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 <혼란을 잠재우는 흑염룡(3)>
날이 밝고 하오문을 통해 새로운 소식이 전해졌다.
“후우…….”
“왜 그래요?”
간밤의 있었던 전투의 흔적을 씻어내지도 못한 성모란의 물음에 나는 아무 말 없이 전서를 내밀었다.
“세상에…….”
그녀의 반응 또한 나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한 개의 문파.
세 개의 무관.
멸문.
간밤에 사라진 백도 세력들의 숫자였다.
본래라면 여기에 유장문이 포함되어 있었겠지.
“대체 무슨 생각이래요? 이 사람들…… 정말 무림맹과 전쟁이라도 벌일 생각이래요?”
목표가 되었던 문파들 대부분이 무림맹과 접점이 없는 중·소 문파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들이 원하는 것은 단 하나다.
‘공포감 조성.’
빠드득.
사(詐)가 현혹하여 상대를 속이고, 마(魔)가 압도하여 제거한다면, 흑(黑)은 공포를 키워 도망치게 한다.
타협이 없을 거라는 공포.
자비를 바라지 말라는 선언.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절망.
흑도와 적이 된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오로지 포기와 도망뿐이다.
효과는 주효해서.
간밤의 일로 벌써 무관 두 곳이 급히 문을 닫았고, 문파 두 곳이 작은 짐만 챙겨 도망쳤다.
공포가 악양 전체를 삼켜버린 것이다.
“대표님.”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장우재의 친구들인 학관생들이 서 있었다.
우리 일행과 똑같이 간밤의 처절한 전투 흔적을 씻어내지 못한 모습.
“무슨 일 있습니까?”
“…….”
학관생의 대표로 보이는 사내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이어 다른 학관생들도 사내를 따라 하나하나 무릎을 꿇었다.
“……왜 이러십니까?”
만류하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이들.
“부디 유장문을 포기하지 말아주십시오.”
“…….”
“그간 저희의 눈치만 보던 저희들이 결코 좋게 보이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이렇게 반성하며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우재, 그 친구를 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나는 이들의 모임이 여타 다른 모임과 다르지 않다 생각했었다.
정도회처럼, 백도회처럼, 12봉성처럼.
세력이 없는 자들끼리 모여 만든 세력.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세력.
“저희 모두 한 번씩 우재 그 친구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저희가 은혜를 갚기 전에 그 친구가 죽지 않길 바랍니다.”
“…….”
“저희 또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부디, 대표님이 그의 힘이 되어주십시오.”
하지만 이해관계로 모인 사람들의 태도라기엔 그들의 눈빛에는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일어나십시오.”
“대표님…….”
“여러분들이 부탁하지 않아도 이미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간밤에 묵혈방에 한 선언도 있었고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이들은 타인의 전쟁에 휘말렸음에도 자신들의 일인 양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전생에 정마대전이 일자 속세에 나타났던 은둔 고수들처럼.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비겁한 이들이 아니었다.
그때, 전각에서 나온 장우재가 이편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진 대표님. 문주님이 찾으십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애를 쓰고 있지만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감정이 느껴진다.
나는 그가 들키고 싶어 하지 않는 감정들을 애써 모른 척하며 대답했다.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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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십칠 개.
대연무장에 쌓인 관의 숫자였다.
총원이 삼백에 불과한 규모를 생각하면, 삼분지 일이라는 큰 숫자가 짧은 전투에서 생을 마감했다.
전쟁이란 것이, 전투라는 것이 이렇다.
나 홀로 싸우다 죽는 것이라면 상관없다.
하지만 내가 싸우는 동안 내 주위의 사람들이 이렇게 죽어 버리고 만다.
그간 필사적으로 태을문의 성장을 바랐던 이유.
나를 따르는 홍사련과 금·은·동 형제 또한 유장문이 겪고 있는 슬픔의 무게를 느꼈는지 입을 꾸욱 다물고 따라왔다.
“오셨는가?”
하룻밤 만에 본 문주의 얼굴은, 마치 십 년의 풍파를 맞은 듯 초췌해져 있었다.
마치 전생의 홍문기와 비슷한 모습.
“괜찮으십니까?”
“…….”
으레 인사말을 건네지만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대답 대신 우리와 장우재의 일행을 보며 말했다.
“간밤에 그대들이 다치지 않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네. 천지신명께 감사할 일이지.”
“…….”
“진 공자 그대를 비롯한 이곳에 모인 모두들에게 부탁이 있네.”
“말씀하십시오.”
유장문의 문주는 메마른 입술을 무겁게 열었다.
“이만 자신들의 갈 길을 가주게.”
