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아비규환(阿鼻叫喚) 대여정(大旅程)>
“거 보세요! 제가 말씀드렸죠! 저희 사형들이 해낼 거라고!”
말은 그렇게 하지만 왕금산은 알고 있었다.
왕소소가 사형제들이 태을문을 나선 뒤로 새벽마다 정안수를 떠 놓고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는 것을.
남악에서 보내온 전서를 쥐고 방방 뛰는 그 모습이 보기 좋아, 왕금산은 그저 모른 척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게, 말이다. 진짜로 해냈구나.”
사실 왕금산의 심정도 왕소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단 네 명으로 시작한 지옥 정시.
그저 경험이나 쌓을 겸 강호를 한 바퀴 돌고 오겠거니 싶었을 뿐이다.
한데, 일관문과 이관문을 훌륭한 성적으로 통과한 것은 물론이고, 삼관문에서 무당을 상대로 삼관문패를 따냈다.
그것도 태을문의 제자 네 명 모두가.
이 결과가 진소운의 능력에 의한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세상 그 어떤 이를 데려다 놓는다 한들, 진소운과 똑같은 결과는 만들 수 없을 테니.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직원이 아니라 데릴사위를 제안했어야 했나.’
한동안 자신이 진소운을 데릴사위로 노린다는 소문이 돈 적이 있었다.
아마 오해로 불거진 일이라며 허허 웃고 넘겼는데 지나고 보니, 그때가 가장 좋은 기회였다.
“쩝.”
상인이다 보니 놓친 기회에 큰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고 보니, 왜 무당은 사형들을 지목한 거죠?”
한창 웃던 왕소소의 얼굴이 차갑게 변한다. 왕금산은 속으로 아차 싶다.
“……그, 글쎄다. 무당 역시도 삼관문에서 가장 약한 존재를 지목하지 않겠더냐? 그런 면에서 봤을 때. 태을문을 지목하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
왕금산은 부디 왕소소가 모르고 넘어가 주길 바라지만, 왕소소의 생각에 잠긴 얼굴은 결코 그렇게 넘어가지 않을 것 같다.
“……역시 마령고원에서의 일에 원한을 가지고 있는 거군요.”
“…….”
그리고 정확히 꿰뚫는다.
무당 측에선 마령고원 사태 이후 용소아의 위명이 약화되는 것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았다.
더불어 모용강의 인정으로 태을검제의 진전을 되찾았다는 점에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관심을 받고 있는 시점.
무당에선 용소아의 일에 더불어 태을검제의 검식을 확인해 보고자 태을문을 지목한 것이다.
“아버지, 우리 왕가장이 무당과 함께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있죠?”
“……저기, 소소야.”
얼마 전에도 화산과 점창파에 관련된 거래들을 끊었다.
용봉지회가 태을문에 와서 한 행위로 인해 분개한 왕소소가 일에 대한 전말을 왕금산에게 고했고, 화산과 점창에 압박해 주길 바랐던 것.
하지만 냉정한 상인의 머리를 가진 왕금산이 그런 치기 어린 감정에 의해 손해 보는 일을 허락할 리 없었다.
“화산과 점창에서 나오는 수익의 두 배를 제가 만들어 드릴게요.”
그 단호함과 함께 시작된 왕소소의 새로운 사업들.
기존 화산과 점창에 연관되어 있던 거래처들을 모두 해체한 후, 북방과 서역의 거래를 새로 만들기 시작했다.
사업의 시작 지점에서 손해를 감수하는 것도 없었다.
왕소소의 손길이 닿는 순간, 마치 기다려왔다는 듯 손을 뻗어오는 상대들은 왕가장의 막대한 이익과 더불어 왕가장의 영역을 더 넓혔다.
물론 부작용이 없는 건 아니다.
화산과 점창과의 거래가 끊기면서 섬서성 일대에서 그들의 보호를 기대할 수 없었고, 이로 인해 왕가장은 자체 무력을 더 키우기 위해 막대한 투자를 해야 했다.
‘그것도 그리 나쁜 일이 아니지.’
덩치가 커진다는 건 확장할 수 있는 세력이 더 커진다는 것이니까.
