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 <혼란을 잠재우는 흑염룡(5)>
“끄아아악!”
사악(蛇惡)이 자신의 허벅지에 깊게 파고든 검악의 검을 보며 비명을 내질렀다.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한 묵혈방 또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이, 오 장이나 날아간 검악이 피를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표…… 죽인다…….”
“그쪽을 때린 건 사악인데 왜 절 죽입니까?”
검악(劍惡)은 고통스러워하는 사익을 한번 본 뒤 말했다.
“……사악은 나중에 때려주고 지금은 널 죽일 거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납득이 좀 가는군요. 물론 잡을 수 있다면 말입니다.”
나는 검악과 묵혈방도들이 움직이기 전에 천하독행신을 펼쳐 하늘로 뛰어올랐다.
퍼펑!
흙거죽이 파도처럼 출렁이며 달려들던 검악의 시야를 가리는 사이, 전각을 밟고 곧장 묵혈방을 빠져나왔다.
필사적으로 따라나서려 하는 검악의 비명소리가 들린다.
“내 전표!!”
그러니까 왜 계속 사람을 물건 취급하고 난리야.
나는 곧장 하오문의 지부로 향했다.
시간이 부족하지만, 묵혈방의 소식이 유장문에 전달되기까진 여유가 있을 것이다.
그래도 혹시 몰라 속도를 높여 포목점으로 향했을 때 나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어라?”
밤중이라 포목점주를 깨울 각오까지 하고 있었건만 포목점엔 불이 켜져있고, 그 앞엔 해령이 나와 있었다.
“어찌 된 겁니까?”
“오실 거라 생각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역시나 하오문주의 첫째 제자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죄송하지만 시간이 없어 본론만 말하겠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소문을 좀 퍼트려 주십시오. 유장문과 백도 문파들이 돈을 모아 살수들을 고용했고, 그들이 본격적으로 활동 예정이다. 라고요.”
“그걸 믿을까요?”
“안 믿겠죠.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그저 신경 쓰이게만 할 생각이니까요.”
백도라면 이런 소문이 돈다 한들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반면, 살수를 고용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흑도의 입장에서 이런 선택은 또 합리적으로 느껴질 테니, 압박감을 느낄 것이다.
“그 이후엔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기호지세(騎虎之勢)라 이미 악양의 흑도들을 멈추긴 늦었습니다. 대신 발을 걸어 넘어뜨릴 생각입니다.”
“……‘비무결전’을 생각하십니까?”
“네.”
해령의 얼굴에 수심이 어렸다.
“설사 비무결전이 이뤄져도 아마 팔악(八惡)이 나올 겁니다. 팔악(八惡)은 쉬운 상대가 아닙니다.”
나도 상대해 봐서 안다. 오랜 시간 손발을 맞춘 두 사람이 방심하지 않았다면 이화접목의 수는 통하지 않았을 테니까.
“대응 방법은 생각해 두었습니다.”
“……알겠습니다. 또 필요하신 건?”
“혹시 하오문에 무공을 쓸 줄 아는 자들이 얼마나 됩니까?”
“그건 어찌?”
“이번 일로 백도 문파가 여럿 무너졌고, 흑도 문파에게도 후폭풍이 칠 겁니다. 사람들을 이끌어서 이권을 차지할 수 있는 기회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되겠습니까?”
해령은 내가 벌인 잔치에 자신의 숟가락이 올라가는 것이 심히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앞으로도 이렇게 흑도와 백도의 줄다리기가 반복될 거라면 차라리 악양을 세 개로 나누는 것이 낫다.
그럼 백도든 흑도든 섣불리 움직이지 못할 테니.
최소 중·소 문파들이 폭풍의 여파에 휩쓸려 나갈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일부러 그녀를 안심시켰다.
“저에게 수익을 나눠주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이 정도 보상이 없으면 저도 일할 맛이 안 납니다.”
#
숨이 넘어갈 만큼 빠르게 유장문에 복귀했다.
나갈 때와는 다르게 이번엔 그냥 소리를 내고 유장문 내에 착지했다.
쿵!
갑작스런 소란에 유장문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있었지만, 뭔가 행동을 취하는 이들은 없었다.
“세상에! 진 공자 뭘 하다 온 거예요?”
“네?”
“이 상처는 다 뭐고요. 세상에 손이 왜 그래요?”
그제야 내 몸을 살피니 왼손뿐만 아니라 팔과 다리에 상처가 가득하다.
하긴 팔악 중 이악을 상대했는데 이 정도 상처로 끝난 거면 선방한 것이다.
