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144화 (144/357)

#144. <검은 가면을 쓴 자들(3)>

장내의 분위기는 서리라도 내린 듯 차갑게 내려앉았다.

이미 무림의 역사 속에서 사라졌지만, ‘마교’라는 이름이 가지는 무게는 들뜬 마음을 내려앉히기에 충분했다.

더구나 여기 있는 사람들은 나와 함께 정시를 치르면서 직접 마교를 목도하기도 했고.

“어쩌지…… 어째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장도원은 예의 날카로운 눈빛은 모두 잃은 채, 마치 정신을 놓은 사람처럼 정신없이 마당을 돌아다녔다.

“어르신…… 어째서 마교가 이런 일을 저지른 거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몇 달 전부터 악양에 그런 소문이 돌았네. 마교가 부활했고, 그들이 천하를 도모하는 중이라고.”

“그럼 실종 사건은…….”

“그 소문과 비슷한 시기에 시작됐네.”

장도원은 문득 뭔갈 깨달은 표정을 하곤 내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자, 자네! 분명 학관에 입학했다지? 내 자네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었어. 혹시 점창파에 아는 이가 있는가?”

“점창파는 어찌 찾으십니까?”

“악양에선 점창이 제일 아닌가. 그들이라면 마교에게 잡혀간 내 손녀를 찾을 수 있지 않겠나.”

“…….”

도와주는 건 상관없지만, 당장 점창파와 내가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말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깊은 고민이 들었다.

“도와주게나. 그럼 내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네.”

장도원은 어린애처럼 눈물과 콧물을 흘리며 울었다.

어째서 장도원의 얼굴을 보고 있건만, 내 모습이 떠오르는 걸까.

고민을 길게 이어갈 필요는 없었다.

“가시죠. 어르신, 도움이 될진 모르겠지만 함께하겠습니다.”

#

성사다원은 악양의 유명한 다루이자, 점창의 지부 역할을 하는 곳이다.

일반인은 애당초 원주를 만나는 것조차 힘든 일이었지만, 무림학관의 학관생임을 밝히자, 곧장 원주가 있는 곳으로 안내되었다.

“흠…… 악양에서 일어나는 실종 사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조사하고 있소. 돌아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결과가 나오는 대로 알려주겠소.”

“마교와 관련되었단 소문이 있다던데…… 사실입니까?”

원주가 미간을 찌푸렸다.

“뭣도 모르는 우민들이 꾸며낸 이야기에 그대들이 흔들리는 것이오?”

전혀 신뢰가 가지 않는 말에 장도원이 애걸했다.

“나으리, 저희 손녀 좀 꼭 구해주십시오. 부모를 여의고 이제 세상에 저밖에 안 남은 아이입니다.”

원주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손사래를 쳤다.

“지금 조사하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사건이 해결되기 위해선 시간이 걸리는 법이니 기다리게.”

난 가만히 이야기를 듣다 말했다.

“혹시 용의선상에 있는 이들이 있습니까?”

원주는 내 몰골을 위아래로 흘겨봤다.

“사건을 조사 중이라 말해 줄 수 없소.”

“점창이 두려워할 정도의 상대입니까?”

“……소협. 말조심하시오. 점창은 불의를 두려워하지 않소. 설사 그것이 실제 ‘마교’라 하더라도 말이오.”

“……‘실제 마교’라도 말입니까?”

이상한 그의 말에 한마디 더 하려 하자 남궁선화가 내 앞을 막았다.

“종벽기 공자는 지금 어디 있죠?”

“……종 공자를 아시오?”

“개인적인 친분은 없지만, 서로 이름은 나눈 사이예요.”

“소저는 누구시길래 개인의 사생활을 묻는 것이오?”

같잖다는 듯 말하는 원주에게 남궁선화가 말했다.

“남궁세가의 선화라고 해요. 이 정도면 종 공자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나요?”

“…….”

#

성사다원을 나선 후, 장도원이 남궁선화를 슬쩍 보며 내게 속삭였다.

“자, 자네가 남궁세가의 소저와 어찌 인연을 만든 건가?”

구구절절 이야기해줄 수도 있었지만, 지금 그에겐 하나도 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어찌 되었든 고맙네. 자네 덕분에 일이 좀 풀리는 것 같으이.”

“별말씀을요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이럴 줄 알았다면, 진작 어디에라도 거처를 마련할 걸 그랬어.”

지나가듯 이야기하는 장도원의 말에 내가 물었다.

“어르신을 모셔가겠다고 한 곳이 있었습니까?”

“모셔가긴 무슨, 장신구나 만드는 노인네를…… 그저 자기네 소속이 되면 보호해 주겠다는 이야기는 들었네. 물론 하인 취급하는 태도에 거절하긴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진작 그리할 걸 그랬어. 최소한 점창의 그늘에 있었으면 해결하기가 쉬웠을 테니.”

