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153화 (153/357)

#153. <혼란 속의 흑염룡(3)>

연회장을 빠져나온 홍사련은 긴 한숨을 쉬었다.

안에서 얼마나 웃었는지 턱뼈가 다 얼얼했다.

얼마 만에 이렇게 웃었는지 복기하던 사련은 그것이 참으로 무의미한 짓이란 걸 금방 깨달았다.

태을문이란 커다란 짐을 어깨에 짊어진 후로부터 사련은 언제나 날 선 칼날 위를 걷는 것과 같은 기분이었으니까.

‘애당초 그릇도 되지 않는 내가 짊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어.’

그럼에도 짊어질 수밖에 없었던 건, 자신이 그 짐을 놓아버리는 순간 모두가 고통 속에 빠져버릴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풋…….”

문득 뒤늦게 연회에 참석해서 금표를 마구 두들겨 패던 대사형이 생각난다.

‘왜 그러냐’ 말리니 ‘이건 다 태을문의 전통을 세우기 위해서’라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내뱉었다.

나 참. 언제부터 태을문에 전통이 있었다고.

그렇게 피식피식 혼자 웃다가도 대사형에게 미안해졌다.

자신의 어깨가 가벼운 이유가,

자신의 웃음이 호탕한 이유가,

자신의 짐을 대사형이 짊어졌기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참 못났구나.”

자신의 짐을 대신 짊어진 사람을 도울 생각은 하지 못할망정 그저 안도하고 있다니.

스스로 봐도 참으로 못났다.

“혼자 나와 뭘 하고 있느냐?”

귀에 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검은 천에 은색 자수가 새겨진 무복을 입은 사내가 다가왔다.

사련은 대답 없이 다시금 고개를 돌렸다.

“뭔가 답답한 일이 있느냐?”

“…….”

이런 식이다.

자신이 가장 힘든 짐을 짊어지고,

자신이 가장 괴로운 일을 하면서도,

주위 사람을 보며 묻는다.

“뭔가 힘든 일이 있으면 말하거라.”

“…….”

정작 가장 많은 피를 흘리고 있는 것은 자신이면서…….

“없어요. 그런 거…….”

“녀석.”

그의 거친 손이 머리 위로 올라온다.

애써 가꾼 머리를 거칠게 헝클이고 모양을 바꿔버린다.

머리 만지는 거 싫다고 그리 싫다고 말했건만.

하지만 머리로 느껴지는 손의 굳은살이 불만을 터트리지 못하게 한다.

마치 나뭇가지로 쓸어내듯,

거친 돌멩이로 비비듯,

그 거칠고 딱딱한 느낌이 너무 좋아서, 너무 편해서.

손을 쳐내지도, 머리를 피하지도 않는다.

“련매, 넌 항상 다른 아이들을 걱정하느라 정작 너 자신을 못 챙기곤 하지.”

당최 누가 할 소릴.

“내가 열심히 챙겨보겠지만, 이 대사형이 워낙 믿음직스럽지 못하지 않더냐. 그러니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언제나 먼저 말해다오.”

“…….”

그렇담 대사형은 누가 챙기나요?

너무 궁금한 이야기였지만, 입밖에 내뱉지 못했다.

그가 할 대답이란 너무나 예상되는 것이니까.

“이 사형이 미덥지 않아서 늘 미안하구나.”

그리고 그 대답이란 사련의 가슴을 미어지게 할 것이니까.

“흑…… 흑…….”

그리고 왜 자신은 이런 상황에서 항상 눈물을 흘리는 것일까.

철이 든 뒤론 아버지 앞에서조차 한 번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을 대사형 앞에서 몇 번이나 흘리는지.

“어, 엇? 우, 우는 것이냐? 아, 아차! 미안하다. 머리 만지지 말라고 했지. 미안하다. 까먹었다.”

그리고 왜 매번 멍청한 사형은 자신이 우는 이유에 대해서 모르는 것인지.

도통 세월이 흘러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자, 자. 봐라. 본래 머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면 되지 않겠니?”

그러면서 다시금 머리를 헝클어 놓는다.

수습하면 할수록 머리는 더 엉망이 되어가고, 그럴수록 복받쳤던 사련의 감정이 조금씩 안정을 찾았다.

“……그만 하세요.”

“쫌만 기다려 봐라, 거의 다…….”

“그만하라고!”

“……아앗, 미안하다.”

절대 고수들 앞에서도 겁 없이 이빨을 드러냈던 사형은 자신의 외침엔 바짝 긴장한 듯, 한 걸음 거리를 떼었다.

“휴우…….”

“화난 거 아니지?”

“화 안 났어요.”

“목소리가 화난 거 같은데?”

“확 씨!”

주먹을 들이대자 겁난 다는 듯 손과 발을 들어 얼굴을 보호한다.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사련은 자신도 모르게 또 웃음이 터진다.

