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112화 (112/357)

#112. <흑도야행(黑徒夜行)(2)>

사황봉.

흑도무림의 구심점은 없지만, 흑도무림의 대표 문파를 꼽으라 하면 무조건 들어가야 하는 거대 문파.

무림정시로 인해 휴식기를 가지고 있던 사황봉의 대문을 박살내고 들어갔으니, 당연하게도 사황봉은 환대하지 않았다.

댕댕댕댕댕댕댕댕.

종이 울린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음에도, 벌써 대마장 주변으로 수백 명의 흑도 무사들이 검을 뽑은 채 일사불란하게 달려오고 있었다.

채채채채채채채채챙.

그야말로 검림(劍林)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수백 개의 검들이 일행 한 명, 한 명을 빼곡하게 둘러싸였다.

그리고 우리 일행은.

“헥, 헥, 헥, 헥, 헥.”

“헉, 헉, 헉, 헉, 헉, 헉.”

“허억, 허억, 허억, 허억, 허억.”

그러거나 말거나 바닥에 자빠져 숨을 고르고 있었다.

자신들이 모시는 이를 홀로 흑도 문파에 던질 수 없다며 결연을 하고 있던 그들은 미처 검도 뽑지 못한 채, 제 숨고르기에 바빴다.

“이놈들이 예가 어디라고 감히 발을 들인단 말인가?”

수백의 무사들이 양옆으로 갈라지며 흑색의 갑주를 걸친 장한이 걸어 나왔다.

“무림정시가 네놈들의 목을 보존해 준다고 하더냐?”

챙.

그의 허리춤에서 대검이 뽑혔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일행들은 주변을 둘러싼 흑도무사들을 보며 사색이 되기 시작했다.

“멍청한 것들, 그저 시험을 포기하면 될 것이었음에, 그러지 못한 네놈들 잘못이다. 무얼 하냐, 모두 목을 베어 대문 밖에 가져다 버리거라.”

“““예!!!”””

대기를 쩌렁하게 울리는 기함성과 함께, 사방에서 숨이 막힐 듯 살기가 터져나왔다.

“자, 잠깐! 하아, 하아. 잠깐만 기다려 주시오.”

나는 품에 안고 있던 남궁선화를 조심히 내려놓았다.

“감히 사황봉에 마음대로 들어왔다 나가려 하는 것이냐?”

“그게 아니오!”

“쓸데없이 시간을 끄는 것이라면 네놈의 손과 발을 잘라 돼지우리에 던져주마.”

장한의 대검 위로 흑색의 기가 유형화되어 일렁거린다.

“알겠오! 그렇게 하시오. 대신 잠깐! 아주 잠깐만 시간을…… 주시오.”

나는 얼른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척. 척. 척. 척. 척.

목 끝으로 다섯 개의 검이 찔러 들어왔다.

“뭐, 뭐 좀 꺼내려 하는 겁니다.”

“내버려 두어라.”

나는 품에 넣었던 손을 천천히 빼며 손안에 물건을 장한에게 보였다.

장한을 시작으로 주변에 서 있던 이들의 이들이 하나둘 부릅 눈을 뜨기 시작했다.

“어, 어찌. 감히 백도의 조무래기 따위가….”

등 뒤로 주르륵 뭔가 흘러내리고 있는 것 같다. 뒤에서 남궁선화가 소리친다.

“진 공자님. 피가!”

아, 피였나. 땀인 줄 알았는데.

어쩐지 정신이 어질어질한 것 같더라니. 나는 정신을 다잡으며 말했다.

“사황봉주님을 뵙고 싶소. 난 태을문의 진소운이오.”

“진소운?”

“태을문?”

“그 흑염룡 아닌가?”

“호오, 저 녀석이 흑도신성 흑염룡이라 이 말이지?”

그래, 니놈들의 흑염룡이다.

나는 속으로 욕지기를 마구 내뱉으며 눈을 감았다.

#

“호오, 신기하군요.”