“별것 아닙니다. 그보다 지금 다들 뭐 하고 있습니까?”
“진 공자가 지시한 대로 번을 서고 돌아가며 자고 있었어요.”
쪽잠이라도 잤으니 피곤은 조금 풀렸을 것이다.
“모두 깨워서 싸울 준비를 하라고 일러주십시오.”
“네?”
“이번엔 널리 퍼지지 말고 이곳 대마장에 다 모이라고 전해주세요.”
“무슨 일 있어요?”
“곧 놈들이 움직일 겁니다.”
성모란은 반신반의하면서 사람들을 깨우러 갔고, 나는 대충 응급처치를 마쳤다.
사람들이 모이고, 대마장 공기는 고요하게 내려앉았다.
그리고 잠시 뒤, 담장 밖에서 소란이 일기 시작했다.
“그게 뭔 개소리야!”
“침입자라니? 불이라니?”
“뭐? 누구라고?”
누군가를 찾는 듯한 소란은 점점 커져 이내 함성처럼 들리기 시작했고, 거친 투기가 담장을 넘어 유장문 내에 전해질 정도였다.
꿀꺽.
대마장에 모인 사람들은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밖의 상황을 보며 굵은 침을 삼키고 검을 고쳐 잡았다.
쾅!
이미 반쯤 부서진 담벼락이 무너지며 낫을 든 사내를 위시하여 흑도들이 유장문 안으로 들이닥쳤다.
“진소운!”
흑도들이 다짜고짜 나를 찾자, 성모란을 비롯한 내 일행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본다.
이번엔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녔냐는 듯한 눈빛.
나는 손안에 광천신장을 모으기 시작했다.
꾸릉 꾸릉 꾸릉.
“어엇?”
“저, 저건.”
이미 광천신장을 한번 맛본 덕인지 묵혈방의 무사들은 주춤거리며 들어서려 하지 않았다.
낫을 든 사내만이 유일하게 두려움 없이 우리 앞으로 나섰다.
“진정 네놈이 묵혈방에 기습을 한 것이냐?”
“무슨 소리요?”
태연한 내 반응에 낫을 든 사내가 이를 뿌드득 갈았다.
“방금 본 방에서 소식을 전해왔다. 침입자가 묵존각을 불태웠다고.”
“저런! 그런 일이 있었소? 얼른 가봐야 하는 것 아니오?”
“진소운!!”
“한 발자국만 더 움직이시오. 어제 맛본 광천신장을 다시금 맛보게 해드리겠소.”
낫을 든 사내는 몸을 움찔거리면서도 앞으로 나서진 않았다.
“한 손으로 열 손을 당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부방주를 데려오시오. 내가 할 말이 있으니.”
순간 사내의 얼굴이 와락 구겨진다.
“……어째서 방주가 아닌 부방주를 찾는 것이냐? 난 불이 났다 했지, 방주님의 죽음을 말한 적이 없거늘.”
나는 애써 놀란 척 대답했다.
“아차! 나의 실수.”
“……역시나 방주를 암살한 것이 네놈이로구나.”
낫을 든 사내의 말에 유장문 사람들이 소리 없는 기함을 질렀다.
금·은·동은 금방이라도 졸도할 듯한 표정.
“부방주에게 전하시오. 내일 오지 않는다면, 유장문이 멸문한다 한들 그다음 죽을 건 부방주 당신이라고.”
“으드득.”
팽팽한 공기가 이어지길 잠시.
이빨이 부서져라 나를 보던 낫을 든 사내는 이내 몸을 돌려 돌아갔다.
한차례 긴장이 지나가자 유장문의 인원들은 물론이고 태을문의 아이들도 자리에 털썩털썩 주저앉았다.
“휴……. 무서워 죽는 줄 알았네.”
금표의 말에 나는 광천신장을 거둬들이며 혀를 찼다.
“겨우 저런 흑도 따위가 무서워서야 강호 생활을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런데 어째, 사람들의 표정이 괴상하게 일그러진다.
“엥? 무슨 소리십니까?”
“……응?”
금표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
“사형이 무섭다는 겁니다. ‘아차! 나의 실수??’ 대체 뭡니까? 그 소름 끼치는 대사는. 오줌 쌀 뻔했습니다.”
은호가 몸을 부르르 떨며 거들었다.
“형, 그 말 하면서 씨익 웃는 거 봤어? 난 귀신인 줄 알았다니까.”
아무리 그래도 대사형한테 귀신이라니.
