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 <혼란 속의 흑염룡>
남궁선화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재차 뜨고는 몇 번이나 눈을 깜빡였다.
“저 사람…… 유월문 문주 아닌가요?”
손발이 뒤로 묶인 채 입에 재갈까지 물려있는 중년의 사내.
답변을 바라는 시선으로 나를 보기에 나는 그 시선을 해령에게로 보냈다.
“진 공자님이 장원을 습격하실 때 저희가 유월문으로 향했습니다.”
“허…….”
입을 쩍 벌리는 성모란.
“분명 점창파가 유월문을 먼저 쳤다고…….”
유월문은 점창의 악양 창고와 같은 일을 했다.
흑도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최대한 빨리 움직이려 했다.
점창이 그간 악양에서 모아 놓은 막대한 재산을 가로챌 좋은 기회였으니까.
하지만 점창이 그것을 가만두고 볼 일은 없었다.
흑도에게 빼앗기기 전에, 손을 더럽히더라도 자신의 것을 회수하는 건 당연한 일.
그렇기에 점창은 누구보다 빨리 유월문을 손절하고, 그들을 습격했던 것.
하지만.
“한발 늦은 거죠.”
애당초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이유가 어디 있던가.
더구나 점창은 실상 자신의 것이나 마찬가지인 재산을 빼앗겼어도 어디 가서 이야기하지도 못하리라.
그걸 이야기하는 순간, 유월문과 점창의 밀약이 퍼질 테니.
성모란이 분하지 않냐고 물어봤을 때도 전혀 마음 상하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 있다.
‘지금쯤 잃어버린 재산 때문에 머리가 아득해질 지경이겠지.’
득의양양한 미소를 참지 못하고 있자니, 성모란이 나를 노려봤다.
“그럼 일부러 시선을 끌기 위해 그 난리를 피운 건가요?”
“뭐…… 이런저런 이유가 있었죠.”
“전 죽을 뻔했다고요!”
“그래서 선상 연회도 즐기는 것 아닙니까.”
“이걸로 입을 싹 닦을 생각 말아요!”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은 없었다.
나는 해령을 바라봤다.
해령은 소매에서 전표를 꺼내어 각각 남궁선화와 성모란에게 하나씩 넘겨주었다.
“이건 뭐죠?”
“두 분의 몫입니다.”
“네?”
허겁지겁 전표를 열어본 두 사람은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금자 이천 냥?”
“이게 우리 몫이라고요?”
남궁선화에게도 전표에 적힌 금액은 너무 컸는지 놀람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설명을 요구하는 두 사람의 시선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신 대로 성 소저는 목숨을 걸고, 남궁 소저는 이름까지 걸지 않았습니까. 당연히 그에 대한 대가가 있어야지요.”
“와…… 진짜 화끈하시네. 나 이런 큰돈은 처음 만져봐요.”
“혹시 제가 남궁세가를 나오게 되면 태을문 소속이 되어도 될까요?”
와, 저 진지한 눈빛. 진심인 것 같은데?
두 여자가 생전 처음 제 소유의 엄청난 금액이 적힌 전표를 뚫어지게 보고 있는 동안, 은호와 사련은 입술이 삐쭉삐쭉 튀어나와 있었다.
“왜 그러느냐?”
“뭐가 말입니까?”
“왜 입이 댓 발 나와 있냐고.”
“제 구강구조가 본래 어류랑 닮은 면이 있습니다.”
이죽거리는 은호를 보며 피식 웃었다.
“태도가 불량한 걸 보니 너희들은 이것이 필요 없겠구나.”
“네?”
나는 품에서 네 개의 환단과 전낭을 보여주었다.
장내엔 묘한 한약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그게 뭡니까? 사형?”
“용돈과 단월환이다. 아마 점창에서 유월문에 준 것이겠지. 본래 너희들에게 주려 했는데, 태도가 영…….”
“사형! 단 한 번도 사형의 행사에 의문을 품은 적이 없었습니다.”
“저도요!”
“……저, 저도 그렇습니다.”
어정쩡하게 매달리는 은호까지 본 이후에야 녀석들에게 목갑과 전낭을 넘겨주었다.
네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영약을 흡수하기 위해 창고 밖으로 향했다.
나는 녀석들의 뒷모습을 보다가 이내 유월문주를 향했다.
이 사태를 바라보고 있던 문주는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재갈을 풀어주었다.
“억울한가?”
“으득…이러고도 무사하길 바라는가? 네놈이 알지 모르겠지만, 그 재산은 모두 점창의 것이다. 점창이 네놈을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다.”
