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123화 (123/357)

#123. <기회를 주는 흑염룡(3)>

-존경하는 형님.

그간 별래무양하시었고, 기체후일향만강 하시온지요.

형님께서 학관의 수석이 될 거라 단 한 번도 의심한 적 없는 동생이지만, 실제 소식을 듣곤 당장이라도 무한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다른 일들로 인하여 이곳에 몸이 묶여있는 동생을 용서하십시오.

태을문은 그간 별일이 없이 잘 있습니다.

최근 모산파에서 출장을 나온 이들이 기문진식의 설치를 완료하고 왕가장으로 넘어갔습니다.

저 또한 태을문의 기관진식 설치를 완료한 이후엔 왕가장에도 같은 것을 설치하러 가야 하는데, 시간을 맞출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현재로선 기관진식의 설계는 모두 끝났지만, 그 부품들을 구현할 만한 기술을 가진 이들이 없는 실정입니다.

외당주님과 왕가장주님이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실력 좋은 야장들을 찾고 계시지만, 여의치 않을 것 같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모든 일을 마무리 짓고 형님을 보러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나, 소제가 책임감 없는 모습을 보였다간 형님께서 실망하시겠지요.

저 또한 제 일을 완벽하게 마무리 짓고 헌앙한 장부의 모습으로 형님 앞에 설 날을 기대하겠습니다.

다행히도 은호 사형께서 형님의 헌앙한 모습을 보내주셔서 많은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수석’의 금빛 글씨가 눈에서 떨어지지 않아 하루 종일 화폭만을 보고 있었습니다.

왕 사저는 그림 장인을 불러 똑같은 그림을 더 크게 그려달라 부탁하였고, 문주님께선 은호 사형이 보내주신 그림을 대현전의 가장 정면에 걸어두시겠다 하여 많은 사제들이…….

거기까지 읽던 나는 서신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탕.

“……은호 어디 갔냐?”

모용재화가 고개를 빼꼼 들었다.

“은호 형님이라면 아까 형님이 서신을 읽기 시작할 때 나가셨지요.”

“……빌어먹을 놈.”

요 며칠간 처음 보는 이와 함께 있는 모습이 자주 보이기에 나름대로 학관 내에서 친구라도 사귄 줄 알았다.

한데 그게 친구인 척한 화공이었을 줄이야.

“이 망할 놈이…… 돈이 어디서 났지?”

의식주가 모두 해결되는 학관 내부에서 돈이 쓸 일이 뭐가 있겠는가.

더구나 태을문에서 지낼 때보다 더욱 훌륭한 수준의 것들이 제공되기에 다른 이들은 몰라도, 금은동 형제의 학관 만족도는 최상인 상태.

딱히 돈을 달라 한 적도 없었기에 자잘한 용돈을 주는 것 말고는 분명 돈이 없을 텐데.

“…….”

“…아우, 찌뿌둥해. 몸이나 좀 풀러 가볼까?”

성모란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 소저.”

움찔 어깨를 부르르 떠는 성모란.

수상하기 짝이 없다.

“……어우, 선화야 우리 비무하러 갈래?”

“성 소저도 알고 있었습니까?”

“…….”

“성 소저가 범인이었군요.”

“아, 아니 아니에요. 무, 무슨 소릴……! 전 아무런 관련이 없어요.”

“…….”

“지, 진짜예요. 그냥 은호가 그림을 몇 점 그리겠다는 말에 돈을 준 거예요.”

“은호는 아직 학관생인데 돈을 언제 돌려받을 줄 알고요?”

“아…… 아하, 아니 뭐. 그렇게 큰돈도 아니고. 대신이라고 할 만한 것을 받았다고나 할까……. 이제 돈 같은 건 크게 상관할 일이 아니라고나 할까…….”

무슨 말인지 횡설수설하는 성모란.

거기다 어쩐 일인지 남궁선화까지도 눈을 피하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수상한 모습을 보인다.

“아, 아 참! 그, 그러고 보니 일각 스님이 초대장을 보냈더라고요. 그거 보셨어요?”

남궁선화는 매우 어색하게 말을 돌리고 있었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고 그 장단에 맞춰주기로 했다.

“그쪽도 연회를 연답니까?”

벌써 세 번째.

첫 번째로 움직인 것은 12봉성이었고, 그 다음은 오대세가. 그리고 이제 구파일방까지 연회를 열겠다 한 것이다.

