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검은 가면을 쓴 자들
“옛 생각이 나는군요.”
혁무강의 말에 제갈소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벌써 사십 년이 흘렀다는 것이 믿기지 않습니다.”
무림학관의 첫 번째 휴식기가 시작될 때면, 두 사람은 호위들을 무르고 무림학관을 산책한다.
첫 번째 휴식기인 만큼 학관 내에 기거하는 이가 적기 때문.
하루의 휴식도 정치적 행보로 보여지는 삶을 수십 년쯤 살다 보면, 사람이 싫어진다.
이런 비슷한 감정을 공유한 두 사람이, 순수했던 옛 시절을 떠올 릴 수 있는 무림학관을 찾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기숙사 건물이 바뀌었군요.”
혁무강의 말에 제갈소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구 건물은 워낙 열악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다니던 시절엔 갑(甲)반 학생도 네 명이 한 방을 같이 공유했었죠.”
“총군사께선 매우 답답하셨겠군요.”
“그래도 학관 동기들과 재미난 일들이 많았습니다. 밤에 몰래 나가 악양까지 달리곤 했었죠. 지금 화산의 장문인을 하는 놈이 그땐 그렇게나 기루를 좋아했었습니다.”
슬며시 입가에 미소까지 지으며 제갈소명이 이야기를 풀어내자, 혁무강도 입을 열었다.
“참으로 부럽군요. 제겐 그런 추억이 없습니다.”
“맹주께선 그때도 친구가 없으셨습니까?”
“응?”
제갈소명의 말에 혁무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 제가 말실수를 했군요. 그때도 수련에 매진하셨냐는 말을 한다는 게 그만……. 하하하.”
제갈소명이 애써 수습했지만, 혁무강의 눈초리는 이미 가늘어진 상태.
“그게 아니라 전, 수석과 대표를 놓쳐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단체 생활을 해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총군사께선 아시겠지만, 대표 기숙사가 조금 외지지 않습니까. ……아차! 총군사께선 학관 대표를 해본 적이 없으시죠?”
“…….”
이번엔 반대로 제갈소명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전 당시 남궁세가의 신검 놈이 대표가 되는 것을 도우려고 일부러…….”
“혹 친구 관계가 아니라 주종 관계셨습니까?”
“크흠! 대국적 결단이었습니다!”
“지금은 두 분께서 친구 관계가 맞으시죠?”
끝까지 놀려 먹는 혁무강의 말에 제갈소명이 한숨을 길게 내뺐다.
“그만하지요. 그런 규정들이 이제 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혹…… 아직도 신검님의 말에 따라야 하는, 그런 관계이신 겁니까?”
“이 사람이, 진짜!”
“하하하하.”
혁무강이 먼저 웃음을 터트리자, 정색하던 제갈소명도 이어 웃음 지었다.
“참으로 조용하니 좋군요.”
“다들 사문에서 거하게 즐기고 있을 테니 말이죠.”
“응?”
주변을 돌아보던 혁무강이 걸음을 멈췄다.
“왜 그러십니까?”
“대표 전각에 누군가 남아 있는 모양입니다.”
혁무강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제갈소명이 안력을 돋우었다.
“진소운과 태을문의 아이들이군요.”
“이번에 돌아가지 않은 걸까요?”
“그러게 말입니다. 아마 태을문 내에서도 한참이나 기다리고 있었을 텐데……. 근데 비무를 하는 것 같습니다.”
“비무요?”
시선을 마주친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대표 전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두 사람 다 싸움 구경은 놓칠 수 없는 무림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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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롭게 외친 것치고는 꽤나 치사하구나, 사 대 일이라니.”
진소운의 말에 검진의 중심에 선 은호는 침을 꿀꺽 삼켰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여유만만이다.
쉽게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거겠지.
‘하지만 이번엔 만만치 않을걸.’
은호는 자신이 있었다.
무림학관 정시를 통해 쌓은 경험과 학관 내의 검진 사부들에게 배운 새로운 지식.
게다가 남궁선화와 성모란으로부터 얻은 두 문파의 검진 요체까지.
이를 모두 흡수한 은호는, 태을진경을 기반으로 백호검진을 한 단계 발전시켰다.
대사형과의 일전에 앞서 남궁선화와 성모란 두 사람에게 새로 만든 검진을 시험해 봤고, 남궁선화는 무려 제왕검법까지 꺼내 들었지만 결국 백호필살검진을 무력화 하는 데 실패했다.
“이번엔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그간 수련이 게을렀다면, 남은 기간 동안 집중 훈련을 받게 될 줄 알거라.”
“……그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동정호에 놀러 가자면서요.”
