다. 힘든 여정을 함께 하면서 어느새 친동생 같은 친밀함이 생긴 것이다.
“대사형께서 우린 검기를 다룰 줄 모르니 다른 분들과 검진을 짜라고 하셨어요.”
“아…….”
정신없이 싸우는 와중이라 그 위험한 존재들을 깜빡하고 있었다. 한편으론 이렇게 난전이 펼쳐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이 과연 끼어들 수 있을지 의문도 들었다.
더구나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때리라는 이야기는 더더욱 신뢰가 가지 않았고.
“저기!”
그런데 그때 동룡이 검을 휘두르다 말고 한쪽을 가리킨다.
10장 거리에 어둠이 내리더니 일직선으로 다가온다.
마치 그곳에만 물이 뿌려진 듯 횃불이 꺼지며 인파도 사라진다.
“아가씨!”
“봤어요!”
이번엔 동룡이 뒤로 빠지고 강서표와 남궁선화가 앞으로 나선다.
설마 했던 일이 진짜로 벌어진 것이다.
남궁선화는 얼마 없는 내공을 박박 긁었다.
“지금입니다!”
강서표의 외침과 동시에 모든 힘을 끌어내어 검기를 날린다. 초식이고 형식이고 지키는 것 없이 날려보낸 검기는 그저 검기 그 자체로의 파괴력만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날카로움이라곤 하나도 없는…….
헌데.
-키엑!
빠르게 다가오던 어둠이 멈추며 그 안에서 짐승의 비명 소리가 들린다.
“히익!”
어둠 속에서 몸을 드러낸 것은 피부가 모두 벗겨진 것 같은 시체의 모습.
갈비뼈 안에서 장기들이 움직이는 모습이 더욱 공포스럽게 느껴진다.
잠시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던 괴물은, 다시금 펼쳐놨던 껍데기 같은 것으로 주위를 둘러싸며 어둠 속에 숨어들려 한다.
하지만 강서표도 남궁선화도 이제 한계다.
둘은 눈앞에서 무서운 적을 놔줘야 한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차아!”
그 순간. 동룡이 번개처럼 튀어나간다.
“동룡아! 안 돼!”
어둠 속을 비집고 들어간 동룡은 모습을 드러낸 괴물에게 공격을 퍼붓는다.
채챙. 채챙. 채채챙.
검기도 없는 단순한 공격에 불과하지만, 동룡이 괴물의 뼈를 공격할 때마다 수복되던 검은 껍데기가 다시금 펼쳐진다.
“대체 어떻게…….”
더구나 동룡의 공격은 기민할 정도로 군더더기 없이 요혈만을 노리고 있다.
심장을 찌르고 장기를 찌르고, 눈알을 찌르고, 입속을 찌른다.
그럴 때마다 괴물이 당황하는 모습들이 보인다.
“대주님!”
“네! 아가씨!”
긴 대화도 필요 없다.
동룡이 잡은 기회를 절대 놓쳐선 안 된다는 일념하에 집요하게 공격을 가한다.
전투를 시작한 이후로 처음으로 희망이 느껴진다. 여태껏 실체조차 잡지 못했던 적에게 공격이 통한다.
“어엇?”
관문패를 노리고 달려들던 응시생들과 그들이 고용한 무사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린 남궁선화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또다시 어둠이 생겨나며 이쪽으로 맹렬하게 다가오고 있다.
이미 전투에 한창이었던 응시생들도 뭔가 이상함을 느끼곤 어둠에서 도망치기 시작한다.
하지만 수백이 모인 전장이 그리 쉽게 빠져나갈 수 있는 공간은 아니었다.
“비, 비켜!”
“뭐야 대체!”
“이건 정보에 없었다고!”
수십의 무사들이 순식간에 어둠 속에 잠식되고, 곧이어 남궁선화와 강서표, 동룡을 한꺼번에 삼켜버리려는 순간.
촤악!
어디선가 날아든 빛나는 채찍이 어둠을 감아 잡는다.
아무것도 없어야 할 어둠 속에서 인간의 형제가 채찍에 감겨 바닥에 쓸린다.