“…….”
쩝.
그렇게 이상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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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밝고 유장문 앞마당엔 작은 탁자가 놓였다.
무림맹의 악양 지부에서 가져다 놓은 것으로, 탁자 주변엔 세 개의 의자가 놓여있었다.
이 검박한 자리에서 유장문의 미래가 결정된다.
나는 아침 일찍 유장문주를 찾아 오늘 해야 할 이야기와 협상할 내용들을 알려주려 했다.
하지만 유장문주는 한사코 거절했다.
“이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네. 자네가 대신 나가주게.”
“네?”
“이미 자네가 아니었다면 유장문은 멸문했을 것이고, 이곳에 있는 이들은 모두 고혼이 되었겠지. 그러니 그 자리에 나서는 사람은 내가 아닌 자네가 되어야 하네.”
물론 그의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이건 문파의 존속이 달린 자리다.
타 문파의 제자가 나서선 안 되는 자리인 것.
“나는 나보다 압도적인 힘을 가진 흑도를 상대하는 방법을 모르네. 하지만 자네는 묵혈방에 타격을 주고 묵혈방주의 목숨까지 빼앗았지. 지금 이 자리에는 내가 아닌 자네가 앉아야 하네.”
“…….”
“걱정하지 말게나. 내가 선택하지 않았다 해서 책임까지 회피하진 않겠네.”
그렇게까지 이야기하자 나도 별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렇담 두 가지만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뭔가?”
나는 아직 유약하게 흔들리고 있는 문주의 눈을 응시했다.
“어떤 것까지 걸 수 있으십니까?”
“…….”
“뭘 걸 수 있는지를 알아야 협상을 할 수 있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문주는 고개를 한번 끄덕인 후 내 눈을 똑바로 보았다.
“……내 목과 유장문의 현판을 걸겠네.”
“아버지!”
“““문주님!”””
장우재와 유장문의 문도들이 깜짝 놀라며 나섰지만, 문주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네. 부디 우리 유장문의 사람들이 유장문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죽지 않게만 해주게.”
피폐한 모습은 여전했지만 두 눈만큼은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자신의 자리에 끝까지 책임을 다하겠다는 모습.
난 그의 눈동자를 보며, 어쩐지 유장문의 끝이 결코 오늘이 아니리라는 강한 감정을 느꼈다.
정마대전 후에도 끝까지 명맥을 유지했던 문파들의 수장들은 대개 저런 눈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때, 옆에 섰던 장우재가 제 아비와 똑같은 눈빛으로 말했다.
“그렇담 저도 걸겠습니다!”
“우재야!”
“아버지! 아버지만 사지로 내몰 수 없습니다. 진 대표님! 저도 함께 책임을 지겠습니다.”
장우재의 태도와 눈빛이 너무도 완강하여 문주도 더 이상 그를 말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알겠습니다. 두 분의 목숨 확실히 받았습니다. 그럼 두 번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나는 숨을 한 차례 골랐다.
어쩌면 유장문의 문주는 물론이고 유장문의 사람들 모두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는 질문이었기에.
“문주님께선 묵혈방의 고수를 상대로 승리를 따내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무공의 강함을 가늠할 척도를 말하라는 건 무인들의 가장 근본적인 자존심을 건드리는 행위.
대저 흑도들이나 왈패들이 상대의 심기를 건드릴 때나 쓰는 고약한 도발이나 다름없는 이야기다.
“…….”
역시나 유장문 무사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
그럼에도 해야 했다.
작전은 정확한 정보가 있을 때만 완벽하게 세울 수 있는 것이니까.
“내가…… 누굴 상대해야 하는가?”
문주는 이미 내가 뭘 계획하는지 알고 있다는 듯 말했다.
눈치가 제법 빠른 사람이로군.
“부방주입니다.”
“……!”
묵혈방의 방주가 비록 허세가 머리를 지배하여 뒈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묵혈방의 방주나 부방주의 실력을 얕잡아 볼 순 없다.
무당과 점창이 지배했던 악양에서 오십 년을 버텨온 흑도 문파의 수장들이니.
유장문의 문도들도 무리라 생각하는지 안색이 회색빛으로 변했다.
‘역시나 어렵나.’
비무결전은 최대한 당사자들만으로 치르게 해야 한다.
팔악(八惡) 출신들이 비무결전에 모두 들어오는 순간 승부는 이미 끝나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이니까.
어쨌든 팔악 출신들에게 최소한의 자리만 준다 해도 정작 유장문의 사람이 패배하면 그 또한 문제가 심각해진다.
