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136화 (136/357)

#136. <자신을 증명하는 흑염룡(6)>

초기 학관생들의 실력 평가는 교두들이 진행하지만, 적은 수의 교두들이 수백에 달하는 학관생들의 실력을 모두 측정할 수 없는바.

결국 학관생들의 평가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소속이냐, 백팔봉의 소속이냐로 먼저 갈린다.

더 나아가면, 백팔봉 안에서도 몇 번째 순위에 놓여 있는가?

오대세가의 소속이면 방계인가 직계인가? 하는 부분까지 고려하여 실력을 예상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지금 내가 소림의 일각이랑 상대를 한다는 건 그간의 관례를 모두 무시한 처사나 다름없었다.

태산북두인 소림의 제자와 백팔봉 끄트머리에 간당간당 걸려있는 태을문의 제자.

어떤 잣대를 들이대 봐도 맞붙어선 안 되는 상대였으니까.

“이야기가 꽤 길어지네요.”

이런 생각은 우리만 하는 것이 아니었나 보다.

일부 교두들과 교관들이 당금의 사태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고, 학관장과 부학관장까지 단상에서 내려와 긴급회의를 하고 있었다.

“끝났나 보군요.”

“당연히 이 말도 안 되는 사태에 대해서 조정이 있겠죠. 아, 진 공자를 무시해서 하는 말은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성모란의 바람과는 달리, 북원평의 잔뜩 찌푸려진 미간이 이야기가 잘 풀리지 않았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북원평은 잠시 장내를 둘러보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전음을 보내왔다.

-명분으론 필기 만점 받은 자네의 실력을 고평가해서라고 하는데…… 실상은 장로전의 입김이 작용했나 보군.

-또 정도회입니까?

-그건 아닌 것 같아. 백도회도 자네의 실력을 알아보고 싶어 하는 것 같거든.

-그렇군요.

-원한다면 직권을 이용해서라도 막아주겠네.

-괜찮습니다. 어쩌면 사숙님이 되실지도 모르는데, 벌써부터 기대는 모습을 보이면 실망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북원평은 꽤나 놀란 얼굴을 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이런 기회가 더 좋을지도 모르지. 자네가 소림에게 진다 한들 자네를 손가락질하는 이들은 없을 테니.

북원평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교두가 우렁차게 외쳤다.

“비무를 진행하겠소. 호명된 학관생들은 연무장 위로 올라오시오!”

일각이 연무장 위로 올라선다.

주위의 차가운 시선과 조소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듯, 평정심을 유지한 모습이었다.

“어떻게든 대사형을 깎아내리겠다는 음모군요.”

은호가 빠드득 이를 갈았다.

“전 차라리 대사형이 그냥 기권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요…….”

“…….”

“일각은 소림의 소불 다음으로 강한 사람이라 들었어요.”

금표는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동룡은 걱정되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렇다더냐?”

내 무던한 답변에도 은호는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지 꽉 쥔 주먹이 붉게 달아올랐다.

“어째서 매번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 겁니까. 대사형은 억울하지도 않으십니까?”

“사람들은 우리가 제자리에 있길 바란다.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려는 시도 하나하나가 그들에겐 거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

“더럽고 치사하다 해서, 우리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어야 하겠느냐?”

“대사형은…… 앞으로 나아가지 않아도 저희 대사형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엔 녀석들을 감싸줄 수 없었다.

당장 계철영의 눈치를 보며 내 보신을 하기도 버거웠으니.

그럼에도 녀석들은 단 한 번도 내게 원망의 감정을 보이거나 쏟아낸 적이 없었다.

내가 녀석들의 대사형이 아닐 때도 녀석들은 그래왔다.

“안다. 하지만 내가 나아가지 않으면, 결국 너희들이 비바람을 맡게 되지 않겠느냐.”

옆에서 아무 말 없이 입술을 씰룩거리던 금표가 버럭 소리쳤다.

“왜 그렇게 사형 혼자 짐을 다 지고 가려 하십니까! 저희들은 애가 아닙니다!”

