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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108화 (108/357)

#108. <아비규환(阿鼻叫喚) 대여정(大旅程)(7)>

궁을 받아 든 모용재화는 얼떨떨한 얼굴이다.

“하, 하지만 형님 제가 어떻게…….”

“궁을 쓸 줄 모르더냐?”

“아, 아니 그게…….”

난 녀석의 손가락을 잡았다. 검지와 중지, 엄지에 몇 번 터졌다 아문지 알 수 없는 굳은살이 두툼하게 배겨 있다. 검사들에게는 생길 수 없는 부위의 굳은살이다.

“뭐가 문제냐?”

“…….”

모용재화는 부상당한 백원각을 바라본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모용세가의 무사들을 바라본다.

“세가를 나오면서 잡기를 쓰지 않겠다는 약속이라도 했던 것이냐?”

모용세가는 장자인 모용재화가 검보다 다른 잡기에 빠져있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네? 그걸 어찌…….”

“지금 그런 약속과 저 사람들의 목숨 중에 무엇이 더 중요하냐?”

“당연히…….”

“그럼 된 것 아니냐.”

그리고 그것이 일궁당천(一弓當千) 파궁(破弓)의 등장을 한참이나 뒤로 미뤘다.

“…….”

난 갈망하는 모용재화의 품에 화살통을 안겼다.

“검을 쓰면 구할 수 없다. 궁을 쓰면 구할 수 있다. 뭐가 고민인 거냐?”

난 모용세가의 멸망 후 등장할 파궁은 필요치 않다.

정마대전의 승기가 마교 쪽으로 기운 후, 홀로 마교의 대군을 막았던 파궁은 필요치 않다.

“파검님 말 따위라면 집어치워라. 소중한 사람을 지키는데, 검이건 활이건 무엇이 중요하냐, 자신이 잘하는 것을 쓰면 될 일이지.”

“……!”

모용재화의 두 눈이 격하게 흔들린다.

“더 고민할 것이 있느냐?”

“……그것이 아니라 전 궁도를 익힌 적이 없습니다. 그저 혼자 놀 때 써본 것이 다인데…….”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라. 내가 배운 것을 알려줄 테니.”

귀주에서 홀로 만 명의 지옥아귀단을 막아섰던 파궁은 이제 12봉성을 막아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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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재화는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자신이 활 쏘는 것을 즐기는 건 어찌 알며, 또 그것으로 적을 막아내라 하는 것은 또 무슨 말이란 말인가.

애당초 자신이 활을 썼던 것은 고민을 털어내기 위함이었다. 활을 쏘고 있을 때면 세가와 자신에 관한 고민과 걱정이 들지 않아서였을 뿐인데…….

그것으로 적을 막아내라니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으갸갸갸각.”

진소운에게 잡힌 몸이 붕 떠오르며 삽시간에 대지가 멀어진다. 예의 귀궁문의 공자가 숨어있던 나무 위에 안착한다.

“내가 아는 이 중에, 홀로 만 명의 적을 막아내려 한 사람이 있었다.”

진소운은 화살 하나를 뽑아 들었다.

“그는 수백만의 인원이 대피할 시간을 벌기 위해 두려움 없이 홀로 나섰지.”

저 멀리 귀궁문이 쏘아 올린 신호탄을 보고 미친 듯이 달려오는 12봉성의 인원들이 보였다.

“모두가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런 건 신화에서나 나오는 일이니까.”

모용재화는 자신이 급박한 상황에 빠졌다는 것도 잊은 채, 이야기에 빠져 군침을 삼켰다.

“어, 어떻게 되었습니까?”

“막아내었다.”

“허!”

“사람들은 검을 만병지왕이라 하지? 난 그날 그 광경을 두 눈에 담고는 생각했다. 만병지왕이 검일지는 몰라도, 세상 가장 무서운 병기는 바로 궁이라는 걸.”

넓은 관도를 거침없이 달려오는 12봉성들.

