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125화 (125/357)

#125. <기회를 주는 흑염룡(5)>

천지사방이 모두 백색인 공간의 모습을 보고, 은설란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허무(虛無)로 사람을 미치게 만들어 죽이는 절진이라더니, 그 말을 직접 체험하게 될 줄이야.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북해에 터를 잡은 자신의 사문이 기문진식을 설치할 일도 없고, 의무복무가 끝나면 더 이상 강호에서 활동하지 않을 자신이 진법에 갇힐 일 같은 건 없었음에도 굳이 이 행사에 지원한 것은, 강호엔 기댈 곳 없는 그녀였기에 뭐라도 하나 얻어갈 게 있을까 하는 작은 희망에서였다.

“여기 들어오는 게 아니었는데.”

간접적인 원인을 따지자면 함께 들어온 홍사련 때문이고, 직접적인 원인을 따지자면 그녀의 몸에서 나는 꽃향기에 딴 정신을 팔아 뒷걸음질 친 자신 때문이었다.

어떠한 기물도 냄새도 느껴지지 않는 공간에 들어서자 평소 맡지 못했던 체취가 강하게 느껴지며, 사련과 달리 자신의 몸에서 느껴지는 땀 냄새에 화들짝 놀라 한 걸음 물러났을 뿐인데, 앞과 뒤에 섰던 사람들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하아…….”

본래 사련과의 관계는 이렇게 불편하지 않았다.

그녀의 사문인 빙백궁은 태을문과 마찬가지로 백팔봉의 최하단에 위치한 문파였다.

과거 소수신녀라는 전설적인 고수가 개파조사로 있었고 그녀의 성명절기인 소수신공이 대대로 내려오고 있었지만, 실제로 소수신녀 이후에 소수신공을 사성 이상 익힌 존재가 없었다.

고수의 부제는 문파를 쇠약하게 만들었고, 지금에 와선 ‘빙백궁 대신 빙백굴에 산다’고 조롱받기 일쑤.

그랬기에 사련과는 동병상련의 감정으로 금방 친해질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무 많이 변했지.’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진 건.

정확히 말하면 은설란이 사련에게 거리를 두기 시작한 것은, 그녀의 대사형인 ‘흑염룡’의 이름이 강호를 울리면서부터다.

마령고원에서 수천의 사람들을 구하고, 용봉지회에서 풍백파검의 인정을 받고, 폭풍처럼 정시를 돌파하는 동안 은설란은 사련에게 점점 거리를 느꼈다.

사련과 자신을 무관심하게 보던 학관생들이 점점 사련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흑염룡은 백팔봉에 소속된 제자들에겐 동경의 대상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라고 흑염룡을 동경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사련의 든든한 사형이라는 것.

그리고 은설란에겐 흑염룡과 같은 사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녀로 하여금 사련에게서 멀어지게 했다.

“못난 년은 못난 짓을 스스로 하는 법이니까.”

홍사련은 흑염룡과 태을문의 이름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려도 이전과 같았다.

아니, 되려 은설란에게 흑염룡을 소개시켜 주겠다고 이야기도 했었다.

흑염룡이 은설란의 이야기를 듣고 만나보고 싶어 했다면서.

하지만 이미 배배 꼬인 열등감에 시야가 가려진 은설란에겐, 그것도 좋게 들리지 않았다.

무림을 들썩거리게 하는 대단한 신성이 뭐 볼 게 있다고 은설란을 만나보고 싶다고 하겠는가.

다 사련이의 배려일 뿐이지.

“후우.”

그리고 그 많은 열등감들이 지금 이 상황을 만들어 낸 것이었다.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

“결국 이렇게 죽는 건가…….”

텅 빈 벽곡단 주머니에 손을 넣었던 은설란이 한숨을 쉬었다.

처음 멸혼진 안에 들어갈 때, 일 주야 치의 벽곡단과 물을 주기에 뭔가 싶었는데, 그것들이 없었다면 은설란은 진즉에 아사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젠 그마저도 모두 떨어져, 벌써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곡기를 입에 넣어보지 못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하하…… 하하.”

죽음이 느껴지자, 어색한 웃음이 흘러나온다. 하지만 그 웃음은 넓게 퍼지지 못한다. 적막과 공허(空虛) 속에 이내 파묻혀 버린다.

