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134화 (134/357)

#134. <자신을 증명하는 흑염룡(4)>

남궁선화는 최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학관에 들어온 이후로 처음 받는 평가가 시작되는 시기였고, 그 방법이 세가에서 배우던 공부와는 판이해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학관의 평가는 크게 필기시험과 실기시험, 두 가지로 나뉜다.

필기는 주로 공통된 무공이론 기초나 운기방식과 혈도법 등을 평가하고, 실기는 필기를 기반으로 익힌 것들을 직접 시험해 보는 방식으로 치러진다.

학관 출신을 많이 배출했던 남궁세가의 교육 방식은 학관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학관 대표단 활동과 시험공부를 병행해야 하는 그녀는 몸이 두 개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번 실기가 비무로 결정된 것일까나.

만약 긴급치료나 혈도해소법 등을 실기로 치러야 했다면, 남궁선화는 세가로 이번 성적이 이렇게 처참한 것에 대한 구구절절한 편지를 보내야 했을지도 몰랐다.

“핑계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그 사람은 왜 쓸데없이 빈틈없어선.”

시험이 다가오자 진소운은 학관간부들에게 학관대표단의 일을 줄이게 하고, 자신이 대부분의 일을 떠맡기 시작했다.

그나마도 가중된 업무들이 두 배, 세 배 늘어났지만, 그는 그다지 큰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필기시험에 대비해 준비해야 하지 않겠냐는 말에, 그는…….

“전 기억력이 좋잖아요. 이미 다 외웠습니다.”

분명, 자신을 배려하는 멋진 모습이고, 유쾌하게 말했음에도 왠지 얄밉다는 생각이 들었다.

“쫌 서운하다.”

정시를 통과하고 학관에 들어오면 시험 기간 동안 함께 밤새 공부도 하고, 학관의 분위기도 만끽하고, 가끔은 술에 취해 날이 새도록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어우! 정신 차려! 남궁선화!”

분홍빛 꿈에 빠져들던 남궁선화는 고개를 내저었다.

분명 여러 가지로 자신의 상황은 좋아졌다.

할아버지는 결국 창궁운위검법을 완성시켰고, 창궁상단을 세가 내부로 옮긴 후 방계의 힘은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세가에서 보내오는 지원은 점점 늘고 있었고, 부모님은 이제 세가가 안정되었으니 아무런 걱정할 필요 없다는 편지까지 보내왔었다.

하지만 반대로 진소운의 상황은 더욱 악화된 면이 있다.

정도회와 각을 세우기 시작했고, 장로들은 진소운을 탐탁지 않아 했다.

무림맹 내에선 그에 관해 안 좋은 소문이 많이 돌고 있다.

최악의 경우엔 대표직을 잃는 것에 그치지 않고, 무림맹 내에 많은 적을 만들지도 모르는 상황.

위험천만한 상황에서 사제들과 자신들까지 많은 것을 짊어지고 있음에도, 그는 항상 여유 있는 태도와 자신만만한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참으로 대단한 사내다.

“끙…… 학관대표단 활동 때문에 성적이 떨어졌다는 핑계는 댈 수 없으니까.”

남궁선화는 그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얼른 잡념을 털어내고 만서고로 향했다.

평소엔 텅텅 비어있는 만서고에는, 시험 기간을 맞이하여 공부하러 온 학관생들로 바글거렸다.

남궁선화는 진소운이 예상문제가 나올 것이라 알려준 서책을 찾기 위해 책장 사이를 다니다, 누군가와 눈이 마주친 후 얼른 고개를 돌렸다.

애써 모른 척하며 서책을 찾으려 하는데, 뒤편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선화 누이.”

돌아서려던 남궁선화의 미간에 내 천(川)자가 그려졌다.

“공부하러 왔는가?”

학관에 입학했을 때만 해도 자신의 무리를 개소 보듯 했던 인간이 친근한 척하며 다가오자, 남궁선화는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저도 멋쩍은 것을 알았는지, 뒷머리를 긁적이면서도 분해하는 표정은 잘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창궁운위검법이 나온 뒤로 세가가 한바탕 뒤집어졌었다지.’

직계에게만 전수되는 검법을 창시했다는 말에도 별반 긴장하지 않았던 방계의 인원들은, 남궁산이 7성의 창궁운위검법으로 창궁무애검법을 십초지적으로 제압하는 것을 보고 난 뒤 사태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았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창궁무애검법은 여전히 남궁세가의 주력검법으로 가져가되, 창궁무애검법을 익힌 방계들은 창궁운위검법이라는 목줄을 차게 된 것이었다.

