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159화 (159/357)

#159. <혼란을 잠재우는 흑염룡(4)>

“불이야!”

“불! 불이야!”

“모두 깨워!”

전각에서 시작된 불길이 사방으로 퍼지며 묵혈방은 때아닌 날벼락을 맞은 듯 부산스러웠다.

술에 취해 옷고름도 제대로 여미지 못한 무사들이 휘청이는 발걸음으로 물에서 물을 퍼다 전각에 퍼부어 보지만 불길은 좀처럼 잦아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산등성이에서 굴린 수레바퀴는 돌부리에 걸릴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묵혈방과 흑부궁을 위시한 악양의 아홉 흑도 문파들은, 단지 묵혈방의 방주가 죽은 걸로는 전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악양의 흑도들이 바로 수레바퀴.

그리고 그들을 멈추게 할 돌부리는 모순적이게도, 그들이 그간 벌인 방법과 똑같은-

‘공포감 조성.’

묵혈방주가 죽고 나면 부방주가 나설 것이다.

부방주가 죽는다면 흑부궁이 묵혈방 대신 나서겠지.

그런 그들을 멈추는 방법이란, 그들의 목숨 또한 경각에 달렸다는 점을 인지시키는 것.

그것도 소모품처럼 사용되고 버려질 말단이 아닌, 결정권자의 목숨을.

“위쪽 놈들의 소갈머리란 다 거기서 거기니까.”

무림맹 내에서도 초개와 같이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는 위정자의 숫자는 손에 꼽을 만큼 적다.

하물며 흑도 나부랭이들이 백도 놈들보다 낫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애새끼들 깨워! 불이 번지고 있다고!”

“다들 유장문에 나가 있어서 사람이 부족합니다.”

“그럼 마을 사람들을 깨워! 죽고 싶지 않으면 도우라고 해!”

방주가 기거하는 거대 전각에 붙은 불은 그들로 하여금 더욱 큰 조바심을 내게 만들었다.

멀리서 그 광경을 보던 나는 다시금 귀식행보를 펼쳐 불이 난 전각과 가장 먼 곳을 향해 달려갔다.

‘이제 시작이다.’

전각에서 번진 거대한 불길 때문에 내가 있는 곳엔 거대한 그림자가 졌다.

나는 귀식대법으로 그림자 안에 몸을 숨긴 뒤 묵혈방을 돌아다니며 지시를 내리는 놈들만 살폈다.

“야 이 새끼야! 뛰어! 안 뛰어!?”

한편에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살기를 쏟아내는 거구의 남성.

사람 몸통만 한 도끼를 붕붕 휘두르는 녀석은 말을 안 듣는 부하들을 단매에 쪼개버릴 모습이었고, 그 때문에 묵혈방의 무사들은 그 거구의 근처에 다가가지도 않았다.

나는 그림자를 타고 거구의 뒤로 다가갔다.

그는 내 기척을 느꼈는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주먹을 휘둘렀다.

“야 이 새끼야! 넌 뭔데……?”

푸욱.

이물감이 가슴에 박혀 드는 것을 느꼈는지 거구의 고개가 천천히 숙여진다.

“넌 묵혈방에서 서열이 어떻게 되지?”

“…….”

어째, 조용해서 몸을 툭툭 쳐보니, 거구는 더 이상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

“이런…… 얕게 찌른다고 찌른 건데.”

나는 거구의 몸을 질질 끌어 사람들의 시야가 안 보이는 곳에 넣어두곤 다시금 그림자 사이를 오가며 적당한 상대를 물색했다.

하지만 불길을 잡느라 지휘부로 예상되는 이들이 전각과 너무 가까이 붙어있었고, 마땅한 녀셕을 찾을 수 없었다.

대신 말단 놈들을 노리기 시작했다.

“야, 넌 뭔데…….”

푹.

“이봐! 넌 왜 물을 안 옮기는…….”

푹.

싸움을 할 필요도 없었다.

물을 옮긴다고 정신이 없는 녀석들을 하나하나 잡아 숨통을 끊고 나면 다른 녀석들이 그 자리를 곧잘 채웠으니까.