금방이라도 들이닥칠 듯한 모습에 모용재화의 두 손에 땀이 난다.

“혀, 형님.”

진소운은 여유롭게 활시위를 당긴다.

“잘 봐라. 그가 남긴 궁도이다.”

핑.

말끔한 호선을 그리며 화살이 12봉성에게 날아간다.

하지만 그들을 막기엔 역부족이다. 오백에 달하는 인원에 비해 화살 한 대는 너무 적으니까.

“어어?”

모용재화의 두 눈이 번쩍 떠졌다.

진소운이 쏘아낸 화살이 수십 개로 분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히이이잉.

급박하게 달려들던 12봉성의 무사들과 말들이 깜짝 놀라며 자리에 멈춰 선다.

“어찌, 귀궁문의 환시를…….”

“귀궁문의 것이 아니다.”

“네?”

“내가 익힌 것은 나의 깨달음을 화살에 담는 법이다. 그리고 난 방금 태을문의 검법을 화살에 담았을 뿐이다.”

이어 진소운은 방금 펼친 궁도의 요결을 읊기 시작한다.

“이걸…… 제게 알려주셔도 되는 겁니까?”

어린 시절부터 무공에 대해 누구보다 깊이 공부해 왔기에 안다. 얼마나 높은 수준의 궁도인지, 얼마나 긴 세월 동안 완성시킨 무공인지를.

“난 그저 보관만 하고 있었을 뿐, 그가 가장 원하던 이에게 전해준 것뿐이다.”

“그게 저라는 말씀입니까?”

“그는 일찍이 자신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가족을 잃었다고 생각했고, 훗날 자신과 똑같은 고민을 하는 이에게 해결책이 되길 바랐기 때문이지. 나는 해당 사항이 없는 사람이고, 넌 적법한 후계다.”

“……이름이 무엇입니까?”

“없다. 그 또한 스스로 짓길 바랄 뿐이었다.”

“……파천, 파천신궁이라 짓겠습니다.”

진소운의 얼굴에 묘한 웃음이 어린다.

“오만하구나.”

“아니오. 그 정도의 이름이 어울릴 법한 대단한 무공입니다.”

“그럼 더 이상 고민할 필요는 없겠지?”

“네. 일각…… 일각만 시간을 벌어주시겠습니까?”

애당초 이 짧은 순간에 파천신궁의 요체를 모두 흡수할 수 있을 리 없다.

가장 중요한 것들만을 쏙쏙 빼내어 건곤파섬검과 조합한다.

어찌 된 것인지, 요결로만 들었을 때 복잡했던 무리들은 건곤파섬검과 함께 엮이니 무엇보다 통쾌하고 시원한 답변을 내놓기 시작했다.

마치 헤어진 반쪽을 만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진소운의 환시에 놀랐던 12봉성들이 다시금 하나둘 고개를 내민다.

진소운은 활을 쏘았고, 이번엔 아래쪽에서 대기하던 일행들이 덩달아 화살을 쏘았다.

환시 속에 숨은 진짜 화살들이 12봉성의 무사들의 몸을 꿰뚫자 다시금 12봉성이 고개를 숨겼다.

그렇게 몇 번, 화살을 피해 숨고 내밀고를 반복하던 이들이 안쪽에서 부산하게 움직이더니, 이내 하나둘 방패들로 전방을 보호하기 시작했다.

핑.

슈슈수수숙.

진소운의 환시 속에 숨겨진 화살들이 12봉성의 머리 위에 떨어지지만, 방패에 모두 막힌다.

더구나 두 발 중에 한 발은 비검을 던져 진소운의 화살을 떨군다. 완벽하지 않은 환시가 파훼당한 것이다.

어느새 거리는 팔십 장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직 멀었느냐?”

“아! 죄, 죄송합니다. 건곤파섬검이 너무 찰떡같이 잘 맞아서 섬광분운검을 대입시켜 보려다가 그만…….”