남궁기표가 이리 행동하는 이유에 대해선 알고 있었지만, 알고 있다 해서 거북감이 사라지는 건 또 다른 이야기였다.

“무슨 일이죠?”

“……하하, 우리가 뭐 무슨 일이 있어야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이던가?”

“‘방계가 직계를 지배하는 건 머지않은 일이다. 이미 모든 건 준비가 끝나 있다.’라고 말하고 다니셨다면서요?”

“…….”

남궁기표가 한숨을 내쉬더니 날카로이 눈빛을 빛냈다.

“가주님이 만드신 검법은 세가의 근본을 부정하는 일이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죠. 발전을 거듭하는 것을 두고 근본을 부정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어요.”

창궁운위검법은 창궁무애검법을 계승하며, 한층 더욱 날카로운 묘리를 가진 검법이다.

강호의 누가 본들 창궁무애검법을 파쇄하기 위해 만든 검법이라 생각할 수는 없었다.

“이런 신경전을 할 거면 그만 가도 될까요? 시험 준비를 하느라 한시가 아깝거든요.”

남궁선화는 그를 두고 돌아서려는 찰나,

“……휴, 아버지만 아니었어도. 그…… 건방진 녀석을 계속 혼자 둘 셈이냐?”

이어 들려오는 남궁기표의 말에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남궁기표가 이야기하는 ‘건방진 녀석’이 누군지는 남궁선화도 금방 알 수 있었다.

“무슨 이야기죠?”

“그놈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세가로 들일 작정이라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남궁서화가 빼액- 하고 소리 지른 덕분에, 만서고의 모인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만서고에서는 정숙해야 하는 걸 모르더냐?”

“대체 누가 할 말을…….”

남궁선화가 어처구니없어하는 표정을 짓건 말건, 남궁기표가 말을 이었다.

“정도회와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는 것은 나도 안다. 하지만 혼자서 정도회를 상대할 순 없는 거지. 네가 그 건방진 놈을…… 크흠, 아무튼 백도회를 등에 업게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

남궁선화라고 진작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진소운은 구파일방뿐 아니라 오대세가, 12봉성들에 모두 반발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가 뭐죠?”

“그편이 놈에게 좋기 때문이지.”

“백도회 또한 정도회에 만만치 않게 진 공자를 싫어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정확히 말하자면, 망가지느니 우리가 거두는 게 낫다는 생각이다.”

“망가진다고요?”

남궁선화의 고운 아미가 찡그려졌다.

“정도회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

“단지 학관 내의 따돌림 수준이 아니다. 어떤 이유에선지 맹 내부에서 진소운을 탐탁지 않아 하는 모양이야. 아마 전방위적으로 압박이 시작되겠지.”

남궁선화는 남궁기표가 말하는 ‘이유’가 뭔지 대략 알 것 같았다.

“분위기 자체가 진소운을 적대하고 무너뜨리려 하면, 그도 버틸 수 없을 거다. 당장 학관 내의 교두들 중에 맹의 입김이 닿지 않는 자가 몇이나 있더냐.”

“…….”

“엉망이 되어 버려지느니, 차라리 백도회가 거두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너라고 진 공자가 망가지길 바라는 건 아니겠지?”

남궁선화는 아무 말 하지 않았고, 남궁기표는 그런 남궁선화를 두고 먼저 자리를 뜨며 말했다.

“잘 생각해 봐라. 그에게서 효용가치가 사라지면 그나마 그를 찾는 이들도 모두 없어질 테니.”

#

필기시험이 끝나고 결과는 학관의 게시판에 붙여졌다.

일등부터 꼴등까지 순위를 적어 발표되는 시험 결과지는 많은 학관생들을 울고 웃게 만드는 것이었지만, 그로 인한 불평을 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에게 매겨지는 시험 점수가 곧 그들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이었으니까.

시험 결과에 대한 가치 평가를 받아들이는 건, 그들이 어린 시절부터 경쟁하며 결과를 순순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교육의 산물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건 사기야!”

“이게 말이나 돼? 만점이라니!”

“역대 가장 우수한 용소아도 만점을 받은 적은 없어!!”

“뭔가 음모가 있다!”

필기시험 결과 일등 자리에 진소운이 있는 건 그렇다 칠 수 있다.

수석으로 입학했으니 그 정도의 우수함은 가지고 있었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점수가 만점이라는 결과를 쉽게 받아들이는 학관생은 없었다.

애당초 교두들이 철저한 가치 평가를 위해 틀리라고 만든 시험 문제가 있었음에도, 그것까지 맞혀버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더구나 녀석은 학관 대표직도 맡고 있다. 그 일이 당최 다섯 명으로 해결이 가능한 일이던가?”

