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아비규환(阿鼻叫喚) 대여정(大旅程)(9)>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난 일명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용봉지회가 와 있는 겁니까?”
일명은 어쩐지 남궁선화를 슬쩍 보곤 다시 나를 바라봤다.
“……뭐, 모두는 아니지만, 용봉지회가 움직인 건 맞습니다.”
“그리고 저를 보고 싶어 한다는 사람이 ‘용소아’구요?”
“그렇습니다.”
시험과 관계없는 듯한 움직임을 보여주는 구파일방과, 왜 이곳에 와 있는지 알 수 없는 용봉지회.
혼란한 정보들 탓에 머릿속이 뒤엉킨다.
냉정한 판단을 내리기엔 기력이 너무 쇠했다.
분석적인 판단을 내리기엔 무리.
난 그저 통찰에 의한 본능적 선택을 하기로 했다.
“됐습니다. 화해의 자리라면 어떤 때에 만나도 지금보단 괜찮을 듯하군요.”
마령고원의 일을 이야기하자 일명이 끌끌 웃음을 짓는다.
“아마 그는 사과하지 않을 겁니다.”
마치 불변의 진리를 이야기하듯 단언하는 그.
나 또한 알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더더욱 볼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일명이 주위를 둘러본다. 어둠에 가려 사람들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을 텐데도, 일명은 구석구석 빠짐없이 사람들을 살핀다.
“이대로라면, 시험 탈락이 문제가 아닐 겁니다. 시주께선 그 업보를 모두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 두 사람은 애당초 그 사람 때문에 지금 시험을 못 봤을 수도 있었습니다.”
내가 남궁선화와 성모란을 가리키며 말하자 일명은 또다시 고개를 끄덕인다.
전생에 난 일명에게 꽤 호의를 가지고 있었는데, 어쩐지 지금 저런 모습은 약이 오르게 만든다. 대가리를 한 대 후려도 계속 소불처럼 웃으려나?
“진 공자.”
성모란이 이야기에 합류했다.
“저흰 괜찮아요.”
성모란이 남궁선화를 보자 그녀 또한 고개를 끄덕인다.
“제가 안 괜찮습니다.”
“……지금 중요한 건, 마령고원에서의 일이 아니라. 무림 정시잖아요.”
다들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다.
어떤 방법이든 이 상황을 벗어나길 바라는 것이다.
내 예감은 전혀 다른 이야길 하고 있었지만, 모두가 이렇게 이야기한 이상 망설이는 것도 안 될 일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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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남궁선화와 모용재화와 함께 움직였다. 그나마 용봉지회에 입김이 닿을 수 있는 이들만 선별한 것이다.
일명은 귀신처럼 움직이는 금강부동신법의 속도를 늦춰 우리와 속도를 맞추었다.
이미 남궁선화와 모용재화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기에 신법을 쓰는 것만으로도 많은 심력이 소모되는 중이었다.
이각 정도 따라가자 먼 곳에서 불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곳곳에 횃불이 켜져 있고, 중간엔 커다란 모닥불이 일대에 불을 밝힌다.
모닥불 위에는 기름진 돼지 한 마리가 구수한 냄새를 피워가며 돌고 있었다.
수천 명에게 쫓기는 우리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나는 괜히 감정이 상해 말했다.
“화식을 멀리하는 소불 선배에 대한 배려도 없답니까?”
그는 부처 같은 미소로 말했다.
“이건 저희를 위한 게 아닙니다. 여러분들을 위한 거지요.”
“…….”
“당장 쉬게 되면 영양 보충이 먼저 필요할 것 같아서 말이지요.”
전생의 불쾌감이 떠오른다.
분명 우리에 관한 일임에도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고 변해가는 주변의 환경을 보는 듯하다.
난 그만 입을 다물고 소불을 따랐다.
모닥불을 지나자 안쪽으로 작은 모닥불이 피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로 일곱의 남·녀가 양옆으로 서 있었다.
태을문에서 본 얼굴도 있고, 전생에 본 얼굴도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 그 남자가 서 있었다.
“오랜만이군.”
“…….”
남궁선화와 모용재화가 포권을 쥐려다 나를 보곤 다시 손을 내렸다.
선배를 대하는 나의 무례에 양옆에 선 남·녀들 중에 인상을 찡그리는 이들도 있었지만, 정작 용소아는 신경 쓰지 않는 듯 표정 변화조차 없다.
“힘든 일을 겪고 있다지?”
담담히 내뱉는 그의 어투가 내 신경을 긁는다.
“그 전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내게 모인다.