“알고 있다.”

이건 나만의 짐.

나만이 알고 있는 전생에 대한 속죄.

“하지만 내가 먼저 너희를 보호한다면, 그다음은 너희들이 더 많은 사제들과 제자들을 보호할 수 있지 않겠느냐.”

“……!”

“……!”

“……!”

어린 시절부터 항상 함께해 왔기에 녀석들의 감정 변화는 금방 알아챌 수 있다.

금표는 울고 싶지 않을 때 코를 벌렁거리고, 은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다.

그리고 동룡은 말없이 눈물을 짜낸다.

“걱정 말아라. 난 겨우 이런 곳에서 쓰러지지 않으니. 동룡이도 그만 뚝 해라. 네가 그렇게 울면 이 대사형이 엄청 약한 사람 같지 않으냐?”

“……히끅.”

난 흑룡검과 비룡조를 풀어 은호에게 건넸다.

금은동 형제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흑룡검과 내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더구나 잔꾀라면 이 대사형을 따라올 사람이 있겠느냐?”

“……?”

“……?”

“……아!”

은호만 알아차린 듯 눈썹을 치켜떴다. 난 눈치 빠른 녀석에게 살짝 웃어준 후, 곧장 돌아서서 연무장 위로 올라섰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장내에 소란이 일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져 시장통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뭐, 뭐야? 저 녀석, 검이 주력 아니었어?”

“태을검제의 진전도 결국 검이잖아.”

“그럼…… 설마 소림한테 검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인 거야?”

“미쳤군.”

조각된 불상처럼 평정심을 유지하던 일각의 얼굴에 미미한 금이 가기 시작한다.

“어째서 검을 들고 오지 않은 겁니까?”

“일각 스님의 주력도 권법이 아니었습니까?”

“……일부러 검을 두고 온 겁니까?”

일각의 얼굴은 천왕문 내부의 사천왕처럼 변해있었다.

“수석이 일반 학관생을 상대로 전력을 다하는 것도 보기 좋진 않죠.”

“……오만방자하기가…….”

-내가 순순히 당해줄 거라 생각했습니까?

“……!”

-난 바보가 아닙니다. 댁들의 얄팍한 수작을 내가 모를 것 같습니까?

“진소운 학관생. 비무 전 전음 사용은 금지되어 있다.”

심판의 제지에 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은 비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웃으며 건넨 포권에 일각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

‘내 실력은 지금 어느 정도 수준이지?’

확실히 전생에 비하면 현생의 실력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발전하긴 했다.

반갑자도 안되는 내공을 아껴 쓰려고 아등바등했던 것에 비하면, 지금은 광천신장을 두 번 정도는 쓰고도 탈진되지 않을 정도니까.

삼류 수준의 하급 무사 출신과 무림학관 수석 입학자의 수준을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무림 안에서 나의 수준에 대해 논하자면 이야기가 복잡해진다.

기본적으로 이번 생에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인물들을 상대할 땐 과거 제갈천기가 만든 파쇄식을 바탕으로 한 대응이었고, 갖가지 잔재주와 과거의 기억들을 이용한 승부였기에 실제 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할 수가 없다.

근래에 파쇄식을 알지 못하는 맹주전의 그림자 무사를 만나긴 했지만, 그는 애당초 내가 논할 수준의 인간이 아니니까.

아무튼, 그런 면에서 볼 때 일각은 제대로 내 수준을 파악할 만한 진정한 상대라 하겠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중 유일하게 파쇄식을 만들지 않은 문파.

아니, 당초 만들 필요가 없었던 문파.

심신 수련을 근간으로 하는 소림의 무도는 초식의 효율 따위를 따지지 않았고, 개개인의 깨달음에 따른 변화가 무수히 많았기에 초식의 효율을 찾는 파쇄식은 필요치 않았다.

“시작!”

심판의 소리와 함께 일각이 기수식을 취한다.

소림칠십이절예 중 하나로 손꼽히는 용왕권.

두 개의 주먹은 승천의 때를 기다리는 이무기처럼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보였다.