생애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완벽한 적막은 은설란에게 생소한 공포를 느끼도록 만들기에 충분했다.

우웅.

소수신공을 끌어올리자 두 손에서 하얀 김이 흘러나온다.

은설란은 그 손을 양 볼에 대고 나서야 아직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꼈다.

‘결국 소수신공의 비밀도 밝히지 못했고.’

수백 년간 누구도 파헤치지 못한 비밀을 자신이 풀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그럼에도 아쉬움이 남는 건.

무림맹 활동을 하고, 빙공과 화공의 고수들을 만나며 비밀을 풀어볼 시도조차 해보지 못하고 죽는다는 점이었다.

은설란은 마지막으로 죽기 직전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계속해서 소수신공을 쓰고 또 썼다. 미약한 내공은 금세 바닥을 드러내고 냉기가 점점 미약해지기 시작했다.

단전의 내공이 모두 사라지자 온몸의 힘이 쭉 빠진다.

지금 당장 느낄 수 있는 생(生)의 감각이란 소수신공 밖에 없기에 텅빈 단전을 억지로 쥐어짠다.

마치 생에 필사적으로 집착하는 것처럼.

쩌저적.

그녀는 자신의 손에서 들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볼에서 손을 떼었다.

“이게…… 무슨…….”

손바닥엔 하얀 김이 흘러나오는 대신 살얼음이 맺혀있었다.

“…….”

소수신공을 멈춘 그녀는 천천히 손바닥을 모아 손으로 얼음을 녹였다.

손안에 맺힌 얼음이 금세 한 모금의 물로 변하였다.

“아…… 아…….”

은설란은 방금 전의 감각을 되살려 소수신공을 운용한다.

쩌저적.

손바닥 모양을 본뜬 듯 얼음이 생겨난다.

은설란은 이미 메말라 버린 입술을 적실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소수신녀가 가르침을 전하지 못하고 죽은 이후에 소수신공을 제대로 익힌 이가 없었다.

무려 사백 년 만에, 무량불괴멸혼진에서 죽어가는 은설란이 소수신공의 비밀을 밝혀낸 것이다.

“흑…… 흑…….”

빙백궁의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안다면 얼마나 좋아할까, 빙백궁을 이끌어 가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얼마나 기뻐하실까.

더불어, 이 깨달음을 전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어가야 하는 자신의 신세가 너무나 한탄스러웠다.

“빌어먹을…… 흑흑 망할 세상!”

은설란은 생애 단 한 번도 내뱉지 않았던 욕을 내뱉었다.

아무렇게나 흩뿌린, 손바닥에서 흘러나온 얼음 결정이 사방에 뿌려지며 사라진다.

“차라리 깨달음이나 오지 말 것이지…… 흑.”

당장에 눈앞에 당면한 죽음보다, 비밀을 전달하지 못한다는 것이 더욱 속상했다.

그녀가 세상의 부조리함에 분개하며 욕을 내뱉고 있을 때.

“깨달음이 왔으면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닌가?”

“!!!!”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은설란의 두 눈이 토끼 눈이 되었다.

목이 부서져라 고개를 돌려 바라본 그곳엔, 옷도 검도 모두 흑색인 사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흐, 흑염룡…… 대, 대협?”

“네가 은설란이지?”

“저, 저를 아세요?”

그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거론된 순간, 은설란의 심장이 미칠 듯이 뛰기 시작했다.

“사련이에게 얘기 많이 들었어. 근데 내가 중요한 시간을 빼앗은 건가?”

흑염룡이 은설란의 손아귀에 쥐어진 얼음 결정들을 보았다.

“아, 아니에요. 이미 감은 잡고 정리는 다 끝난 뒤라.”

“그럼 이제 그만 나갈까?”

“나, 나간다고요?”

거대한 백지 가운데에 위치한 흑점처럼 보이는 사내. 그의 말에 은설란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깨달음을 더 얻고 싶은 욕심은 알겠는데, 네 몸 상태가 꽤 걱정되거든. 음식이랑 물도 다 마신 것 같고. 힘들지 않아?”

“나, 나가고 싶어요! 이곳에서 나가고 싶어요!”

흑염룡이 그림처럼 푸근하게 웃었다.

