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검은 가면을 쓴 자들(2)>
“선배를 봤으면 인사부터 해야지. 뭐 하는 것이냐!”
원치도 않는 인사를 바라는 건 상대를 대놓고 깔보겠다는 의도.
“…….”
그나저나 모용강 어르신이 교육을 좀 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매가 별로 아프지 않았나 보다.
아니면 그가 내 예상보다 맷집이 좋거나.
“우리가 인사를 나눌 사이였습니까? 차라리 검을 나누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도발을 해봤지만, 그는 예전처럼 발딱 반응하지 않았다.
“이래서 근본 없는 것들이란…… 쯔쯧.”
비운신풍 종벽기.
용봉지회 활동을 하고 있어야 할 그는 홀로 호남성에 있었다.
“남궁 소저, 사람에겐 ‘급’이라는 게 있는 겁니다. 남궁 소저가 이런 녀석들과 어울리다 보면, 세간의 사람들이 소저를 얼마나 우습게 보겠습니까.”
“급……이라고요?”
남궁선화는 경멸하듯 그를 보다가 비녀로 다시금 머리를 묶었다.
최소한의 대응할 가치도 없다는 뜻.
그녀가 돌아서서 자리에 앉았으나, 종벽기는 이대로 대화를 끝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니, 그와 함께한 이들이 되려 남궁선화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남궁선화라면, 신검님의 친손녀 되지 않습니까.”
“이거 만나뵈어 반갑습니다.”
“전 호남성에서 상단을 운영하는…….”
화려한 장신구로 치장한 사내들이 앞다투어 차례차례 자기소개를 했지만, 남궁선화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금·은·동 형제들의 식사를 챙겼다.
보다 못한 종벽기가 나섰다.
“남궁 소저, 제가 이분들 소개하는 것이 늦었습니다. 이분들은…….”
고관대작의 자제들이거나, 거대 상단의 자제들. 동정호에 수백 대의 배를 가진 선주의 자식들도 함께였다.
그야말로 악양 내에서 방귀깨나 뀐다는 이들.
소개를 받는 사람들은 자신이 호명될 때마다 가슴을 한 번씩 펴보았지만, 남궁선화는 여전히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그렇군요.”
“그렇습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좋은 인연이니 자리를 옮겨 함께 이야기를 좀 나누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종벽기의 말에 남궁선화가 사내들을 주욱 쓸어보았다.
“함께 어울리기엔…… 남궁세가의 수준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네요.”
“…….”
“……!”
남궁선화의 말에 종벽기와 사내들의 얼굴이 똥 씹은 표정으로 변했다.
성모란은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콱 깨물었고, 금·은·동 형제는 어쩐지 반짝이는 눈빛으로 남궁선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명백히 모욕당했음에도 사내 중 누구 하나 화를 내거나 자리를 박차고 나서진 않았다.
그녀의 말마따나, 남궁선화는 그들이 쉬이 범접할 수 없는 존재였으니까.
종벽기 또한 그런 눈치들을 읽고는 얼른 나섰다.
“아, 소저! 아까 말이 조금 심했던 점은 사과드리겠습니다.”
“그걸 왜 저한테 사과하시는 거죠? 모욕을 받은 건 태을문의 제자분들이 아닌가요?”
“아…….”
“그만 돌아가 주세요. 식사에 방해되니까요.”
남궁선화의 축객령에 종벽기가 결국 물러서려는 찰나.
“사과는 받은 걸로 하겠습니다. 그런 의미로 이 식사를 종 선배가 사시는 게 어떻습니까?”
내 말에 남궁선화가 도끼눈을 뜨고 나를 바라본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가. 간만에 만난 종벽기를 그냥 보내줄 수야 없지.
자고로 사람을 함부로 무는 개는 매로써 다스려야 한다.
이참에 모용강 어르신께 덜 받은 듯한 교육도 좀 해야 하지 않겠어?
“…….”
종벽기는 나와 자신의 뒤에 선 사내들의 얼굴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리고 화해를 한 기념으로 합석도 하시지요.”
“그, 그럴까?”
현생에 와서 제일 어이없는 순간이, 저놈들의 이런 등신 같은 면을 볼 때이다.
내가 어쩌자고 전생엔 저놈들을 그리 무서워했을까? 자괴감이 들고 후회가 된다.
종벽기와 일행들은 희희낙락하며 빈자리를 차지하고 앉았지만, 남궁선화는 그들에게 눈빛도 주지 않고 있었다.
