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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129화 (129/357)

#129. <기회를 빼앗는 흑염룡(4)>

“계속 그리 불경하게 누워있을 테냐?”

“하암… 아… 너무 피곤하군… 응? 누구…….”

제갈소명은 뒤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연기는 여전히 어설프군…… 내가 하던 일을 멈추고 굳이 뒤돌아야 하나?”

“어? 총군사님 아니십니까?”

“그 같잖은 장단에 계속 맞춰줘야 하나?”

“죄송합니다, 제 몸이 영 좋지 않아서 말입니다. 멸.혼.진 안에서 너무 무리를 했더니…….”

“피로가 중첩되어 있긴 했지만 정기신 모두 멀쩡하더군…… 그거 아는가? 총군사에게 거짓 보고를 한 자는 최대 금옥 3년 형이다.”

제갈소명의 말에 생글생글 웃던 진소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가뜩이나 무림맹 총군사가 자신의 숙소에 와 있는 것도 이해가 안 가는 와중에, 어쩐지 성격은 예전보다 더 괴팍해진 것 같았다.

“끄응…….”

진소운은 한숨을 길게 내쉬곤 제갈소명을 바라봤다.

그는 지난번 만남과 비슷하게 진소운과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서류를 살펴보고 있었다.

여기가 철검문처럼 무림맹과 멀리 떨어진 곳도 아니고, 굳이 남의 숙소에 와서 이러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진소운은 그저 제갈소명이 먼저 말을 꺼내기 전까지 차분히 그를 기다리기로 했다.

눈앞에 놓인 찻잔에 찻물을 가득 채운 진소운은 천천히 찻물을 삼켰다.

현실 시간으론 얼마 되지 않았지만, 멸혼진 내부의 시간 흐름으론 거의 열흘 만에 들이켜는 찻물이라 향이 진하게 느껴졌다.

남궁세가에서 먹던 차에 비해 조금도 손색이 없는 좋은 향.

술을 즐기지 않는 진소운이 그나마 차를 즐긴다는 이야기를 듣고 중년 시비가 최근 차를 바꾸었다고 하더니, 조금 무리를 한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아니, 애당초 무림맹과 무림학관의 규모로 봤을 땐 무리는 아닌가?’

여타 다른 대표들의 씀씀이를 생각해 보면 진소운의 소비가 그리 크지 않은 편이었으니, 중년 시비도 이런 곳에 돈을 쓰는 게 그리 부담스럽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진소운이 잠시 딴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제갈소명이 읽던 서류에 서명을 하곤 문서들을 한쪽으로 밀어둔 채 진소운을 바라봤다.

“…….”

진소운의 놀란 표정에 제갈소명이 물었다.

“왜 그러느냐?”

“급한 서류라서 이곳까지 가져오신 것 아니십니까?”

진소운이 탁자 한쪽에 가득 쌓인 서류들을 가리키며 말하자, 제갈소명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사람하고 대화를 할 땐 눈을 봐야지, 딴짓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거 안 배웠나?”

“와…….”

퉁명스러운 제갈소명의 말에 진소운은 ‘그럼 전엔 제가 사람이 아니었나 봅니다.’라는 말을 내뱉으려다 관뒀다.

“뭔가 할 말이 있는 표정이군.”

“하아…… 아닙니다. 근데 이곳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네가 잠들어 있는 사이에 많은 일이 일어났지.”

“어떤 일 말씀이십니까?”

“첫 번째론 징벌위원회가 열렸지.”

“아…… 그렇습니까?”

진소운의 반응에 제갈소명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놀라지 않는군?”

“뭐…… 예상했던 바였으니까요.”

“징벌위원회는 명현 도장이 선정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자네에 대한 징벌도 논의되었지.”

제갈소명의 말에 진소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결과는 어떻게 나왔습니까?”

진소운의 질문에 제갈소명은 답하지 않고 그를 계속 바라봤다.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자네가 잠들어 있는 사이에 징벌위원회가 열렸고, 자네에 대한 징벌도 논의되었다고 말했네. 그것도 예상한 바였는가?”

“뭐…… 대충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라 생각하긴 했습니다.”

“그런데도 멸혼진에서 일부러 무리를 하여, 사흘간 잠들어 있었고?”

진소운이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제가 잠들어 있지 않았다고 하여 달리할 수 있는 일이 없었을 테니까요. 그냥 여기저기 끌려다니며 증언하고 하느라 되려 피곤했겠지요.”

제갈소명은 결국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작은 장탄식을 내뱉었다.

“허!”

“그래서 결과가 어떻게 나왔습니까?”