“그럼 가자.”

흑염룡이 은설란을 지나쳐 앞장서자, 은설란이 이번에는 놓치지 않기 위해 재빠르게 걸으려 했다.

“아얏.”

하지만 이미 지쳐버린 육신이 말을 듣지 않았다.

“괜찮다면 내가 업어도 될까? 이번에 또 발을 잘못 디딘다면 언제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르거든.”

사내에게 안긴다니, 그런 건 책에서나 보던 일이 아닌가, 당황한 은설란이 뭐라 답하기도 전에 흑염룡이 은설란을 등에 업었다.

그의 등은 겉보기와 달리 넓고 단단하고…… 따뜻했다.

“조금만 참아, 금방 나갈 수 있을 거야.”

“……저, 근데 대협…….”

“대협이라니 그거 좀 간지러운데?”

“아앗. 죄, 죄송해요.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할지. 선배님?”

“나랑 같은 기수잖아. 선배님도 어색하지. 그냥 사련이 친구니까 오라비라 부르는 건 어떠니?”

“그, 그래도 괜찮을까요?”

은설란은 어쩐지 얼굴에 열감이 느껴지는 듯했다.

“사련이 친구면 내 동생이나 마찬가지니까. 근데 왜 부른 거니?”

은설란은 애당초 자신이 무슨 질문을 하려 했던 것인지조차 까먹어 버렸다.

머릿속에 ‘내 동생’, ‘오라비’라는 단어가 마구 증식하며 생각이 멈춰버렸기 때문이었다.

“까, 까먹었어요.”

“그래, 질문은 나가서 생각해 보자.”

완전한 적막(寂寞), 공허의 공간에서 은설란은 더 이상 쓸쓸하지도 고독하지도 절망적이지도 않았다.

#

“덕분에 한숨 돌렸습니다.”

제갈소명의 말에 백수신검 혁무강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허허, 정말 진소운 그 아이가 특별하긴 한가 봅니다.”

“저로서도 정말 어찌할 방도가 없었으니까요.”

제갈소명이 착잡한 표정을 지었지만, 입가에 어린 미소만은 지워지지 않았다.

혁무강으로선 그 장면 또한 놀라울 뿐이었다.

제갈소명이 감사의 인사라는 걸 하는 사람이던가? 애당초 그는 누군가에게 주면 주는 사람이었지, 부탁을 할 만한 아쉬움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예산 편성에 관해 그토록 완벽한 당위성을 가진 보고서는 처음 봤습니다.”

원리원칙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기에, 되려 그 철칙을 따르면 불가능한 일도 가능하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맹주전에서 예산을 빌려주신 덕분에 한숨 돌렸습니다.”

“안 그래도 맹주전 부장이 입에 거품을 물더군요. 자기네들은 어쩌냐면서.”

혁무강이 은근히 약한 소리를 하자, 제갈소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빨리 예산을 짜서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내년부턴 예비비를 따로 만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정말이지 진소운 그 아이가 총군사의 많은 걸 바꾸는군요.”

혁무강의 놀림에 제갈소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별수 없지 않습니까. 직접 쓰지 않았지만, 복양 평원에 나타난 존재와 엮어 ‘마교’를 은유하는데, 당최 거절할 명분이 없더군요.”

“그래도 덕분에 벌써 의외의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고요?”

“소수신공의 봉인이 한 꺼풀 풀렸다고 하더군요.”

“호오…… 경사입니다. 빙백궁에서도 좋아하겠군요.”

잠시 박자를 맞추던 제갈소명이 차 한 잔을 들이켜고 본론을 꺼내었다.

“그런데 맹주께서도 내일 멸혼진 시연회에 참석하신다고요?”

“예, 저도 어쩐지 궁금증이 들더군요. 과연 어떤 진일지.”

그럴 수 있다며 고개를 끄덕이던 제갈소명이 눈빛을 번쩍이며 말했다.

“그럼 제가 옆에 딱 달라붙어서 보좌해야겠군요.”

제갈소명의 말에 혁무강의 미간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총……군사께선 바빠서 안 가신다 들었습니다만…….”

“맹주께서 가시는데 제가 안 갈 수가 있겠습니까.”

“아니, 언제부터 그러셨다고…….”

“맹주께선 제가 가는 것이 불편하신 모양입니다?”

