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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138화 (138/357)

#138. <만서고의 요괴를 만나는 흑염룡(2)>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만서고의 사용인들에게 각각 세 번씩.

받아주지도 않는 인사를 한 꼽추 노인은, 만서고를 나와 자신이 기거하는 숙소로 천천히 걸었다.

무림학관의 정식 사용인이 아니었기에 기숙사를 사용할 수 없었던 그는, 무림학관의 모처에 작은 움막으로 향했다.

쩔뚝, 쩔뚝.

허리가 굽은 꼽추에 한쪽 다리까지 저는 그는, 거동이 힘들어 보였지만 쉬지 않고 부지런히 걸었다.

인적이 드문 숲길로 들어섰을 때, 그의 앞에 한 청년이 나타났다.

“억! 어이쿠, 깜짝이야!”

꼽추인 탓에 항시 고개를 숙이고 움직였던 노인.

청년이 지근거리까지 다가와서야 청년을 발견하고, 뒤로 자빠질 듯 매우 놀라며 물러났다.

“뉘, 뉘십니까?”

청년은 정중하게 포권을 쥐며 소개를 했다.

“저는 태을문의 제자이자 무림학관의 대표인 진소운이라고 합니다.”

“아……? 아, 그, 그러시군요. 근데 여긴 어떻게. 이곳은 사람들이 다니는 곳이 아닌데.”

진소운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게 다름이 아니라 제가 최근에 벽을 마주했는데 그 벽을 넘기가 쉽지 않아……. 노사께서 저를 좀 도와주셨으면 해서 말이죠.”

“저, 제가 말입니까? 아니, 저 같은 병신 꼽추에게 무슨…….”

“뭐, 무공을 전수해 달라 그런 건 아닙니다. 노사께서 쓰시는 무공 중에서 검강의 요령을 좀 알려주실 순 없을까 해서 여쭙는 겁니다.”

“거, 검강이요?”

“네.”

“도, 도련님. 전 태어나면서 단 한 번도 하늘을 제대로 목도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 제가 검강이라뇨.”

“……음 그렇습니까?”

“그렇고 말고요. 지나다니는 그 누구를 잡고 물어보셔도, 제에게서보다는 더 좋은 답변을 얻지 않으시겠습니까.”

꼽추 노인의 말에 진소운은 생각에 잠긴 듯 턱을 쓸었다.

“혹시, 이곳에 기거하는 이유를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럼 거래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이유라니요. 오갈 곳 없는 노인이 푼돈이라도 받으며 허드렛일을 하는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그래도 흑도무림의 정점이라 불리는 검마(劍魔)가 있기엔, 무림학관 만서고는 좀 부적절한 곳 아닙니까?”

“…….”

꼽추 노인은 너무 얼토당토않은 말에 말문이 막힌 듯 입을 헤 벌렸다.

“……도련님 혹시 어디가 아프십니까?”

“흠…… 역시나 그냥 정체를 밝히실 의향은 없겠지요?”

“그게 무슨…….”

꼽추 노인이 고개를 돌려 진소운의 얼굴을 보려는 순간.

진소운의 양손이 격하게 떨리더니 수십 개의 권영이 허공에 나타났다.

그러곤 금방이라도 노인을 짓이길 듯, 빠트린 곳 없이 전신에 타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퍽.

부지불식간에 공격당한 꼽추 노인은 무려 이장이나 날아가 바닥에 처박혔고, 동시에 핏물을 토해냈다.

“커헉.”

꼽추 노인이 처참한 모습으로 바닥에 쓰러져 있었지만, 진소운은 자기 주먹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대단하시군요. 어떻게 그 많은 권격을 맞기 직전에 해소할 수 있는 거죠?”

“커흐흑.”

진소운의 말에 답변이라도 하듯 노인이 다시금 핏물을 토해냈다. 파리한 안색이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모습.

그런데도 진소운은 별 감흥이 없는 듯 천천히 검을 뽑았다.

“그거 아십니까? 내상으로 인해 일어난 각혈은 검붉은 색입니다. 반면에 입안을 깨물어 터트리는 가짜 각혈은 선홍빛 붉은색을 띠지요. 그건 제가 많이 해봐서 압니다.”

“…….”

“지금 보여드릴 건 저희 사문의 독자적인 무공인데, 한번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진소운의 흑룡검이 휘둘러지며 다섯 자루의 검이 허공에 나타났다.

그 다섯 자루의 검이 각기 움직이며 검식을 펼치기 시작하자, 그 검들을 중심으로 수십 개에 달하는 환검들이 사방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만검이라는 겁니다. 검강을 막아내긴 하는데, 검강을 압도할 만한 수준은 아닌 듯해서 말입니다. 한번 노사께서 평가해 주십시오.”

