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기회를 빼앗는 흑염룡>
몰래 들어갔다는 말에 나는 기가 막혀 되물었다.
“몰래요? 분명 경비를 세워두었을 텐데요.”
“경비가 교대되는 틈을 타 들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
명색이 무림학관의 경비가 뚫렸다고?
전후 사정이 대충 그려지며 머리에 열이 서서히 올랐지만, 당장 급한 건 그놈들이 어떻게 경비를 뚫었는가가 아니다.
아무리 안전장치를 마련해 두었다고 해도, 멸혼진에서 함부로 발을 디딜 경우, 멸혼진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마령고원에서 그 많은 사람이 살아 나올 수 있었음에도 무턱대고 멸혼진에 들어간 사람들을 끝내 찾아내지 못한 이유가 무엇이던가.
이백만 개나 되는 진로 어딘가에 들어간 이들을 찾을 방도가 없기 때문이었다.
“어, 어찌해야 할까요?”
유지량의 목소리는 연신 떨리고 있었다.
내가 오기 전 이번 일로 인해 구파일방의 사람들에게 책임을 추궁받은 듯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나는 얼른 주위를 둘러보았다. 경비가 뚫렸다면 그 책임을 진 자들이 추궁을 받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대마장 한편에서 죽상이 되어 추궁당하고 있는 인원 둘이 눈에 보였다.
나는 얼른 자리를 옮겨 그들에게 다가갔다.
유지량은 헐레벌떡 내 뒤를 쫓았다.
“제가 잠시 이분들과 이야기를 좀 해도 되겠습니까?”
“…….”
경비를 선 자의 상관으로 보이는 이가 추궁을 하다 말고 홱 돌아가 버렸고, 나는 어젯밤 경비를 선 자에게 몇 가지를 물었다.
경비들에게 이야기를 듣는 사이, 누군가 불쑥 끼어들었다.
“유지량 님, 그리고 진소운 학관생.”
유지량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고, 그곳엔 교두 하나가 악귀 같은 표정으로 우리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맹의 어른들께서 설명을 듣고 싶어 하십니다. 가시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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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연회를 위해 마장 중앙에 단상을 세우고, 서른 개가 넘는 의자들을 가져다 놓았었다.
그리고 지금 그곳엔 빈자리가 없이 빼곡히 사람들이 앉은 상태였고, 거기에 더해 의자 뒤로 관계자들이 모두 몰려와 서 있었다.
덜덜덜덜.
유지량은 옆에서 걷는 내가 느낄 수 있을 만큼 크게 떨고 있었다.
나는 그의 어깨에 잠시 손을 올려놓았다.
“유 대협, 조금 진정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 네. 네. 그래야지요.”
“정 힘드시다면 저 혼자 다녀오겠습니다.”
내 말에 반색한 유지량은 잠시 생각하는 얼굴을 하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어찌 되었든 이 멸혼진의 책임자는 저 아니겠습니까. 제가 가야지요.”
“…….”
유지량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어기적어기적 단상으로 걸어갔다.
멀리서 볼 때와 달리, 단상에는 이미 무림맹주 혁무강과 총군사 제갈소명을 비롯한 장로전의 인원들 모두가 와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건가?”
“관리를 어떻게 했길래, 아해들이 이 위험한 절진에 함부로 들락거린다는 건가?”
“들어볼 게 뭐가 있겠습니까? 당장 진을 해진하고, 책임자를 맹의 법도에 따라 문책해야 합니다.”
우리가 도착하기 무섭게, 고호성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더구나 장로전의 인원들은 감정을 주체하기 힘든 듯 말을 내뿜는 동시에 살기를 마구 뿌렸고, 시연회를 보기 위해 몰려왔던 이들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모조리 입을 다물었다.
마치 칼끝을 딛고 다리를 건너는 것 같은 위태한 분위기가 계속되었다.
“학관 대표는 언제까지 입을 다물고 있을 거야!”
“당장 말을 해!”
