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161화 (161/357)

#161. <혼란을 잠재우는 흑염룡(6)>

“거리가 조용하군요.”

내 말에 당혁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조심하는 것이지. 두려우니까.”

악양이 조용하다.

그간의 침묵이 병장기 소리에 두려워 고개를 숙인 거라면, 지금은 마치 폭풍 전야처럼 고요하다.

거리를 다니며 엿을 파는 사람, 떡을 파는 사람들이 자취를 감췄고, 호객행위를 일삼던 상인들도 매대만 내어놓은 채, 연신 주변을 살피고만 있었다.

“살수들이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돌던데. 그거 자네가 한 소행이지?”

“……왜 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필요 이상으로 빠르게 소문이 돌고 있으니까. 아무리 호사가들이라도 이야기를 전하는 데 물리적 한계가 있는 법인데 말이지. 근데 그게 통할 거라 생각하나?”

역시나 똑똑한 인간은 이렇게 단순한 방법으로 속이기 쉽지 않다.

“지부장님 정도 되는 분이야 사실과 거짓을 분석하고 판별하는 데 능하지만, 놈들은 그렇지 않죠.”

지금 흑도 문파들이 움직임을 멈춘 것만 봐도 그렇다.

다들 하나같이 호위들을 제 숙소까지 들이고, 경계를 더욱 강화한 꼴을 보이고 있다.

세력을 확장하는 것도 좋겠지만, 묵혈방의 방주처럼 뒈지면 부하들 좋은 일만 시켜주는 꼴이니까.

덕분에 잠시지만 악양은 휴전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불안을 견디지 못한 몇몇 백도 문파들은 끝내 짐을 싸서 악양을 떠났다.

차후 악양에서의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는 일이니까.

“그럼 나 다시 짐을 싸도 되겠는가?”

“왜 그런 질문을 하십니까?”

“자네가 죽으면 태을문에서 내게 투자해 주겠나?”

재수 없게 왜 그딴 말을 하지?

“왠지 살아남더라도 투자 약속을 철회하고 싶은 심정이군요.”

당혁재가 황당하단 표정을 지었다.

“사실이 그렇지 않은가. 자네가 죽으면 내가 태을문까지 가서 뭘 하나?”

“이 양반이 진짜. 듣자 듣자 하니까 죽긴 누가 죽습니까!”

“묵혈방 측에선 분명 검악이 나올 거야. 검악은 흉신삼악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평가받는 존재네.”

흉신삼악은 팔악(八惡) 중 삼좌를 차지하는 이들을 이야기한다.

용악(龍惡), 혈악(血惡), 도악(道惡).

이 세 사람은 사실상 다른 팔악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위험도를 가졌다 판단되고 있으며 동시에 무림맹의 주요 관찰 대상이기도 했다.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더구나 검악은 묵혈방주가 죽은 일과 내게 당한 일 때문에 원한을 가득 품고 있는 상태.

다른 팔악(八惡)의 인원이 나온다 한들 제가 나오겠다 우길 가능성이 크다.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상황.

나는 자꾸 근심에 빠져드는 생각을 털어내며 말을 돌렸다.

“부탁드린 건 어떻게 되었습니까?”

“장사에서 출발했다는 소식을 들었네. 아마 모레쯤이면 도착하겠군.”

“이틀 말입니까? 그럼 늦지 않습니까?”

“그럼 어떻게 하나, 물리적인 거리라는 것이 있는데.”

“애초에 왜 악양 지부장까지 맡으시면서 악양에 당가 지부 하나 열지 않으신 겁니까?”

“나 참 누가 들으면 숫제 맡겨 놓은 줄 알겠군.”

당혁재가 입을 삐쭉거렸다.

“투자자가 죽는 꼴을 보고 싶으신 겁니까?”

“……쉬지 말고 최대한 빨리 오라 전했네. 아슬아슬하지만 제시간에 도착할 거야.”

나를 보는 당혁재의 시선에 불안이 가득했다.

“부디 죽지 말게.”

문득 나는 그의 진심이 궁금해졌다.

“순수하게 제가 걱정돼서 그런 겁니까? 투자자가 죽을까 봐 그런 겁니까?”

순간 당혁재의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렸다.

“…….”

“됐습니다. 대답은 듣지 않겠습니다.”

검악도 그렇고 대체 사람을 뭘로 보는 거야?

#

유장문 안으로 들어선 나는 연무장을 지나다가 기이한 광경에 걸음을 멈췄다.

‘뭐 하는 거람?’

유장문의 문주 장사경이 유장문 곳곳을 보면서 산책을 하고 있었던 것.

이틀 뒤면 생사대적을 펼쳐야 하는 사람치고는 너무도 여유롭다.

‘자신이 숨겨둔 한 수를 완벽하게 믿는 건가?’