“……그게 무슨……?”
“오늘부로 유장문은 강호에서 사라질 것이네.”
나는 장우재를 바라봤다.
장우재는 이미 알고 있었던 듯,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참고 있었다.
“이미 대응을 계획하던 많은 문파들이 떠나겠다 전갈을 보내왔네. 우리 또한 이만 악양을 떠나는 것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길이라 판단했네.”
유장문의 문주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뒤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는 문주의 눈동자엔 죄책감이 가득했다.
“우리 때문에 진 공자 자네를 위험에 빠뜨릴 순 없다네.”
“전 상관없습니다.”
문주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네는 내가 본 어떤 무림 신성보다도 협의를 잘 아는 친구로군.”
“…….”
“오늘 유장문이 입은 은혜는 유장문이 사라지더라도 계속 기억하고 있겠네. 우재가 자식을 낳으면 그 아이에게도 가르치고, 그 아이가 다시 자식을 낳으면 그 아이에게도 기억시키겠네.”
문주가 다짐하듯 처음으로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언젠가, 아무리 긴 세월이 흘러도 잊지 않고 반드시 오늘의 빚을 갚도록 하겠네.”
함께 말을 듣고 있던 유장문의 모든 이들이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간의 유구한 역사가 단 하룻밤에 사라지고.
집을 잃어 이제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는 것이리라.
“어디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문주는 장내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각자 자신의 집으로 돌아갈 걸세. 그리고 갈 곳이 없는 이들은 내 처가가 있는 호북성으로 함께 갈 예정이네.”
“긴 여정이 되겠군요.”
“아마도 그렇겠지.”
문주는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결국 입을 열지 못했다.
그 침묵을 나는 깨주었다.
“저희가 함께하겠습니다.”
입술을 부들부들 떨던 문주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악양을 벗어날 때까지만 부탁해도 되겠나?”
스스로의 행동에 수치심이 들었는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어차피 우리 일행도, 장우재의 일행도 학관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가는 길에 함께하겠다 대답하려는 찰나.
숨이 꼴딱 넘어갈 듯 급박한 모습의 무사 하나가 들어섰다.
“무, 문주님 큰일 났습니다.”
“……이제 와 무슨 큰일 말인가?”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
문주를 시작으로 각 당의 당주들과 우리 일행까지 무사를 쫓아 대문으로 향했다.
무너진 대문과 뻥 뚫린 담벼락.
훤히 드러나는 외부의 전경과 그곳에 서 있는 이들의 모습을 보며, 우리 일행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빌어먹을 자식들…….”
커다란 구멍 밖으로 무사들이 도열해 있다.
담벼락 너머에서도 수십이 넘는 인원들의 기척이 느껴진다.
유장문 전체를 흑도 무사들이 둘러싼 것이다.
의도가 다분한 그들의 무력시위에 장로 하나가 탄식하듯 내뱉었다.
“사람이 어찌 이리 악독한 마음을 먹을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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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장문의 무사들은 물론이고, 우리 일행도 유장문 밖으로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었다.
참다못한 내가 유장문을 나서려 하자 전날 밤에 낫을 든 사내가 내 앞을 막아섰다.
“네놈이 움직인다면, 유장문에 풀뿌리 하나 남지 않을 것이다.”
“…….”
“말하지 않았느냐. 각오를 해야 할 거라고.”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것이오.”
“너의 알량한 협의가 악양에 더 많은 피를 흘리게 할 것이다. 우린 그걸 방지하기 위해 행동하는 것뿐이야.”
흑도놈들도 경력이 쌓이면 혀가 부드러워지는 것인가?
“퍽이나 대단한 대의명분이군요.”
“그런데도 밖으로 나갈 것이냐?”
“……되었소.”
억지로 열고 나가자 한다면 못 열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 벌어질 일들이 감당이 안 된다.
어떤 유리한 상황에서 전투를 벌인다 한들 결국 피해가 큰 것은 유장문이다.
더구나 이제는 노골적으로 묵혈방의 인원이 아닌 다른 흑도 문파의 인원들도 몰려들고 있었다.
완벽한 수적 우위로 전투를 최대한 빠르게 끝내겠다는 의도.
머리를 아무리 짜내 보아도 지금 당장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을 만한 계획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문밖에서 소란이 일었다.
“아! 진짜 비키라니까! 안쪽에 볼일이 있다고!”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봐! 악양의 패권을 두고 싸우는 건 좋은데. 최소한 지켜야 할 선이란 건 있는 법이야. 무림맹 악양 지부장의 일을 방해하고도 흑도 무림이 악양을 지배할 수 있을 거라 확신하나?”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
잠시 뒤, 수행 인원들과 안쪽으로 들어온 이는 다름 아닌 당혁재였다.