“그러니까 말이에요. 아직 학관대표가 열지도 않았는데.”

성모란이 기가 막히다는 듯 손부채질을 한다.

“그보다 우리도 이제 연회를 열어야 하지 않을까요?”

“제가 연다 한들 참석할 이가 누가 있겠습니까.”

본래 학관대표단이 온전히 꾸려지면 첫 번째 연회를 시작으로 학관생들의 학사가 시작되는 것인데, 그걸 다른 이들이 가로챈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학사 일정이 시작한 지 이 주째.

학관대표단의 업무는 일이 숙달되기 시작하면서 속도가 더 붙었고, 우리만으로 불가능해 보였던 서류 처리는 모두 완료되었다.

하지만 진정한 문제는 내가 꾸리는 학사 일정에 참석할 이들이 없다는 것.

그리고 그런 학사 일정이 삼 개월간 지속되면 결국 학관 대표직에서 물러나야 한다. 삼청무상검이 그래서 물러났던 것이고.

“애당초 의무로 참석시킬 수 있는 이들이 아닙니다. 그럴 돈으로 차라리 다른 일을 하는 게 낫지요.”

“다른 일?”

내 머릿속에 든 정보들이 학관대표단의 서류 처리에만 쓰이는 것은 아니다.

예산을 관장하고 시행하는 만통부를 어떻게 해야 굴러가게 할 수 있는지도 알고, 그걸 어떻게 써야 하는지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참석해 달라고 애원할 필요 없습니다. 다들 참석하고 싶어 안 달나게 하면 될 일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난 대표직에서 쉽사리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

“이게 다 뭔 일이야!”

제갈소명이 짜증이 난 듯 소리를 버럭 질렀지만, 그에 반응하는 부원들은 없었다.

가뜩이나 학관정시도 끝난 마당에 일할 것이 없어서 다들 휴가만 기다리고 있는 와중인데, 정시에 비할 정도로 많은 문서들이 만통부에 도착한 것이었다.

“무림학관에서 올라온 것들입니다.”

“학관? 그놈들이 언제 일을 이런 식으로 처리했다고.”

“학관 쪽이 아니라 학관대표단 쪽이요.”

“뭐?”

제갈소명은 무심결에 서류 하나를 뒤집어 보았다.

“…….”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서류들은 군더더기가 없이 완벽하다.

“이거 몇 번 왔다 갔다 한 거야?”

“한 번에 처리된 겁니다.”

“뭐?”

학관대표단이라도 무림맹의 절차를 배우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 몇 번이고 반려당하고, 몇 번이나 수정을 거쳐야 겨우 볼만한 보고서가 올라오는 법인데.

이건 그 과정을 모두 거치고 한참이나 경험을 쌓은 행정원이 처리한 듯한 느낌이 아닌가.

“맹주원 그놈이 학군대표단에 도움을 주기로 했냐?”

결국 그렇게 되었나 보다 하고 혼자 읇조리니, 부원이 고개를 젓는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되려 진소운을 골탕 먹이겠다고 쓸모없는 문서까지도 만들었던 부장님인데.”

“그런 것들까지 다 처리했다고?”

“네.”

서류의 산더미 사이에서 맹주원은 망연한 얼굴로 주저앉아 있었다.

“더구나 갑자기 학사 일정에 필요하다고 엄청난 예산을 신청했습니다.”

“뭐?”

“이거 보십시오.”

학관대표단이 짜는 학사 일정이라는 게 대부분 친목을 도모하는 것이니만큼, 연회를 열거나 무림 명사를 초대하여 자신의 인맥을 자랑하거나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 금전 삼만 냥?”

하지만 녀석에겐 자랑할 만한 인맥 같은 건 없을 테니, 연회 예산이나 신청했겠거니 했는데.

그 금액은 어지간한 일에도 놀라지 않는 제갈소명을 기함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미친, 무슨 천하 십대 고수들 모두를 초대해 연회라도 펼칠 생각이라더냐?”

부원은 대답 없이 끌끌 웃기만 할 뿐이었다. 가끔은 명사를 초대하겠다며 강의비를 막대하게 청구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제갈소명이 그런 것을 용납할 리 없었다.

“당연히 안 될 일이지.”

“저…… 근데 통과시켜 줘야 할 것 같습니다.”

“뭐?”