진짜 부작용은 왕금산 자신이 너무 힘들다는 것이다.
새 사업의 입안이나 계획은 소소가 짜도, 일의 실행은 결국 왕금산이 해야 한다.
가문의 발전보다 소소와 시간을 더욱 보내고 싶은 왕금산에겐 고문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무당은 우리와 함께하는 사업이 많지 않단다. 그리고 강호의 일이라는 것들이 대부분 이런 식으로 돌아가지 않느냐. 그냥 넘어가자꾸나.”
왕소소는 단호하다.
“아니요! 아버지, 한번 물러나면 두 번 물러나야 하는 거예요. 과연 왕가장이 집요하게 상대를 물어뜯는 가문이었다면, 제 납치 같은 사건이 일어났을까요?”
역시 피는 못 속인다고, 왕소소도 왕가장의 딸이 맞다.
사업적 수단은 물론이거니와 평생 집안에 강제로 붙잡혀 읽은 수만 권의 책들이 그녀의 지평을 넓혀줬고, 더불어 타고난 입담은 상대에게서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는다.
“휴…….”
그리고 결국 자신이 원하는 것을 쟁취해 낸다.
“무당이 우리와 함께 하는 사업이 많지 않다면 그들의 사업을 빼앗아 와야겠어요.”
“…….”
“아버지, 제가 기획안을 올릴게요. 괜찮은지 봐주시겠어요?”
괜찮은지 안 괜찮은지 평가해 달라고 하지만 그 기획안이 안 괜찮을 리 없다는 것쯤은 왕금산이 더 잘 알고 있다.
왕금산은 조금이라도 더 쉬고 싶은 강력한 열망에 다른 이야기를 꺼내 보았다.
“근데, 그보단 지금은 사형제들의 승리를 축하해야 하지 않겠느냐?”
태을문 제자들의 이야기가 나오자 얼굴이 다시금 보들보들 변한다.
사나운 늑대 같았던 아이는 어느새 새끼강아지로 변해있다.
“작게 잔치를 열어 줄 테니 태을문의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건 어떻겠니?”
한 일주일 정도 잔치를 하다 보면 복수니, 뭐니 그런 것도 다 잊지 않을까?
“정말요? 하지만 아직 진짜 중요한 관문이 남아있다고 하던데요. 괜히 섣불리 잔치를 벌였다간.”
왕금산은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시험의 결과를 떠나서 태을문의 제자가 무당의 제자를 이겼다는 것은 역사에 길이 남을 상징이란다. 이런 과정을 더욱 의미 있게 받아들이는 것이 더 중요한 것 아니겠느냐?”
왕실을 상대로 거래를 할 때도 생기지 않았던 절박한 마음을 담아 입을 털자, 왕소소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렇…… 겠지요?”
“그럼. 과정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 아니더냐.”
“고마워요, 아버지!”
왕소소는 왕금산의 품에 폴짝 뛰어든다.
왕금산은 간만에 안아보는 딸의 온기에 가슴이 다시금 벅차오른다.
“이 소식을 태을문 사형제들에게 알려줘도 되겠지요?”
“그래 그러려무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왕소소가 뛰어나간다.
왕금산은 저도 모르게 왕소소를 제지하기 위해 어깨를 붙잡는다.
“소소야 뛰면 안 된…….”
분명 소소의 어깨를 붙잡았다 생각했건만, 왕금산의 손은 소소의 모습을 통과해 버렸다.
“허, 허상?”
고개를 들어보니, 왕소소는 벌써 저만치 앞서 달려가고 있다.
왕금산은 내심 놀람을 금치 못했다. 분명 왕소소는 체질 때문에 태을심법이라는 기초 무공밖에 익히지 못하는 것이 분명했는데.
어찌 발걸음과 움직임마다 현기가 가득 들어있단 말인가.
“허어…….”
조만간 태을문에 문의를 위해 방문을 한번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왕금산이었다.
“더불어 데릴사위 얘기도 꺼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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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어…….”
“흐음…….”
“커흠…….”
어색한 침묵이 감돈다.