“지부장님.”
“에잉.”
당혁재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인상을 찡그리더니 수행원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수행원들은 등에 메고 있는 등짐을 내려두곤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주먹밥과 금창약 등을 건네었다.
“어떻게 알고 오신 겁니까?”
안 그래도 당혁재에게 연락을 하려 했지만, 마땅한 수가 없었던 참이었다.
내 물음에 내 얼굴을 빤히 보던 당혁재가 말했다.
“이보게.”
“네.”
“그 얼굴 좀 먼저 풀지 그러나.”
“네?”
“꼭 흉신악살과 같은 표정을 짓고 있지 않은가.”
“그게 무슨…….”
내가 고개를 돌려 은호를 바라보자 은호는 잠시 멈칫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화가 많이 났는가?”
“……조금 났습니다.”
“그래도 나만 하겠어?”
“예?”
“투자하겠다는 물주가 죽게 생겼으니, 여태껏 싸던 짐을 다시 풀어야 할 판이란 말일세.”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자네 악양의 흑도 세력이 무엇을 준비한 줄 아는가?”
“……숫자가 꽤나 많더군요.”
“인근의 낭인들은 물론이고, 팔악(八惡) 중 다섯을 끌어들였어.”
당혁재의 말에 장내의 있던 이들이 퍼뜩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흑도무림의 독보적 고수라 칭해지는 팔악(八惡).
그들이 악양에 와 있다는 건, 흑도 무리들이 중간에 일을 멈춰 세울 생각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진짜 무림맹과 전쟁이라도 치를 작정이란 겁니까?”
“거기까지 가지 않겠지. 하지만 자네 정도는 처리해도 충분히 수습할 수 있지 않겠나.”
“…….”
이렇게까지 투자를 한 이상 저들은 악양에 원하는 만큼의 패권을 가질 때까지 뒤로 물러나는 일은 없을 것이 분명했다.
나는 너무도 궁금하였다.
“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까지 하는 거랍니까.”
이성적으로 쉬이 납득이 되지 않는다.
이 정도면 ‘위험을 감수한다.’라는 표현을 넘어 ‘작두 위에서 칼춤을 추는 수준’이다.
한 발만 삐끗 잘못해도 발이 아작 나고, 잘못하며 목까지 잘릴 수도 있는 상황.
“그리고 아무리 명분을 얻었다 치더라도 차후에 무림맹의 보복이 두렵지도 않다고 합니까?”
당혁재는 뒷머리를 긁었다.
“꼭 그렇게 굴러가는 건 또 아니네.”
“무슨 말입니까.”
“어쩌면 이번에 확장한 세력이 계속 이어질 수도 있다는 말이지.”
악양은 강호의 적을 둔 거대 세력들에겐 절대 놓칠 수 없는 금쪽같은 도시다.
무림맹이, 점창이 이 맛 좋은 도시를 두 눈 동그랗게 뜨고 빼앗길 리 없었다.
“흑도 연맹이 있지 않은가.”
“네?”
“사황봉을 중심으로 흑도 연맹이 준비되고 있지 않은가. 아마 그 안에 들어가 자신들의 목소리를 높일 요령인 것이겠지. 그리고 흑도 연맹이 창설되고 나면 무림맹도 감히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테니.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해볼 만한 도박이라 생각한 것이겠지.”
머리가 띵하다.
그제야 머릿속에 헝클어진 조각들이 하나하나 제 모습을 찾기 시작했다.
“……젠장.”
“그래 젠장 할이야.”
“절대 물러날 생각이 안 들겠군요.”
그냥 적당히 물러날 상황이 아니다.
무림맹의 초기 설립 문파들이 지난 오백 년간 얼마나 거대한 성장을 이룩했는지를 본다면, 흑도들이라고 이번에 생기는 흑도 연맹의 초기 설립 인원이 되고 싶지 않은 이들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따서 갚으면 되지’라는 심정으로 일을 벌인 후에는 흑도 연맹의 뒤로 몸을 숨긴다.
그럼 악양 전체가 영원히 그들 손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무림맹에 지원 요청을 보내놨네만, 처리되어 무사들이 파견되는 때까지는 한참 걸릴 거야.”
“악양이 놈들 손에 떨어지고 나면 오겠지요.”
“어찌할 텐가.”
“…….”
놈들은 도박 이후에 벌어들일 어마어마한 금액을 상상하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승리의 흐름을 탄 도박사는 제 부모가 와도 못 말린다.