진소운은 제대로 된 대표단을 꾸리지도 못했고, 다른 이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뛰어난 인재라도 시간을 쪼개가며 사용하고 있는 와중에, 만점을 받는다는 건 요원한 일이다.

이번 필기시험의 결과로 인해 학관생들은 물론이고, 교두들과 학관 자체에도 비상이 걸렸다.

가뜩이나 장로들에게 밉보인 진소운이 만점을 맞으며, 시험 중에 부정행위가 없었는지 엄중히 조사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던 것.

“진소운 학관생, 솔직히 말한다면 참작하여 대표직을 내려놓는 것으로 마무리해 주겠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우수한 성적을 받은 학관생이 대표직을 내려놓아야 한단 말입니까?”

교두들과 무림학관장 앞에서 진소운은 당당했다.

“그렇다면 이 점수가 부정행위가 아닌 자네 실력으로 본 거란 말인가?”

“저보다 높은 점수를 받은 이가 없는데, 어떻게 부정행위를 한다는 거죠?”

“…….”

“아니면 제가 시험지가 있는 곳에 몰래 숨어들어 시험지를 빼돌리기라도 했다는 말씀이십니까?”

무공이 뛰어난 인재들이 모여있는 공간인 만큼, 시험지를 빼돌려 보겠다는 생각을 한 학생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일개 학관생이, 무림맹의 일급 기밀 보관처 심현각에 비견되는 보안을 자랑하는 학관 내부 금고를 뚫고 들어올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런 것을 감안한다면 실제 실력을 다시 측정할 방법은 한 가지뿐.

“그렇다면 재시험을 치를 수도 있겠지?”

너무나도 당연한 논리.

모여있는 교두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지만, 진소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납득이 되지 않는군요. 단지 좋은 점수를 받았다는 이유로 제가 재시험을 치러야 하는 겁니까?”

“…….”

너무나 상식적인 이야기를 되물음에 이야기를 내뱉었던 교두가 멈칫거렸다.

“……명백히 의심할 수 있는 상황이지.”

그리고 그걸 알아챈 듯 진소운의 입에서 비웃음이 삐져나왔다.

“그게 아니라, 제가 태을문 출신이기 때문에 그런 거 아닙니까?”

“뭐?”

“만약 제가 무당파의 출신이거나 소림사의 출신이라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의혹 같은 건 생기지 않았을 것 아닙니까. 역시나 무림학관도 별수 없는, 기득권에 아양을 떠는 존재였군요.”

쾅!

“말조심해라!”

교두 하나가 투기를 뿜으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교두는 자신이 모욕을 받은 듯 수치심으로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지만, 너무나도 태연한 소운의 행동에 되려 자신이 뭔가 잘못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

여지껏 조용히 관찰만 하던 학관장은 차갑게 내려앉은 눈빛으로 두 손을 모아 턱을 괴었다.

“……난 자네가 치기 어린 객기에 경솔한 행동을 하는 애송이라 생각하지 않아. 그간 자네의 행동은 치밀한 계획하에 준비된 것들이 대부분이거든.”

학관장은 멸혼진 사태 이후로, 진소운을 운 좋은 애송이로 보던 시선을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그게 아니고선 설명되지 않는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났기에.

“나와 교두들의 성질을 돋운 것은 내게서 원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겠지?”

교두들은 당금의 사태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

학관의 입장에선 의심 가는 학관생이 있다면 당연히 다시금 시험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가?

할 말을 잃은 교두들은 입을 꾸욱 다물고 진소운을 바라봤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진소운은 당황하는 모습도 없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하기 시작했다.

“학관장님의 무공이 꽤나 독특하다고 들었는데, 그걸 배우고 싶습니다.”

“…….”

“…….”

장내의 공기는 찬물을 끼얹은 듯 싸늘하게 식었다.

학관장이 무공 팔아먹는 낭인 나부랭이도 아닌데, 무공을 배우고 싶다니.

더구나 학관장의 무공은, 그 특별함이 다른 도가계열의 무공과는 비견되지 않을 만큼 특수해, 맹 내에서도 가장 귀한 취급을 받고 있었다.

“삼청무상검의 진전을 잇고 싶다는 건가?”

“무슨 말씀을 전 이미 태을문의 제자입니다.”

“…….”

불가에 달마역근경이 있다면 도가에는 삼청무상검이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삼청의 본질을 추구하는 지고한 무공.

이를 한낱 내기로 내걸어 배우고 싶다는 진소운의 말에, 교두들은 사달이 나도 단단히 나겠다 생각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어떻게, 저랑 내기 한번 하시겠습니까? 그게 싫다면 전 재시험 같은 건 치르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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