‘벌써 용왕권이라니, 화가 단단히 났나 보군.’

나 또한 만화무적권의 기수식을 펼치자 장내의 소란이 더욱 커졌다.

“진짜 권법으로 상대할 생각인가?”

“오만이 지나치군.”

“어차피 창피당할 거, 적당히 면피할 생각인 거 같은데?”

장내의 소란을 뚫고 먼저 움직인 것은 일각이었다.

얼음 위를 미끄러지는 듯한 부동신법에 이은 용왕권의 연환격.

파파파파팟.

물 흐르듯 맹렬하게 쏟아져 나오는 권격들은 용의 이빨과 같은 날카로움을 가지고 있어 흡사 검에 베이는 듯한 기분이었다.

일 초식에 무려 열 번의 공격을 내지르고도 일각은 물러설 생각이 없었는지 연이어 용왕권을 쏟아내었고, 정면에서 짓쳐드는 권격과 아래에서 솟아오르는 권격으로 시야를 흩트렸다.

“겨우 이 정도로 오만을 부렸던 것입니까?”

말투는 정중하지만, 뻗어나온 목소리는 분노를 확실히 담아내고 있었다.

삼초식, 총 스물다섯 번에 달하는 공격을 막아낸 나는, 태을팔만신보를 펼쳐 일각의 옆으로 이동하는 환영을 만든 후, 뒤로 물러서려 했다.

“……흥!”

옆으로 이동하던 일각은 내 진신의 발소리를 들었는지, 금세 발목을 틀어 팔괘사형보를 펼쳤고, 그의 신형은 어느새 내 앞에 불쑥 나타났다.

일 초에 열 번의 권격을 쏟아내는 용왕권이 내가 있던 공간을 갈랐고, 나는 가까스로 용왕권을 피해 그의 뒤를 잡았다.

하지만.

퍽.

연무장의 바닥이 부서질 정도로 강하게 진각을 밟은 일각은 어느새 내 뒤로 이동해 있었다.

“손오공은 구름을 타도 부처님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퍼퍼퍼퍼퍼퍼퍼퍽.

용왕권을 쏟아내는 일각.

나는 만화무적권의 변(變)의 묘리로 대응했다.

허공을 가득 메우는 수십 개의 권형과 용의 이빨과 같은 날카로운 권격이 부딪친다.

콰가가가가강.

만화무적권의 위력을 과소평가했던지, 환영을 무시한 일각은 만화무적권에 온몸을 내주곤 세 걸음 물러났다.

만화무적권을 정면으로 막아냈던 팔뚝을 바라보는 일각.

붉게 변한 피부를 보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찡그린다.

“예상보다 꽤나 무겁지요?”

“…….”

일각의 두 주먹의 위치가 양옆에서 상하로 바뀐다. 칠십이절예의 또 다른 무공인 호투권.

팍.

팔괘사형보를 밟은 일각의 신형이 화살처럼 쏘아져, 어느새 눈앞에서 호랑이처럼 두 주먹을 휘두른다.

파파팍.

만화무적권을 펼쳐 호투권을 막아보지만, 때릴 때마다 뼈가 저릿하게 울린다.

‘이래서야 뼈가 못 버티겠군.’

일각은 외공인 천근갑을 익혔기에 몸으로 부딪치는 데 거리낌이 없지만, 이쪽은 아니다.

더불어 애당초 강(强) 대 강(强)의 대결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의 주먹 하나를 흘리며 동시에 몸을 측면으로 틀어 연화(蓮花)를 시전 한다.

뿌드득.

“……!”

제아무리 천근갑을 익혔다 한들 뼈마디를 잇는 관절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것.

뼈가 부러지고 싶지 않으면 내가 잡은 그의 팔에 몸을 실을 수밖에 없었다.

일각의 몸이 붕 떠올라 반 바퀴 뒤집힌다.

동시에 온 힘을 다해 그를 연무장에 내려친다.

퍼걱.

바닥을 온몸으로 받아낸 일각은 바람을 가득 채운 돼지 오줌보처럼 벌떡 튕겨 올랐다.