“녀석아! 정신 차려라. 백 대주의 목숨이 너에게 달렸다.”

“넷!”

모용재화는 그렇게 대답하곤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나무 위에 서 있었음에도 작은 흔들림도 없었다.

잠시 눈을 감았던 그가 눈을 뜨는 순간.

퉁.

진소운의 것과는 다른 짙은 울림과 함께 한 대의 화살이 날아든다.

호선이 아닌 직선으로.

수십 발이 아닌, 단 한발로.

날아드는 화살을 보며 비웃음을 짓던 12봉성들이 슬며시 방패까지 치우고 검으로 화살을 쳐내려 하는 순간.

쾅.

검으로 쳐내려던 무사의 오른쪽 어깨를 꿰뚫고 그를 이 장이나 밀고 들어간다.

통마시(通馬矢).

말을 꿰뚫고 그 위에 갑옷 입은 무사의 몸까지 통과하는 화살.

화살의 위력에 경악한 12봉성의 무사들이 서로 뒤엉키며 바위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어느새 모용재화의 시선에 보이던 이들은 하나도 없어지고, 앞이 훤히 뚫렸다.

“네가 백 대주를 구했다.”

금방이라도 모용재화의 일행을 도륙내려 달려오던 이들은 숨소리마저 내지 않았다.

그 갑작스런 고요함이 모용재화에게 너무도 짜릿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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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번 무림정시는 혼란하기 그지없다.

어느 것 하나도 예측이 되지 않는다.

동남 구역에선 산적들과 왜놈들이 합세하여 일관문을 통과하지 못한 자들이 수두룩했고, 북서 구역에선 사도로 추정되는 이들이 응시생들과 충돌을 일으켜 의도치 않게 중도탈락자들이 대거 생산되었다.

동북 구역에선 오백에 달하는 사망자와 그의 흉수로 보이는 정체불명의 인원에 대한 조사를 만통부에서 시행하는 중이었다.

전회와 같이 성적은 예측되지 않았고, 의외의 인물들이 탈락하거나 떠오르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그중 12봉성의 움직임을 주시하던 명현 도장은 그들이 숭산에 멈추어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자, 장로전의 정도회 인사를 소집했다.

“애당초 그치들에게 기대를 거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본래 목적은 태을문의 포섭 아니었습니까?”

“어쨌든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그 둘이 서로 반목했으니 좋은 것 아닙니까.”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12봉성 중에 입관패를 빼앗긴 자들이 있답니다.”

정도회 인사는 모두 열여섯 명. 전체 장로전 서른 명 가운데 과반에 해당하는 이들이다. 그들 면면이 능히 손 하나로 천하를 들썩일 수 있는 이들임을 생각하면, 그들의 모임 자체에 그만큼 무게가 있어야 함을 알아서인지, 그들은 서로를 책망하는 것을 쉬지 않았다.

“자자, 잠시 고정하시오. 우리 정도회가 일치단결하지 않으면 차후 대업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당대 정도회 회주 명현 도장이 엄숙하게 이야기했지만, 그의 의견에 혀를 차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당초, 당선 공약으로 만통부를 정도회 아래 두겠다는 약속이 차일피일 미뤄지며, 본래부터 있었던 그의 자격에 대한 근원적 문제 제기가 있었던 탓이다.

“일치단결이고 나발이고 정도회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게 생겼소. 만약 정도회의 인원이 무림학관에 수석으로 입학하지 못한다면 어찌할 것이오?”

“그럼 어쩔 수 없지요.”

“허……! 아니, 지금 그걸 말이라고!”

명현 도장도 제갈소명을 압박하여 만통부에 제자를 넣을 계획이 어그러지면서 통탄을 금치 못했지만, 애당초 작전을 어그러뜨렸던 진소운이 여전히 날뛰어 준 덕분에 다시금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회주. 태을문이 무림학관에 들어선다는 건, 차후 무림맹의 질서에 큰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는 뜻임을 모르고 하는 소리시오?”