“푸훗, 나 참 정말.”

그렇게 또 무게 같은 건 잊은 채 어린아이처럼 실컷 웃는다.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다 잘될 테니.”

“…….”

당최 뭐가 잘 된다는 걸까.

사련은 진소운이 무엇을 바라보는지 정확하게 잘 알지 못했다.

“사형이 바라는 미래는 무엇인가요?”

최소 그가 바라보는 미래가 무엇인지 알아야 자신이 거기에 발맞출 수 있을 테니까.

“내가 바라는 미래라…….”

진소운은 대답 없이 어둠이 짙게 내린 동정호를 바라봤다.

“내 눈에는 어두운 동정호가 꼭 천하처럼 보인다.”

“…….”

“그리고 저 밝게 빛나는 불빛 중의 하나가 태을문이길 바란다.”

진소운은 마치 오래전의 세월을 더듬는 듯한 눈빛으로 말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것 하나뿐이다.”

알 듯 말 듯 종잡을 수 없는 진소운의 말.

하지만 사련은 그의 눈이 깊게 침잠하는 것을 보고 더 이상 묻지 못했다.

그저 그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든 이룰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해야겠다 생각할 뿐이었다.

#

악양을 뒤흔든 마교사칭사건의 일로 점창과 관련된 문파와 사업체들이 모두 숨죽이고 있었다.

유월문을 시작으로 유월문과 관련된 문파들이 일제히 점창의 조사를 받으며, 그간 산중 호랑이처럼 악양을 호령하던 이들이 흠이라도 잡힐까 알아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던 것.

창성파도 그중 예외가 될 수 없었는데.

창성파는 반갑지 않은 손님들의 방문에 퍽 난감한 상황이었다.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함께 힘을 모아 악양을 지키자 하지 않으셨습니까?!”

“벌써 나성무관과 홍죽방이 흑도의 공격에 쓰러졌습니다.”

“아마 그들은 여기서 절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악양 전체를 자신들의 손아귀에 넣을 때까지요.”

인근 백도 문파의 자제들과 그의 친구들이라고 하는데.

애당초 그들이 그 정도 신분에 머물렀다면 창성파 내부로 들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학관생이라 하기에 대단한 이들이 몰려온 줄 알았더만…….’

창성파 문주가 호법당주를 날카롭게 째려보았다.

무림학관에 다니는 학관생들이긴 하지만 대부분 정도회나 백도회 12봉성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이들.

차후에 그들이 무림맹에서 승승장구할 것을 생각해 보면 그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여 하는 것은 분명 맞지만.

사실상 그들 사문이 지금 백척간두에 서 있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들의 앞날도 그리 밝지 않았다.

“안 그래도 대책을 수립하고 있네. 일단은 사문으로 돌아가 대기하고 있으시게나.”

“당장 사문이 흑도의 칼날 앞에 쓰러지기 직전입니다. 부디 도와주십시오.”

알고 있다.

아마 이번 일로 인해 악양의 절반 이상이 흑도 무림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점창에 대한 의심이 심한 현재로선, 그들을 상대로 자신들이 나설 명분이 없었다.

점창은 애당초 차후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리라.

흑도의 패악질이 기승을 부리고, 사람들의 성토가 심해질 때. 그때 다시금 악양을 손아귀에 넣기 위해 지금은 그들을 모른척 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지 않았는가. 대책을 수립하고 있다고. 자네들이 이리 방해하는 것은 더욱 일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곤 생각하지 못하는가!”

창성파 문주의 축객령에, 핏대 높여 성토하던 장우재를 비롯한 학관생들이 쫓겨나듯 창성파를 나섰다.

“흐흑, 이제 어찌하면 좋은가…….”

악양에 위치한 유장문의 적자인 장우재는 풍전등화와 같은 문파의 미래 앞에 절망했다.

“미안하네. 내 이런 꼴을 보여서…….”

장우재의 초대에 이번 휴식기 동안 유장문에 방문했던 학관생들은 그저 안쓰러운 얼굴로 장우재를 볼 뿐이었다.

장우재도 그렇지만 자신들도 사문의 기둥뿌리를 뽑아 학관에 들어온 터.

애당초 유장문을 도울 방법 따윈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럴 게 아니라 다른 곳에 도움을 청해보는 것이 어떻겠나?”

“자네도 보지 않았는가? 우리가 지나온 곳마다 모두 거절하지 않았나.”

“내 듣기로 지금 악양에 정도회의 일부가 회의하고 있다고 하더군.”

“정도회가?”

“그래. 단지 학관생들뿐만 아니라 맹의 소속되어 있는 어른들도 왔다고 하니 그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거기가 어딘가!”

장우재는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는 심정으로 바닥에서 벌떡 일어났다.