“여기 예산을 쓰는 방안들을 작성한 것입니다.”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는 보고서에는 예산이 왜 필요한지, 어디에 쓸 것인지, 그것으로 인해 어떤 효과가 나며, 행사로 인해 무림맹이 어떤 이득을 가지게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그리고 중간중간 한 번도 걸리는 문장이 없을 정도로 유려하기 그지없었다.

“…….”

“안 줘도 되겠습니까?”

장로전이나 무각처럼 그냥 무작정 와서 예산 늘려달라고 떼를 쓰는 놈들이랑은 차원이 다르다.

이건 돈을 안 줄래야 안 줄 수가 없다.

아니, 다른 곳의 예산을 줄여서라도 돈을 내줘야 할 지경이었다.

“허허, 이놈 진짜…….”

당장에 만통부 부부장 정도의 직위를 맡겨도 될 만큼의 역량이라는 느낌까지 받는 제갈소명이었다.

‘부부장? 아니, 심현각주를 맡겨도 될 것 같은데.’

제갈소명이 자신만의 희망 가득한 꿈을 꾸고 있을 때, 부원은 말을 이었다.

“어쨌든 이것 때문에 저희가 검증해야 할 일도 이렇게 늘어났습니다. 부장님은 그 때문에 저런 상태시고요.”

“쯔쯧, 그러게 지가 일을 왜 만들었어.”

멍하니 산더미 같은 주변의 문서들을 바라보던 맹주원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그 모습이 꽤나 기괴하여 제갈소명이 뒤로 물러나려는 찰나.

“초, 총군사님…….”

“난 안 도와줄 것이다! 네놈이 뿌린 씨앗이니 네놈이 거둬라!”

“총군사님!!!”

맹주원이 네발로 기어 달려와 제갈소명의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안 도와준다니까!”

“이거 보셨습니까? 이거?”

맹주원은 방금 전 부원이 보여주었던 예산 증액 신청서를 흔들며 말했다.

“진소운은 졸업 후에 반드시 만통부에 들어와야 합니다. 아니, 지금 당장 들어와야 합니다. 녀석에게 제 부장 자리를 주십시오. 제가 부부장, 아니 부원이 되겠습니다.”

“이, 이런 미친 놈이…….”

“총 군사님!!!! 제발!!!!! 진소운을!!!!”

“당장 안 떼어내고 뭐 해!”

부원 네댓이 달려들어서야 겨우 떼어진 맹주원이, 만통부를 나가는 제갈소명에게 절규했다.

“총군사님!!! 진소운은 꼭 만통부로 와야 합니다!!!”

#

“…….”

“왜 안 입으시겠다는 건지 전 도통 알 수가 없군요.”

시비장이 길게 한숨을 내쉰다.

하지만 나로선 절대 물러설 수가 없었다.

“……이걸 입고 죽을 뻔했습니다.”

“네? 그게 무슨…….”

“동경에 비친 제 모습이 수치스러워서 호수에 절로 몸을 던지고 싶어지더군요.”

“……어, 어찌 그런 말씀을, 이건 호북성에서 수를 가장 잘 놓는 금분네가 백 일에 걸쳐…….”

“그러니까, 정식 행사도 아닌데 왜 이걸 입어야 한다는 겁니까?”

시비장은 여전히 예의 ‘수석’ 옷을 내게 입히려 하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학관생분들은 물론이고 무림맹의 명사들도 오시는 자리 아닙니까. 필히 눈에 띄는 이 옷을 입고 가셔야 합니다.”

“이번엔 죽어도 안 입을 겁니다.”

그렇게 내가 태을팔만신보를 펼치자 허상을 잡으려던 시비들이 바닥에 넘어졌다.

“자, 잠깐! 알겠습니다! 그러니 그 칙칙하고 미적 감각이란 내다버린 것 같은 무복을 입고 가신다 하지 말아주십시오.”

“…….”

난 순간적으로 내 무복을 바라봤다.

새로 맞춘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기운 흔적도 없고, 최근엔 바닥을 구를 일도 없었기에 얼룩도 많지 않았다.

이게 왜 칙칙하단 말인가.

“……혹시 몰라서 준비한 옷이 있습니다.”

시비장이 십 년은 늙은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시비들이 새 옷을 가지고 나왔다.

“최소한 이걸 입고 참석해 주십시오.”

내가 늘상 입던 검은색인 것은 같았지만, 고급 천을 쓴 듯 윤기가 흐르고 소매를 타고 얇게 은색의 수가 들어가 있어 더욱 고급스러워 보였다.