“그건…… 아닙니다만…….”

“역시 진소운을 만나기 위해선 제가 없는 쪽이 편하신 겁니까?”

“…….”

혁무강은 불쑥 들어오는 제갈소명의 질문에 꿀 먹은 듯 대답하지 못했고, 제갈소명은 그런 혁무강을 보며 눈썹을 치켜떴다.

“내, 내……! 이럴 줄 알았습니다! 어디 얌전한 고양이같이 부뚜막에 먼저 오르시려고!”

제갈소명의 말에 혁무강도 꽤 불쾌함을 느꼈다. 이번에 긴급 예산이 필요하여 금전 삼만 냥이나 밀어준 것은 다 자신 아닌가.

그런 자신이 진소운과 독대도 못 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좀 너무하신 거 아니요, 총군사? 내가 뺏어 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보면 만지고 싶고, 만지면 가지고 싶은 것이 사람 심리라고 하지요. 절대 안 됩니다.”

“……크흠. 거참. 그냥 만나보기만 하겠다는데…….”

당최 제갈소명까지 홀려버린 그 실력에 궁금증을 참지 못했던 혁무강이었다.

이번만큼은 그도 쉽사리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정 그러시다면…… 저도 총군사 자리를 그만두겠습니다.”

“아니!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요!”

“이미 노신이 지쳤고, 고혼이 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만 고향에 돌아갈 때가 되었지요. 어떻게든 만통부와 심현각에 어울리는 인재를 발굴하여 키우고 돌아가려 했으나, 이리 방해하시니 그만 제가 없어도 된다는 말이지요.”

“와…….”

지금 당장 무림맹에서 제갈소명이 사라지는 순간, 무수히 많은 정쟁이 수면 위로 떠올라 터져 나갈 것이 분명했고, 그렇게 되면 무림맹이 사분오열될 것임은 분명한 상황.

절대로 그가 없어서는 안 되었다.

“알겠소. 알겠소. 내 추호도 진소운을 맹주전에 데려갈 생각은 하지 않을 터이니, 그런 끔찍한 소리는 하지 마시구려.”

“하해와 같은 거대한 은혜를 이 보잘것없는 이에게 베풀어 주시니, 어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까 삼만 냥을 빌려줘 고맙다는 말보다 더욱 감읍한 표정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제갈소명을 보며, 혁무강은 그저 ‘더럽고 치사하다’라는 생각만 들었다.

#

“후…….”

한숨이 새어 나온다.

그토록 말했건만, 왜 말을 듣지 않는 것일까?

“입으시지요.”

당연한 일이라는 듯 비단옷을 내미는 시비장.

“왜 또 쓸데없는 수를 놓으신 겁니까?”

소매 끝부분에는 무늬인 ‘척’ 숨어있는 ‘수석’이라는 글자가 무수히 많이 새겨져 있었다.

“오늘은 맹에서 높으신 분들이 오신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거하고 무슨 상관입니까. 이게 정식 행사도 아닌데요.”

멸혼진에 들어가는 삼 조였던 은설란이 멸혼진 안에서 깨달음을 얻어, 그간 아무도 풀지 못했던 소수신공의 비밀을 풀어낸 후.

절대 채워지지 않을 것 같았던 백 자리는 하루 만에 모두 차버렸다.

‘더불어, 소수옥녀와 끈도 만들었고.’

가장 큰 성과라면 단연 소수옥녀와의 관계를 만들어 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빙백궁을 북해빙궁으로 바꾸고, 마교가 북해만큼은 침범할 수 없도록 무적의 신위를 보여주었던 소수옥녀가 아니었던가.

‘사련이랑 친분이 있다고 하니, 차후에 백랑각에 올 수 있도록 꼬셔 볼까나.’

물론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시도해 볼 가치는 충분히 있는 일이었다.

아무튼 이 일을 계기로 맹에서도 멸혼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학관에선 장로전과 각주들을 초빙하여 시연회를 개최하기를 원했다.

“높으신 분들이 오신다면 당연히 돋보여야 할 이는 공자님이십니다. 이런 기회에 눈에 들지 않으면 앞으로의 출세도 어려울 것입니다.”

“출세에 관심 없습니다. 출세에 관심이 있었다면 애당초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들과 척을 질 생각도 하지 않았겠지요.”

