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만서고의 요괴를 만나는 흑염룡(5)
“흐흐흐…….”
금표가 실성한 듯 웃었다.
“흐흐흐흐…….”
그 옆으로 은호 또한 실성한 듯 웃었다.
“헤헤.”
동룡은 그런 형들을 보며 함께 웃었다.
바닥에 벌렁 드러누운 은호가 놀란 사련을 보며 물었다.
“어떻습니까? 사저.”
“…….”
금·은·동 세 사람의 새로운 검진 시연을 본 사련은 여전히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백호필살검진입니다.”
“필살?”
금·은·동 세 형제가 정시를 겪으며 실력이 일취월장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방금 보여준 그 검진은 자신의 예상을 아득하게 넘어서 버리는 것이었다.
“그간 동룡이가 펼치는 검식을 연구를 좀 했습니다.”
은호의 말에 사련의 시선이 동룡에게 향했다.
천살성이라 했던가?
다행히 태을진경과 끈질긴 심상 수련으로 살성은 억눌렀다 들었다.
그리고 천살성의 천부적인 재능이 만들어 내는 살검식을 금표와 은호가 따라 익혔다고 했는데…….
“거기에 더불어 만해천지검결을 추가한 거죠.”
분명 세 사람이 펼친 검진은 단순한 백호검진이 분명했지만, 선보인 파괴력은 같은 백호검진이라 볼 수 없는 것이었다.
“…….”
비무장 일대만 둘러보아도 그 파괴력을 짐작할 수 있다.
대리석으로 만든 바닥이 깨지고 통나무로 만들어진 허수아비가 산산조각이 났다.
셋이서 펼친 검진에 이런 파괴력이 존재한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근데 이게 끝이 아니라고?”
어안이 벙벙한 사련의 물음에 은호가 득의양양 답했다.
“사저도 만해천지검결에 입문하셨다 했지요?”
사련은 고개를 끄덕였다.
학관에 들어온 후 태을검제의 무경을 익혔지만, 신검에게 받은 벌모세수와 본인의 각고의 노력을 통해, 최근 태을검제의 오의라 할 수 있는 만해천지검결로 한 자루의 만검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사저까지 함께 넷이서 검진을 펼치는 겁니다.”
“……괜찮을까? 난 너희와 검진을 맞춰본 적이 없는데…….”
“애당초 백호검진은 서로 다른 검법을 익힌 사람도 무리 없이 하나가 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검진입니다. 더구나 저희는 같은 무공을 익히지 않았습니까.”
은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사련은 문득 궁금한 점이 떠올랐다.
“그런데, 굳이 내가 들어가야 하는 이유가 뭐야? 너희 셋이 손발을 맞춰온 시간이 길잖아.”
“사저가 함께 해주시면, 필살검진이 더욱 강해지니까요.”
“더 강해진다고?”
백호검진은 공격보단 수세에 강한 효과를 가지고 있다.
그런 검진의 공격력을 올려서 어디에 쓰려는 생각이지?
“대사형에게 쓸 생각입니다.”
“에?”
“그간 대사형께서 저희 사제들을 걱정하시느라 무척이나 심려가 크지 않았습니까. 이번 기회에 그 코를 한번 납작하게 해서 저희를 걱정할 필요 없다는 걸 증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혹시 복수할 생각인 거야?”
“…….”
딱 걸렸다는 저 표정.
동룡이야 워낙에 얌전하고 착하기에 그럴 일은 없지만, 금표나 은호는 워낙에 장난이 심해 진소운에게 맞는 일이 잦았다.
설마 그것 때문에 그동안 그렇게 수련에 매진했던 거라고?
“……그럴 리가요. 하늘 같은 대사형께 복수라니. 그런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이게 다 저희의 발전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이지요.”
어째 내뱉는 말들 하나하나가 모두 거짓말같이 느껴진다.
……그래도 그 의도가 무엇이든 한 방 먹여줄 수 있다는 점은 크게 나쁘지 않은 것 같다.
“한 방 먹여줄 거면 제대로 하는 게 낫겠지.”
“네?”
“난 어디에 들어가면 돼?”
홍사련은 오랜만에 수련에 대한 열의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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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만서고에서 검마가 찾는 책을 가져다주었다.
검마는 그 책을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었다.
눈물을 흘리면서도 읽고, 딱딱한 표정으로 책장을 넘기기도 했다.
그렇게 책을 몇 번이나 읽던 검마는 당장이라도 그들을 찾으러 갈 채비를 했고, 난 그를 뜯어말렸다.
“……거기가 어디라고 이렇게 가시려 합니까.”