“기본도 안된 것에게 대표를 맡기니 이런 일이 생기는 겁니다. 당장 대표부터 갈아 치워야 합니다.”
그리고 이내 그 화살은 나에게도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수라장 같은 날카로운 말들이 공간을 가득 채우자, 이내 못 견디겠는지 제갈소명이 입을 열었다.
“모두 조용하시오!”
“…….”
“…….”
제갈소명의 일갈에 장로들이 입을 다물자, 일대는 마치 멸혼진 내부에 들어온 것처럼 정적에 휩싸였다.
“묻겠다. 총 몇 명의 인원이 들어간 것인가?”
제갈소명이 이야기를 이끌자, 사람들의 시선이 이제는 제갈소명을 따르기 시작했다.
모두의 시선을 받은 유지량은 말을 버벅거리며 입을 열었다.
“보, 보고받은 바로는 초, 총 여섯 명이라 들었습니다.”
“보고받은 바? 정확하지 않다는 이야기인가?”
“아, 아닙니다. 멸혼진에 들어간 이들의 일행들이 말했기에 확실한 숫자입니다.”
“좋아. 그들이 들어갔고, 지금 그게 왜 이리 문제가 되는 것이지?”
“본래 멸혼진에 들어간 인원들은 한 시진 이내에 나와야 정상입니다. 헌데 어제 인시에 들어간 인원들이 사시인 지금까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그 안에서 길을 잃었다는 말이 됩니다.”
“길을 잃었다면 다시 나올 수 없나?”
“멸혼진은 기준점이 없기에 자신이 딛는 발걸음을 기준으로 법칙에 따라 행로를 걸어야 합니다. 헌데 그게 한 번이라도 틀렸다면…….”
유지량의 말에 장로들의 인상이 잔뜩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어째서 안전장치가 발동하지 않는 것이지?”
“안전장치는 진의 입구가 아닌 다른 곳에서 들어가는 인원을 막기 위함입니다. 애당초 입구로 들어가는 인원들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 안전장치가 없다는 말인가?”
“애당초 안전장치를 만들 수 없는 절진입니다. 그렇기에 철저한 관리하에 인원들을 제한하여 반드시 정해진 생사문을 통해서만…….”
유지량이 멋대로 들어간 이들을 책망하려 하자, 명현도장이 불쑥 대화를 끊었다.
“결국 안전장치도 없는 위험한 절진에 우리 아이들이 갇혔다는 말 아닌가.”
“……아, 그것이…….”
제갈소명이 미간을 찌푸렸지만, 명현도장은 그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말을 이었다.
“아이들이 제때 나올 확률은?”
“……없습니다.”
“허, 참.”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한껏 지은 명현은 무림맹주를 향해 말했다.
“맹주님, 이는 미래에 맹을 짊어질 학관생들의 목숨을 앗을 수도 있는 중대한 일입니다. 당장 멸혼진을 해진하여 아이들을 구해야 합니다.”
무림맹주 혁무강은 유지량을 돌아보며 물었다.
“무량불괴멸혼진은, 말 그대로 해진되지 않는다 들었는데, 방도가 있는가?”
“애, 애당초 멸혼진의 중심축이 되는 오십 개의 기둥이, 한 달 뒤에 부서지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에 한 달 뒤라면 사라질 것이나……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
“멸혼진 내부에서 느껴지는 시간의 흐름이 외부와 다릅니다. 때문에 하루만 머물러 있어도 칠주야간 머물러 있는 것과 같은 게 되어버립니다.”
“실제가 아님에도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인가?”
“제갈세가의 절진 중 수마대방진에 갇힌 인원들은 질식하여 죽습니다…….”
“허…….”
“저희도 이번에 새로 만들면서 처음 경험해 본 효과입니다. 문제는 어제 무단으로 들어간 이들이…….”
“잠깐!”
유지량이 말을 잇다 말고 명현 도장을 바라봤다.
“자꾸 ‘무단’이나 ‘인원 외’ 등,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는 단어들을 쓰지 말게나. 이건 어디까지나 관리를 소홀히 한 그대들의 잘못이니.”