“그러니, 그런 상황인 만큼 더더욱 자신을 돋보여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외관은 공자님의 생각보다 더 많이 사람을 지배합니다. 제왕 같은 모습을 보인다면, 그것에 감화되어 공자님과 함께하고자 하는 이들도 더 많아질 겁니다.”

이야기를 하던 도중 나는 이상함을 느꼈다. 시비장으로서 학관에 늘상 상주해 있다곤 하나, 어찌 학관생들 사이의 일을 이토록 잘 안단 말인가.

“속사정에 대해서 어떻게 이렇게 잘 알고 계십니까?”

“……전 공자님을 보좌하는 사람입니다.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하는 일들이지요.”

뭔가 더 할 말이 있었던 듯 입술을 달싹이던 시비장이 이내 입을 다물었고, 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아무튼 안 입습니다.”

“입으셔야 합니다! 애들아, 문 닫거라!”

“……대체, 이렇게까지 제게 옷을 입히고자 하시는 의도가 뭡니까?”

내 물음에 시비장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 아이는 어린 시절부터 무(武)에 뜻이 깊었지요. 저와 제 남편 또한 맹에서 밥벌이를 하는 이들이었기에 크게 거부감도 없었고요. 해서 아이에게 기회를 주고자 이름난 문파들의 입문 시험을 치르게 해주었지만 모두 탈락하였습니다.”

흔한 이야기. 이름난 문파들에 인재들이 모여들면서, 괜찮은 문파들이라 평가받는 곳의 입시경쟁은 그 끝을 모르고 계속 높아졌다.

“어린 시절엔 무관에서 배우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즐거워하던 아이가,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한계를 단정 지은 듯 보이더군요. 그리고 그 벽을 보고 좌절하는 모습에도 저희들은 해줄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시작할 때부터 생겨나는 격차. 그리고 그것들을 좁힐 수 없게 만드는 벽들은, 새로운 시도를 하려는 사람을 늘상 꺾어낸다.

“최근에 아이가 다시금 열심히 무관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하루하루 쉬지 않고 수련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게 된 연유는…….”

시비장이 흔들리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본다.

“진 공자님 덕분입니다.”

“…….”

“저는 진심으로 공자님께서 계속 승승장구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제 아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시길 바라고요. 하지만 워낙에 겸손하신 분이기에 제 바람이 도저히 이뤄지지 않는군요. 알겠습니다. 다른 옷을 준비하라 하겠습니다.”

“…….”

이야기를 하고 한숨을 내쉬는 시비장은 평소엔 절대 내보이지 않는 지친 표정을 보였다.

나는 옷을 들어 찬찬히 보았다.

“다음부턴 이 글자가 좀 더 무늬처럼 보이게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

중년 시비의 얼굴이 환하게 펴진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조금 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물론 그렇다고 시도 때도 없이 입겠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냥 좀 티만 안 나게 해주십쇼.”

시비장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결국 ‘수석’ 예복을 입고 대마장에 나섰다.

인근에는 맹에서 온 높은 분들을 구경하겠다고 몰려든 학관생들로 인산인해였다.

그들을 뚫고 지나가자, 어제 이론 수업을 마치고 오늘 멸혼진에 들어갈 육 조가 대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연회가 시작될 것임에도 어쩐지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더군다나 구경꾼들만 모였다기엔 모인 이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절대로 이 근처엔 접근도 하지 않을 것 같았던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12봉성의 주요 인원들까지 모두 모여있었다.

내가 대마장에 들어서자, 학관 행정원과 이야기를 나누던 유지량 일행이 내 쪽으로 달려왔다.

“오셨군요.”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군요. 혹시 무림맹주님이라도 오신답니까?”

“네. 맞습니다.”

“네?”

유지량은 방금 무림맹주가 온다는 이야기는 별거 아니라는 듯 곧장 다음 말을 꺼냈다.

“그보단 큰일 났습니다.”

“……더 큰일이요?”

생애 단 한 번 얼굴 보는 것이 힘들다는 무림맹주를 만나는 것보다 더 큰일이랄 게 뭐가 있던가?

“구파일방의 인원들이…… 몰래 멸혼진 안에 들어가 나오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 미친놈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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