“……진작 그러시지.”

옷차림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편이긴 하지만, 이 정도라면 충분히 입을 만했다. 사실 흑색 무복은 다른 학관생들에 비해 너무 수수해 보이니까.

그들 사이에 있으면 종종 내가 대표로 이 자리에 와 있는지 하인으로 시중을 들려 온 것인지 헷갈릴 때가 있었다.

상의는 도포처럼 소매가 길게 늘어지고 뒤편으로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은색 수가 놓여진 문양들이 화려하게 엇갈렸다.

“이럴 줄 알았다면 여기에도 수를 놓을 걸 그랬습니다.”

중년 시비장은 여전히 ‘수석’이란 글씨를 포기하지 못한 듯 보였다.

“그런 짓을 했다간 이 옷도 다시는 입지 않을 것입니다.”

“어찌 그리 자신을 내세우는 것을 싫어하십니까. 그러니 학관 생활에도 어려움을 겪는 것 아니십니까.”

어쩐지 중년 시비장의 이야기는 내 상황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내가 대답이 없자 중년 시비장의 두 눈이 토끼처럼 동그래졌다.

“죄송합니다. 실언을 했습니다.”

“뭐, 실언이라고 할 만한 게 있겠습니까.”

그게 틀린 말도 아닌데.

#

나는 구파일방이 여는 연회장으로 향했다.

연회장으로 가는 길목을 따라 화려하게 등이 장식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그 등길을 따라 서넛이 모여 걷고 있었다.

학관생으로 보이는 이들이 절반.

그리고 이런 연회 때마다 그들과 연을 만들기 위해 참석하는 이들이 절반이었다.

하나같이 고급스런 옷가지와 장신구들을 패용한 이들의 모습은, 그들이 범상치 않은 신분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연회장까진 거리가 꽤 남았었지만 벌써부터 흥겨운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겨울이 지나 날씨가 풀리며 연회장 바깥에도 이곳저곳에 술상을 놓았는데, 구파일방의 제자들은 그런 술상들을 돌아다니면서 서로 인사를 나누고 친분을 쌓기 바빠 보였다.

“오셨군요.”

고개를 돌리니 제갈정기가 가볍게 포권을 쥐어 보였다.

“혼자 오셨습니까?”

“다들 속이 좋지 않다 하여.”

사실 굳이 따라오겠다고 한 걸 말린 것은 나였다.

뻔히 이런 자리 오면 불편한 시선을 받게 되는 것을 알기에, 그런 불편함은 나 혼자 감수하면 충분하지 않겠는가.

“배려심이 대단한 분이시군요.”

제갈정기는 뭔가 아리송한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구파일방의 연회에 참석하십니까?”

“아시다시피,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서로 적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한 몸이라고도 볼 수 없지 않습니까?”

그들이 적이 아니라면 전생엔 왜 그토록 모질게 복마전을 벌였던 건가.

“전략적 동맹 관계라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고 하기엔 공통의 적이 너무 초라하지 않습니까.”

“모른 척하시는 겁니까. 정말 모르시는 겁니까.”

“…….”

“진 공자는 ‘상징’입니다. 그것도 꽤 커다란 균열의 상징.”

“제가요?”

“혼란은 그 작은 균열에서 시작되는 것이지 않습니까.”

“…….”

제갈정기는 나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왜 대표께선 연회를 안 여십니까? 학관 대표께서 연회를 안 여시니 먼저 열어버린 저희들의 낯이 안 서지 않습니까.”

“……열면 오실 생각은 있으십니까?”

“물론 갈 생각은 없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몰래 학관 대표를 지지하는 있는 분들도 있을 텐데 말이죠.”

주변을 둘러 보다 남화성과 함께 선 철순직과 눈이 마주쳤다.

그들은 어째서인지 딱딱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 어서 연회를 여시지요. 차일피일 연회를 미루다간 결국 학사 일정은 물론이고, 연회도 한번 못 열고 물러난 학관 대표가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 물어도 되겠습니까?”

나는 히죽이죽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네. 뭐든.”

“왜 제갈천기에 대해선 안 물어보십니까?”

“…….”

그의 얼굴이 처음으로 딱딱하게 굳었다.

“제가 알기론 제갈세가는 장자계승이 아닌 능력주의로 계승을 한다 알고 있는데, 그 때문에 천기를 경계하시는 겁니까?”