“놀러 가는 게 아니다. 일하러 갔다 잠시 구경하고 오는 것이지.”
“어쨌든요!”
분명 휴식 기간 동안 악양에 데려가 준다고 해놓고, 갑자기 이런 조건이라니.
너무 가혹하지 않나.
“역시 대사형 성질머리는 천하제일…….”
“뭐야?!”
“아닙니다.”
“그러니 구경 가고 싶다면 죽을 각오로 덤벼라.”
“!”
흑룡검을 뽑아 든 소운의 모습에, 네 사람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준비됐어요?”
관전자로 자리한 남궁선화의 물음에 태을문 사람들 모두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시작!”
남궁선화의 신호가 떨어지기 무섭게, 소운이 섬전처럼 튀어나가 검을 찔러넣었다.
챙.
검진 안에서 가장 앞선 동룡이 간신히 소운의 검을 막아섰지만, 몇 걸음이나 물러난 탓에 검진이 발동하지 못했다.
검진이 발동하기 전에 부수겠다는 소운의 의도에 가로막힌 것.
“대사형, 저희도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여기까지 온 게 아닙니다! 홍탄(洪彈)!”
은호의 외침과 함께 검진이 화살촉 모양으로 변했다.
동룡이 소운을 상대하는 동안 사련이 튀어 나가며 소운의 급소를 매섭게 노렸다.
쐐액.
빠른 속도의 소천검법이 요혈을 노리며 들이치자, 소운이 몸을 두 번 돌리며 뒤로 물러났다.
“동강(銅姜)!”
검진이 부챗살 모양으로 펴지며 동룡의 양옆으로 사련과 금표가 서고, 세 사람이 일제히 진소운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채채채채채챙.
눈 깜짝할 사이 십여 합이 오가고, 소운이 다시금 두 걸음이나 물러섰다.
“공격이 꽤나 매섭구나. 어디 방어도 괜찮은지 볼까?”
소운의 흑룡검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하며 쌍천검결을 흩뿌렸다. 사방에 진검과 환검이 마구 흩날리며 네 사람을 옥죄기 시작했다.
“금은갑(金銀甲)!”
은호의 외침과 함께 동룡과 사련이 뒤로 물러나고, 금표와 은호가 앞으로 나서며 쌍천검결을 마주했다.
진소운의 쌍천검결과 두 사람의 쌍천검결.
서로 다른 점이라면, 진소운은 쌍천검결을 넓게 폈다면, 두 사람은 쌍천검결을 좁게 펼쳐 마치 검막과 같은 효과를 냈다는 것.
채채채채채채챙.
자신이 펼친 쌍천검결 수십 개가 일거에 해소되자, 소운도 놀람을 감출 수 없었다.
“너희 본래 이렇게 손발이 잘 맞았더냐?”
“지금은 비무 중입니다. 대사형!”
“그렇긴 한데, 생각 이상으로 손발이 잘 맞는 거 같다?”
소운의 말에 은호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자신들이 죽어라 수련하며 알아낸 태을진경의 비밀.
바로, 대사형에게 덤벼볼 수 있겠다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었던 것.
‘알려드려야겠지만, 지금 이 비무에서는 아닙니다.’
지금은 어디까지나 비무 상대.
지금 이 순간은, 철저히 실력만 비교해 보는 자리다.
“은환(銀幻)!”
은호가 앞으로 나서며 외치자, 세 사람이 은호 뒤로 물러서며 일제히 검을 회수했다.
소운이 아직 검진의 정체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사이, 은호가 대천검법을 전력으로 펼치며 소운의 시야를 가렸다.
“재미있긴 하다만, 악양에 놀러 갈 정도는 아닌 것 같다.”
소운의 도발에 은호가 이를 악물었다.
“이제 시작입니다, 대사형.”
태을팔만신보를 걷는 진소운이 대천검법 사이로 숨겨진 소천검법들을 피하며 은호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챙, 챙, 채챙.
여유 있게 검들을 치워내며 검진 안으로 들어가던 소운이 갑자기 걸음을 우뚝 멈췄다.
샥-
작은 절삭음과 함께 진소운의 소매가 잘려나갔다.
“어라?”
분명 환검 사이에 있던 진검들은 모두 치웠다고 생각했으나, 그중 놓친 것이 있었던 것.
소운이 잠시 놀란 사이, 은호의 외침이 비무장을 크게 울렸다.
“성환(星幻)!”
은호가 피워낸 환검들 옆으로, 세 사람이 동시에 환검을 피워내었다.
수십…… 아니 수백에 달하는 환검들이 소운은 물론이고 그 일대를 가득 덮었다.