말을 끝내자마자 허공을 가득 메운 흑룡검들이 일제히 꼽추 노인에게 작렬하기 시작했다.

부지불식간에 살기를 내뿜으며 떨어져 내리는 수십 개의 검에, 꼽추 노인의 가냘픈 몸이 산산조각 나기 직전.

핑.

눈을 번쩍 뜬 꼽추 노인의 손에는 어느새 젓가락처럼 얇은 나뭇가지가 쥐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나뭇가지로부터 오 척에 달하는 거대한 검강이 솟아올랐다.

콰콰콰콰콰콰콰콰쾅

만검과 검강이 맞부딪치며 거대한 폭발음이 터져 나온다.

뒤이어 쏟아지는 검강이 이내 만검을 모두 뒤엎고 진소운까지 집어삼켰다.

---------------!

떵떵거리는 충격파가 사방으로 뻗친다.

조용하게 머물던 산새들이 한꺼번에 날아올라 하늘에 점을 새겼다.

정돈되지 않은 야산의 나무들이 일거에 쓰러지고, 바닥에 소복이 쌓여있던 낙엽들은 파도에 실린 것처럼 사방으로 흩어진다.

그리고 검강의 파도에 직격당한 진소운의 옷가지는 넝마로 변해있었다.

“커헉.”

내상을 입은 듯 진소운이 각혈을 내뱉었다.

진소운은 자신이 내뱉은 핏자국을 꼽추 노인에게 보이며 씨익 웃었다.

“이것 보십시오. 진정한 내상은 이렇게 검붉은 색입니다.”

그렇게 말한 진소운이 픽 하고 쓰러졌다.

나뭇가지를 든 꼽추 노인은 그런 진소운을 보며 황당하다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이런 미친놈을 봤나…….”

평생 무림을 질주하며 오만 군상의 인간을 다 만나 보았다.

하지만 진소운만큼 정신이 나간 놈은 처음이었다.

“끄응…….”

꼽추 노인은 당금의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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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떴을 땐, 누추한 움막 안이었다.

지붕은 어찌나 대충 얹었는지 햇살이 비쳐 들고, 세간살이 중에 멀쩡한 것이 없었다.

‘그래도 명색이 검마인데…….’

이렇게까지 생활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무림학관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 진심이라고 봐야겠지.

기감에 검마가 잡혔다.

하지만 당장 몸을 일으켜 나가진 않았다.

검마와의 일전으로 내부가 진탕되어 각혈까지 했으므로 몸을 추스르고 나갈 필요가 있었다.

가부좌를 틀고 태을진경을 끌어올렸다.

진기를 일으켜 내부 곳곳을 살피니,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었다.

그렇게 내상을 다스리고 움막을 나서자, 평상 위에서 검마가 책을 보고 있었다.

더 이상 꼽추 흉내는 포기한 것인지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있었고, 내가 나왔음에도 내 쪽으론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검마(劍魔)가 책을 보고 있다니.’

검에 미쳐 마(魔)라는 별호까지 받은 자다.

그런 자가 무슨 연유에서 무림학관에 머물며 책을 읽고 있는지 궁금했다.

슬쩍 다가가 살펴보니, 졸업생들의 논문을 가져다 읽는 중이었다.

“그런 건(?) 왜 읽고 계신 겁니까?”

검마가 읽고 있는 것은, 무림학관의 졸업생이자 과거 청화무검이라는 별호로 불렸던 검사가 쓴 논문.

청화무검 자체가 그리 뛰어난 검사는 아니었기에, 그가 제출한 논문도 그리 훌륭하진 않았다.

그저 선배들이 써놓은 논문에 몇 가지 살을 덧붙여 구색만 갖춘 헛껍데기 논문.

그런 논문을 천하의 검마가 마치 비급이라도 되는 듯 샅샅이 훑고 있는 모습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도생일(道生一) 일위태극(一僞太極)이 무언지 아느냐?”

“알지요.”

“지껄여 보거라.”

“그게 왜 궁금하십니까?”

“여태껏 삼천 개에 달하는 논문을 보았는데, 모두 이 똑같은 말을 써놓았더구나.”

“근데 병신 꼽추치고는 부탁하는 말투가 굉장히 오만하게 들리는군요.”

“…….”

검마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병신 꼽추를 만나러 온 것이더냐?”

“검마님을 뵈러 온 거지요.”

“그럼 된 것 아니더냐.”

“그렇네요.”

“지껄여 보거라.”

“방금 질문하신 건 도가의 기본적인 가르침입니다. 삼라만상이 발생하는 과정 중에…….”