보통 이런 생사대적을 앞둔 상황이라면 촌음의 시간도 아껴 수련을 하는 것이 당연할진대 그는 어찌 된 일인지 여유만만한 상황.

“응? 진 소협!”

나를 보고 반가운 얼굴을 하는 장사경에 나는 천천히 포권을 쥐며 인사를 올렸다.

“나와 계셨습니까?”

“유장문의 시설들이 얼마나 망가졌는지 확인하던 참이네.”

장사경은 유장문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리 먼 미래까지 준비하는 모습을 보일 수 없는 노릇 아닌가.

“잠시 함께 걷겠나?”

“네.”

장사경은 천천히 문 내를 걸으며 이곳저곳을 소개해 주었다.

어릴 적 자신이 수련을 땡땡이치고 몰래 숨었던 헛간.

본인이 혼례를 올렸던 공간, 장우재가 처음 태어났던 방 등등.

평생 유장문 내에서만 살아왔던 이였기에 쌓을 수 있는 이야기를 천천히 풀어내었다.

“미안하네.”

그러다 갑작스레 사과를 건네는 그의 모습에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뭐가 말입니까?”

“우재가 자네를 좋아하고 있는 것을 아는가? 아니지…… 동경하고 있다고 표현하는 쪽이 맞겠군.”

“네?”

“학관에 간 뒤로 우재가 보내는 전서의 절반 이상이 자네에 대한 이야기였지. 얼마나 멋진 사내이며, 얼마나 대단하고 호방한지를 한 번도 빠짐없이 적어 보내곤 했었네.”

“…….”

“자신도 그런 사내가 되고 싶다고, 자네와 함께 활동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었지.”

“그렇습니까?”

“그래서 내가 말렸네. ……자네가 걷는 길은 너무 힘들고 너무 고통스런 길이니까. 편한 길을 걸으라고.”

어떤 부모든 자식이 가시밭길을 가는 걸 원치 않겠지.

“이해합니다. 당연한 선택이고요.”

“그래서 더 염치가 없다네. 편한 길만을 선택하다 결국 자네의 도움을 받게 되었으니.”

장사경은 포권을 쥔 채 고개를 깊숙하게 숙였다.

주위에 유장문의 제자들이 있건만 그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놀라며 얼른 그를 일으켜 세웠다.

“사람들이 볼까 무섭습니다. 그만 일어나시지요.”

고개를 든 장사경의 두 눈엔 복잡한 감정이 가득했다.

“자네를 보면 참으로 존경스럽네. 우리 우재가 자네를 동경하는 것도 이해가 가.”

“과찬이십니다.”

“참으로 후회되는군. 본래 삶이란 고통스러운 게 당연한 것을 왜 항시 피하려고만 했을꼬.”

다시 걷기 시작한 우리 둘 사이엔 더 이상 대화가 없었다.

그렇게 산책마저 끝내고 돌아서려는 사이, 우리의 시야에 장우재가 들어왔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무림맹에서 지원 나온 이에게 전낭을 넘겨주고 작은 목갑을 받는 장우재.

나는 목갑의 모양새에 묘한 이끌림을 느끼고 그에게 다가갔다.

“아! 진 대표님!”

무림맹 사람이 후다닥 도망치듯 자리를 뜨고 장우재는 어색한 듯 입가에 미소를 짓는다.

분명 뭔가 있다.

“그게 뭡니까?”

“응?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저 사람과 주고받은 것 말입니다.”

“……아, 별것 아닙니다. 비무결전을 앞두고 조금 도움이 될까 해서 싸구려 영약을 받았습니다.”

“잠깐 봐도 되겠습니까?”

“……정말 별것 아닙니다. 진 대표님께서 필요하시다면 제가 더 좋은 것을 구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니요. 그게 뭔지 보고 싶군요.”

나는 그 말과 함께 백봉수를 뻗어 장우재의 품 안에 든 목갑을 꺼내었다.

“어엇! 대, 대표님!”

“…….”

역시나 많이 봤던 모양새다.

목갑을 빼앗으려는 장우재를 미뤄둔 채, 목갑을 열자 거무튀튀한 붉은색을 띠는 단환이 나왔다.

“…….”

나는 시선을 돌려 장사경을 바라봤다.

그 또한 꽤나 놀란 눈빛.

나는 탄식을 겨우 삼켰다.

“폭혈단이 무슨 물건인 줄 알고 함부로 건드시는 겁니까?”

“…….”

“이길 자신이 없다면, 그냥 다른 사람을 내보내면 되는 겁니다.”

“아닙니다! 전 분명 이길 수 있습니다. 다만 확실한 승리를 위해 준비했던 것입니다.”

심정은 이해한다.