섭소정이 남겨놓은 자신의 위치는 길림성.
북경과 요녕을 지나야 하는 곳이다.
“그리고 편지를 받았던 것이 오 년 전이라면서요. 아직 그곳에 기거하리란 걸 어떻게 장담합니까?”
“그곳에 없다면, 그곳에서부터 다시 찾아봐야지.”
“만약 이게 가짜라 하면요?”
“…….”
“천하를 다 뒤지실 겁니까?”
물론 책의 내용이나 전서를 살펴봤을 때, 워낙 둘만 알고 있는 비밀들이 많이 적혀있었기에 가짜일 리는 없겠지만, 그마저도 모를 일 아닌가.
더구나 검마는 적이 많다.
백도와 흑도 모두가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인간이, 바로 검마다.
싫다는 사람의 처소까지 부득불 찾아가 비무를 벌이는 검마의 무한 비무행을 멈추기 위해 누군가 수작을 부렸을지도 모를 일이고.
“일단 사람을 보내서 확인해 보시죠. 그리고 그들이 어딘가로 이동했다면 검마님께서 직접 찾는 것보다 사람을 통해 찾는 것이 더 나을 겁니다. 그리고 제게 무공을 가르쳐 주기로 하시지 않았습니까.”
“개방을 고용하라는 이야기더냐? 하지만 난 돈이 없는데…….”
“……그건 제가 내겠습니다. 수업료를 낸다 생각하지요.”
그렇게 섭소정의 존재를 확인하는 동안, 검마와의 개인 무공 수련이 시작되었다.
“누가 검기를 그따위로 두른다더냐? 네놈 검기는 횃불을 대신하려 하는 것이냐?”
“검기는 클 필요가 없다. 아니, 되려 작으면 작을수록 좋지.”
“뭐? 크기가 작으면 기세에 밀려? 왜 이리 크기에 집착하는 것이냐? 어디 다른 곳에 약점이라도 있는 거냐?”
“검기는 밀도다. 밀도를 더 올리기 위해 검기를 두르는 것이야. 밀도를 올릴 수 있다면 그 형태는 크기에 상관이 없다.”
검마의 수련은 거칠고 자존심을 긁어대기도 했지만, 확실히 실전에 유용할 만한 현실적인 가르침이 많았다.
나로선 강채석 당주 이후로 처음으로 제대로 된 무공사부에게 배우는 처지라, 그간 궁금하고 부족했던 부분들을 모두 검마를 통해 해소하기 시작했다.
검마는 백도무공에 기반을 둔 나의 질문을 자신만의 독창적인 통찰로 해석하여 풀어내 주었는데, 그 답변들이 실로 간결하고 단순하여 절로 웃음이 날 정도였다.
“형과 식 말이더냐? 물론 중요하지. 하지만 실전에서 쓰지 못하면 무에 소용이 있더냐. 그렇다고 형과 식을 버리라는 소리가 아니다.”
“뭐? 깨달음의 다음 단계를 위해선 초식을 버려야 하는 거 아니냐고? 이런 미친놈이! 네놈이 무슨 초월적 단계에 오르기라도 했단 말이냐?”
“검강 말이냐? 검강에 목매지 말라 하지 않았더냐! 염병할, 전생에 검강 못 익혀 뒤진 귀신이 붙었나. 천강문 그 새끼들을 봐라. 수강이니 권강이니 쓰는 놈들이 쾌검 한 방에 손발이 휙휙 잘려나간다. 백날 검강을 익혀봐야 소용없다는 거지.”
“검기가 완성이 돼야 한다. 검기가 완성돼야 검강이 따라온다. 검기도 완성하지 못한 채 만드는 검강 또한 종이 쪼가리에 지나지 않는다. ……내 말이 개소리로 들리더냐? 지금 당장 네 검강으로 내 검기랑 한번 맞붙어 볼 테냐?”
물론 성격이 워낙 불같고 불량한 사람이기에 가르침을 받기가 쉽진 않았다.
그래도 더 이상 기숙사를 오갈 필요 없이 움막에서 함께 지내면서 온종일 수련할 정도의 사이가 되긴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검마와의 수련을 하던 중 이상함을 느끼고 흑룡검을 천천히 내렸다.
검마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아직 수련 중이다. 검을 들어라.”
“지금 선보이신 그거, 검마님의 독문무공 아닙니까?”
“호오, 네놈도 눈이 달렸다고 훌륭한 검법은 단박에 알아보는구나?”
하 씨, 말을 해도 꼭…….
“지난번에도 알려드렸습니다만, 제가 눈썰미랑 기억력이 꽤 좋아서요.”