“…….”
“…….”
“…….”
명현 도장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장로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지량은 사색이 되어 얼이 빠져있었다.
“계속해 보게.”
“네, 네. 어제 들어간 이들이 비상식량을 가지고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명현 도장이 고개를 젓다가 맹주를 보고 말했다.
“맹주님, 더 이상 들어볼 것도 없습니다. 당장 강제로 해진을 해야 합니다.”
무림맹주 또한 명현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강제로 해진할 방도는 있는가?”
맹주의 말에 유지량이 입술을 부르르 떨면서 말했다.
“아까 말씀드린 오십 개의 기둥을 동시에 부순다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럼 당장 시행하게.”
명현의 말에 유지량은 곧 죽을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더 이상 그런 그를 볼 수 없었던 내가 앞으로 나섰다.
“그건 불가합니다.”
“……지금은 네놈이 나설 자리가 아닌 것 같다. 네놈에 대한 추궁은 차후에 할 테니 지금은 빠져있어라.”
나는 명현 도장의 말에 그를 무시하고 맹주와 총군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멸혼진을 인위적으로 해진하기 위해선 오십의 인원이 생사문으로 입장하여 정확한 방위를 다잡고 동시에 깨트려야 합니다.
하지만 이는 이론상의 예시일 뿐, 실패할 경우 오십의 인원이 추가로 멸혼진에 빠질 수도 있음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방에서 깊은 탄식이 흘러나온다.
“허!”
“어찌…….”
“어쩌자고 저런 것을 만들어선.”
이야기를 들은 무림맹주와 총군사마저도 입을 다물었다.
결국 분을 참지 못한 명현이 고성을 터트렸다.
“이를 어찌 책임질 것이냐? 네놈이 무리하게 대표직을 유지하고자 하다 이런 사달이 난 것이 아니더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명현 도장을 바라봤다.
“제가 왜 책임을 져야 합니까?”
“뭐, 뭣? 네놈이 지금…….”
“간밤에 번을 선 자들에게 이야기를 들으니, 스물의 인원이 몰려와 예정보다 일찍 교대할 것을 명령하였다 하더군요. 그 과정에서 정도회의 이름이 운운되었고요.”
“그건 말도 안 되는…….”
나는 명현도장의 말을 끊으며 말을 이었다.
“점창에선 남의 무공을 몰래 훔쳐본 자를 어떻게 처리합니까?”
“갑자기 그건 무슨 소리냐?”
“전 자금과 공간의 한계로 제한 인원을 두고 행사를 진행시켰습니다. 이는 정식으로 행사에 참여한 인원들에게 멸혼진의 비전을 전수하기 위함이었지요. 헌데, 행사에 참여하지도 않은 이들이 몰래 비전을 훔치다 이런 사달이 났으니, 당연하게도 상보단 벌을 내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명현 도장을 비롯한 장로들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제겐 당연하게도 이 일에 책임 따윈 없습니다. 여기 계신 유지량님에게도 책임 따윈 없지요. 그들 스스로가 위험을 자초했고, 그 위험은 모두 그들의 개인적인 욕심 때문이었겠지요.”
나는 내 목소리에 은은하게 내기를 담았다. 이곳에 모인 모두에게 내 목소리가 들릴 수 있도록.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멸혼진을 해진하는 방법은 있습니다. 장로님들 중 백 일 정도 최소한의 물과 식량만으로 버틸 수 있는 분들께서 위험을 감수하시고 해진을 하는 겁니다. 성공하면 어리석은 짓을 한 학관생들을 구할 수 있겠지요.”
백 일이라는 말에 장로들 중 아무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 일을 공모하고 시행한 자들이 나서야겠지요. 경비를 서던 자들을 윽박지르고 협박하여 일을 무리하게 진행한 자들 말입니다.”
내가 몸을 돌려 장내를 둘러보았다.
학관생들 중 정도회의 인원들이 살기등등한 눈으로 이편을 바라보았다.