“…….”

우리의 대화는 종벽기가 머물고 있다는 홍루 앞에서 멈췄다.

“저와 장 노사 두 사람만 들어가겠습니다.”

홍루의 특성상 여성들에게 민망한 장면을 보일 수 있어 조심하는 나의 배려에, 남궁선화와 성모란이 기가 찬 듯 말했다.

“홍루에서 잔 적도 있는데 갑자기 왜 이래요?”

정시 치를 때의 이야기를 하며 벌컥 문을 열고 들어서는 성모란.

홍루 내부에선 묘한 향기가 풍겨오며 달뜬 신음들이 들려오고, 벗은 것인지 입은 것인지 분간이 안 가는 남녀가 잔뜩 돌아다니고 있었다.

“저기 있네요.”

홍루의 가장 상석.

종벽기와 그의 일행들이 각자 여성들을 옆에 끼고 부어라 마셔라 하고 있었다.

“종 공자.”

“응?”

반쯤 감긴 눈으로 기생을 보며 술잔을 넘기던 종벽기가 남궁선화를 바라봤다.

“아니, 남궁 소저! 여긴 어쩐 일이오? ……그 거지들까지 줄줄이 달고?”

남궁선화의 등장에 종벽기의 일행들이 주섬주섬 옷가지를 정리한다.

하지만 어찌나 많이 취했는지 제대로 옷을 여미지도 못하고 있었다.

“악양에서 벌어지는 실종 사건에 대해 알고 싶어서 왔어요.”

“실종? 아, 아아……. 그거 말이오. 별거 아니외다. 본래 집안 관리가 안 되는 이들에게 종종 생겨나는 일이니.”

“……여기 노사님의 하나뿐인 손녀가 실종되었다고 해요. 종 공자께서 좀 도와주셨으면 해요.”

“노사……?”

종벽기는 게슴츠레한 얼굴로 장도원을 보다가 눈썹을 씰룩거렸다.

“하, 그 건방진 노인네였구먼.”

“…….”

“아시나요?”

“우리 점창에서 귀하게 쓰려 방문한 적이 있었지, 하지만 어찌나 잘난 척을 하던지. 헌데…… 손녀를 잃어버리셨다고?”

“…….”

장도원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나으리, 제가 주제 파악도 못 하고 건방을 떨었습니다. 제발 제 손녀 좀 구해주십시오.”

“흐흣, 진작 점창에 왔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을… 쯔쯧.”

남궁선화도 함께 나섰다.

“종 공자, 부탁드릴게요.”

이죽거리며 웃던 종벽기가 손을 두어 번 휘저었다.

“알겠소. 내 남궁 소저를 봐서라도 알아보리다. 대신 기억하시오. 남궁 소저는 내게 빚을 하나 진 것이니.”

“……기억하겠어요.”

“그만 가보시오. 저 노인네를 계속 보고 있으려니 술맛이 떨어지려 하는구려.”

축객령과 함께 종벽기는 다시금 기생과 시시덕거리기 시작했고, 그의 일행들도 그 모습이 썩 만족스러운지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

장도원을 집으로 데려와 수혈을 짚어 잠을 재우곤, 조용히 마당으로 나왔다.

“종 공자에게 좀 더 이야기해 볼 걸 그랬나 봐요.”

남궁선화는 안타까움을 숨기지 못했다.

“이미 나서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더구나 남궁선화는 마지막에 빚을 지겠다는 말까지 했다.

남궁세가의 사람으로서 그 말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는 스스로 잘 알고 있을 터.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헌데 진 공자님은 어쩐지 개운하지 못한 표정이네요.”

“…….”

장도원의 손녀가 사라진 사건에 드는 의문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만통부의 기록 중에 악양 실종 사건 관련 문서가 있었는데, 마교와 관련된 접점은 찾을 수 없었다.

물론 전생엔 마교의 정체에 대해 한참 뒤에 알게 되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지금의 실종 사건이 마교에 의한 것이라 짐작하기엔 무리가 많다.

마교는 괴랄한 술법을 사용하기 위해 인신공양까지 마다하지 않는 미친놈들이긴 했지만, 악양처럼 사람들이 많은 번화가에서 일을 벌일 정도로 머저리는 아니었다.

굳이 악양까지 오지 않아도, 천하엔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숱하게 널렸고, 관청의 영향이 닿지 않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도 수없이 많았으니까.

자신들의 정체를 철저하게 끝까지 숨기려 했던 마교가, 천하의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악양까지 와서 일을 벌인다?

‘글쎄…….’