“푸헤헤. 네놈이 내 검식의 외운다 한들 따라 할 수 있겠느냐?”
“…….”
“백월제천삼식(白月制天三式)이다.”
잘 알고 있다.
미래에 검마는 저 검법으로 흑도 무림을 일통하니까.
“훔쳐 갈 수 있다면 훔쳐 가보거라.”
절대 훔쳐 가지 못할 거라는 대단한 자신감.
그의 말대로 나는 매일 백월제천삼식을 상대했지만, 첫 번째 초식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어째서 제 만검이 검기도 두르지 않은 나뭇가지에 깨지는 겁니까?”
“일초식의 오의는 극쾌이다. 가장 빠르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하겠느냐?”
“힘?”
“아무것도 필요 없다.”
분명 무엇이 필요하냐 묻지 않았나?
“…….”
“가장 가벼운 상태가 되어야 가장 빠를 수 있다. 무엇도 쫓아오지 못하는 속도는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법 아니겠느냐?”
“하지만 제가 펼친 만검과 분명 부딪치지 않았습니까.”
“만검이 완성되기 전에 그 길을 막았으니까. 검기가 밀도라 이야기하지 않았느냐. 완성되지 않은 검은 언제든 부서질 수 있는 모래성에 불과하다. 네 만검도 마찬가지지.”
그렇게 한 달의 시간이 지나 길림성에 사람을 보내 찾던 섭소정에 대한 소식이 돌아올 때까지도, 결국 검마의 일초식을 분쇄하지 못했다.
“…….”
하오문이 전해온 전서를 읽으려는 나를 검마가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뭐라고 써있느냐?”
“……이제 펼쳤습니다.”
어서 전서를 읽어보라는 듯 재촉하며 침을 삼키는 검마.
나는 고개를 저으며 전서를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분은 지금 요녕성에서 기거하고 계시답니다.”
내가 전한 소식에 검마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두 사람이 내가 찾는 이들이…… 맞다더냐.”
“굉장한 미모를 가진 모녀가 화전을 일구며 살고 있답니다.”
“…….”
나는 목석처럼 변한 검마에게 섭소정에 대한 정보를 건네주었다.
“결국 저만 손해를 보았네요. 제대로 된 수업은 받지도 못했는데.”
뻣뻣하게 굳어 전서를 읽던 검마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어쨌든 검강을 뽑을 수 있게 되지 않았더냐!”
“아, 물론 그렇긴 하죠.”
난 그토록 바라던 검강의 경지에 들어섰다.
하지만 지난 한 달간 그의 최종 오의나 마찬가지인 백월제천삼식을 매일 봐서 그런지, 그토록 바라던 검강을 뽑아내게 되었지만 아쉬운 감정은 숨길 수가 없었다.
“바로 가보실 거죠?”
“…….”
“안 가실 생각입니까?”
“섭소정은 백화궁의 후계자였던 사람이다. 그 사람이 화전을 일구며 살아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전력으로 펼친 만해천지검결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던 검마는, 마치 무거운 짐을 짊어진 것처럼 어깨를 축 내렸다.
“백화궁의 사람으로서 흑도인의 아이를 낳았으니 죄인처럼 살아가는 거죠. 뭐.”
“뭐얏!”
“그건 엄연한 사실 아닙니까?”
“…….”
“어쨌든 저도 좀 생각을 해봤습니다. 어째서 섭 선배께선 곧장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지 않고 검마 선배님을 만서고에서 헤매게 했을까.”
“…….”
“결국 결단을 바란 것 아니겠습니까?”
“결단?”
아이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만들고 싶었다면, 아이를 데리고 눈앞에 나타나면 될 일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검마에게 아이의 존재에 대해서 알릴 필요도 없었으리라.
하지만 섭소정은 굳이 복잡하고 어려운 길을 제시했다.
“자신은 백화궁의 사람으로서 소속을 버렸으니, 검마님께서도 본인이 짊어진 업을 버릴 수 있는지 물어본 것이라 생각합니다.”
“…….”
“앞으로도 계속 검마로 살아가고 싶다면 자신들 앞에 나타나지 말라는, 그런 말 아니겠습니까?”
검마는 마치 깨달음이라도 얻은 듯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그 말이 맞는 것 같구나.”
“아직도 검마라는 이름에 미련이 있으십니까?”
“…….”
검마는 자기 손을 바라보았다.
잠시간 흐르는 침묵.
이윽고 고개를 저었다.
더없이 홀가분한 얼굴에 미련 한 줌 남지 않은 표정.
난 검마가 이처럼 순수한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것에 꽤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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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습니까? 잘 맞는 것 같습니까?”