“사과부터 하지.”
“……!”
“……!”
“……!”
그리고 놀란 눈이 된다. 믿을 수 없다는 듯 함지박만 하게 입을 벌린 이도 있다.
용소아는 뚫어지게 나를 본다.
전생엔 뭔가를 꿰뚫어 보는 것 같은 저 두 눈에 함부로 눈을 마주칠 수조차 없었다.
“내 행동은 당연한 것이었다. 사과할 일 따윈 없다.”
“당신 때문에 몇 명이 죽을 뻔했는지 아나?”
“그 당시 최선의 선택은 내가 나가 사람들을 불러오는 것이었다. 네가 해진을 해서 그곳을 나올 수 있었던 건 그저 결과론에 불과한 것이지.”
“본인으로 인해 진이 엉켜 구출에 더 어려움을 겪었다는 건 생각하지 못하나?”
“결국 너는 진을 해독했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것이다. 모두가 각자의 최선을 선택했으니 누구에게 사죄할 필요는 없는 것이지.”
“궤변을 줄줄이 잘 늘어놓는군.”
“일행들이 많이 지쳤다고 들었는데, 계속 이리 무의미하게 시간을 끌 것인가?”
남궁선화와 모용재화를 바라본 용소아의 말에 내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 때문에 부른 거지?”
“너를 돕기 위해서.”
“하!”
용소아의 말에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건 나다.
저 인간에게서 날 죽이겠다는 소리가 아닌 돕겠다는 소리를 들을 날이 올 줄이야.
“왜지?”
“그것이 나의 최선이니까.”
나와의 과거 따윈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저 태도.
저 태도가 진심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더 신경을 긁는다.
“더 자세히.”
용소아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유 따위가 중요한가?”
“명분은 백도가 움직이는 가장 거대한 원동력이지. 하물며 백도의 영웅인 용소아가 이곳까지 명분 없이 움직였을까?”
용소아는 특유의 이질적인 눈빛으로 나를 뚫어지게 본다.
“구파일방을 주축으로 형성된 정도회는 자파의 주력 제자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제자들을 모두 이곳으로 불러들이고 있다.”
남궁선화의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상상만으로도 힘들어하는 모습. 나는 가만히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고작 우릴 잡겠다고?”
“너희가 아니다. 바로 ‘너’지.”
“그것이 궁금한 거다. 굳이 왜 ‘나’를 잡겠다고 오는 것이지? 단순히 내가 수석 입학 예정이라?”
“지금의 정도회에겐 그것이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그런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나를 돕겠다고 한 거고?”
옆에 섰던 남자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녀석이 보자 보자 하니, 태을문에서도 그랬지만, 오만방자하기가 이를 데 없구나.”
청성의 소제호. 태을문에 있었던 인물이다.
나는 그를 한번 바라본 후 무시하고 계속 용소아를 바라봤다.
소제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좋아. 어떻게 도와주겠다는 거지? 우릴 무림학관에 데려다주겠다는 건 아닐 테고.”
“그렇게 할 것이다.”
“뭐?”
“못할 거라 생각하는가?”
용봉지회는 당대 무림학관 졸업자들 중 가장 뛰어난 성적을 가진 자들의 모임이다. 더구나 지금 이 자리엔 용소아와 일명이 함께였다.
“할 수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가 아니지 않나?”
해서는 안 되는 짓이다.
“시험 규정에 사문 혹은 동맹과 그에 관련된 이의 도움을 받은 자는 시험 자격을 박탈한다 써지.”
“모두가 시험 규정을 지킨다 생각하는가?”
“…….”
“너는 정하기만 하면 된다. 할 것인가, 하지 않을 것인가.”
“좋아. 이런 상황에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지. 조건을 듣고 싶소.”
“조건?”
“대가가 있을 것 아닌가?”
“없다.”
용소아의 말에 나는 물론이고 남궁선화와 모용재화도 두 눈을 부릅뜬다.
“넌 최고의 성적으로 무림학관에 입학하여 수석 입관생이 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용소아의 손이 천천히 들린다. 그리고 내 옆의 두 사람을 지목한다.
“단, 저들은 물론이고 일행 그 누구도 함께할 수 없다.”
묘한 정적이 주위에 가라앉는다.
“…….”
“…….”
남궁선화와 모용재화는 손아귀에 쥐고 있던 모래들이 흩어져 내리는 것을 보듯 허탈한 표정이었다.
“흐흐흐흐.”
반대로 난 예상을 했기에 웃음이 삐져나왔다.