제아무리 환검이라 한들, 보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이 들 정도.
채채채채채채챙.
눈 깜짝할 사이에 수십번의 검을 휘두르는 소운.
하지만 그의 옷가지가 조금씩 찢겨나가기 시작했다.
“이런…….”
드디어 소운의 입에서도 당혹감 어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제 시작입니다, 대사형!”
은호와 사형제들이 득의양양하며 더욱 기세를 올렸다.
눈앞에 악양의 화려한 불빛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별수 없구나.”
나지막이 울려퍼진 말과 함께, 소운의 검에서 네 자루의 만검이 생겨났다.
“그걸론 안 될 겁니다!”
은호의 자신만만한 말투.
소운은 그런 은호를 보며 슬쩍 미소지었다.
“보면 알겠지.”
그 순간, 만검에 검기가 어렸다.
“어라?”
“무슨!”
“!”
은호는 물론이고 다른 사형제들도 놀람을 금치 못했다.
분명 만검에는 검기를 쓸 수 없을 터인데.
“나라고 놀고만 있었을 거라 생각한 거냐?”
검기가 어린 만검이 휘둘러지기 시작하면서, 쌍천검결이 피워낸 환검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마치 천적을 만나 쫓기는 날벌레들처럼 순식간에 사라진 환검.
은호를 비롯한 세 사람은 두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이런 치사한…….”
“죽고 나서도 치사하다고 말할 참이더냐?”
“아직 끝난 건 아닙니다!”
은호가 세 사람과 시선을 맞춘 후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외쳤다.
“만환(萬幻)!”
네 사람의 검에서 만검이 한 자루씩 피어난다.
진소운은 그런 사제들의 모습에 이상함을 느끼곤 이맛살을 찌푸렸다.
지이이이잉--
검진에서 뿜어져 나오는 요상한 진동음.
더불어, 여태껏 손발을 맞추는 수준으로 보였던 네 사람이 이제는 마치 한 사람이라도 된 듯 움직인다.
불온한 기운이 진소운의 신형 전체를 감싸고, 미증유의 압력이 몸을 옥죄어 오기 시작했다.
“대체…….”
뭔가 말을 꺼내 보려는 찰나, 사제들이 피워낸 만검 옆으로 한 자루씩의 만검이 또 생겨난다.
“응?!”
네 사람이 피워낸 총 여덟 자루의 만검. 그 만검들이 동시에 움직이며 허공에 쌍천검결을 수놓기 시작했다.
그 반경이 얼마나 컸던지, 대표 숙소에 위치한 작은 비무장 전체를 휘감았다.
파파파파파파팍!
퍼퍼퍼퍼퍽!
만검들이 춤을 추고 간 곳에선, 대리석이 파이고 나무들이 잘려나갔다.
그야말로 거대한 검의 연무.
닿는 즉시 갈려 나갈 것 같은 위험한 안개가, 네 사람을 보호한 채로 진소운에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허!”
검의 연무에 당하기 직전인 소운은, 두렵다기보단 당황스러움이 더 컸다.
분명 자신이 알고 있는 만해천지검결이고 백호검진이건만, 이런 기이한 형태의 공격이 다 있단 말인가?
‘그렇다고 대사형 체면에 물러 서 줄 수도 없는 노릇이지.’
사제들이 더욱 강해지는 것은 대견해할 만한 일이나, 아직은 녀석들이 뛰어넘어야 하는 벽으로 남고 싶다.
“어디 이것도 받아 보거라!”
검마가 자행하는 수백 번의 욕설을 감내하며 만들어 낸 태을문만의 검강.
소운의 흑룡검이 두 자루의 만검을 만들어 내었다.
이윽고 만검의 끝에서 검강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검마마저도 ‘꽤 쓸만하다.’ 평가해주 었던 만강(萬姜).
“으아아아악!”
검의 연무 속에서 악에 받친 외침이 피어난다.
소운은 그마저도 즐겁다는 듯 지체 없이 검의 연무 속에 몸을 던졌다.
퍼퍼퍼퍼퍼퍼펑.
연속된 폭발음과 함께 검의 연무와 만강이 격돌했다.
이윽고,
쾅! 쾅! 콰콰콰……쾅!
강한 충격음과 함께 애먼 비무장의 대리석과 나무들이 사방으로 밀려나갔다.
“헉, 헉, 헉.”
“하아, 하아.”
은호를 비롯한 세 사람은 바닥에 널브러져 숨을 헐떡인다.
“제법이구나.”
반면 여유 있게 검을 집어넣는 진소운.