어느새 시체를 쌓아두는 건물 뒤편 좁은 골목이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찼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야겠군.’

우지끈-

마침 불길을 이겨내지 못하고 전각 한쪽이 무너지며 불꽃이 사방으로 퍼졌다.

“피해! 불 번진다!”

“나와, 이 새끼들아!”

“방주님! 방주님을 본 사람은 없나!”

전각이 무너지며, 옆의 전각에 불이 붙는다.

정신이 반쯤 탈출해 버린 놈들은 불을 끄다 말고 양동이도 내던진 채 사방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쾅.

결국 가장 큰 전각이 무너지며 대연무장과 대마장 일대가 불바다가 되어버렸다.

“저기도 불 번진다! 물 가져와!”

“양동이가 부족합니다.”

“흙이라도 가져와 새끼들아!”

사람들의 시선이 다른 전각으로 집중되어 있는 순간.

나는 넋이 빠진 녀석들 뒤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한 놈을 잡아 목을 꿰뚫으려는 찰나.

머리 위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겁이 없는 놈이로고.”

“!”

고개를 든 순간 수십 개의 족적이 허공을 가득 메웠다.

푸칵-

급히 태을팔만신보를 밟아 피하자, 청강석으로 만든 바닥이 산산조각 나면서 돌부리가 사방으로 튀었다.

‘뭔 놈의 파괴력이…….’

사악(蛇惡)의 각법이 일절이라곤 들었지만, 내기도 두르지 않은 발이 청강석을 산산조각 내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내 앞에서 도망쳐 놓고 다시 돌아오다니. 내가 그리 쉬워 보이더냐?”

뒷짐을 진 채 지붕에서 내려오는 중년의 남자.

염소수염이 인상을 더욱 간사하게 보이게 만드는 남자는 클클 웃으며 말했다.

“듣기로는 흑염룡이 주둥이만 살아있는 놈이라 들었는데. 기묘한 무공을 익혔구나.”

“나는 흑염룡이 아니오.”

“흑도야행에서 네놈을 보았다.”

빌어먹을, 그때 모였던 흑도 놈들 중 하나였나?

“아! 인연이 있었군요. 그럼 좀 빠져주시겠습니까? 이건 묵혈방과 제 사이의 일인데.”

사악은 염소수염을 손가락으로 비비 꼬며 말했다.

“제대로 이야기하자면 묵혈방과 유장문의 일이지.”

“이제 돈 줄 사람도 없는데 너무 열심히 할 필요 없는 것 아닙니까?”

“나는 무조건 선불로 받는다.”

“하긴 흑도놈의 신용을 믿다니. 등신이 따로 없군요.”

“클클클. 무공은 도가의 냄새를 풀풀 풍기는 놈이 어째 주둥이는 뒷골목 왈패 같누.”

뒷짐을 진 사악(蛇惡)이 오른발을 들어 채찍처럼 여덟 번을 휘둘렀다.

퍼퍼퍼퍼퍼퍼퍽

평소 외공 수련이 부족하지 않았고 기까지 둘렀음에도 비껴맞은 부위가 뼈가 부서질 듯 아팠다.

더구나 각법의 들어가고 나아감이 어지간한 쾌검보다 빨라 틈을 노릴 수도 없는 상황.

거리를 벌려 흑룡검을 휘두르려 했으나, 사악은 그것을 두고 보지 않았다.

틈을 만들기 위해 시덥지 않은 말을 꺼낸다.

“나는 검이 일절인데 내 검술을 견식하고 싶지 않으시오?”

“뿌헐, 묵혈방주를 죽인 그 검술 말이더냐? 나는 간담이 작아 호기심이 없다.”

그러나 그는 멍청한 소정대 놈들과 달랐다.

퍼퍼퍼퍼퍼퍼퍽

삼 방에 각기가 공간을 물 샐 틈 없이 점하고, 물러서려 하면 더 큰 공격으로 위협하며 거리를 좁힌다.

“어딜 요놈아!”

달려들어 넘어뜨리려 하면 좁은 거리를 살린 공격으로 허벅지를 때리는데, 그때마다 몸이 휘청일 정도로 큰 충격이 일었다.