옷매무새를 가다듬던 검마는 어색한지 몇 번이나 어깨를 흔들어 보였다.
“좀 화려한 것 같구나.”
검마가 지금 입고 있는 옷은 내가 시비장에게 개인적으로 부탁하여 지은 옷이었다.
흰색과 청색을 적절하게 섞은 평범한 장포였지만, 평생 옷가지에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검마에겐 이것도 꽤 화려하게 느껴지나 보다.
“이 정도를 입어야 사람들 눈에 띄지 않습니다.”
“그냥 달려가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은데.”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야 그럴 수 있겠지만, 사람들 많은 곳을 지날 때면 눈에 띄지 않겠습니까.”
“그런가…….”
검마는 이제 완전히 꼽추 노인 행세를 그만뒀다.
역골공과 변용술을 모두 풀어낸 그는, 그저 평범한 중년의 남성으로 보일 뿐이었다.
“이건 왕가장에서 운영하는 마방에서 쓸 수 있는 마패입니다. 그리고 이건 하오문의 흑패인데, 도움이 필요할 때 허리에 달고 있으면 하오문에서 사람이 찾아올 겁니다.”
“……나는 어린애가 아니다. 어련히 알아서 찾아갈 수…….”
“아이고, 말을 마십시오. 애당초 섭 선배가 숨겨둔 책을 찾겠다고 첫 번째 서고부터 뒤진 분을 제가 믿겠습니까?”
“…….”
마패와 흑패를 챙긴 검마는 멀뚱히 나를 바라봤다.
“왜 이리 잘해주는 것이냐?”
검마의 앞으로 행보가 어떨지 모르겠으나, 정마대전이 벌어진다면 이 사람은 다시금 강호에 나올 것이다.
그때를 위해서 이 정도의 투자쯤이야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지.
“그래도 제 무공사부 아니십니까. 이런 건 제자가 챙겨야죠.”
“흥……! 그따위 실력으로 제자는 무슨……. 어디 가서 내게 한 자락 배웠다는 말은 하지 마라. 내 가만두지 않을 테니.”
“네, 네.”
나는 전낭 하나를 건넸다.
“안에 들어있는 금자는 어지간하면 꺼내지 마시고, 항시 돈을 쓸 때는 은자와 동전만…….”
“내가 무슨 반푼인 줄 아느냐?”
버럭 소리를 지른 검마는 전낭 내부를 한번 확인하곤 품 안에 쏙 집어넣었다.
“내가 떠나면 이곳에 남은 내 흔적은 모두 지우도록 해라.”
“안 그래도 그럴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것도 같이 가져다 버리도록 하고.”
검마는 평상 위에 놓여있던 책자 하나와 목갑 하나를 내게 건넸다.
“논문을 아직도 읽고 계셨습니…….”
책을 읽던 나는 눈 안에 들어오는 글자들에 동작을 우뚝 멈추었다.
세 가지 검식을 설명하기 위해 나열된 수백 개에 달하는 글자들.
거기에 더불어 평생 맞붙었던 비무 상대들의 약점과 비무에서 깨달은 것들까지.
그야말로 검마의 모든 총체가 한 권의 책자 안에 모두 들어가 있는 것이었다.
“이건 백월제천삼식이 아닙니까?”
검마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목갑을 향해 고갯짓을 할 뿐이었다.
나는 재빨리 목갑을 열어 보았다.
뽕하는 소리와 함께 피어오르는 숲속의 청아한 향.
지난날 먹었던 소림의 소환단 못지않은 비범한 기운을 가진 단환이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선물에 그를 바라봤다.
“……지금 나보단 네게 더 필요한 것들 아니더냐. 어디 네가 원하는 대로 천하제일인이 되어 보거라.”
언제 적 이야기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단 말인가. 감동이 벅차올라 눈물이 나려는 순간.
“아 참, 맘대로 전수했다간 나한테 죽을 줄 알아라.”
눈물이 쏙 들어갔다.
참으로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지는 인간이다.
“어쨌든 제자 절 받으십시오.”
정식 제자는 될 수 없지만, 그래도 진전을 잇지 않았는가.
구배는 못하더라도 삼배는 해야 인간의 도리라 할 수 있겠지.
우뚝.
한데, 절을 하려는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마치 무형의 기에 몸이 제압당한 듯 꼼짝하지 않는다.
어리둥절해하며 검마를 바라보자, 그가 쌀쌀맞게 말했다.
“난 네놈과 사승관계를 맺을 생각이 없으니, 절도 필요 없다.”