징그럽기 그지없는 사체의 피부를 만지는 백수신검 혁무강의 입에서 탄성이 튀어나왔다.

“흠…… 본래 이쪽에 사체가 더 있어야 하는 것 같은데, 이건 죽은 이후에 잘린 상처이지 않습니까.”

사체를 먼저 살폈던 제갈소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맹으로 오는 과정에서 사체를 살피기 위해 누군가 빼돌린 것이겠지요.”

“흠……. 장로전의 짓이라 생각하십니까?”

“그 외에 달리 누가 있겠습니까. 아무튼 중요한 건 그치들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몸을 이렇게 만든 시술이 마교……의 것이라는 겁니까?”

“네. 심현각 가장 심처에 있는 자료를 찾느라 보고가 늦었습니다.”

제갈소명은 심현각을 뒤지기 위해 만통부의 일이 일시정지 될 정도였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

혁무강이 눈을 감곤 기다란 흰 수염을 천천히 쓸어 넘긴다.

“하지만 100년 전 천산에서 발현한 천신교는 모두 소탕당하지 않았습니까.”

백 년 전, 마교의 후예를 자처하며 천산에서 나타났던 천신교는 당대 맹주인 창천대제의 손에 모두 죽었다.

“그들의 수준이 아닙니다.”

“그들도 철강시를 백구나 만들어 놓았다고 했습니다.”

“이 시술은 다릅니다.”

“기본적으로 은신술과 검술을 하나로 합쳐놓은 기괴한 무공을 절정의 수준까지 익히게 합니다. 그리고 그 절정의 고수들에게 다시금 유체골검이라는 비상식적인 시술을 거쳐 만들어 내는 괴물들입니다.”

1명의 괴물을 만들어 내기 위해 최소 서른 명의 절정 고수를 갈아넣어야 한다는 끔찍한 시술.

“보고에서는 최소 스무 구의 괴물들이 사람들 사이를 오갔다고 합니다.”

“…….”

말도 안 되는 확률과 숫자들에 혁무강마저도 입을 꾹 다물었다.

“……최소 육백 명의 절정 고수를 갈아 넣을 수 있는 문파가…….”

“중원 무림 안엔 없습니다.”

평범한 무사가 오를 수 있는 최후의 경지가 절정이라 하지만, 그것도 인생을 모두 갈아 넣어서 노력하고 배경이 뒷받침해 줄 때나 가능한 말이다. 그런 고수 삼백을 갈아넣을 수 있는 집단이란 건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다.

“어찌 되었든 효과는 아주 확실했습니다. 이 사체가 아니었다면, 그들의 흔적을 쫓지도 못했을 테니 말입니다.”

어둠과 동화되어 습격하는 절정의 고수라니 상상만으로도 식은땀이 흐른다.

“휴…… 모르겠군요.”

혁무강의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다. 강호를 손바닥 보듯 들여다보고 있는 자신조차도 지금 어떤 일을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까.

“일단, 가상의 적을 설정하는 것부터 시작하시지요.”

“……장로전이 이걸 이해하겠습니까?”

“……그래서 일단 저희끼리 먼저 알고 있자는 것입니다. 다행히 복양 평원 이후엔 활동하지 않는 듯하니까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곤륜파에선 아무런 말이 없었군요.”

과거 마교는 천산에 위치해 있었다.

곤륜파는 마교를 가장 먼저 막아선 선발대이자, 백도 문파의 척후병 역할을 했었다.

제갈소명은 입술을 쌜쭉거렸다.

“정시를 치르느라고 정신이 없겠지요.”

그 어느 때보다 다사다난한 일들이 많은 회차다.

“장로전이 조용한 이유가 그 때문이었군요.”

“……?”

“태을문의 진소운이라 했나요?”

“!!”

제갈소명이 퍼뜩 눈을 치켜떴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세력이 그 어느 때보다 강성해져 있는 탓에 양쪽 어디에서도 무림맹주를 뽑을 수 없었다.

