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121화 (121/357)

#121. <기회를 주는 흑염룡>

“대체 무슨 생각이에요? 진 공자.”

학관 대표의 가장 좋은 점이라면 숙소와 더불어 사용인들이 항시 대기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연회장의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지자 교두들은 급히 연회를 마쳤고, 우리 일행은 기숙사로 가기 전 내 숙소로 모두 모였다.

“차 향이 좋습니다. 한번 맛보세요.”

“…….”

나에게 이 수치심 덩어리인 옷을 강제로 입힌 중년의 시비는,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차와 다과를 내왔다.

남궁선화와 모용재화, 성모란은 본래 집에서도 이 정도 대우는 받았는지 놀라는 법이 없었지만, 우리 태을문 아이들은 말없이 등장하는 시비들의 모습에 바짝 긴장하여 말이 없었다.

“진 공자님. 정말 괜찮으신가요?”

“선화 소저는 괜찮으십니까?”

“뭐가요?”

“제가 의견도 묻지 않고 간부로 내정하긴 했습니다만…….”

“물론 저야 좋죠. 하지만 그 때문에 다른 이들이 잔뜩 화가 나서 그게 걱정인 거예요.”

“화가 났다면 어쩔 수 없는 거지요.”

오대세가의 세력에 들어갈 수 있었음에도 모두 나를 따라주었다. 나로선 최고의 참모진을 임명한 것이었다.

“하지만 학사 일정이 시작되고, 진 공자님이 짜는 일정에 아무도 따르지 않게 된다면…….”

“그럼 대표 자리를 내려놓으면 그만입니다.”

“네?”

“애당초 부귀영화와 승진을 위해 학관에 온 것이 아니니까요.”

안락한 생활을 포기해야 하고 사용인들을 쓰지 못하게 되겠지만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애당초 난 내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학관에 들어온 것이고 그 정도는 대표가 되지 않아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당장 얼마 뒤엔 무림학관의 대다수가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난 무림학관에 들어온 첫날부터 이 사건을 막을 방법을 생각하느라 밤잠을 설쳤다.

시산혈교.

혈마종의 한 분파로 200년 전 마교와 분파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꾸려 서장에서 활동하던 이들.

마교의 계략으로 정마대전이 벌어지기 전 무림맹의 상대는 이 시산혈교가 되고, 맨 처음 이들에게 갈려 나가는 희생양이 바로 이번 무림학관의 학관생들이다.

“전, 저와 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이곳에 들어온 겁니다. 대표의 자리나 차후 용봉지회의 직책 같은 건 관심에 두지 않습니다.”

내 이야기에 사람들의 시선이 멍하니 변한다.

전생에야 마교의 행동이 워낙에 은밀했고 그들이 강호 전역에 펼쳐놓은 마수가 복잡했기에 그들이 부리는 술수를 알아차릴 수 없었지만, 현재는 내가 있고, 내가 흘린 정보들이 조금씩 퍼져나가고 있다.

그로 인해 미래가 많이 바뀌었고, 시산혈교와의 일전도, 무림학관의 학관생들이 학살당하는 일도 없을지 모른다.

“전 그저 제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할 겁니다. 제 이익을 위해 그들과 타협하는 일 또한 없을 거고요.”

“……저, 혹시 저희도 진 공자님 사람인가요?”

남궁선화의 조심스런 물음.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당연한 거 아닙니까.”

“……헤헤.”

어떤 일이 펼쳐지든 내 목적은 분명하다.

전생에 내가 지키지 못한 이들을 지키는 것.

“더불어 그들이 아무리 술수를 부린다 하더라도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더불어 엿 같았던 놈들에게 엿을 제대로 먹여주는 것.

#

제갈소명은 장로전을 극렬히 혐오한다. 무림맹에서 장로전에 들어설 수 있는 이들은 대체로 능력보다는 정치를 잘하는 위정자들이다.

권력에 대한 갈망이 가득하고 특권의식에 찌든, 무림맹의 폐단들이 모두 모인 곳이 장로전이라고 생각하는 제갈소명이었다.