‘임기응변이 대단하다.’

비무나 연습에 의해 단련된 싸움이 아닌, 진짜 실전을 통해 만들어 낸 극한의 박투술.

때문에 같은 초식을 써도 다른 초식처럼 느껴지고,

다른 초식을 써도 같은 초식처럼 느껴졌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전투가 길어진 탓에 묵혈방의 인원이 하나둘 이편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더 이상 지체했다간 본래 의도했던 공포감 조성도 실패할 것이 분명했기에 필사적으로 몸을 뺐다.

물러나는 것 역시 중요한 전술.

“아직도 도망치려 하느냐?”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말이오.”

“못 가게 되었다는 전갈은 내가 전해주마.”

“사양하겠소. 난 직접 이야기하는 것이 좋소.”

태을팔만신보를 극성으로 밟으며 세 개의 환영을 만들어 낸다.

동시에 만화무적권을 펼쳐 사악의 시야를 가리고, 성화멸마수를 뽑아내어 사악의 요혈을 노렸다.

그는 필사적으로 몸을 비틀며 성화멸마수를 피하려 각기를 날렸다.

파팡, 파팡, 파파파팡.

폭발음과 함께 불씨가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아까도 느낀거지만 범상치 않은 불꽃이구나. 당최 무슨 무공이더냐?”

“흑도 때려잡는 정의의 불꽃이오.”

말과 함께 성화멸마수를 흩뿌려 틈을 벌린 나는 방향을 틀어 다리에 힘을 주었다.

헌데 그때 사악이 이상한 말을 내뱉었다.

“아직 놈은 내 것이야. 손대지 마.”

쭈뼛.

분명 내게 하는 말이 아닌데.

척추를 타고 오르는 기이한 기분에 재빨리 고개를 숙이는 순간.

쐐애애액-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머리카락이 잘려 바닥에 떨어졌다.

‘……기척을 못 느꼈어?’

사악(蛇惡)은 바닥에 떨어진 내 머리카락을 보며 혀를 찼다.

“쯧쯧, 건들지 말라니까.”

“사악(蛇惡), 고용주 죽었다. 장난치지 마라.”

“거보라니, 미리 선금으로 받아두라니까.”

“…….”

왜 전투 중에 시무룩해지는데?

아, 정말 싫다.

한 놈은 고용주가 죽었는데도 실실 농담이나 던지고, 한 놈은 돈을 못 받게 되었다며 어린아이처럼 시무룩해지고.

백도 무림에도 괴상한 인간들이 참 많지만 그래도 흑도 놈들에 비하면 지극히 정상이다.

“어라? 네 전표 도망간다.”

사람보고 전표라 하지 마! 미친놈아!

사악의 말에 고개를 든 검악(劍惡)은 어느새 내 눈앞에 나타나 퇴로를 막아섰다.

“도망치지 마라. 전표.”

“최소 사람 취급은 좀 해줘!!”

쌍천검결을 흩뿌리며 검악의 팔방을 옥죄자, 검악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순간 검악의 검이 흐릿하게 보일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핑- 핑- 핑- 핑- 핑-

나는 검악의 한 수에 기함했다.

세상에, 환검과 진검을 구분 안 하다니.

환(幻)은 미혹하여 속인다.

반대로 환과 진을 구분 않고 모두 쳐내면 미혹되지 않는다는 말.

굉장히 등신 같은 소리처럼 들리지만 실제로 목격하니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은근히 탐이 날 정도.

“돈 얼마나 받기로 했습니까?”

“많이 받는다.”

“나도 많이 줄 수 있는데.”

“얼마나 줄 거냐?”

“금 일만 냥?”

검악의 한쪽 눈썹이 들썩였다.

아니, 이걸 또 넘어온다고?

“……뭘 하면 되지?”

“묵혈방놈들이랑 저기 사악(蛇惡) 좀 죽여주십시오.”

이야기를 듣던 사악이 투덜거리며 각기를 날렸다.

“저, 저 등신 저거, 뭘 또 듣고 있어!”