결국 세가 없고, 홀로 강한 백수신검 혁무강을 뽑아놓은 것인데, 어느새부턴가 혁무강은 자신만의 정보통을 가지고 있는 듯 보였다.

“그저 맹주 일을 하기 위함입니다. 혹, 총군사께서 원하신다면 그들을 보여드리도록 하지요.”

잠시 생각하던 제갈소명은 고개를 저었다.

애당초 백수신검 혁무강이 세력을 만드는 것이 의미가 있던가.

능히 홀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모든 장로들을 상대할 수 있는 사람에게 세력이 있고 없음이 무슨 소용일까.

“괜찮습니다. 먼저 준비해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허허, 그나저나 조금 아쉬우시겠습니다. 진소운 그 아이를 점찍으셨다 들었는데.”

혁무강의 말에 제갈소명이 혀를 찼다. 그놈의 장로전 놈들의 수작만 없었어도 처음으로 무림학관 출신의 만통부원을 만들어 보나 했는데 말이다.

“별수 없지요. 어차피 의무복무를 하러 올 테니. 그때 자리에 앉힐까 합니다.”

“아니면 이건 어떻습니까. 일단 맹주전에 제가 데려오겠습니다. 그리고 때를 봐서 만통부에 넘겨드리지요.”

제갈소명이 세상 믿을 사람 없다는 눈으로 혁무강을 바라보았다.

“아니, 만통부가 얼마나 바쁜지 아시면서 그런 소리를 하십니까!!”

“아아, 그러니까. 본래 만통부에 들어갈 때까지만…….”

“그럴 생각이라면 진즉 제가 데려왔지요. 저라고 뭐, 데려올 방안이 없어서 그런 겁니까! 다 정치 때문 아닙니까. 정치!”

“……크흠. 미안합니다. 총군사. 내가 욕심이 앞섰습니다.”

“다시는 그런 말 마십쇼. 그놈은 제가 찜했고,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을 겁니다.”

만통부로 와야 할 인재를 가장 많이 빼앗아 간 곳이 맹주전이다.

이제는 하다못해 학사로 쓸 녀석까지 빼앗아 갈 생각을 하는 걸 보면, 맹주의 인재 사랑은 도가 지나치다.

‘저럴 것이면 차라리 문파를 창설할 것이지.’

몇 번이나 문파 창설을 도와주겠다 말했지만, 그때마다 거절했던 이가 인재에 욕심이 많은 건 또 이해가 잘 안 가는 법이었다.

‘내 또 빼앗길 줄 알고.’

이번엔 절대 빼앗기지 않겠다 다짐하며 만통부로 향하던 제갈소명은, 맹주전으로 향해 헐레벌떡 달려오는 놈을 보고 혀를 찼다.

“쯔쯧. 대체 저놈 머릿속엔 뭐가 들었누.”

그러곤 맹주원을 향해 일갈한다.

“이놈아! 이곳이 어딘지 몰라서 그리 뛰는 것이냐!”

“총군사님, 크, 큰일 났습니다.”

하지만 급박한 얼굴에 정신이 빠져있어 보이는 맹주원의 얼굴을 보고 덜컥 심장이 떨어진다. 평소 느긋한 녀석이기에 더욱 공포가 엄습한다.

“혹, 벌써 천마신…….”

“우리 소운이가! 잔악무도한 구파일방의 간계에 의해 사황봉으로 던져졌습니다.”

“…….”

“아이고, 아이고, 이제 장가는 다 갔다. 아이고, 아이고.”

숫제 부모라도 잃은 듯 통곡하는 녀석을 보며 제갈소명은 스윽 팔을 걷어붙였다.

#

“미친놈에겐 자고로 매가 약이라 그랬는데.”

성모란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절로 기절한 진소운에게로 향한다.

“깨어나야 매든 상이든 주지.”

사황봉에 들어서자마자 진소운이 꺼낸 사황봉주의 명패 덕분에 당장 목숨은 부지했지만, 상황이 영 좋지 않다.