그들은 규율을 지키지 않고 규범을 뛰어넘으며 저들이 특권층인 양 행동한다.

그렇기에 약속도 없이 만통부에 쳐들어오고, 자격에 맞지 않는 인재를 마구 밀어넣는 행위를 단호하게 잘라내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제갈소명에게도 자신의 가득한 업무를 몽땅 미뤄두고 장로전의 인물을 만나야 할 순간이 생길 때가 있는데, 그때가 바로 그들이 ‘절차’를 지키는 순간이다.

“어색하게 왜 안 하던 짓들을 하는지.”

며칠 전에 연통을 넣어 일정을 조율하고, 장소를 잡았다. 갑자기 장로전의 인물과 생겨난 일정에 당황한 쪽은 되려 제갈소명이었다.

“대체 무슨 엄한 이야기를 하시려 이런 불편한 자리까지 만드셨소?”

제갈소명의 말에 명현도장이 지그시 미소를 짓는다.

“뭐, 꼭 약속이 있어야 만날 수 있는 겁니까? 그저 이렇게 만나 옛이야기나 나누는 거지요.”

제 놈과 자신이 언제 그런 이야기를 나눴다고. 더구나 과거에 제갈소명이 무림맹에서 용봉지회로 이름 날리고 있을 땐, 명현은 어디서 굴러먹었는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하기엔 바쁘신 분들이 이런 귀찮은 절.차.를 거쳐 오셨으니 하는 말입니다.”

“허허, 이번 사건을 통해 저희들도 깨달은 바가 많았습니다. 절.차.나 규.범.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입니다. 덕분에 흑도와 내통하고 있는 아이를 학관에 받아버렸지요.”

그럴 줄 알았다. 애당초 옛이야기는 무슨, 진소운을 수석 합격시킨 것에 울분을 갖지 않았으면 애당초 이따위 귀찮은 짓 따위는 하지 않았겠지.

“안 그래도, 장로전에선 새로운 법안을 입안하기로 했습니다. ‘진소운 법’이라 이름 붙였지요.”

“별로 좋은 작명은 아닌 것 같군요. 그리하면 꼭 진소운이 뭔가 불법을 저지른 것 같지 않습니까.”

“물론 입안되면 다른 이름을 붙이겠지요.”

“……이제 와서 법을 만든들 이미 학관에 합격한 아이를 내칠 수는 없습니다. 그건 아시지요?”

“물론입니다. 그저 자세하고 빈틈없이 꼼꼼한 거름망을 만들어, 다음에도 또 이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지요.”

진소운에 대한 일은 어느 정도 마음을 접은 것 같아 보이지만, 아직까지도 영 명현의 목적이 뭔지 감이 잡히지 않는 제갈소명이었다.

“이제 학관 시험도 끝났으니 본격적으로 강호를 돌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명현장로께선 맹의 용무를 보기에도 몹시 바쁘실 텐데, 강호까지 생각하십니까?”

제갈소명의 비아냥에도 명현 도장의 혈색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이번 북서 시험구역에서 사도들의 흔적이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

“우선은 그쪽 조사가 시급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금번 시험에서, 곤륜산 일대에 사도의 무리로 추정되는 이들과 응시생들 간 충돌이 있었다는 것은 제갈소명도 알고 있는 바.

하지만 복양 평원에서 나타난 마교의 흔적 때문에 조사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상황이었다.

“만통부 또한 그 일에 대해 인지하고 조사를 준비 중입니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정작 조사를 시작했다는 이야기는 들은 바 없습니다만.”

“일의 경중에 따라 처리하는 중입니다.”

“허허, 사도의 등장보다 더 중한 일이 있단 말입니까?”

강호 전체에서 마교의 흔적으로 보이는 것들이 속속들이 나타나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마교라는 대상으로 한정했을 때 증명되는 심증에 불과했고, 그들의 정체를 증명하기 위해선 더 자세한 조사가 필요한 바. 맹의 조사 인원들은 모두 그쪽에 쏠려있었다.

“아마 근 시일 내에 처리할 수 있을 듯하니 너무 걱정 마시지요.”