“……세가의 일입니다. 진 공자가 신경 쓸 일이 아니죠.”

“아니면 혹시 천기가 균열의 상징이기 때문입니까?”

“…….”

이제껏 여유 만만했던 제갈정기의 얼굴이 야차처럼 변했다.

“진 공자는 꽤나 유해한 사람입니다. 문제는 본인이 그것을 잘 모르고 있다는 거지요.”

전생에 제갈정기는 나를 같은 인간으로도 본 적이 없었는데, 이 정도면 출세한 것인가.

“그리고 본인이 아닌 세상 모두가 틀렸다고 생각하고 있지요.”

제갈정기의 언성이 점점 높아진다.

주위의 시선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진 공자가 위험한 사람인 거지요. 아시겠습니까?”

그때, 장년인 무리가 우리쪽으로 다가왔다.

“남의 잔치에서 무슨 소란인가?”

장년인들은 하나같이 고급스런 의복에 보석이 박힌 요란한 요대를 착용하고 짜맞춘 듯 한 손으론 섭선을 부치고 있었다.

제갈정기는 그들을 보고 화들짝 놀라 얼른 포권을 쥐었다.

“무림맹의 지고하신 장로님들을 뵙습니다. 제갈세가의 정기라 합니다.”

장년인들의 맨 앞에 선 사람은 잠시 제갈정기를 보다가 내게 시선을 돌렸다.

나는 천천히 그리고 가볍게 포권을 쥐어 보였다.

“인사 올립니다. 진소운입니다.”

“어디 소속인지, 어디에 근본을 두고 있는지 말하지 않으면 내가 어찌 네놈을 알 수 있느냐?”

장년인들 맨 앞에 선 이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저를 모르십니까?”

“내가 너를 어찌 안다 그러는 것이냐?”

“방금 전에 ‘남의 잔치’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제갈정기는 물론이고 당연히 제가 구파일방의 소속이 아님을 아시기에 하신 말씀 아니십니까?”

“…….”

미간을 잔뜩 찌푸렸던 장년인, 아니, 실제적으로 무림맹을 내부 권력 투쟁의 시발점이 되었던 장로들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

“……진 공자. 이분께서 누구신지 아시고 이리 무뢰를 범하시는 겁니까?”

민머리에 승복을 입은 이가 꽤 놀란 얼굴로 말했다. 소림사의 일각이었다.

“태을문의 진소운입니다.”

내가 가볍게 다시금 포권을 쥐며 말하자 명현도장이 비웃음을 지었다.

“흥, 과연 흑도무림을 등에 업은 흑염룡의 기세가 무섭다더니 사실이었구나.”

“사실이 아닌 것이 명현 장로님에 의해 사실이 되어버려 제가 꽤 곤란을 겪고 있습니다.”

“네놈이 학관대표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것이 내 탓이라고?”

“그러지 않고서야 이토록 노골적으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12봉성들의 세력들이 저를 무시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게 다 장로님들께서 제 행사를 방해하셨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지요.”

“허, 뭐라?”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돌고, 사방에서 압력이 느껴진다.

“무림에서 그따위로 말을 지껄이다간 목숨을 부지하지 못한다는 것을 배우지 못하였느냐?”

명현도장뿐만이 아니라 그 주위에 선 장로들이 마치 일심이라도 된 듯 동시에 암경을 쏘아대는 바람에 대답은커녕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내 옆에 서 있던 제갈정기는 화들짝 놀라며 두 손으로 자신의 목을 부여잡고 당황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주위에서 조여드는 강력한 압력 때문에 움직이지도 못하자, 금방 얼굴이 퍼렇게 변해가며 곧 죽을 듯한 얼굴이 되었다.

나는 얼른 태을진경은 전력으로 끌어올려 저들의 암경을 밀어내었다.

“헙.”

명현도장의 뒤쪽에서 기함 소리가 터져 나왔고, 조금은 숨 쉴 수 있는 여유가 생겨났다.

명현 도장은 꽤나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

“확실히 운으로 들어온 것은 아니구나.”

명현도장의 말과 함께 주위를 압박하던 암경이 일거에 사라지고, 제 목을 부여잡고 있던 제갈정기는 털썩 바닥에 쓰러져 숨을 한참이나 몰아쉬었다.