“대사형!”
“잘했다!”
그 정체는 다름 아닌 진소운.
왼손에 빛나는 채찍을 감은 그는 자신이 제압한 어둠에 권기를 쏟아붓는다.
퍼퍼퍼퍼퍼퍼퍼퍼퍽.
일순간에 바닥이 움푹 파일 정도의 빠르고 강력한 공격.
이윽고 어둠은 뿌드득 소리를 내며 납작하게 변해 붉은 피를 콸콸 쏟아낸다.
동룡과 남궁선화, 강서표가 상대하던 괴물도 그 장면을 보았는지, 재빨리 세 사람을 죽이고 자리를 뜨려 한다.
하지만 공격 일변도에 동룡을 떨궈내지 못했다.
촤악!
결국 진소운의 왼팔에서 뻗어나온 광휘의 채찍이 괴물의 목을 감는다.
-케엑!
괴물은 덫에 걸린 짐승처럼 쭈욱 끌려가더니 이내 목이 잘린다.
자신이 내려칠 땐 강철 같았던 뼈가 순식간에 잘리는 걸 보며, 대체 진소운이 저 괴물을 상대하는 데 얼마나 많은 내공을 쏟아붓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진 공자.”
“허억, 허억, 괜찮습니까?”
아니나 다를까 괜찮냐는 질문은 이쪽에서 해야 할 것 같은 몰골이었다.
“진 공자, 대체 지금…….”
얼굴은 창백하게 변해있고, 온몸의 핏줄이 모두 터질 듯 부풀어 올라 있다.
한계까지 내공을 끌어올렸을 때 나타나는 증상.
이미 주화입마의 위기 단계를 한참 넘은 상태다. 조금만 잘못하면 바로 폐인이 될 수도 있는 상황.
“더 이상 움직이지 말아요.”
남궁선화가 진소운의 팔을 잡지만, 진소운은 그런 그녀의 손을 잡는다.
“아직 움직여야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진 공자! 여기서 더 움직이면 진짜 죽을 수도 있어요.”
“다행히 아직 선천지기는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억지로 미소 짓는 입꼬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성모란이 몇 번 이야기했던 ‘미친 사람’이라는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여덟을 잡았습니다. 이제 열하나만 더 잡으면 됩니다.”
남궁선화는 절박하게 말했다.
“그러다 죽어요!”
진소운은 작게 한숨을 몰아쉰다. 이제야 겨우 숨이 돌아온 모양.
그는 남궁선화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한다.
“제가 안 움직이면……. 다른 이들이 죽을 겁니다.”
“…….”
“전 그걸 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다 당신이 죽으면?’이라는 말은 입가를 맴돌다 다시 삼켜진다.
뭔가 다른 말을 꺼내기도 전에 진소운은 제 할 말을 이어 한다.
“조금만 버티고 계십쇼. 여기 모인 응시생들도 저들에 의해 조금씩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하고 물러나고 있습니다. 전장도 금방 해소가 될 겁니다.”
“…….”
“남궁 소저…….”
지금 할 수 있는 말은 그의 걱정을 조금 더는 것 정도겠지.
“……알겠어요. 미안해요. 힘이 못 돼서.”
“그게 아니라……. 꼭 살아계십시오.”
“……네?”
진소운은 전장 한복판에서 짓는다고 생각할 수 없는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금방 오겠습니다.”
“…….”
남궁선화가 대답을 하려는 순간, 진소운이 바닥을 박차고 다시금 어둠 속으로 몸을 던진다.
그가 들고 있는 금빛 채찍의 빛이 별똥별처럼 그의 궤적을 따라 늘어진다.
“괜찮으십니까?”
“금방…… 제게 돌아온다고 했죠?”
강서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뜻이 아닌 것 같은…….”
“분명히 들었어요. 금방 제게 돌아오겠다고…….”
“……아가씨 힘드신 거 같은데. 조금만 쉬고 계십시오.”
“아니에요. 정말 괜찮아요. 회복했어요.”
남궁선화는 어쩐지 바닥난 내공이 반쯤은 채워진 듯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