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아비규환(阿鼻叫喚) 대여정(大旅程)(8)>
모용재화가 궁을 든 후부터 우리의 여정은 편해지기 시작했다.
핑.
퉁.
내가 쏴 올린 허술한 환시 사이로 모용재화의 통마시가 습격자들 머리 위로 떨어지면, 말도 안 되는 화살의 위력에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흩어진다.
방비할 수 없는 화살은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 걸음을 주저하게 만든다.
우리 일행은 그들의 주저함 속에서 휴식을 취한다.
“형님, 일전에 말씀하신 거 있지 않습니까?”
“뭐?”
“그 혼자서 만 명을 막아냈다는 이야기요. 그거 과장된 이야기죠?”
재화는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도 쉽사리 믿기지 않는 듯 했다.
나는 피식 웃음을 내뱉었다.
“진짜다. 조금의 과장도 없는.”
전생에 아무도 믿지 않는 고독한 늑대와도 같았던 그와 동행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내 기억력 때문이었다.
그 덕분에 난 아무도 보지 못했던 그 경이로운 광경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그는 홀로 일만의 적을 막아냈다.”
각궁의 최대 사거리가 백 장에 달한다고 하는데, 그가 쓰는 철궁은 사백 장에 달했다.
더불어 그의 성명절기인 벽력시는 거대한 기의 폭발을 일으켜 그 일대에 커다란 충격을 준다.
내가 머릿속에 그려져 있는 지형에 대해서 읊어주면 그는 바람과 지형, 땅의 움직임을 감지한 뒤 보이지 않는 목표물을 향해 화살을 쏘아 올린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먼 거리에서 쏘아 올린 화살 하나가 부대의 머리 위에 떨어지면, 마치 폭격을 받은 것처럼 피해가 사방으로 퍼졌다.
마기에 의해 대부분 미쳐버린 마인들이라 할지라도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날벼락에는 본능적으로 몸을 사릴 수밖에 없는 법.
그의 철궁 앞에 일만의 인원은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벽력시……. 어쩜 그분은 저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 걸까요?”
“귀궁문의 각궁이 튼튼해 보이긴 한다만, 아마 네 힘을 버티긴 힘들 것이다. 차후엔 철궁으로 바꾸거라 내가 손재주 좋은 어르신을 소개시켜 줄 테니.”
“……형님”
목소리가 이상해 돌아보니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왜, 왜 그래?”
“형님은 진정 제 은인이십니다. 앞으로 형님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고 따르겠습니다.”
나는 문득 전생의 재화가 생각나 끌끌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싫소. 사람은 개보다 신의가 없으니.
전생과 대비되는 천진난만한 모습은 어쩐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기도 했다.
“아, 근데 형님. 왜 전 그런 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지 못한 겁니까?”
“…….”
나는 적당한 거짓을 말하려다 다른 말을 했다.
“그는…… 홀로 죽었다.”
“네? 어째서요?”
-내가 있었다는 것을 그대만 기억해 주시오. 내 삶은 항상 회피와 도피로 부끄러운 삶이었으니.
암흑절혼단에 의해 끝내 죽음을 맞은 그가 남긴 말.
“자신의 처지를 마주하지 않은 스스로를 부끄러워했기 때문이지.”
전생의 모용재화의 후회가 닿길 바라며 말을 하자, 현생의 모용재화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
재화와 내가 습격자들을 견제하며 우리는 남소까지 안전하게 이동했다.
덕분에 일행들은 잠깐이지만 휴식을 취하고, 짧게나마 잠도 잘 수 있었다.
“형님, 또 옵니다.”
“봤다. 준비해라.”
“정말 질리지도 않게 오는군요.”
재화는 나와 함께 쉴 새 없이 이동하며 견제를 해야 했음에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
핑.
퉁.
우리의 화살이 오백여 명으로 보이는 인원들의 머리 위로 떨어진다.
“어? 형님, 저들이 도망치지 않는데요?”
이제껏 습격자들은 자신들이 대응할 수 없는 통마시의 위력에 혼비백산하며 바위 뒤로 숨거나 나무 아래로 숨어들어 움직이지 못했었다.
“다시 해보자.”
이번엔 연속 세 발의 화살을 각기 날렸다.
환시로 인해 습격자들의 머리 위에는 그야말로 화살비가 내렸지만, 이번엔 당황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펑. 펑. 펑. 펑. 펑. 펑.