#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더냐?”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일각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

동정호의 중앙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커다란 배.

그 배의 난간에 선 두 남녀를 보던 일각이 시선을 돌렸다.

“오셨습니까. 스님.”

혜성은 일각의 인사에 대꾸 없이 그가 섰던 자리로 가 커다란 배를 바라봤다.

그리고 알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번뇌에 싸여 있었구나.”

“…….”

혜성의 말에 일각은 부끄럼이 가득하여 대답하지 못했다.

“저 아이가 너를 이겼다지? 그것이 그리도 충격이었더냐?”

일각의 일그러지는 얼굴에 혜성이 고개를 저었다.

“수련이 부족하구나.”

“……패배한 것 때문에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 무엇 때문이냐?”

“존재(存在)에 대한 근원이 궁금하기 때문입니다.”

“쯧. 역근경을 익히고 면변을 했다기에 깨우쳤다고 생각했거늘…….”

혀를 차는 혜성의 말에 침잠하던 일각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스님. 제가 깨우친 것이 맞습니까?”

“네가 발현한 금강력이 그걸 뒷받침하지 않더냐.”

“스님. 제가 공부하기론 금강력과 태극력, 삼청력은 오로지 깊은 수련과 인내, 참선과 숙고, 생의 끝에 달하는 고통을 견뎌낸 자만 발휘할 수 있다. 들었습니다.”

“그렇다. 애당초 아무나 사용할 수 있는 힘이 아니니까.”

일각은 다시금 배에 선 두 남녀 중 남자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자가 발현한 것은 분명 옥청천상력이었습니다. 어찌 그것이 가능한 것이었습니까?”

“…….”

일각은 여지껏 진소운과의 비무에서 그가 펼친 옥청천상력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니, 그날 이후로 깊은 번뇌에 빠져있었다.

“그는 속되고, 비겁하고, 정직하지 못하고,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목적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지요. 그렇다면 어찌하여 저런 자가 옥청천상력을 쓸 수 있는 것입니까. 그는 정말 악인(惡人)이 맞는 겁니까?”

“……쯔쯧. 눈 앞에 펼쳐지는 현상에 혼란을 겪고 있었구나.”

혜성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귀는 때로 성자의 모습을 한 채 눈앞에 나타나는 법이고, 독약은 언제나 향 좋은 술에 섞여 있기 마련이다. 어찌하여 눈을 어지럽히는 한낱 현상에 현혹되는 것이냐.”

“…….”

일각은 혼란스러웠다.

그간의 일들이, 그간에 보여 왔던 진소운의 모습들이, 정말 혜성이 말한 대로 악인의 탈을 쓴 자의 것이던가?

그렇다면 반대로 자신이 행해왔던 행실은, 성자의 모습으로 행했다 할 수 있는 것인가?

“망상을 제거하거라. 오만(五萬) 가지 망상이 번뇌를 키우는 것이다. 그것이 수행의 첫걸음임을 절대 잊지 말거라.”

불가의 정론.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금과옥조(金科玉條).

일각은 떼어지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벌렸다.

“……명심하겠습니다.”

혜성은 잠시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회주에게서 연락이 왔다.”

“……정도회주님 말입니까?”

악양에서의 일은 간접적으로 들어 알고 있었다.

점창에게 악재로 작용 될 이번 일을 수습하기도 바쁠 텐데. 어찌 연락했을까?

“그래. 사천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조사를 하러 가자고 하는구나.”

“……외부 활동 말입니까?”

“그렇다.”

“……하지만, 학관으로 돌아가야 할 시기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더불어 ‘학기 중 학관생들의 외부 활동은 학관 대표의 허락을 득해야 한다.’는 말은 삼켰다.

그 말이 곧 혜성에게 번뇌를 일으킬 것임을 알기에.

“그렇기에 가자는 것이겠지. 학관대표가 통제하기 전에 말이다.”

“…….”

의도가 뻔히 보인다.

“의도가 뻔히 보이는 행동이지.”

일부러 진소운을 의식한 행동일 것이다.

“일부러 악양의 일을 의식한 행동일 테지.”

진소운의 힘을 약화시키고 뭔가를 받아내려고 하는.

“이번 기회에 악양에 진출할 계기를 얻을지도 모르겠구나. 아마 지금의 점창이라면 악양을 내어주겠지.”

“…….”

일각은 별 다른 답변을 할 수 없어 두 손을 모아 합장했다.

“아미타불.”

“그래그래. 그야말로 부처님의 은공 없이는 이루지 못했을 일이다.”

득의양양 웃음을 터트리는 혜성.

그를 보던 일각은, 순간적으로 그의 얼굴이 마귀처럼 보이는 것에 놀라며 망상을 빨리 털어내려 애썼다.

‘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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