“……그럼, 사람들이 이 무공을 어디서 익혔냐 물어보면요?”
“뺏었다고 하든가.”
“……미친.”
검마한테 무공을 뺏어? 천하의 과연 누가 그 말을 믿어줄까.
“검마한테요?”
“……이 새끼가 언제까지 검마, 검마 거릴 거냐? 내 그 이름을 버린 지 오래이건만.”
이름을 버리겠다 한 지 겨우 이틀 되셨습니다만.
“……그럼 이름을 알려주시든지요.”
“백해광. 그게 내 이름이다.”
아마도 백해광은 나에게 자신의 업을 잇지 않게 하려는 생각에서 저리 말을 한 것이리라.
참으로 말하는 입은 못났지만, 마음은 고운 사람이다.
“섭 선배를 만난 이후엔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거기까진 생각해 보지 않았다.”
“설마 화전을 계속 일구며 사실 생각이십니까?”
“그건 아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애당초 백해광이나 섭소정이나 평범하게 살래야 살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럼 이참에 문파를 하나 세워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문파?”
“두 분 다, 본래 사문이나 가문으론 돌아갈 수 없지 않습니까. 더구나 한 분은 백도 출신에 한 분은 악명이 높은 흑도인인데. 받아줄 곳도 만무하고요.”
“……문파라.”
“작더라도 강성한 문파를 만들면, 섭 선배와 따님이 기거하기 편한 곳이 될 수 있을 겁니다. 평생 숨거나 도망만 다니며 살 순 없는 노릇 아닙니까.”
검마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난 가진 것이 없다. 문파를 세우는 게 쉬운 일도 아니고 나를 따르는 이가 있는 것도 아닌데…….”
“제가 마침 훌륭한 후원자를 알고 있습니다. 한동안 그의 문파에서 식객 생활을 하시면서 문파 창건의 초석을 준비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후원자?”
“근본 없는 흑도방파를 세우실 게 아니지 않습니까.”
검마라면 지금 아무 흑도 방파나 들어가도 힘으로 제압한 후 방주가 될 수 있을 터.
하지만 그가 바라는 것은 흑도인의 삶이 아닌, 섭소정과 딸을 지킬 수 있는 보호막.
힘들어도 처음부터 하나하나 스스로 쌓아 올려야 했다.
“……그런데 그 훌륭한 이가 나를 후원해 주겠느냐?”
“그가 속한 문파의 문주님 인심이 워낙 넉넉하여 마을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하고, 그런 분께 영향을 받은 제자이니 그분 또한 사람을 사귀는 데 가림이 없다고 합니다. 그분이라면 분명 후원자가 돼줄 겁니다.”
“그런 자가 있었다고……? 대체 누굴 이야기하는 거냐?”
누구긴 누구야.
“태을문의 진소운이죠. 누구겠습니까.”
“…….”
좋아, 걸려들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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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흐흐.”
아버지에게 전서를 쓰면서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백해광은 모든 결정은 섭소정을 만난 후에 하겠다 했다.
그때를 대비해서 미리 아버지에게 언질을 주려는 참이다.
백월제천삼식과 영약을 얻은 것도 대단하지만, 제일 좋은 점을 꼽자면 검마가 태을문의 식객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
그것도 섭소정과 딸을 데리고 말이다.
천하의 악명을 쌓아온 검마가 어디 기댈 데가 있겠는가?
더구나 문파 창설이 하루 이틀 만에 되는 것도 아니고, 향후 몇 년은 걸릴 일인데.
결국 갈 곳 없는 검마는 태을문에 기거하면서 꽤 오랜 세월을 보내게 될 터.
“후후후, 태을문을 건들면 다 새되는 거예요~. 왜냐면 우린 검마가 식객이거든요~.”
그렇게 전서를 쓰고 있을 때, 인기척과 함께 귀에 익은 목소리들이 들려온다.
“왜 대사형 기분이 좋아 보이지?”
“뭔가 음흉한 생각을 하는 모양인데, 남 골려 먹을 때 많이 짓는 표정이거든.”
나는 녀석들에게 일갈했다.
“대사형한테 못 하는 말이 없구나.”
들어서는 금은동 형제와 사련을 본 나는 말문이 막혔다.
“……너희 대체 뭐 하고 다니는 거냐?”
금·은·동 얘들이야 워낙 털털한 사내놈들이니 그렇다 쳐도, 사련이까지 거지가 형님 할 몰골이었다.
그때 다른 사형제들과 눈빛으로 대화를 나눈 금표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대사형.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봐라.”
“한판 붙죠!!”
호오, 네놈들이 드디어 하극상을 저지르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