성모란에 관심을 갖는 이도 있었지만, 성모란도 이미 그들에겐 정이 떨어진 상황이었고.
어색한 분위기가 자리를 지배하고 금·은·동 형제의 젓가락 소리만이 가득할 때, 내가 입을 열었다.
“근데 용봉지회는 어쩌시고, 이곳까지 오신 겁니까?”
“……그건 네놈이…….”
뭔가 막말을 내뱉으려 한 게 분명했던 종벽기는 잠시 남궁선화의 눈치를 보다가 말을 이었다.
“본산에서 쓸 장인을 구하러 왔다.”
“점창이라면 이미 훌륭한 장인들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점창이 장인 한둘로 처리가 되는 곳이라 생각했더냐. 남궁세가도 그렇지 않습니까?”
“…….”
남궁선화는 종벽기의 말을 무시했다.
사태가 점점 이렇게 흘러가자 종벽기의 화는 곧장 나에게로 향하기 시작했다.
“네놈이 운 좋게 학관에 들어갔다는 말은 들었다. 하지만 그 알량한 신분을 유지하려면 이런 곳에서 노닥거릴 시간 따윈 없지 않으냐?”
“못 들으셨습니까? 제가 이번 시험에서 필기와 실기 모두 만점 받았단 소식을?”
“……네가?”
여태껏 나에겐 일절 관심이 없던 사내들도 하나둘 믿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나를 본다.
“더불어 저 또한 놀려고 이곳에 온 게 아닙니다. 사문에서 함께할 장인을 모시기 위해 온 것이지요.”
“뭐? ……크흐흐, 하하핫.”
종벽기가 난데없이 웃음을 터트리고, 그의 일행이 영문도 모른 채 엉겁결에 따라 웃었다.
“과연 이곳에 태을문 따위와 함께할 장인이 있겠느냐?”
“태을문이 어때서 말입니까? 그래도 전설의 태을검제님이 세우신 문파 아닙니까.”
“네놈이 아직도 그따위 소릴…….”
종벽기가 버럭 소리 지르려는 찰나, 내가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모용강 어르신의 매가 그리 아프지 않았나 봅니다. 종 선배.”
“…….”
내 말에 종벽기의 얼굴이 똥을 씹은 듯 일그러졌다.
그리고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일행들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을 내뱉었다.
“오오, 파검 어르신과 여행을 함께한 적이 있다더니, 사실이었나 보구려.”
“모용세가는 여타 다른 문파와 교류를 많이 하지 않는다 들었는데, 대단합니다.”
“언제 파검 어르신과 함께 뵐 수 있겠습니까?”
모용강에게 억지로 끌려갔던 것을 마치 친분이 있는 것처럼 포장했던 모양인지, 그의 눈빛은 격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설마 모용강 어르신과 친하다는 이야기를 한 겁니까?”
“…….”
종벽기의 일행이 나를 돌아본다. 나와 대화는 하고 싶지 않은데, 이야기는 듣고 싶어 하는 표정.
“모용강 어르신은 종 선배를 사람 취급도 안 했습니다. 개새끼는 때려서 가르쳐야 한다며, 세가로 데려가 두들겨 패려 했던 거지요.”
종벽기는 수치심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르고, 그의 일행들은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모르는 표정.
“크, 크험, 우, 우리는 이만 가는 것이 어떻겠소.”
종벽기의 일행이 겨우 입을 떼자, 종벽기도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참, 화해의 의미로 식사는 사주신다 했으니, 나가며 계산해 주십시오.”
“…….”
나를 응시하는 종벽기의 눈빛은 흡사 부모의 원수를 보는 듯 맹렬한 분노로 타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끝내 그는 조용히 일어섰다.
“……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거예요?”
채근하듯 타박하는 성모란.
난 그가 나간 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참지 못할 줄 알았는데. 잘 참네요. 인내심이 늘어난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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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지에 가기 전에 포목점에 먼저 들렀다.
비싼 밥값이 굳은 김에 금·은·동 형제에게 새 옷을 맞춰주고 싶었다.
화려한 포목점 내부엔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비단들이 즐비했다.
“여기 대사형과 똑같은 질감으로 된 옷을 주십시오.”
“저도요.”
“저도.”
금·은·동 세 형제가 주문한 것은, 검은색의 무복 형식 복장.
누굴 닮았는지 취향 한번 검소하다.