“멸혼진에 들어갔던 이들이 퇴학 처분을 받았네. 퇴학당한 이들이 자네를 매우 칭송하더군. 덕분에 명현 도장의 입김은 닿지도 않았지.”

“그렇군요.”

“그것도 예상했는가?”

“그건 아닙니다. 다만, 제가 징벌을 받았어도 크게 문제가 없었을 거라 생각했을 뿐입니다.”

“어째서?”

“이번 일의 주모자들도 퇴학 처분을 받았다곤 하나, 실제 정도회 학관생 간부들은 아니었겠지요?”

진소운의 말에 제갈소명은 입을 앙다물곤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럴 거라 생각했습니다. 덕분에 정도회 내부에선 정도회의 도덕성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갖는 자들이 많아지겠지요. 자신들이 계속 이용만 당하다 버려지는 존재가 아닌가 하는…….

그리고 그런 생각은 오대세가를 주축으로 이뤄진 백도회와 12봉성의 인원들도 크게 다르게 느끼진 않을 겁니다.”

“그러다 일이 잘못되면 자네의 자리가 흔들릴 텐데?”

“크게 상관없습니다.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고 다른 이에게 의지하는 게 아닌, 자신들을 스스로 돌볼 생각을 하게 된다면 말입니다.”

“……결국 무림맹을 위함이라는 건가?”

“그리 거창한 건 모르겠고, 그냥 정신들 좀 차리고 자기 앞가림이나 했으면 좋겠다 생각한 겁니다.”

진소운의 이야기를 들은 제갈소명은 한참이나 말없이 생각에 빠져들었다.

태을문.

백팔봉의 하위 중에서도 하위.

제 한 몸 가누기도 어려운 문파 출신이, 무림 전체를 위한 일들을 하려고 하고 있었다.

처음엔 협력 단체에서 시작했지만, 이제는 거대한 정치판이 되어버린 무림맹 내에서 닳고 닳은 제갈소명.

그의 입장에선 이 어리숙한 이상주의자처럼 보이는 애송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잘 가늠이 되지 않았다.

잠시 딴생각을 하던 제갈소명은 정신을 차리고, 준비했던 질문들을 다시금 이야기했다.

“어쨌든 퇴학당한 이들의 지지를 받기 위해 멸혼진 내부에선 음식물을 전혀 섭취하지 않은 것이냐?”

진소운이 멸혼진 내부에서 나왔을 때의 모습은 가히 끔찍했다.

거의 폐인에 가까웠으니.

하지만 진소운을 진맥해 본 제갈소명은 그것이 진소운의 의도된 행동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폐인과 같은 겉모습과 달리, 그의 심맥은 그 어느 때보다 힘차게 뛰고 있었으니.

처음 제갈소명은 너무 놀라 진소운의 뺨을 때려 깨울 뻔했었다.

“……혹시 모를 생존자를 위해서 좀 참은 겁니다.”

“흥! 말 같잖은 소리, 생존자들 대부분이 들어갈 때보다 더욱 살이 쪄 나왔다고 하더구나. 분명 네놈이 먹을 양까지 양보한 것이겠지.”

제갈소명의 말에 진소운의 얼굴은 똥 씹은 표정이 되었다.

“그게 바로 무림맹이 말하는 ‘협의’ 아니겠습니까?”

“말 같지 않은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잘하는구나.”

한 치의 의심도 없이 확신에 차 비웃음을 날리는 제갈소명.

무림맹의 총군사에 위치해 있지만, 진소운의 말대로 무림맹에 ‘협의’가 있다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제갈소명이 그렇게까지 이야기하자, 진소운이 결국 털어놓았다.

“네. 사기 좀 쳤습니다. 시간도 좀 끌고, 안에 들어가서 음식도 최대한 줄였습니다.”

“더욱 극적인 효과를 위해서 말이지?”

“네.”

그리고 그 사기는 효과를 발휘하여 멸혼진에 들어갔던 이들로 하여금 정도회에 배신감을 느끼게 하며, 동시에 진소운에 대한 강렬한 신뢰를 가지게 만들었다.

자신의 사문과 자신들이 정도회로 인해 피해를 입을지라도 말이다.

“…….”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제갈소명은 놀란 마음을 다잡기 위해 천천히 차를 마셨다.

진소운은 연신 눈알을 돌리며 제갈소명의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혹시 문제가 되겠습니까?”

“허어…….”

방금 전 제 입으로 사기 쳤다고 이실직고해 놓고, 이제 와 불안에 떠는 모습이 제법 웃겼다.