“허허, 믿을 수가 없군요. 탕마멸사에 가장 앞서야 하는 총군사께서 이리도 다른 일에 신경이 쏠려 있으시다니.”

“…….”

진소운의 일을 가지고 이런 식으로 복수를 하려나 하는 생각에, 심현각에서 가져온 명현도장의 치부 몇 개를 슬며시 꺼내려는 찰나.

“……하지만, 총군사껜 나름 다른 고충이 있으신 거겠지요.”

“…….”

“그래서 제가 생각을 좀 해봤습니다. 무림학관의 학관생들에게 이번 일을 맡겨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진소운이 간부진을 결국 선임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절반의 인원은 채웠지만 그것도 모두 자신들의 지인들.

진소운에게 힘이 되어 주어야 할만한 이들 모두가 진소운을 무시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일에 이 눈앞의 명현도장의 입김이 들어갔을 거라 생각되는 제갈소명이었다.

“학관생들이라곤 하나 이미 무공적으로 부대주 급은 되지 않습니까. 아마 학관생들에게도 귀중한 경험이 될 것입니다.”

무림학관생들이 실습을 대신하여 강호의 경험을 쌓는 일이 하루 이틀은 아니지만, 진소운은 학관생들을 휘어잡지 못했다.

‘결국 이렇게 나오겠다 이거군.’

지금 상태에서 학관생들이 움직였다간 통일되지 않은 지휘 체계에 결국 문제가 생길 것이고, 그 문제는 진소운의 탄핵을 앞당길 것이다.

하지만 당장 이렇게 열심히 준비를 하고 명분을 갖춘 명현도장의 이야기를 마냥 거부할 수만도 없는 상황.

“아직 학관생들이 적응도 하지 못한 상황에서 그런 큰일을 맡긴다는 건 내키지 않는군요.”

“적응이라니 그런 건…….”

“아, 물론 안 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런 일 정도라면 학관생들이 할 수 있겠지요. 다만 조금 시간을 주자는 겁니다. 어느 정도 체계가 잡히고 정리가 되어야 녀석들도 움직일 수 있을 것 아닙니까.”

“…….”

제갈소명이 진소운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시간을 벌어주는 것뿐이었다. 그마저도 없다면, 학관생들을 수습할 여유도 없이 조사를 나갔다 능력 부족으로 탄핵당할 것이 분명했으니까.

결국 명현도장도 그쯤에서 물러섰다.

“평생 잔머리만 굴리던 놈들을 상대하려니 영 머리가 아프군.”

만통부로 돌아가던 제갈소명은 자신의 관자놀이를 꾸욱꾸욱 눌렀다.

누군가 자신을 대신해서 저 능구렁이 같은 늙은 여우들을 싸그리 상대해 주면 속이 다 시원할 것 같은데.

그 정도로 머리가 돌아갈 것 같은 녀석은 지금 학관에서 제 목이 위태위태하다.

“이히힛…… 멍청한 놈,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걸복걸하게 해주마. 으히힛.”

“…….”

맹주원은 며칠간 힘이 없이 ‘내 청춘… 내 토끼 같은 부인… 내 여우같은 새끼들….’을 외치며 죽은 듯 살더니 이제는 눈에 불을 켜고 뭔가 일을 하고 있다.

“저 놈 뭐 하는 거냐?”

지나가는 부원이 작게 한숨을 쉬며 맹주원이 끼고 있는 규범집을 가리킨다.

“무림학관의 학관대표단 간부진이 결국 파행되지 않았습니까?”

“그래.”

“아무튼 그 소식을 듣자마자 다시 장가갈 기회가 왔다며 저렇게 일을 만들고 있습니다.”

꼴을 보아하니, 무림맹에서 보내는 서류들을 평소의 몇 배로 부풀려 보낼 생각인가 보다.

당장에 간부진과 학관생들의 도움을 못 받는 진소운의 입장에선 맹주원의 도움이 절실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려는 작전.

“말릴까요?”

“냅둬라.”

“네?”