“검은 무복은 학관 내에서도 얼마든지 지어 입을 수 있지 않더냐, 이왕 온 김에 연회 때 입을 수 있는 옷을 찾아보거라.”
“음…….”
내 말에 잠시 고민하던 동룡이 주인을 보고 말했다.
“하얀 비단에 가슴엔 금색 수실로 ‘태을’을 새겨주세요.”
“동작 그만!”
검소는 개뿔……!
나는 질겁하는 심정으로 동룡을 부여잡았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따위 옷을 입고 다니려 한단 말인가.
가슴에 ‘태을’을 박아넣는다고?
고혼이 되신 태을검제님도 뒷목을 잡고 쓰러질 정도의 의복 감각이다.
“대사형이 행사 때 하얀 옷을 입지 않습니까? 사제인 저희들도 당연히 그에 맞추어야 하지 않을까요?”
동룡의 말에 금표와 은호 또한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동룡이에겐 내 행사용 의복이 어지간히 인상 깊었나 보다.
이걸 어찌 설득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남궁선화가 말했다.
“동룡아, 그러면 진 공자님의 화려함이 묻히지 않을까? 차라리 푸른색으로 하는 게 어떠니? 아마 하얀 의복과 잘 어울릴 듯한데.”
남궁선화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동룡은 고개를 금세 끄덕였다.
“그렇게 해주세요. 대신 가슴에 ‘태을’ 글자는 아주 크게 새겨주세요.”
“동룡아, 그건 아니야.”
은호가 필사적으로 동룡을 말리고 있었다.
애당초 세 사람이 함께 입고 다닐만한 옷을 맞춰 입기로 했던 것.
“은호 형은 태을문이 부끄러워?”
동룡의 순진무구한 표정 때문에 은호는 사문을 부끄러워하는 파렴치한이 되었다.
“아니……! 왜 그렇게 해석이 되는 건데. 단지 가슴에 이름을 박는 것이 부끄러운 거야!”
결국 은호와 동룡의 첨예한 갈등 끝에, 의복의 소매에 ‘태을’이라는 글자를 화려하게 수놓는 것으로 합의가 되었다.
한바탕의 설전으로 이미 진이 다 빠진 금·은·동 형제와 이제 슬슬 시작이라는 듯 기운을 차리기 시작한 여자들을 이끌고 본래 목적지로 향했다.
홍등가 거리.
금·은·동 형제들은 얼굴을 붉히면서도 속살이 비치는 옷을 입은 처자들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고, 여자들의 표정은 점점 좋지 않게 변해가고 있었다.
이윽고 도착한 홍등가 거리의 끝자락.
장도원이 운영하는 장신구 가게가 보였다.
“…….”
“……여긴가요?”
하지만 장사로 바빠야 할 장신구 가게는 이미 불이 꺼진 상태였다.
나는 가게의 외벽을 따라, 뒤편에 위치한 장도원의 문을 두드렸다.
“계십니까!”
한참이나 반응이 없던 문이 끼이익 열리며 장도원이 나타났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르신.”
“…….”
장도원은 문을 열어놓은 채로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조심스레 문 안으로 들어서자, 정리되지 않은 마당과 불이 꺼진 화로가 눈에 들어왔다.
장도원은 마루에 걸터앉으며 멍한 표정이었다.
“어르신?”
“…….”
“어르신?”
몇 번이나 불러서야 고개를 드는 장도원.
“……무슨 일인가?”
“그건 되려 제가 묻고 싶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마치 귀신이 사는 것처럼 전혀 관리 되지 않은 집.
노년의 나이에도 기운 넘치던 장도원은 폐인처럼 살고 있었다.
“……자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네. 무슨 일로 왔는가?”
본래는 모용재화의 활을 만들 겸 태을문으로 모시는 걸 제의해 보려 했다. 한데 전혀 그런 말을 꺼낼 상황이 아닌 듯 보였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무슨 일……. 무슨 일……. 무슨 일이라…….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말이 엉키는 장도원. 그러다 문득 뒤통수라도 맞은 듯 눈을 부릅떴다.
“……설연.”
“네?”
“설연이가…….”
멍한 표정을 짓던 장도원의 얼굴이 삽시간이 일그러진다. 그러곤 메마른 얼굴 위로 눈물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설연이가 납치됐네. 설연이……! 내 손녀 설연이가 마교에게 납치되었어……. 이를 어쩌면 좋나…….”
마교, 또 마교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