전쟁의 최전선에서 그들의 교활함을 뼛속 깊이 느껴왔던 내가 생각하기엔 ‘영 아니올시다’다.

그리고.

“성사다원에서 이상한 점 못 느끼셨습니까?”

“이상한 점이요?”

“원주가 ‘실제 마교’라 하더라도 두렵지 않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

“왜 원주는 마교가 실제가 아니라 확신했을까요? 악양엔 소문이 이렇게 많이 퍼졌는데. 단순히 믿지 않았던 걸까요?”

과민한 생각일 수도 있었으나, 마치 소정대에서 사기도박을 당했을 때처럼 찝찝함이 남는다.

이럴 땐 도박판에 앉아있는 놈들의 속곳까지 다 뒤져봐야 한다.

나는 태을문의 아이들에게 말했다.

“장 노사께서 일어나면 최대한 안심시켜 드리도록 해라.”

“네.”

“진 공자, 어딜 갈 생각이죠?”

성모란의 물음에 답했다.

“따로 알아봐야겠습니다.”

#

“우선 정보를 모아봐야겠습니다.”

“개방이라면 걸인촌으로 가봐야 하지 않을까요?”

강호의 정보 대부분을 개방이 틀어 쥐고 있으니, 가장 먼저 개방을 떠올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나는 그에 못지않은 정보단체를 알고 있다.

내가 향한 곳은 번화가 한구석에 위치한 작은 포목점.

“여긴 왜?”

“옷은 아까 샀잖아요.”

다시금 포목점에 들른 나를 보고 의문을 품는 두 사람.

나는 말없이 포목 점주에게 다가가 여미미에게 받았던 흑패를 내밀었다.

살갑게 장사를 하던 포목점 주인은 잠시 얼굴을 굳히더니, 정중하게 인사를 하곤 안쪽으로 나를 안내했다.

포목점 안쪽에는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이 놓여있었다.

그 아래로 내려가자 포목점보다 더욱 커다란 내실이 나타났다.

내실엔 갖가지 기이한 물건들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남궁선화와 성모란은 연속된 놀라운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여기 설마…… 흑점인가요?”

“흑점?”

성모란의 물음에 남궁선화는 놀람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하오문이 운영하는 기밀 상점이에요. 여자 속곳부터 시체까지, 양지에서 구하지 못하는 갖가지 물건을 모두 구할 수 있다는……. 하지만 그 흑점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얻어내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라 했는데…….”

남궁선화의 설명에 앞서가던 포목점 주인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흑점에서 거래되는 물건들에도 등급이 있습니다. 방금 말씀하신 물건들은 일반 등급의 손님이라면 구할 수 있는 것들이지요.”

“……그럼 특별 등급은 또 따로 있다는 말인가요?”

“그곳에선 진정 못 구하는 것이 없지요. 살아있는 사람의 피는 물론이고, 죽은 이의 뼛조각까지. 이 세상에 있는 거라면 어떤 짓을 해서라도 가져다드립니다.”

“……그 등급을 따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요?”

침을 꿀꺽 삼키며 묻는 성모란의 질문에, 포목점주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짓고 말했다.

“그 등급은 원한다고 따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격이 있어야 하지요.”

포목점주는 남궁선화의 얼굴을 한번 보곤 답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소저의 할아버지이신 신검님께서도 그 자격을 가지고 계시지 못합니다.”

포목점주의 대답에 기함하는 두 사람.

“제가 누군지 아세요?”

포목점주는 빙그레 웃었다.

“안휘성 삼대 미녀로 꼽히신 두 분을 몰라본다면 사내가 아니지 않겠습니까?”

사내의 말에도 두 사람은 여전히 놀란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신검님도 자격이 안 된다고 하셨는데, 그럼 대체 누가 그런 자격을 가지고 있다는 거죠?”

앓는 듯 말하는 성모란의 말에, 포목점주는 대답 없이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그 시선 끝엔…….

“허…….”

“대체…… 뭐 하는 사람이에요. 진 공자는?”

나는 민망함에 얼른 말을 돌렸다.

“악양 지부장 되십니까?”

“네. 맞습니다.”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일단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기다리고 계시는 분이 있습니다.”

나를 기다린다고? 내가 올 줄 알고 미리 와 있었단 말인가?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야기에 나는 잠자코 다시금 악양 지부장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흑점을 지나, 미로 같은 내부를 한참 들어간 이후에야 지부장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는 지체없이 문을 열었다.

“그간 공사다망하다는 이유로 이제야 인사를 올립니다.”

그 안에서 예상치 못한 존재가 인사를 하고 있었다.

어딘가 익숙한 얼굴과 공손한 태도…….

아니, 이 사람이 왜 여기서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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