“지부장님이 중재를 좀 해주십시오.”
“말 같지도 않은 소릴 하게. 자네도 이야기하지 않았나. 물러날 생각이 없을 거라고.”
“그러니까. 지부장님께 부탁드리는 겁니다. ‘비무결전’으로 승부를 가리자 전해주십시오.”
“……그걸 퍽이나 받아주겠나?”
비무의 결과로 갈등을 해결해 보자는 의향을 보내도 콧방귀도 뀌지 않을 것이다.
이미 자신들이 승기를 잡은 상태에서 굳이 ‘비무결전’을 해줄 이유 따윈 없을 테니.
“받아주지 않는다면 받아주게끔 만들어야죠.”
그들이 했던 방식 그대로를 사용하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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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혈방을 비롯한 흑도들은 저녁이 되도록 유장문을 떠나지 않았다.
마치 시체를 시장 한가운데 매달아 놓아 다른 이들로 하여금 반항하지 못하게 하듯, 유장문을 물 샐 틈 없이 완벽히 포위하고 있었다.
나는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밝은 달이 어두운 구름에 몸을 숨긴 순간.
천하독행신을 펼쳐 하늘로 솟아올랐다.
핑-.
극도로 소리를 줄이는 움직임 때문에 속도는 제대로 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유장문을 벗어나기엔 충분했다.
탁.
유장문에서 삼십 장 정도 떨어진 곳에 착지한 나는 그대로 묵혈방을 향해 나아갔다.
악양에 흐르는 묘한 긴장감 때문에 술집들도 모두 일찍 문을 닫고 불을 꺼둔 상태였지만, 묵혈방 만큼은 대낮처럼 불을 밝힌 채였다.
‘팔자 좋군.’
가장 커다란 전각에선 음악이 흘러나오고 간간이 사람들의 술주정이 흘러나왔다.
전각 안에서 대단한 존재감을 가진 이들이 둘 포착되는 것으로 보아, 당혁재가 말한 팔악(八惡) 중 두 사람을 위한 주연을 벌이는 것으로 보였다.
‘나머지 삼악은 흑부궁에 있다 이거군.’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두건을 쓰고 귀식행보를 밟으며 전각의 지붕 위에 몸을 숨겼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하나둘 사람들의 잠꼬대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음악 소리도 조금씩 잦아들었다.
그리고 난 전각 안에서 느껴지는 하나의 기척을 따라 조심스레 움직였다.
예의 주시하던 기척이 전각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후.
나는 조심스레 내기를 풀어 그림자 무사를 찾았다.
‘역시나…….’
옛말에 백도는 호기 때문에 죽고
흑도는 허세 때문에 죽는다 했다.
묵혈방의 방주는 옛말을 충실히 따르는 인간이다.
한마디로 허세가 머리를 지배한 멍청이라는 뜻.
나는 천정의 기와를 빼내고 그 틈에 몸을 구겨 넣어 방안으로 들어섰다.
술에 잔뜩 절은 옷가지를 벗어내던 묵혈방의 방주는 문득 이상함을 느꼈는지 번개처럼 돌아서며 검을 뽑았다.
챙-
“누구…….”
하지만 말은 다 이어지지 않았다.
푹-.
그의 가슴에 박힌 흑룡검이 그의 심장을 멈추게 했으니까.
“너, 넌…….”
난 주취가 가득 풍기는 그의 앞에 대고 말했다.
“공포는 너희들만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두 눈을 부릅뜬 묵혈방의 방주는 쓰러지는 순간까지도 자신의 죽음을 믿지 못하는 눈빛이었다.
“누구냐!”
그때, 거대한 두 개의 기가 섬전과 같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펑!
나는 지붕을 부수고 날아올랐다.
“허허, 신기한 놈이로고 어찌 우리 기감을 피한 것이냐?”
팔악(八惡) 중 신법이 가장 뛰어나다는 사악(蛇惡) 악중학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곧장 양손에 성화멸마수를 담은 뒤 만화무적권을 펼쳤다.
퍼퍼퍼퍼퍼퍼퍼퍼퍽.
퍼펑, 퍼펑, 퍼펑, 퍼펑.
내가 쏟아낸 불주먹과 그가 받아친 각기가 허공에서 부딪치며 사방에 불꽃을 터트린다.
“윽! 검악!”
성화멸마수의 불꽃을 제대로 뒤집어 쓴 사악이 주춤거렸다.
이어 검악(劍惡)이 검풍을 일으켜 불길을 잠재우려는 순간, 나는 천하독행신을 전력으로 펼쳐 묵혈방을 도망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