같은 공간에서 제갈정기는 쓰러지고 나는 멀쩡해 보이는 모습에, 사람들의 시선에 이채가 어리기 시작했다.

나도 당장에 제갈정기와 똑같이 숨을 몰아쉬고 싶었지만, 이를 악물고 버텨냈다.

“그래, 듣자 하니, 아직 학사 일정은 물론이고 학관대표의 이름으로 연회도 열지 않았다고?”

“허례허식에 불과한 잔치를 누굴 위해서 열어야 하겠습니까.”

“이래서 못 배운 것들은 쯧.”

명현 도장이 혀를 차며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그렇다면 금전 삼만 냥의 예산은 왜 신청한 것이냐?”

명현도장의 입에서 나온 말에 사방에서 기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사, 삼만 냥?”

“그런 돈이 학관대표한테 주어진다고?”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야?”

명현도장의 말로 인해 연회에 참석한 학관생들은 물론이고, 구파일방과 연을 맺고자 하는 이들까지도 모두 나를 주목하고 있었다.

“당연히 학사 일정을 위한 겁니다.”

“금전 삼만 냥이?”

“네.”

“연회에 참석한 이들에게 금원보를 하나씩 나눠줄 생각이더냐?”

내가 대답에 뜸을 들이자, 장내는 소낙비가 내린 숲속처럼 조용해졌다.

“그럴 리가요.”

“그럼 대체 그만한 돈을 어디 쓰겠다는 거지? 설마, 착복하여 네 사문에 비자금으로 보낼 생각이라면 내가 있는 한 불가할 것이다.”

“저희를 너무 거지로 보시는군요.”

“그럼 그 돈을 어디 쓰겠다는 것인지 밝혀라.”

이미 연회장의 연주는 모두 끊겼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명현도장 덕분에 일이 예상보다 쉽게 풀렸다.

나는 목소리에 내공을 실어 말하기 시작했다.

“모두들 마령 고원에서 일어난 악몽에 대해서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

“…….”

“무공의 고하를 떠나 한번 갇히면 고혼이 되어버리는 끔찍한 살진을.”

내가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수백 개의 시선이 따라왔다.

“저는 그 악몽이 되풀이되지 않게 하기 위해 무량불괴멸혼진의 해법을 공유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를 위해 무림학관 대마장에 무량불괴멸혼진이 구현되고 있습니다.”

사방에서 앓는 듯 탄식이 터져나왔다.

“허…….”

“어쩐지, 이상한 건축물이 올라온다 했더니만.”

“그걸 알려준다고?”

“모산파에서도 딱히 해진의 방법이 없다 했는데…….”

잠시의 소란은 내가 입을 여는 순간 빛을 만난 그림자처럼 사라졌다.

“아시는 분도 있겠지만, 저는 유일하게 그 멸혼진을 오가며 사람들을 구했던 사람입니다. 이번 학사 일정에 참석하신다면, 차후 여러분들이 멸혼진에 갇힌다 하더라도 목숨을 구할 수 있을 겁니다.”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더불어 자신의 사문에 멸혼진을 설치할 수 있는 단서를 얻어 가실 수도 있겠지요.”

내 얘기가 끝나자마자 소란은 다시금 커졌다.

그때, 인파 속에서 한 사람이 질문을 했다.

“누구나 참석할 수 있는 겁니까?”

목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니, 12봉성과 함께 있던 철순직이었다.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이 행사는 모든 학관생들을 위한 것이니까요.”

나는 잠시 뜸을 들이고 말을 이었다.

“단, 시설이 완벽하지 않은 만큼 시간과 인원수엔 제한을 둘 겁니다. 선착순으로 열흘간 단 이백 명만이 무량불괴멸혼진에 대한 해법을 배워가실 수 있을 겁니다.”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장내의 소란이 커졌다.

사람들은 연회는 이미 뒷전이었고, 다들 마령고원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공유하기 바빴다.

명현도장과 장로들, 그리고 구파일방의 학관생들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가뿐히 무시하고 제갈정기에게 다가갔다.

“내가 균열이라고 했습니까?”

“…….”

그는 좀 전의 느낀 암경에 대한 압력과 내가 말한 이야기들로 인해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얼굴이었다.

나는 그의 귓가에 작게 말했다.

“정확하게 봤군요. 나는 균열이 맞습니다. 그리고 그 균열이 당신들이 탄탄하게 쌓아온 둑을 부수는 첫 번째 구멍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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