평소라면 맹주원의 이런 짓거리를 절대 용서할 리 없는 제갈소명이 허락하는 것에 부원은 놀람을 금치 못했다.

“어차피 진소운에겐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니. 모로 가도 강남만 가면 되는 거겠지.”

더불어 맹주원으로 인해 진소운이 만통부에 한 발 걸쳐놓게 된다면, 자신도 훨씬 일이 편해질 것 같고 말이다.

#

학관생들은 성적에 따라 총 열 개의 반으로 나뉘었다.

수업은 오전 시간 세 개를 넘지 않게 해 차후 있을 학관대표단의 수업들을 위해 시간을 비워놓았고, 학관생들에겐 각자 개인의 연공을 할 시간이 충분하게 주어졌다.

“무(武)란 무엇인가?”

나는 우리 일행 중 유일하게 갑(甲)반에 배속되었고, 지금은 그 갑(甲)반의 첫 수업 시간이었다.

“결국 무란 강함의 한 종류일 뿐이다. 아무리 강대한 무인이라도 관의 힘에 당해낼 수 없고, 절대적인 권력도 금력에 비하면 십 년을 유지하지 못한다. 하지만 금력의 힘이란 결국 간접적인 것이니 무력 앞에선 꼬리를 말 수밖에 없다.”

“질문 있습니다.”

강의를 하던 교두가 손을 든 학관생을 바라본다.

“힘은 그 세 가지밖에 없습니까? 제 생각엔 다른 힘도 있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다른 힘?”

“네. 이번 저희 동기들 중에 인력(人力)이 훌륭하여 훌륭한 성적을 낸 이가 있어서 드리는 말입니다.”

“인력?”

“네, 인맥이 흑도까지 넓게 퍼져 시험을 합격한 이 말입니다.”

“……푸하하하하.”

“크하하하하.”

정적이 감돌던 학관생들 사이에서 박장대소가 터져나온다. 그리고 자연스레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

교두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도 배가 당길 만큼 웃어놓고는 그제야 신색을 회복하며 말했다.

“떽! 앞으로 함께할 전우를 그리 멸시해서야 쓰나.”

“글쎄요, 전 되려 불안할 것 같습니다. 언제 전향하여 등 뒤에서 칼을 꽂을지 모르지 않습니까.”

“푸흐흣, 그래. 그럼 자네는 저 친구의 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지?”

결국 교두는 나를 지목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질문을 했던 이를 바라봤다.

“글쎄요. 단지 인력으로 좋은 성적을 차지했다고 생각한다면, 무공을 익히기엔 지력이 너무 모자란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드는군요. 확실히 무림학관이 지력을 측정하지 않는다는 건 알겠습니다.”

“…….”

녀석들의 농담에 어울려 나도 농담을 했는데, 녀석들은 마치 죽은 시체라도 본 표정이 되었다.

정말 더러워서 못 해 먹겠네.

“그럼 다른 힘도 충분히 가지고 있다는 건가?”

“충분한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단지 인력으로 들어오기엔 학관이라는 곳이, 문턱이 워낙 높지 않습니까.”

“흠…… 그렇지. 이야기를 들어보니 다른 학관생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제가 많이 부족한가 봅니다.”

“자네를 증명할 자리를 만들어 주지. 최소한 자네가 무력에서 부족하지 않다는 걸 보여줄 필요가 있지 않은가?”

“비무를 하란 말씀이십니까?”

“뭐 무론을 펼쳐봐야 측정이 되겠나?”

“…….”

교두는 질문을 했던 이를 바라본다.

“자네도 경솔하게 입을 놀렸을 땐 그만한 각오가 되어있었겠지?”

“당연합니다!”

교두가 다시 나를 봤다.

“어떤가? 하겠는가?”

“그걸론 절 증명하긴 좀 힘들 것 같군요.”

학관생들의 얼굴에 비웃음이 어리고 이곳저곳에서 피식피식 웃음을 내뱉는다.

난 그들이 그러건 말건 앞으로 나아가며 말했다.

“최소한 다섯 명 정도 있어야 증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