나는 해령을 보고 물었다.
“아직 안 알려줬습니까?”
“네.”
유월문 문주에게 말해주었다.
“뭔가 착각하고 있군. 우린 지금 당신과 당신 가족을 보호하고 있는 거야.”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지금 점창이 당신을 살인멸구 하기 위해 열심히 악양을 뒤지고 있거든.”
“뭐?”
“유월문의 무사들을 가장 많이 죽인 건, 다름 아닌 점창이라 이 말이야.”
“…….”
유월문주는 믿지 못하겠다는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하지만 어쩌랴. 사실은 사실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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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령과 난, 자리를 옮겼다.
“문주님께서 공자님께 안부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문주님은 잘 지내고 계십니까?”
“예. 하오문이 이제 날개를 펼 때라며 그 어느 때보다 왕성하게 활동하고 계십니다.”
“다행이군요.”
“이게 다 공자님 덕분입니다.”
머쓱함에 찻물을 마시자 싱긋 웃던 해령이 소매에서 전표 열 장을 꺼내었다.
“당장 유월문 내에 비축하고 있던 금은보화와 전표들을 처분한 비용입니다.”
“…….”
각 일(一)만 냥짜리 전표 열 장.
“이렇게나 많이 나왔습니까?”
내 예상보다 아득히 높은 숫자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다.
“악양은 호남성 제일 경제 도시이자 강남에서도 손꼽히는 관광지입니다. 점창이 악양에 지부를 세우기 위해 돈을 모아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되레 부족한 금액이지요.”
“부족하다고요?”
“유월문이 가지고 있던 객잔과 주루 등 유형자산은 처분하지 못했습니다. 그것들에 손을 댔다간 꼬리가 잡힐 테니까요.”
“그렇겠군요.”
언젠가 시간이 흐르면 알 수도 있겠지만, 지금 당장 그렇게 급한 일도 아니고, 점창이 안다고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나는 열 장의 전표 중에 두 장을 해령에게 다시금 건넸다.
“……?”
해령은 의문 가득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수수료입니다. 언제부터인가 하오문에선 수수료를 받지 않으시더군요.”
“아…… 그건 어디까지나 ‘식객’이시기에…….”
“식객에게 그런 배려까지 해준다는 건 듣지 못했습니다.”
“…….”
아마도 해령을 비롯한 양군백 등의 사람들 배려로 수수료를 떼이지 않았던 것이겠지.
하지만 이런 배려에 의지하는 거래는 언제고 탈이 나게 마련이다.
“받을 건 받으시고, 최고의 성과를 내주십쇼. 제가 바라는 건 바로 그겁니다.”
해령은 한동안 내 얼굴을 뜯어보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저히 당해낼 수 없는 공자님이시군요. 정말 괜찮으십니까?”
“이번 일에 하오문의 도움이 없었다면 더 오래 걸렸을 겁니다. 그리고 사람은 일했으면 그 대가를 받아야죠.”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해령은 전표 두 장을 잘 포개어 품속에 넣었다.
“공자님께 이런 선물을 받았으니, 제 선물의 빛이 바래지겠군요.”
“응?”
영문을 알 수 없는 말과 함께 해령이 손짓하자, 시비 하나가 나무 쟁반을 들고 왔다.
그 위엔 아홉 개의 줄기가 달린 말라비틀어진 풀뿌리와, 건들기만 해도 쪼개져 사라질 것 같은 책자 하나가 놓여있었다.
선물이라기엔 모양새가 영 아닌데…….
“이것들은 뭡니까?”
“유월문주의 비밀 금고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비밀 금고요?”
창고에만도 막대한 재산이 착복되어 있었는데, 비밀 금고에서 나온 물건들이란 과연 무엇일까?
“구령신초라고 들어보셨습니까?”
“…….”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시선이 말라비틀어진 풀뿌리로 향했다.
“이, 이게 구령신초입니까?”
아홉 줄기에 천하의 영맥을 모두 담는다는 신기한 영약.
약성이 얼마나 강한지, 어지간히 내공을 쌓은 고수도 잘못 먹었다간 약 기운에 밀려 장기가 녹아버린다는 어마무시한 영약이다.
“아마 자신이 흡수하지 못할 걸 알고 바칠 생각이었나 봅니다.”
“…….”
과연 저 영약을 섭취하는 순간 내공이 얼마나 오를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동안에도 해령의 말은 이어졌다.
“다른 하나는 혈옥수입니다.”
“…….”
구령신초에게 혼을 빼앗기고 있던 내 시선이 급하게 해령에게 돌아갔다.