대답 없는 문주의 태도에 나는 남궁선화를 보았다.
지금 내가 쓸 수 있는 두 번째 패.
최소한 남궁선화가 참석한 비무결전은 이의를 제기하진 못하겠지.
그렇게 계획을 여러 가지로 굴리고 있는 사이, 유장문의 문주가 침묵을 깼다.
“이길 수 있네.”
“네?”
아차, 너무 놀랐다.
난 나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 놀라며 수습하려 했지만, 문주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네. 세간에는 내 실력이 그리 뛰어나지 않다고 알려져 있지. 하지만 내겐 평생에 숨겨둔 비기가 있다네.”
문주가 잠깐 말을 멈추고, 유장문의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숨을 한 차례 고르고 올곧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내가 이긴다 생각하고 작전을 짜주게.”
순식간에 주변의 공기가 변한다. 벅차오른 듯한 유장문 사람들의 얼굴.
나는 고개가 끄덕여졌다.
항시 삼 할의 실력은 숨기라는 강호의 격언을 실천해 왔던 것인가?
새삼 유장문의 문주가 다르게 보였다.
“그럼 되었군요. 유장문의 한 분만 더 계시면…….”
“진 대표님!”
역시나 제일 먼저 대답을 한 이는 장우재.
그는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강하진 않지만,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와 확신이 들어찬 눈빛과 행동.
무림학관 내 세력이 없는 이들이 장우재를 따르는 건 우연이 아니었다.
“그럼 되었군요.”
내가 고개를 끄덕인 순간, 무림맹의 행원이 다가와선 모두 모여있다는 말을 전했다.
협상의 자리로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잠깐, 비무결전은 총 세 명으로 치르지 않던가?”
문주가 의아하다는 듯 물어온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춰 그를 한번 본 후, 말했다.
“제가 나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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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혈방, 흑부궁, 귀검각, 창귀문, 혈사문, 서악문……등등.
악양에서 이번 일을 주도하고 있는 흑도 문파 아홉 곳이 몰려왔다.
유장문 일대에만 거의 삼천에 가까운 인원들이 모여있는 것이다.
인근에서 장사를 하던 자들은 매대를 치우고, 창문을 열었던 자들은 혹여나 눈이라도 마주칠까 꼭꼭 잠갔다.
근데 웃긴 것은 개중에 나와 마령고원의 일을 함께 겪었던 이들도 있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손을 흔들고 검을 들어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켰다.
‘미친놈들.’
나는 천천히 탁자로 다가갔다.
상석에는 당혁재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앉아있고, 전면에는 묵혈방의 방주로 보이는 자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그의 뒤로 검악(劍惡)과 다리에 붕대를 감은 사악(蛇惡)이.
그 옆으로 흑부궁의 궁주와 창악(槍惡), 호악(虎惡), 부악(斧惡)이 섰다.
그야말로 이 자리가 잘못되면 유장문을 쓸어버리겠다는 노골적인 신호.
“유장문의 문주는 어디 가고 어째 네놈이 나오는 것이냐?”
“문주님께 모든 선택권을 이양받았습니다. 어차피 저를 보고 싶으셨던 거 아니었습니까?”
묵혈방의 부방주. 소경추가 악귀 같은 표정을 지었다.
“감히 묵혈방에 그따위 짓을 해놓고 협상이 가능할 거라 생각하느냐?”
“그렇다면 왜 여기까지 기어 나온 겁니까?”
“기, 기어 나와……?”
인상을 찌푸리던 당혁재가 기함하며 전음을 보냈다.
-자네 말 좀 가려 하면 안 되겠나?
당연히 안 되지, 이런 자리에선 특히.
전음을 가볍게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댁들도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이곳까지 나온 것 아닙니까.”
“……말조심해라 애송이. 중간에라도 그냥 모두 밀어버리는 수가 있으니.”
“퍽이나 가능하겠군요.”
“뭐?”
“댁들이 각기 문파로서 행동하지 않고 단체 행동을 하기 시작하면 무림맹이 본격적으로 나설 겁니다. 흑도연맹이 아직 창설되지도 않았는데. 무림맹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 수나 있겠습니까?”
“…….”
당혁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더불어 흑도연맹에서도 무림맹의 심기를 건드린 그대들을 창설 인원으로 받아들이기 어렵겠군요. 어찌 되었든 흑도연맹은 무림맹을 무시할 수 없으니 말입니다.”
소경추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탕!
내가 탁자를 내려친 소리에 살짝 놀라며 분에 찬 모습을 보이는 소경추.