대충 생각을 정리한 제갈소명은 찻잔을 한쪽으로 치우고 처리해야 할 서류들을 진소운 앞으로 밀었다.

진소운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

“읽어 보고 정리한 뒤 처리해 보아라.”

진소운이 대굴대굴 눈알을 굴린다.

“이건 만통부의 문서들이 아닙니까? 그런 중요한 문서들을 제가 어찌 감히…….”

“네놈 옆에 있느라 며칠간 일이 밀려 서류가 이리 쌓였다.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징계를 내릴 것이다.”

눈알을 대굴대굴 굴리던 진소운은 들으라는 듯 ‘누가 옆에 있어달라고 했나…….’라고 중얼거리더니 문서 하나를 들어 읽기 시작했다.

그러곤 제갈소명이 쓰던 지필묵을 가져와 문서 이곳저곳을 손보기 시작했다.

“…….”

문서에 이것저것 써넣던 진소운은 마지막에 ‘반려’라는 글씨를 쓰곤 문서를 한쪽에 밀어둔 채, 다음 문서를 보기 시작했다.

자신이 처리한 것에 대해 평가를 받아볼 생각도 없다는 듯이.

그 기가 막힌 행동에, 제갈소명이 진소운이 밀어둔 문서를 스스로 가져와 촤락 펼쳤다.

혹시나 잘못 기재한 것이 있다면 그걸 꼬투리 잡아 혼쭐을 내줄 생각으로 말이다. 헌데.

“후…… 허허…….”

문서를 보던 제갈소명은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 진소운이 처리한 문서는, 무림맹과 각 지부 간에 오가는 물류에 대한 외주를 누구에게 줄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한 서류였다.

기존에 무림맹과 계약되어 있는 표국이 스물네 개. 새로이 계약을 신청한 표국이 열두 개였다.

이중 기존에 문제가 있다 판명된 표국 여섯 개를 골라 계약을 해지하고, 새로이 계약을 신청한 표국 중 여섯 개를 선정하여 새로운 계약을 해나가야 하는 문제.

현시점에 발생한 문제에 대한 설명만 해도 몇 장을 잡아먹는 어려운 문제.

하지만 진소운은 기존에 문제가 있다 판명된 표국 여섯 개 중에서, 세 개는 천재지변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는 말과 함께, 문제 지적에 대한 근본적인 반대 의견을 내었고.

동시에 새로이 계약을 신청한 표국들 대부분이 구파일방과 연계된 표국들임을 이유로, 문제 해결에 대한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는 의견을 써 반려 판정을 내린 것이었다.

제갈소명 또한 비슷한 의견을 낼 만큼 타당한 의견이지만, 제갈소명이 놀란 부분은 그것이 아니었다.

문서에 반려 판정을 내리기까지는 기존 표국에 대한 조사, 새로운 표국에 대한 조사, 문제 제기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조사 등등.

각각 무림맹 내부의 수없이 많은 기관들을 돌아야 나올 수 있는 결과라는 것이다.

마치 복잡한 문제에 대한 정답을 모두 알고 있는 듯, 거침없이 해결책을 제시하는 모습에 제갈소명은 기함을 금치 못했다.

벌써 세 번째 문서에 뭔가를 써넣던 진소운을 보고 제갈소명이 물었다.

“자네 정체가 뭔가?”

“네?”

“어찌 이것에 대해 알고 있느냐 물은 것이다.”

“……어, 그게, 제가 기억력이 좀 좋습니다.”

“기억력?”

“한번 본 것은 잊지 않는 기억력 말입니다.”

“그 기억력으로 이 문서들을 처리했다고?”

“어찌 설명해 드려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렇습니다.”

“…….”

진소운의 말에 제갈소명은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기억력이 좋은 것은 간혹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허나 그 기억력을 기반으로 통찰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능력은, 기억력과는 별개의 일이었다.

통찰이란 방대한 지식과 깊은 사고 끝에 나오는 것이니까.

지그시 진소운을 바라보던 제갈소명이 진소운의 손에 들린 문서를 집어 문서 더미 속에 대충 던져놓았다.

갑작스런 제갈소명의 행동에 진소운은 이 사람이 또 왜 그러나 하는 표정이 되었다.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아니, 지금부터 네가 해야 할 일이 있다.”

“또 뭡니까?”

“지금부터 비무를 해야 한다.”

“네?”

진소운의 얼굴이 방금 던져진 문서처럼 구겨졌다.

“그건 또 무슨 얼토당토않은 소리십니까?”

“네가 잠들어 있는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다고 했지?”

진소운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는 내가 자네의 단전 안에 잠든 삼 갑자의 내공을 봤다는 것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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