“혈옥수라면…… 제가 아는 그 혈옥수가 맞습니까?”
해령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맹이 지정한 십 대 금공 중 하나가 바로 혈옥수다.
“아마도 이것을 가지고 그간 마교 운운하고 다녔던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고개가 끄덕여졌다.
어떤 일을 벌여 어떤 의심을 사든, 최후에 혈옥수를 상대에게 던지기만 하면 모든 의심을 단박에 뒤집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아마 진 공자님이 아니셨다면 끝내 점창과 유월문의 뜻대로 모든 일이 흘러갔을 겁니다.”
“……다행이군요.”
말을 하면서도 입안에 까끌까끌한 맛이 남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무림맹 최일선에서 ‘탕마멸사’를 외치는 그들의 욕망이 ‘정도’를 벗어났다는 것은, 과거 ‘정의’를 위해 목숨 바쳤던 사람에겐 유쾌한 일이 아니니까.
“약소하지만 이게 제 선물입니다.”
쟁반을 내 쪽으로 내미는 해령을 보며 물었다.
“비밀 금고라면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되었을 건데 말입니다.”
아무리 식객이라 한들 하오문이 모든 걸 밝힐 필요는 없었다.
“물론 이것 말고도 그간 유월문이 뇌물을 바친 고관대작들의 장부도 있습니다. 그건 저희가 쓰기 더 좋을 것 같아 따로 챙기지 않았습니다.”
“아니, 내 말은…….”
“공자님.”
해령이 단호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저희는 정보를 사고파는 정보상임과 동시에 정보를 분석하는 기관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저희의 분석에 따르면, 지금이 공자님의 몸값이 가장 저렴한 순간이라 하더군요.”
“…….”
“저희는 공자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공자님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강한 확신이 어려있는 해령의 눈빛.
예상치 못한 그녀의 말에 달리 답을 하지 못한 나는 침만 꼴깍 삼켰다.
“그러니 정 부담된다면 그냥 친구비 정도라고 생각하시지요.”
해령의 말에 나도 모르게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지어진다.
“양군백의 이야기를 들으신 겁니까?”
“녀석을 호되게 혼냈습니다. 겨우 그런 가격으로 친구를 만든 거냐고요.”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나는 조심스레 구령신초와 혈옥수를 품 안에 갈무리했다.
해령은 마치 자식의 입 안에 음식이 들어가는 걸 보는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어쩐지 어색한 기분이 들어 얼른 다른 화제를 꺼내었다.
“앞으로 악양의 주인은 누가 될 것 같습니까?”
악양의 자리가 비었다.
지금 흑도 무림과 백도 무림이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것은, 결국 악양을 누가 먹느냐를 두고 한바탕 일전을 벌이는 것.
“아마도 묵혈방과 흑부궁을 비롯한 흑도 무림이 악양을 지배하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흠…….”
역시나 그렇게 생각하는가.
점창을 비롯한 백도 문파들은 이번 사건으로 신의를 잃었다.
점창을 따르던 문파들에도 한동안은 점창의 영향이 덜할 것이 분명했다.
결국 서로 눈치를 보느라 결집하지 못한 이들은 더 이상 예전처럼 성세를 자랑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점창을 비롯한 백도의 누군가가 다시금 악양을 차지하기 위해선 또다시 엄청난 피 값을 내야 할 것이 분명했다.
“그 자리에 하오문이 낄 틈은 없습니까?”
“네?”
해령이 드물게 토끼 눈을 뜨고 끔뻑끔뻑했다.
자신이 들은 것을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
“흑도도 한 입 하려 하고, 점창도 자신들의 입지를 잃지 않으려 노력할 겁니다. 그 사이로 하오문이 파고들 수는 없겠습니까?”
“……공자님도 알다시피 저희는 겉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는 처지입니다.”
“은밀하게 손을 뻗으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
전혀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
이왕 좋은 관계를 가진 김에 선물 하나 해 볼까.
“악양 지부장 자리 정도면 어떻습니까?”
“네??”
“지금 악양 지부장이 아마 곧 자리를 옮길 겁니다. 그리고 관례상 지부장의 자리는 전임이 추천한 이가 자리하는 경우가 많지요.”
“그렇……지요. 하지만 악양 지부장이 자리를 옮긴다는 소식은 듣지 못하였는데, 그 정도 되시는 분이 대체 어디로 가는지 아십니까?”
“태을문에 파견 기사로 올 겁니다.”
“네?!”
여태껏 단아한 모습을 한 번도 흩트린 적 없던 해령은 입을 쩍 벌리고 내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니,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
해령의 반응은 조금 상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