오백의 인원이 동시에 하늘을 향해 장력을 쏟아냈고, 맑은 하늘에 우레가 터져나가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
무식하기 이를 데 없는 작전이었지만, 또 그만큼 효과적인 방법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모용재화가 아직 벽력시를 쓸 수 없는 이상, 그들에게 타격을 줄 방법도 없었다.
“잠깐 기다리거라.”
상대의 정체를 확인해야 했다.
오백의 인원이 마치 짜 맞춘 듯 일거에 장력을 쏘아낼 수 있는 집단이란 그리 많지 않으니.
천하독행신으로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그들의 무복을 확인한 나는 나직이 신음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종남…….”
다시금 구파일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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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을 향해 가던 우리는 결국 무강 방향으로 진로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오백이나 되는 인원을, 그것도 종남파 수준의 적을 상대할 수 있는 여력은 없었다. 무조건 도망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는데, 무작정 잠을 안 자고 가기엔 이미 일행들 모두가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나는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엔 소림입니다.”
무강 방향으로 틀었더니, 이번엔 소림사의 인원 삼백이 뒤를 쫓아오고 있었다.
“진짜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내 말에 피곤 가득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이들의 낯빛이 더 어두워졌다.
“12봉성이 아직 포기하지 않았고, 화산과 점창도 움직이고 있다고 합니다.”
“꼭 우릴 쫓는다고 볼 수 있을까요?”
남궁선화가 메말라 버린 입술을 달싹였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표정이다.
나는 안타깝지만,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숭산에서 무림학관이 있는 천문까지 가는 가장 빠른 길은 남소와 동주를 지나 호북으로 넘어가는 길입니다. 무강은 대별산맥이 가로막고 있지요. 우릴 노리기 위해 이곳까지 온 겁니다.”
“…….”
현실이 아니길 바라는 모습.
“어떻게 해야 하죠? 진 공자…….”
성모란도 남궁선화와 매한가지였다. 언제나 넘칠듯한 기운을 사방으로 뻗어내던 그녀는 지금, 바람 불면 부러질 것 같은 위태한 모습이다.
“제일 좋은 방법은 대별산을 넘는 겁니다.”
“아…….”
“…….”
이곳저곳에서 탄식이 흘러나온다.
악으로 깡으로 버티며 여기까지 함께 따라왔던 무사들도 이미 자신들이 대별산을 넘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대별산 일대엔 흑도 문파가 세 곳이나 위치해 있다. 혹여 그들과 시비라도 붙었다간 부상으로 낙오되는 것이 아닌 목숨이 날아간다.
“……만, 그건 힘들 것 같으니, 남양을 통해 동주로 넘어가도록 하는 겁니다. 대신 쉴 수는 없을 겁니다.”
“……차라리 그게 낫겠어요.”
“……그게 낫겠네요.”
불에 타죽는 것과 물에 빠져 죽는 것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하는 심정으로 선택을 마친 우린,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기다! 저기 입관패가 있다!”
“쳐라!”
“모두 힘이 빠졌다. 저놈들만 제치면 우리가 무림학관에 들어갈 수 있다!”
소림과 화산, 점창 등 거대 문파들이 나타났다 해서 강탈자들이 포기한 건 아니었다.
되려 앞선 경로에서 기다리고 있던 자들이었기에, 구파일방의 인원들이 오기 전에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입관패를 빼앗으려 했다.
“…….”
“하아, 하아.”
“큭, 하아.”
우리 일행은 그 어느 때보다 처절하고 힘들게 싸웠다.
이미 지친 이들은 소리를 치거나 기합을 쓸 힘조차 없었다.
그저 최단 시간, 최적의 방법으로 상대를 물리치고 이 자리를 벗어날 방법을 생각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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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으로 향하는 길에 있는 이름 없는 작은 산.
어둠이 내린 곳에 우리 일행이 숨어있었다.
저녁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누구 하나 불 피울 생각을 하지도 못했다.
아니, 버릇처럼 먹던 육포를 꺼내 드는 자도 없었다.
일행 모두는 지금 이 어둠 속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구름에 가려졌던 달이 모습을 드러내고, 메마른 성모란의 얼굴을 비추자 그녀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내 생애 이렇게 열심히 행공을 익힐 거라 생각도 못 했네요.”
“…….”
“…….”