네 사람을 그를 보며 아쉬움을 숨기지 못했다.
“마지막에 그건 무엇이었느냐?”
분명 내공의 양으로 보나, 만해천지검결의 성취로 보나, 아이들이 피워낼 수 있는 만검은 한 자루가 한계였다.
하지만 검진을 이루는 마지막 아이들은 각각 두 자루씩의 만검을 만들어 냈다.
“저희는 그냥 동조(同調)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동조?”
“네, 저희끼리 검진을 맞추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힘을 덜 들이고 기를 더 많이 쓸 수 있더라고요.”
흡사 소림사의 백팔나한진이나 무당의 음양태극진이 발하는 동기(同氣) 현상과 비슷한 효과를 말하고 있었다.
“하핫! 대단하구나.”
“네, 그 대단한 걸 가지고 결국 졌네요.”
“그래도 충분했다.”
“악양 갈 정도는 됩니까?”
은호의 말에 소운이 피식 웃었다.
“그래, 충분하다.”
소운의 말과 함께 지쳐 쓰러져 있던 사제들이 벌떡 일어나며 환호했다.
“대사형, 근데 치사하게 검강은 언제 익히신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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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무림 학관을 산책하다 아이들의 비무를 구경하게 된 두 사내는, 비무가 다 끝난 이후에도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셨습니까?”
제갈소명 물음에 혁무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을문엔 진소운만 있는 게 아니군요.”
“그렇지요?”
“태을문이 제 생각보다 더 높게 날아오르겠습니다.”
“날 뿐이겠습니까? 천하를 울릴 것 같습니다.”
“총군사께선 이 상황이 꽤나 마음에 드시나 보군요.”
혁무강의 말에 제갈소명이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어떤 아이가 마음에 드십니까?”
“전 동룡이라는 아이가 탐나는군요. 믿을 수 없게도 천살성을 극복한 아이인 것 같습니다.”
“이번엔 겹치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전 은호라는 아이가 마음에 듭니다.”
“호오…… 만통부에서 쓸만 한 인재입니까?”
“진소운만큼 하는지는 좀 알아봐야겠습니다만, 진을 운용하는 솜씨를 보건대 만통부에 충분히 적응할 것 같습니다.”
“그 정도입니까?”
“순간적으로 상대에 맞춰 검진을 바꾸는 것 보셨습니까? 저건 머리가 안 되면 불가능한 겁니다.”
제갈소명의 들뜬 모습에 혁무강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큼 태을문 아이들의 비무는 인상적이었다.
“그나저나 진소운 저 아이는 그 짧은 시간에 언제 저렇게 성장한 걸까요.”
“그러게 말입니다. 전 저놈이 검강을 뽑았을 때 기절하는 줄 알았습니다.”
“진짜 그 잠재력이 얼마일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 아이군요. 기대가 됩니다.”
비록 원하던 조용한 산책은 끝마치지 못했지만, 두 사람의 얼굴은 그야말로 만족스럽기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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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호!”
“휴가다!”
이번 휴식 기간에 목적지로 삼은 곳은 동정호가 있는 호남성의 악양.
“놀러 가는 거 아닙니다.”
“네네, 그렇겠지요. 그래도 꼭 일만 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은설란과 모용재화도 나를 따라오고 싶어 했지만, 두 사람은 각각 보충학습과 개인 수련으로 인해 결국 학관에 남아 있어야 했다.
“근데 이 화려한 악양에서 할 일이라는 게 뭐예요?”
이미 악양의 화려한 거리에 스며든 듯 고급스런 비단옷과 장신구를 착용한 성모란이 물었다.
“꼬셔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네?”
“……네?”
성모란과 남궁선화의 고개가 목각 인형처럼 끼기긱 거리며 돌아간다.
내가 그렇게 이상한 말을 했나?
“꼬, 꼬신다고요?”
“…….”
“꼬신다는 말이 좀 이상하긴 하겠군요. 정확하게 이야기한다면 모신다는 말이 맞겠네요.”
최근 제갈천기가 보내온 전서에는, 기관진식을 완성하기 위한 부품들의 조달이 점점 힘들어진다는 투정이 담겨있었다.
합비 인근에도 좋은 대장장이들은 많지만, 장인이라 부를 수 있는 이들은 없었으니까.
복잡하고 섬세한 방식으로 구동되는 기관진식을 떠받치는 부품은, 어지간한 기술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전생에서 제갈천기도 끝내 기관진식을 완성해 보지 못한 것이겠지.
그래서 설득해 봐야겠다 생각한 이는, 다름 아닌 전에 인연이 있었던 장도원.
내가 알고 있는 최고의 장인이었다.