그는 자신의 얼굴에 흙이 묻은 것도 모른 채 토끼 눈을 뜨고 있었다.

“……이화접목?”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의 일각.

하긴 이화접목이니 사량발천근이니 하는 무공들은 당초 무당이나 소림에서도 천대받는 것이 아니던가.

헌데 소림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을 제대로 돌려준 유운신공이 얼마나 놀랍겠나.

“태을문에 그런 무공도 있었습니까?”

“당초 제한된 무공만 선보이는 자리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 지요.”

표정을 다잡은 일각의 양손에 서로 다른 기운이 어린다.

오른손에는 용왕권, 왼손에는 죽엽수였다.

아마도 유운신공 연화(蓮花)를 신경 쓴 탓이겠지.

나도 그와 마찬가지로 왼손엔 연화를, 오른손엔 만화무적권의 기운을 실었다.

꿀꺽.

누군가의 침 넘기는 소리와 함께 일각이 미끄러지듯 다가온다.

나 또한 이번엔 피하지 않고, 태을팔만신보를 펼친다.

먼저 용왕권이 쏟아져 나온다.

퍼퍽, 퍼퍽, 퍼퍽, 퍼퍼퍽.

내가 그의 권격을 연화로 하나하나 넘기고, 이어 그의 힘을 이용해 그를 제압하려 하는 순간.

왼손에 준비되어 있던 죽엽수가 날카롭게 찔러 들어온다.

파파파파팍.

아찔한 날카로움으로 날아드는 죽엽수를 피하기 위해 죽어라 발을 놀리자, 그의 손이 지나간 바닥이 움푹움푹 파여 들어갔다.

퍼걱, 퍼걱, 퍼거걱!

분명 사람 손과 대리석이 맞부딪쳤음에도 흙먼지가 날리고, 대리석 조각이 깨져나간다.

이어 그가 죽엽수를 회수하고 몸을 뒤로 빼려는 순간.

태을팔만신보로 그의 측면을 잡은 나는 만화무적권을 온전히 쏟아낸다.

허공을 수놓는 수없이 많은 권영과 권격이 그의 신형을 집어삼킨다.

이미 사방(四坊)을 모두 제압했기에 빠져나갈 곳 따윈 없는 상황.

천근갑으로 버텨낼 수 있었기에 내공을 있는 대로 때려 박았다.

제아무리 단단한 바위라도 더 강한 망치질에는 깨지는 법이지.

콰가가가가가각!

용왕권과 호투권으로 만화무적권을 마주하던 일각은 이내 한계를 느꼈는지 두 주먹을 회수했다.

아마도 몸으로 받아낸 후, 빈틈을 노리겠다는 속셈인 듯한데, 삼갑자에 달하는 내공을 받아내고도 버틸 수 있다면, 내가 먼저 기권하는 게 낫지.

일각이 수십 개의 권영과 권격에 집어삼켜지려는 찰나.

쾅쾅쾅!

황금색 빛이 번쩍이며, 거대한 폭발음을 일으킨다.

예상치 못한 충격음에 몸이 붕 떠오른 나는, 몸을 몇 바퀴나 돌리고 나서야 그 충격을 해소하고 바닥에 내려앉을 수 있었다.

나는 설마 하는 생각으로 고개를 들었다.

“저거 금강복마권 아냐?”

“에이 설마……이제 겨우 약관에 불과할 텐데? 벌써?”

“왜! 일각도 일명 못지 않은 재능을 가졌다던데!”

그가 달마역근경까지 익힌 것은 알고 있다.

“…….”

허나, 대외적으로 역근경에 입문하는 나이는 서른이 넘어서라고 알려져 있었는데…….

설마 스님들이 거짓말하겠어?

먼지가 걷어지자 일각의 주먹에 금빛 빛무리가 어려있었다.

그는 단지 일권으로 수십에 달하는 만화무적권을 모조리 막아낸 것이었다.

그건 분명 금강복마권이 확실했다.

난 실망을 금치 못했다.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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