모두들 어색하게 미소만 보일 뿐, 웃음소리를 내지 못했다.
삐유욱-
달빛 사이로 매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설마 하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나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아니나 다를까, 커다란 날개를 퍼덕이며 내려오는 매는 하오문의 철응이었다.
“이 시간에 왜…….”
하오문은 매일 아침, 한 번씩 정보를 보내준다.
그럼에도 굳이 이 어두운 밤에 다시금 전서응을 보냈다는 건.
나는 재빨리 철응의 발을 살폈다.
철응의 발엔 아침에 보냈던 것보다 많은 양의 양피지가 둘러있었다.
“…….”
내가 하오문으로부터 우리 행보에 관한 정보를 받아 본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들이 모두 내 얼굴을 바라본다.
나는 내가 방금 본 이 이야기를 어떻게 전달해야 하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뭐래요?”
“……청성과 공동이 무한을 지나 북진하고 있답니다.”
“…….”
“…….”
강남에서 시험을 치른 청성파와 공동파의 최종 목적지는 무림학관이 있는 무한이어야 했다.
침묵하던 남궁선화가 허탈한 듯 말했다.
“그들이 왜 북진하는 걸까요?”
누구 하나 무한을 지나 북진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 떠오르는 예측을 입밖에 내뱉지 않았다.
“아니, 그게 아니라……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강남에도 이미 충분히 많은 입관패들이 있을 거예요. 청성과 공동의 입장에선 이동 거리만큼 확률이 낮아지는 건데. 굳이 그럴 이유가 뭐에 있을까 하는 거예요.”
“그러네. 학관의 입학이 중요한 것인데. 단순 입관패가 많다고 쫓아온다고 보기엔 이상해. 삼관문 패의 수량은 정해져 있는데 말이야.”
“더불어서 소림도 그래요. 왜 우릴 쫓는 거죠? 그들은 이미 충분히 입관패를 확보했는데.”
소림뿐만이 아니다. 화산과 점창, 종남도 그들의 입장에선 예년과 같은 수준의 입관패를 확보한 상태였다.
“그 질문에 대해선 제가 답할 수 있을 것 같군요.”
채채채챙.
우린 어둠 속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번개같이 반응하여 검을 들었다.
어두운 숲속 사이로 인영이 스르륵 움직인다.
“귀, 귀신?”
금표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움찔거린 것은 금표뿐만이 아니다, 각 가문의 무사들도 모두 귀신처럼 좌우로 움직이는 그 신형의 모습에 검을 꽉 틀어쥐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합니다. 하지만 워낙 은밀하게 숨어있는 탓에 찾기가 영 어려워서 말입니다.”
나는 어둠 속에서 천천히 나오는 그 인영을 보며 말했다.
“일명 선배께서 이곳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그는 다름 아닌, 용봉지회 소속 소불(小佛) 일명이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는 무사들과는 반대로,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관해서 설명해 주기 위해 왔습니다.”
“누군가의 의도처럼 들리는군요.”
일명은 조금 전 귀신이라고 소스라치게 놀랐던 이들이 무안할 정도로 특유의 푸근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내 기수의 무림정시가 역대급으로 치열한 경쟁을 펼쳤다고들 합니다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
“아마 시주와 보살님들이 치르는 이번 정시가 역사상 가장 가혹하고 혼란한 시험이 되겠지요.”
일명은 고개를 꾸벅거렸다.
“그리고 종국엔 여러분들은 모두 탈락할 겁니다.”
“소림사의 소불에게 미래안이 있다는 이야긴 처음 듣는군요.”
내가 이를 갈았지만, 일명은 허허로운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시주께선 여전히 활활 타오르는 불과 같으시군요.”
“실례를 범하는 것을 이해해 주십시오. 현재 상황이 그래서 말입니다.”
일명은 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여러분들이 모두 탈락할 미래를 바꾸기 위해 온 겁니다.”
“자꾸 ‘우리’라고 하시는데, 제 눈에만 보이지 않는 겁니까?”
“하하, 사실 여러분들을 찾으려 산개한 탓에 저 혼자 이쪽에 오게 되었지요.”
“그 ‘우리’가 누구지요?”
“정확히는 ‘우리’가 아니겠군요. ‘그’가 발의하고 실행한 계획이니까요.”
“그?”
“현청…… 아 ‘용소아’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더 낫겠군요. 그가 당신을 보고 싶어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