검마가 책을 던지며 내 말을 막았다.

나는 손을 뻗어 검마가 던지는 책을 잡아챘다.

“어이쿠야. 설명이 너무 어렵습니까?”

“내가 아직도 병신 꼽추로 보이느냐? 태역(太易), 태초(太初), 태시(太始)도 모를까 봐?”

“아아, 알고 계셨습니까?”

“내가 궁금한 건, 어째서 다들 똑같은 내용을 글자만 바꿔서 써냈냐는 것이다.”

“그야, 그걸 내야 졸업할 수 있으니까요.”

“오롯이 자신의 깨달음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졸업하기 위해 내는 거라고?”

“그렇죠.”

“빌어먹을, 학관에 안 들어오길 잘했군.”

“그럼 이제 제가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일없다. 돌아가라. 그리고 다시는 나와 마주치지 마라. 그땐 반드시 죽일 테니.”

“음…… 그건 좀 힘들지 않겠습니까?”

“허, 내가 못 할 거라 생각하는 거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게 아니라. 제가 죽으면 검마님께서 여기에 더 계시지 못하지 않습니까.”

“내가 흔적 같은 걸 남길 것 같으냐?”

“아뇨. 제가 남길 거거든요. 오늘처럼 검마님을 만나러 올 때마다 만서고의 꼽추 노사를 만나러 간다고 사람들에게 말하고 올 거거든요.”

“…….”

나는 평상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학관생들의 논문들을 보며 물었다.

“뭔가 목적이 있어서 무림학관에 머물고 계신 거 아닙니까?”

“…….”

“제가 별건 아니지만 나름 무림학관의 대표라서 말입니다. 제가 죽으면 어찌 되었든 찝찝한 위치에 있는 꼽추 노사께서도 이곳에서 쫓겨나실 텐데…… 괜찮으십니까?”

반나절 전만 해도 나를 볼 때마다 안구가 격하게 흔들리고 있었는데, 지금은 마치 거대한 호수처럼 흔들림이 없다.

무공의 경지가 극에 달하면 감정에 의한 신체 변화도 조절할 수 있는 걸까?

“내 정체를 어찌 알았지?”

사실 이건 순전히 운이 좋아서 가능했다.

만서고의 책을 외우던 시기 꼽추였던 검마를 항시 가까이서 봤었는다.

헌데 훗날 정마대전 중에 흑도 무림을 결집한 검마가 만서고의 꼽추 노인과 똑같은 걸음걸이와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닌가.

인간은 살아온 환경과 습관, 버릇에 따라 다른 행동을 하게 된다.

제아무리 쌍둥이라고 하더라도 그 미미한 차이를 지울 수는 없는 법.

하지만 꼽추 노인과 검마는 마치 사람을 가져다 똑같이 복사한 듯 같은 행동을 했다.

“제 동기인 소천수에게 손을 쓰시는 것을 보고 알았지요.”

“그걸 보았다고?”

“너무 확실히 보이던데요?”

물론 검마라는 인지를 하고 유심히 관찰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그마저도 제대로 다 보진 못했다.

하지만 내가 검마를 아는 내막을 알려줄 순 없으니 이렇게 대충 둘러대는 수밖에.

정말 회귀한 이후에 거짓말만 계속 느는 것 같다.

후, 난 본래 거짓말 같은 건 할 줄 모르는 군자 같은 인간이었는데.

“내 수를 본 놈이 왜 내게 무공을 가르쳐 달라는 것이냐.”

“아, 뭐. 대충 저도 검마 어르신처럼 무공에 미쳐서라고 생각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본래 백도 문파의 사람이었던 검마다.

검에 심취하여 상대를 가리지 않고 비무행을 치르고, 무공의 성취를 위해선 물불 가리지 않는 행동들이 그의 별호를 마(魔)로 만들었다.

그래서 나도 그를 차분하게 설득하느니, 그가 썼던 방법으로 한 자락 배움을 청하기로 했다.

“이런 미친 새끼가…….”

하지만 검마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별호에 마(魔)까지 붙은 사람에게 ‘미친 새끼’라 불리니 심히 마음이 편치 않다.

더구나 이 사람은 자신이 과거에 행했던 행동을 똑같이 하고 있음에도, 나를 받아줄 마음이 없어 보였다.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인간 같으니라고.

쯧, 그러니 흑도인이 된 거겠지.

나는 그가 앉은 평상 위에 널브러진 논문들을 보다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아까 말씀드린 대로 거래를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검마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제가 드리고, 제가 원하는 걸 검마님께서 주십시오.”

검마는 곽궁을 상대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고수다.

나는 꼭, 당신에게 한 자락 배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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