“…….”

검악은 시무룩하니 입술을 삐쭉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사악, 성격 나쁘다. 뒤끝 있다. 두고두고 괴롭힌다.”

나는 철판교의 수법으로 사악의 각기를 피하며 말했다.

“여기서 죽여버리면 되지 않습니까.”

“사악, 죽으면 일 못 얻는다.”

“둘이 친구입니까?”

대답은 사악에게서 돌아왔다.

“죽마고우라고 하지.”

오호라. 친구라 이 말이지.

“이래서 어른들이 친구를 잘 사귀라고 했군요.”

“저놈이 팔악(八惡) 중의 하나가 된 것도 다 이 몸 덕분이지.”

사악의 말마따나 두 사람이 합을 맞춘 지 오래였는지, 서로가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상당히 잘 메꿔준다.

허리 위쪽으론 검악이 혼을 빼놓고, 허리 아래쪽으론 사악이 발을 엉키게 만든다.

가뜩이나 한 명을 상대하기도 버거운 상황에 두 사람과 손속을 나누자니 도망갈 엄두도 나지 않는다.

나는 두 사람의 무공을 하나하나 머릿속에 담으며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친구 인생 조져놓은 게 그리 자랑입니까?”

“흑염룡처럼 악명도 명성이다.”

시벌, 언제부터 내 별호가 악명이 된 건데?

질문이 목구멍까지 치솟아 올랐지만,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검날에 다시금 삼켜졌다.

‘뭔 놈의 검법이 기척이 없어!’

좀 전의 감각이 내가 틀린 것이 아니라는 듯 이번에도 검악의 검법엔 기척이 없었다.

속도는 둘째치고, 감각에 잡히지 않으니 시선을 돌릴 수가 없다.

검악에 시선을 고정하자니 사악이 하반신을 집요하게 노려 온다.

“저기다! 저기 침입자다!”

불길에 정신이 빠져있던 묵혈방의 인원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나는 한 손에 성화멸마수를 품은 만화무적권을, 다른 한 손에는 만해천지검결을 펼쳐 만검 두 자루를 생성했다.

퍼펑, 퍼펑, 퍼펑.

사악의 각법과 마주한 만화무적권이 사방에 불꽃을 터트린다.

채채채채채챙.

만검이 흩뿌리는 쌍천검결이 검악의 검에 산산이 흩어진다.

검기를 품으면 더욱 강력하겠지만 사악을 상대하느라 시간을 벌 수가 없었다.

어느새 일대를 점거한 묵혈방의 인원들은 전투의 여파로 쉽사리 다가오지 못했지만, 언제든 무기를 들고 내게 돌격한 기세를 흉흉하게 풍겨내고 있었다.

“전표, 포기해라. 팔 잘린다.”

“…….”

그의 말마따나 난 욕지거리도 못 내뱉을 만큼 급하게 검과 손을 놀리고 있었다.

마치 딱 들어맞는 두 개의 걸쇠 사이에 끼어 있는 이물질 같은 기분이랄까.

그야말로 한 치만 흔들려도 죽음을 면하기 어려운 상황.

나는 되려 그들의 품속으로 몸을 던졌다.

검악의 검날이 눈썹 위를 살짝 지나가고, 사악의 발끝이 대퇴부에 날카로운 상처를 남긴다.

‘지금!’

난 만화무적권을 회수한 뒤 왼손마저 검악에게 뻗었다.

“내 발은 맞을 만하다 이것이냐?”

사악이 내기가 뚜렷하게 어린 발을 전력으로 휘두른다.

맞는 순간 뼈는 물론이고 피부 또한 온전치 못할 것이라 예상되는 파괴력.

회수한 왼손으로 검악의 검날을 잡았다.

피부가 갈라지고 핏물이 분수처럼 터져 나온다.

“응?!”

검악이 놀란 표정을 표정을 짓는 사이 이화접목의 술인 연화를 전력으로 펼쳐 검악의 검로를 사악의 발로 비틀었다.

푹--.

펑!

고기가 꿰뚫리는 소리와 응축된 내기가 폭발하는 소리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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