“누가 나서시겠습니까? 장로님들과 문파의 어르신들이십니까? 아니면 학관생의 신분으로서 대표의 말 따윈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던 이들입니까? 누구입니까?”
내 말이 끝난 이후에 말을 내뱉은 이는 없었다.
장내에는 개미 하나 지나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나는 이제 눈치 보지 않고 내기를 양껏 담아 외쳤다.
“없습니까? 지금 멸혼진 안에서 학관생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나설 사람은 없는 겁니까?”
나는 정도회의 인원들이 모여있는 곳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선 자에게 말했다.
“일각 학관생! 그대가 이번 일에 관여되지 않았다 생각하지 않소. 그대는 나설 생각이 없습니까?”
“…….”
참으로 기이한 광경이다.
소림의 중들이 일제히 나를 죽일 듯한 눈빛으로 노려보는 모습이라니.
아마 전생의 마인놈들도 저런 눈빛은 받지 못하였을 텐데.
내가 다시금 그들을 몰아붙이려고 할 때 제갈소명이 나섰다.
“그만.”
제갈소명이 장로전의 인원들을 쓰레기 보듯 한번 훑은 후 말을 이었다.
“지금 당장 중한 문제는 누구에게 책임의 소지가 있느냐가 아니다. 어떻게 그들을 구할 수 있느냐이지. 구할 방법은 없는가?”
“이백만 개의 진로를 다 훑어볼 수 있다면 구할 수 있을 겁니다.”
“이백만 개라고는 하나 실제 그대가 교육한 행로는 세 개에 불과하지. 그것들에서 파생되는 숫자들을 세어보면 그리 많은 진로가 나오지는 않을 텐데.”
역시나 총군사의 자리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럼 멸혼진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이 저 안으로 들어가 그들을 구하는 것이 가장 가능성이 크겠군.”
유지량이 슬그머니 손을 든다.
“저와 저희 사문의 술사들이 멸혼진을 만들긴 했지만, 실제 그 안을 자유로이 오갈 정도는 아닙니다. 그동안 멸혼진에서 갇힌 이를 구해 온 것도…….”
유지량이 말을 끝맺지 않고 나를 바라보았다.
제갈소명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나서야겠군.”
제갈소명도 무림맹주도, 장로들도 모두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내가 나서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나는 고개를 저었다.
“싫습니다.”
“뭐?”
“총군사께서 하신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이론상의 일일 뿐, 실제론 제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허나, 제 책임이 될지도 모르는 일에 제 목숨까지 걸어야 할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네놈이 그러고도 학관 대표더냐!”
명현 도장의 일갈에 난 답했다.
“학관 대표이긴 하나, 대부분의 학관생들이 절 대표로 인정한 적은 없었지요. 그런 이들 때문에 책임을 뒤집어쓰고 목숨까지 건다?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싫습니다.”
“허…….”
명현 도장과 장로들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잠시간 무표정하게 나를 보던 제갈소명이 말했다.
“학관 대표의 말이 옳다. 멸혼진에 들어간 이들은 학관의 규칙을 어기고, 맹의 예산이 들어간 중요한 행사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타인의 무공을 훔친 것만큼의 중한 죗값을 치러야 한다.”
“총군사!”
“그건 아니 될 말이오!”
“그럴 수는 없는 것이오!”
제갈소명이 명현 도장 등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그대로 죽는 걸 지켜보시겠소?”
“…….”
제갈소명은 대마장 전체에 들리게 외쳤다.
“이번 일을 주도한 이들과 감히 겁 없이 멸혼진에 들어간 이들은 퇴관 처리를 할 것이며, 이와 관련된 이들 또한 징계에 처할 것이다.”
제갈소명의 말을 들은 인원들이 뭐라 수군거리건 말건 제갈소명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학관 대표는 정당한 징계를 받을 수 있도록 학관생들을 데려올 수 있겠는가?”
정도회 놈들이 퇴관당하는 꼴을 볼 수 있다고?
“반드시 데려오겠습니다!!!”
아무리 목숨이 걸려 있어도 이건 못 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