“아마 모시기 꽤 힘든 분일 거라 생각됩니다. 학관 이수가 끝나기 전에 설득이 된다면 다행이겠지요.”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진 공자가 그 정도로 정성을 들인다는 거죠?”
“아마 겉보기엔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어쩌면, 그 괄괄한 성격에 되려 눈살을 찌푸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가장 빛나는 보석은 광산 가장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법이 아니던가.
제갈천기가 만드는 기관진식은 물론이고, 전생에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나눠 가진 십오(十五)신기가 모두 태을문에 모여있다니.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웅장해진다.
“형, 이거 내 거라고 했잖아.”
“네 것도 내 거, 내 것도 내 거.”
“…….”
그나저나 기껏 성모란 소저가 고오급 식당에 데려왔건만, 이 삼형제는 거지처럼 밥을 먹고 있는 걸까나?
“천천히 먹어라. 누가 안 뺏어간다.”
내 말에 금표가 기름기가 번들거리는 입가를 대충 쓱 닦았다.
“저희도 아는데, 왠지 맛있는 것만 먹으면 습격을 받거나 방해받을 거 같은 불안감이 들어서 말입니다.”
아니 태을문에서도 항시 밥을 챙겨주고, 내가 데리고 다니면서도 끼니를 놓치게 했던 적이 없는데.
왜 이리 걸신이 들린 걸까.
참으로 알 수가 없……지 않구나, 크흠.
“……그나저나 점창 소속으로 보이는 무사들이 꽤 많네요.”
성모란의 말대로 식당 자리마다 하나 건너 하나, 점창 소속임을 나타내는 무복 차림의 남녀가 앉아 있었다.
“악양은 점창의 입김이 강하게 닿는 곳입니다.”
“호남성엔 형산파를 비롯한 강한 문파들이 즐비한데요?”
“그렇긴 합니다만. 악양엔 점창파의 속가문파인 유월문과, 점창파와 긴밀한 관계를 맺어온 창성파가 있기 때문이죠.”
유월문과 창성파 두 곳 다 백팔봉 중 오십 위 안에 드는 문파다.
그 두 문파 덕분에 점창파는 호남성 제일 관광지라 할 수 있는 악양을 손안에 꽉 틀어쥘 수 있었다.
“헤에, 진 공자는 별걸 다 아네요.”
그나저나 점창파의 무복과 비교해도 그렇고, 화려한 성모란과 남궁선화 옆에 있으니 삼형제의 검은색 무복이 참으로 초라해 보인다.
나야 본래 검정색을 좋아해서 이렇게 입는 데다, 처소의 시비장이 신경을 써준 덕분에 수가 놓인 고급스러운 무복을 입고 다니는 반면, 녀석들의 차림새는 조금 불쌍해 보인다.
최소한 문파를 상징할 수 있는 무복이라도 있다면 괜찮을 텐데.
기운 옷을 벗어 던진 지도 얼마 안 된 태을문이, 문파의 상징을 박힌 무복을 준비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
괜히 미안한 마음에, 장도원을 만나기 전에 녀석들 옷부터 좀 맞춰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드는 찰나.
“어디서 온 거지새끼들이지?”
분명 소란스런 식당 내부였건만, 욕하는 소린 확실하게 들렸다.
우릴 향한 게 아니지 않을까, 혹시나 하는 생각에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고오급 식당답게 다들 형형색색의 비단옷과 금장식을 한 손님들뿐이었다.
역시 거지새끼로 오해받을 만한 사람은 우리뿐이군.
금은동 형제는 물론이고, 성모란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었다.
남궁선화는 기다릴 것도 없다는 듯, 머리의 비녀를 뽑아 칼처럼 들고는 살기를 풀풀 풍기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성큼성큼 움직였다.
“누구죠? 누가 우리 귀여운 동생들 더러 ‘거지 소리’를 낸 거죠?”
“…….”
뭐지? 분명 남궁선화는 우릴 두둔해 주기 위해 저런 말을 한 것 같은데…….
왜 상처가 되는 거지?
어쨌든 ‘거지 소리’를 낸 상대방은 남궁선화 손에 곤죽이 되지는 않았다.
그가 한 소리에 남궁선화의 몸이 우뚝 멈춰버렸기 때문.
“아니?! 남궁선화 소저 아닌가?”
“…….”
짐짓 반가운 친구를 만난 듯 높아진 목소리.
화려한 이들 사이에 둘러싸인 사내는 웃으며 인사를 하다 눈동자를 돌려 이편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했더니…… 네놈들이었나?”
사내의 음성엔 진득한 경멸이 담겨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