모두의 이목이 내게로 쏠렸다.
“여러분들은 지금 엿 같은 상황에 몰려있다 이 말입니다.”
“…….”
주도권이 점차 내 손에 들어오는 게 느껴진다.
나는 등을 젖히며 느긋하게 말투를 바꾸었다.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비무결전으로 묵혈방과 유장문 간 전쟁의 끝을 내죠.”
“그걸 받아들일 거라 생각하느냐?”
나는 가만히 소경추를 바라봤다.
“…….”
양손을 모아 입을 가리고 그가 불편해할 때까지 계속 그를 노려보았다.
“나는 지금 매우 심기가 불편한 상황입니다.”
팔악 출신들과 흑도 문파의 수장들을 한 번씩 눈에 담았다.
“그대들은 항복을 표명한 상대를 무자비하게 공격했고, 전투의 의지를 상실한 이들을 쫓아가 죽였습니다.”
탁- 탁-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탁자를 두어 번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지금 내 눈엔 그대들은 사람 새끼가 아니라 짐승 새끼로 보인다는 말입니다.”
“이 새끼가!”
“어이! 말조심해!”
소경추를 비롯한 각 흑도 문파들의 수장들이 불편함을 내비쳤지만 상관없었다.
애당초 흑도연맹을 만들려 했던 이유는 더 큰 악을 함께 대비하자는 것이었지, 속이 곪은 사과를 참고 삼키자는 뜻이 아니었으니까.
“만약 유장문이 묵혈방의 손에 결국 멸문을 당하게 된다면, 난 모든 일을 제쳐두고 묵혈방의 방주, 부방주, 당주, 부당주. 어떤 놈이건 다 죽여버릴 겁니다. 내가 방주를 죽였던 방식 그대로.”
“…묵혈방이 그리 만만하게 보이더냐!”
“보았으니 알 겁니다. 내 은신술은 누구도 알아차리기 힘들고 내 신법은 묵혈방의 누구도, 심지어 사악(蛇惡)도 쫓을 수 없습니다. 당신들은 평생 불편하고 불안한 잠자리를 가져야 할 겁니다.”
“…….”
소경추가 고개를 돌려 사악을 바라본다.
사악은 나를 죽일 듯한 얼굴로 노려보기만 할 뿐,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내 말이 틀림없다는 걸 증명해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
“그따위 짓을 벌였다간 너도 무림맹에서 활동하기 힘들 거다.”
나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무림맹에서의 활동을 걱정했다면, 애당초 흑도야행 같은 일을 벌였겠습니까?”
“…….”
한참이나 나를 노려보던 소경추가 침음을 삼켰다.
“비무결전의 결과는?”
“유장문이 지면, 터와 사문, 현판과 사업 등을 모두 넘기고 악양을 떠날 겁니다. 다시는 어떤 곳에서도 유장문이라는 이름을 듣지 못할 겁니다. 묵혈방이 지면 유장문에 전쟁으로 인해 입은 피해 보상을 하고, 죽은 자의 가족들에게 위로금을 전달하는 겁니다.”
“…….”
“이게 불공평하다는 개소리는 하지 않길 바랍니다.”
“놈! 입이 걸구나.”
나는 턱짓으로 사악과 검악을 가리켰다.
“만약 저 두 사람이 없었으면 어제 죽는 건 방주만이 아니었을 겁니다.”
“…….”
“초청한 오악으로 세 자리 모두 채울 생각도 마십시오. 최소 두 자리는 묵혈방의 무사들이 나서야 합니다. 이게 유장문과 묵혈방의 전쟁이라는 걸 잊지 마십쇼.”
소경추가 낫을 든 사내를 바라봤다.
낫을 든 사내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좋다.”
“결전은 일주일 뒤, 이곳에서 치르겠습니다.”
“지금 당장 치르겠다.”
“묵혈방의 시체도 치우지 않을 생각입니까?”
“……그렇담 삼 일 뒤에 이곳에서다.”
삼 일…… 삼 일…… 아무리 생각해 봐도 빡빡한 시간이다.
하지만 저 흑도들의 불만가득한 표정과 살기 어린 시선을 보건데 그 시간도 아슬아슬해 보인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유장문으로 걸어가다가 다시금 뒤를 돌아보며 사악(蛇惡)을 가리켰다.
“근데 저 발 병신은 굳이 왜 데리고 온 겁니까?”
사악(蛇惡)이 나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뭘 봐, 봐서 뭐 어쩔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