정색하는 질문과는 반대로 명현도장은 느긋하게 수염을 쓸어내렸다.

“허허, 무슨 그런 큰일 날 소릴. 무림학관의 설립 목적은 어디까지나 공정한 방식으로 인재를 뽑아 양성하여 무림의 평화를 위해 일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 아닙니까. 그들이 실력을 키워 들어오는 것이 어디 나쁜 일입니까?”

“크흠. 흐흠.”

그걸 누가 모른단 말인가. 하지만 설립 목적이야 목적이고, 실제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는 다른 것 아니던가.

“아마도 천 장로께서 하고 싶은 말씀은, 태을문의 진소운이 수석 입학하는 것에 대한 우려겠지요.”

“그렇소!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그것이오.”

무림학관은 철저한 성적 위주로 책임과 권리를 가진다.

누가 수석 입학하느냐에 따라 그 기수의 학관생들의 기조가 바뀌는 것을 생각하면 학관생들의 자유도 좋지만, 차후 무림맹을 위해서라도 혼란을 야기할 가능성을 미리 제거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12봉성 그치들이 조금 쓸모 있는 일을 하나 싶었지만, 역시였습니다. 결국 우리가 움직여야 하겠지요.”

“회주께선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요. 사사로이 무림정시에 관여했다간 무슨 일이 당하게 되는 줄 모르시고 하시는 말씀이시어?”

“당연히 사사로이 관여해서는 안 되지요. 하지만 강 장로께선 태을문의 제자가 수석 입학하는 모습을 보고 싶으신 겁니까?”

“……크흠.”

“더구나 그거 아십니까? 지금 수석으로 점쳐지는 태을문의 진소운은 과거 총군사가 입관패를 넘겼던 자입니다.”

“응? 그런 자가 어찌 무림정시를 치른단 말인가?”

“그가 왜 정시를 치르는지, 입관패의 행방은 어디로 향했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태을문의 그자가 제갈소명이 주시하는 인물이라는 점입니다.”

“…….”

“만약 태을문의 진소운이 만통부, 혹은 심현각에라도 가게 된다면 어찌 될 거로 생각하십니까?”

“허허.”

“제갈 총군사가 만통부를 장악한 이래 처음으로 학관 출신 인사가 만통부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것도 태을문의 제자가.”

만통부는 무림맹을 움직이는 기관이다.

만통부를 손에 넣는다는 것은 무림맹을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다. 거기다 학관 출신으로 들어갔다? 과연 젊은 나이에 어마어마한 권한을 가진 그가 어떤 일을 벌일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태을문은 최근까지도 백팔봉에서 제외되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평가를 받던 문파입니다. 그런 괄시를 받아온 문파의 제자가 만통부에 들어가 권력을 얻게 된다면, 과연 무림맹의 평화가 계속 이어지겠습니까?

개선과 진보라는 말로 무림맹의 질서를 마구 흩트려 놓겠지요.”

나이 지긋한 장로들은 상상만으로도 두렵다는 듯 저마다 눈을 감고 탄식을 이어갔다.

이미 진소운과 태을문에 집중이 된 이상, 명현 도장에게 만통부의 일은 어찌 된 거냐며 시비를 거는 이들은 없었다.

당금 만통부가 장로회의 손아귀에 들어오는 것보다, 자신들이 하찮게 여기던 이가 자신들과 권한을 나눠 갖는 것이 더 두려운 일일 테니까.

“맞는 말이오. 어설픈 이가 검을 휘두르면 무고한 이들이 피를 흘리는 법 아닙니까.”

명현도장을 백안시하던 장로들도 이내 하나둘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참으로 쉽다.

명현 도장은 이를 갈았던 진소운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회주의 고견을 듣고 싶소.”

“회주의 고견을 듣고 싶소.”

저마다 목소리엔 정중함과 조바심이 가득하다.

잠시 침묵으로 사람들의 조바심을 달랜 명현 도장은 입술을 한번 적시고 말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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