서로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불편한 신음성이 터져 나온다.
“저어…… 전, 괜찮습니다.”
모용재화의 말에 성모란과 남궁선화는 한심한 눈빛을 감추지 못한다.
“우리가 안 괜찮아! 멍청아!”
“으휴…… 설 언니를 어떻게 봐야 하지…….”
성모란과 남궁선화가 각각 대전자를 이겨 삼관문패를 획득하고, 패배가 예상되었던 태을문의 제자들이 무당으로부터 모두 승리를 거두며 잔치를 벌여도 모자란 분위기였으나, 정작 유망주였던 모용재화가 무당의 제자에게 패배하며 잔치에 찬물을 끼얹었던 것.
“그, 그래도 형님을 비롯한 태을문의 사람들이 모두 합격해서 얼마나 다행입니까. 이것이 바로 무림의 정의가 바로 서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바 아닐까요? 하하.”
“…….”
“…….”
진소운은 물론이고 모용세가의 무사들도 어처구니없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모용재화가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는 사이.
남궁선화가 진소운을 바라보며 말했다.
“바로 출발해야겠죠?”
진소운은 고개를 젓는다.
“오늘은 쉽니다.”
“네?”
예상외의 답변에 남궁선화가 토끼 눈을 뜬다. 당연히 관문패를 얻었으니 누구보다 빠르게 출발할 거라 생각했다.
“마지막 대여정을 위해 주문한 물건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더불어 2일 차에 합격한 이들과 동시 출발해서 추격자들을 조금 나눌 생각입니다.”
“주문한 물건이요?”
“그나마 대여정을 조금 편하게 해줄 물건입니다.”
“…….”
남궁선화가 어떤 물건인지 감도 못 잡는 사이, 모용재화가 슬며시 진소운에게 다가왔다.
“형님, 혹시 저희도 함께하면 안 될까요?”
“…….”
“…….”
“…….”
진소운은 물론이고, 성모란과 남궁선화도 백안시하며 모용재화를 바라본다.
“넌…… 삼관문 패를 얻어야 하지 않느냐?”
모용재화에게 남은 기회란 대여정 과정에서 삼관문패를 빼앗는 것뿐이다.
무조건 도망쳐야 하는 상황인 진소운 일행과 함께 움직였다간 마지막 기회마저 놓칠 수 있었다.
“전 어차피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더불어 형님과 함께하다 보면 그나마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
“…….”
모용재화에겐 아직 팔십의 인원이 있다. 삼관문 패를 가진 자를 잘 골라 최적의 순간에 승부를 보면 합격할 가능성도 있었다.
“괜찮겠느냐?”
“물론입니다.”
“아니, 우리랑 함께했다간 파검님이 그냥 넘어가지 않으실 것 같은데. 괜찮겠냐 묻는 것이다.”
“……아! 괘, 괜찮을 겁니다.”
모용재화는 작게 ‘어차피 맞아 죽을 건데 뭐…….’라고 중얼거렸다.
진소운은 작게 한숨 쉬며 모용세가의 대주에게 물었다. 이미 이성을 상실한 듯한 모용재화와의 대화는 불가능해 보였다.
“삼관문패를 쫓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모용세가 무사들을 이끄는 대주 백원각이 한숨을 내쉰다.
“도련님께선 이미 간밤에 함께 하고 싶다고 얘기하셨습니다.”
“하지만 삼관문패를 얻지 못했으니…….”
“도련님의 고집은 파검님 못지않지요. 남궁소저와 성소저도 걱정되기도 하고, 더불어 소운님께는 저희 세가가 진 빚도 있지 않습니까.”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지만 모용상원의 일을 언급하는 백원각.
그리고 그제야 모용재화가 자신들을 위해 남은 시험을 포기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부상자를 제외하면 채 사십이 안 되는 인원으로 대여정을 치를 수 없다.
그들을 위해 모용재화는 자신의 시험을 포기하고 그들과 함께하기로 한 것이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
모용재화의 마음 씀씀이를 거절할 수 없었던 진소운이 작게 한숨을 쉬자, 머리를 쥐어뜯던 모용재화가 반색하며 방방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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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객잔 앞엔 기이한 모양의 마차 두 대가 당도해 있었다.