진소운이 어째서 사황봉주의 명패를 가졌는지는 차지하고서라도 정작 당사자인 그가 깨어나지 않는 탓에 사황봉주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모조리 한방에 갇혀 이 천의 흑도무사들의 감시를 받는 중이었다.

더 그들을 좌절하게 만든 건 진소운을 치료하고 간 의원의 말이었다.

“이미 죽은 사람이야. 기다리지 말고 자네들 살길이나 찾게. 얼마나 몸을 혹사 시켰으면…… 쯧쯧.”

의원에 말에 금은동 형제는 물론이고, 남궁선화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태.

마지막 기회라는 진소운의 말을 듣고 따라오긴 하였으나, 정작 진소운이 깨어나지 않는 탓에 모든 계획이 어그러지고 있었다.

벌컥.

그때 문이 열리며 십여 명의 흑도무사들이 실내에 들어왔다.

모두 사황봉의 상징인 흑색의 갑주를 착용한 상태.

그리고 그 뒤로 거대한 몸체의 장한이 들어선다.

“아직도 안 깨어났나?”

불쾌한 그의 행동에 불만을 표출할 법도 했지만, 진소운 일행은 누구 하나 섣불리 나설 수 없었다.

거패 황부식.

사황봉의 4인자이자 흑도무림의 손꼽히는 고수.

점창파의 일류 무사 서른이 그와 시비가 붙었다가 모조리 주검이 된 일화는 그의 강함을 입증해 주기에 충분했다.

“아직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어요.”

“이틀 안에 깨어나지 못하면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더구나 이리 급박한 와중에 넋 놓고 치료할 여유가 있던가?”

성모란은 저도 모르게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했다.

“저희는 사황봉주님의 명패를 가지고 온 사람들이에요.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주세요.”

황부식이 코웃음을 쳤다.

“사황봉주님의 명패를 가져온 것은 흑염룡 진소운이다. 그리고 그가 깨어나지 않는 이상, 이미 그 명패의 효용가치도 끝난 것이지.”

“봉주님을 만나 뵙게 해주세요. 제가 그의 뜻을 알아요.”

황부식의 얼굴에서 그나마 남아있던 웃음기가 모조리 사라졌다.

“어이, 애송이. 사황봉주님이 너 같은 애송이가 만날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느냐?”

“…….”

“밖에선 구파일방의 제자들이 진소운 일행을 내놓으라 성화 중이다. 애당초 우리 흑도무림은 무림맹의 행사에 참견하지 않는바. 이미 이틀이라는 시간을 준 것만으로도 명패의 효용성은 모두 사용한 것이다.”

“그럴 수가…….”

자신들은 무엇을 위해 그리 목숨 걸고 이곳까지 왔는가, 최후엔 가장 의지가 되던 이의 목숨마저 위태롭게 만든 채로.

성모란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짐을 챙겨 떠나라. 최소 흑염룡의 치료는 맡아주마.”

“…….”

“오늘 해가 지기 전에 사황봉을 나서라.”

성모란과 일행들이 낙담한 표정을 짓건 말건 황부식은 주저 없이 몸을 돌려 밖으로 향했다.

“……사황봉은 구파일방의 제자들이 두려운 겁니까?”

“!!!”

황부식의 몸이 우뚝 멈춰 선다. 그의 몸에서 가공할 기운이 폭사된다.

“감히 어떤 애송이가…….”

황부식의 기운이 폭사되건 말건 사람들이 예의 ‘미친놈’을 봤던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진 공자!!!”

“진 공자님!!!”

“대사형!”

그곳에 진소운이 위태하게 휘청거리며 몸을 일으킨 채였다.

“흥! 흑염룡. 결국 일어났는가?”

“다행이도 이틀은 넘기지 않았군요. 제게 그 망할 별호를 지어주신 분께 안내해 주시겠습니까? 진소운이 빚을 돌려받으러 왔다 전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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