“역시나 그 소갈머리는 변하지 않는군.”
“놈! 말이 과하다.”
소제호의 일갈이 귓등으로도 들리지 않았다.
“거절하지.”
“왜지?”
용소아는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답을 내놨다.
“그게 옳은 일이 아니기 때문이지.”
용소아의 표정이 처음으로 미미하게 갈라진다.
“더 자세히.”
“더 자세히라…….”
아마 현 무림맹의 세력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거겠지.
용소아는 몇 년 후에 자신만의 세력을 만들어 무림맹을 잠식하니까.
기존 세력을 뒤흔들어 무능함을 상기시키는 건 신진 세력들이 꼭 해야 할 일.
새로운 영웅의 등장은 정도회를 비롯한 장로전의 인간들을 갈아치울 명분도 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그 영웅을 자신의 손으로 만들었고, 제 손으로 마음껏 요리할 수 있다면, 더더욱 금상첨화.
훗날에 쓸모가 없어지면 버려도 탈이 나지 않는 미천한 문파의 출신.
여러 가지가 머릿속에 떠오르지만 굳이 말하지 않는다.
대신 놈을 약 올릴 수 있는 방향으로 최대한 머리를 굴려본다.
“당신이 말하는 정의에 동의할 수 없으니까.”
그의 정의는 결국 백도의 명맥을 유지했다.
하지만 그의 정의는 끝내, 내 동료 모두를 버렸다.
“시간만 버렸군. 대신이라고 하긴 그렇지만, 그대들이 하루 정도는 시간을 벌어주시오. 용봉지회라면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돌아서려는데 소제호가 다시 나선다.
“아직 돌아가라 말하지 않았다.”
그의 말을 무시하고 걸음을 내디뎠다.
“이놈이!”
청성의 소제호가 강한 살기를 발산한다.
평소 같았으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살기가 온몸에 엄습하며 신경을 난도질하는 것 같다.
옆에 섰던 남궁선화와 모용재화는 탄식을 내뱉으며 바닥에 쓰러졌다.
부지불식간에 내뿜은 살기가 내부에 타격을 가한 것이다.
“우웩.”
남궁선화가 검은 피를 한 모금 내뱉자, 소제호의 안색이 그제야 창백해졌다.
자신도 이럴 줄 몰랐다는 모습.
백수신녀 당서희가 재빨리 튀어나와 남궁선화를 진맥했다. 그러곤 품 안에서 단환 하나를 꺼내어 남궁선화의 입에 집어넣었다.
남궁선화의 안색이 좋아지자, 이젠 모용재화를 확인한 그녀는 자리로 돌아가려다가 나를 뚫어지게 봤다.
“너, 잠은 얼마나 잔 것이야?”
“언제부터 말하는 겁니까?”
“…….”
냉막한 표정의 당서희가 손을 뻗어 맥을 짚으려 하자 난 얼른 손을 빼내었다.
“…….”
당서희가 뚱한 얼굴로 다시 나를 바라본다.
“손을 내놔야 하는 것이야.”
“싫소.”
“소제호 때문에 그런 것이야?”
“그렇소.”
“소제호가 죽으면 손을 내놓을 것이야?”
“그래 줄 수 있소?”
소제호의 안색이 하얗게 질린다.
“한 한 달 정도 피똥 싸게 해줄 순 있는 것이야. 대신 손 내놔.”
“약속했소.”
당서희는 진맥을 보더니 항시 반쯤 감겨있던 눈을 부릅떴다.
“너 죽고 싶은 것이야?”
“죽을병에 걸렸소?”
“네가 이 중에서 제일 심각해.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는 것이야.”
안색을 회복한 남궁선화와 모용재화가 말을 잇지 못한 채 나를 본다.
“잠 좀 자게 추격자들 좀 떼어주시오.”
“이대로면 죽을 것이야.”
“그래도 무림정시를 포기할 생각은 없소.”
“그럼 용소아를 따라야 하는 것이야.”
“서희 선배.”
“왜 부르는 것이야?”
“이곳에 있는 인원들 뭔가 이상하지 않소?”
“?”
“죄다 구파일방의 인원들만 모여있단 말이오. 오대세가는 서희 선배 하나뿐이고.”
“…….”
“용소아가 말하는 정의는 결국 제 편 가르기일 뿐이오.”
당서희가 반쯤 감긴 눈으로 용소아를 바라본다.
용소아는 여전히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무슨 말로 용소아가 서희 선배를 꼬셨는지 모르겠지만, 용소아 또한 그가 경멸하는 현 무림맹의 적폐들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