장식이 제거된 투박한 모양의 마차 겉면에는 철판이 여기저기 붙어있었다.
모용재화가 신기한 눈으로 마차를 보며 물었다.
“형님, 이건 대체 용도가 뭡니까?”
“대여정 중에 잠을 자는 용도로 쓸 생각이다.”
“아, 누님들 때문에 따로 주문하신 겁니까?”
“아니, 모든 사람들이 번갈아 가면서 잘 거다.”
“돌아가면서 하루씩 자는 겁니까?”
“아니, 행군 중에 번갈아 가면서 자는 거지.”
“네?”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곤 계속 움직일 거다. 그러자면 잠시라도 안전하게 잘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느냐?”
“…….”
모용재화는 입을 쩍 벌린 채 믿기지 않는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마차에서 새로 주문한 방패를 꺼내어 금은동 형제들에게 나눠주었다.
“휴우…….”
“쩝.”
금표와 은호는 여전히 길게 한숨을 내쉬며 받아든다.
“왜? 싫으냐?”
“그럴 리가요. 부모님이 얼마나 한탄스러워하시겠습니까.”
“싫으면 안 차도 된다.”
“네?”
“정말요?”
내 말에 반색하는 금표와 은호.
“어? 새로 주문했나 보네요? 안 그래도 우리가 여벌로 몇 개 더 주문했는데.”
옆으로 다가온 남궁선화는 왼팔에 우리가 착용했던 것과 같은 작은 방패가 패용되어 있었다.
“복양 평원에선 이게 그렇게 부러워 보이더라고요.”
남궁선화는 물론이고, 성모란, 창궁대와 철검문의 무사들까지 모두가 작은 방패를 패용하고 있었다.
모용재화를 비롯한 모용세가의 무사들은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그 모습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잘하셨습니다. 앞으로의 대여정에선 이게 꼭 필요하게 될 겁니다.”
“응? 금표랑 은호는 이거 안 차니?”
남궁선화과 놀란 눈으로 묻자 두 사람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금 차는 중이었는데요.”
“전 이거 없으면 무공을 못 씁니다.”
난 쓴웃음을 지으며 모용재화에게 시선을 돌렸다.
“여벌로 방패들을 챙겨 왔으니, 모용세가의 무사들 중 원하는 사람들에게 나눠주거라.”
“아…… 예,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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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시작된 대여정.
남악을 나서는 순간부터 사람들이 하나둘 따라붙기 시작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거리를 두고 따라붙는 이들과 거리를 좁혀 따라붙는 이들이 혼재되어 있었다.
“역시나 쫓는 이들이 많네요.”
그나마 2일 차이기에 아직 시험 보는 사람들이 많아서 이 정도인 것이다.
삼관문 시험이 끝나는 3일 차가 되고 탈락자들이 확정되는 순간 추격은 더 거세질 것이다.
“속도를 최대한 높이겠습니다.”
“……초장부터 속도를 내면 좀 힘들지 않을까요?”
“복양을 지나면 계곡이 하나 나옵니다. 거기까지 최대한 일찍 도착한 후에 잠깐 쉬겠습니다.”
“쉰다고요? 쉬지 않기 위해 저 강철마차를 준비했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곳에서 무당을 칠 생각입니다.”
“에엑?”
남궁선화의 눈이 부릅떠진다.
난 뒤쪽을 가리켰다.
“저들 중 가장 경계해야 할 상대는 무당입니다. 그들을 처리하지 않으면 대여정 내내 더 힘들어집니다.”
“아니 그렇다 해도 이 와중에 습격을 한다는 게.”
그때 동룡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선화누님 원래 이유 없이 쫓길 땐 이유를 만들어 주는 거라고 했습니다.”
“뭐?”
남궁선화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진다.
“아니, 대체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걸 가르친 거야?”
동룡이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가리켰다.
“…….”
“아니, 그게 원래 그런 뜻이 아니라…….”
나와 남궁선화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감돈다.
억울하다.
이럴 때 쓰라고 말해준 게 아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