자신의 사문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보겠다는 각오겠지.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어제와 다르다, 자기파괴적 행위를 저지를 만큼의 위급한 상황이 아니다.

콰직.

목갑과 함께 폭혈단을 짓이기자 장우재가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나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는 유장문의 그 누구도 원치 않는 일일 겁니다.”

그러고 이내 시선을 장사경에게로 옮겼다.

“특히 아버님이 보고자 하시는 광경은 더더욱 아니실 거고 말입니다.”

장사경은 돌처럼 굳은 얼굴로 장우재를 보고 있었다.

“…….”

장우재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을 때.

장사경이 엄숙하게 말했다.

“따라오거라!”

나는 두 사람이 자리를 떠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

죽음을 자처하는 모습을 부모에게 보이는 것이란 얼마나 창피한 일이던가.

장우재는 방에 들어온 뒤에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장사경의 무거운 목소리가 들렸다.

“네 잘못이 무엇인 줄 아느냐?”

“……신체발부(身體髮膚) 수지부모(受之父母), 불감훼상(不敢毁傷) 효지시야(孝之始也). 효의 가장 기본을 어겼습니다.”

장사경의 입에서 버럭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니다!”

“……!”

장우재가 놀란 표정으로 제 아비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답답함이 가득 어려있었다.

“정녕 모르겠느냐! 바로 네 책임을 다하지 않으려 했음이다!”

“……무슨.”

“너의 책임이 무엇이냐! 유장문의 후계로서 유장문의 사람을 보호하고 그들을 살려내는 것이 아니더냐!”

“…….”

“유장문을 위해 죽음을 각오할 수 있는 이는 문주뿐이다. 네가 벌써 유장문의 문주더냐?”

장사경의 눈빛에 점차 실망감이 어리게 시작했다.

“어찌 어려운 부담감에서 벗어나려 죽음으로 회피하더냐. 네가 그리 동경하던 진 소협이 그리하더냐?”

“아버님…….”

“그를 그리 오래 지켜보았다면 배우는 점이 있을 것 아니더냐. 진 소협을 보고 배운 부분이 고작 그런 것이냐 물었다.”

“…….”

고개를 푹 숙인 아들을 바라보던 장사경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어제 진 소협이 묵혈방과 협상하는 과정을 본 것만으로 네가 왜 그를 따르려 했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거기서 무엇을 배웠느냐?”

“……사내다운 호기 말입니까?”

“아니다! 유장문이 지면 유장문을 넘기고 사람들은 그저 떠나기로 했지. 그때 이미 진 소협은 유장문의 모든 사람을 구한 것 아니더냐!”

“아……!”

장우재가 두 눈을 부릅떴다.

그 중요한 것을 이제야 깨닫다니.

아들의 눈빛이 변하는 걸 본 장사경은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그가 강호에서 흑염룡이라 불리는 이유는 바로 그런 점 때문 일 것이다. 존재감도 없던 태을문이 불과 몇 년 사이 천하인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 것 역시, 그의 역할이 대단했기에 가능했던 일이겠지.”

“…….”

진소운을 칭찬하는 장사경의 말에 장우재는 심히 부끄러워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제 네 잘못을 알겠느냐?”

“……너무 쉬운…… 너무도 편한 길을 선택했습니다…….”

기어가듯 이어지는 장우재의 대답에 장사경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바로 그것이다!”

“…….”

“내 굳이 다른 사람을 놔두고 너를 뽑은 것은 너에게도 유장문의 후계로서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지난날 너에게 구파일방에 선을 대라 했던 것에 대해 사과하마, 차후론 진 소협을 항시 보며 배우거라. 그리고 네가 훗날 유장문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고민해 보거라.”

“…….”

“그것이 네가 유장문의 후계자로서 필히 해야 할 책임이니라.”

장사경의 훈계는 그 어떤 질책보다 무겁게 장우재의 어깨를 짓눌렀다.

#

장사경과 장우재가 떠난 뒤, 혼자 남은 나는 문주의 개인 연무장으로 향했다.

미리 양해를 구해두어 제지하는 이는 없었다.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 일은 검악을 상대하는 것.

문제는 검악을 상대하기엔 태을문의 무공이 상성이 좋지 않다는 것.

특히나 그 특유의 은밀하고 빠른 검은 상대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다.

물론, 전력을 투사한 비무를 벌인다면 어찌 될지 모르겠지만, 유장문이 이긴 후에 흑도들이 어떻게 나올지도 생각해 봐야 한다.

‘뒤에서 칼 찌르던 놈들이 비무에서 졌다고 패배를 인정하고 순순히 물러날 리 없겠지.’

어찌 되었든 비무에서 이기고, 묵혈방이 함부로 덤비지 못하게끔 대비도 해야 한다.

그렇기에 내공을 다 폭사해버리는 방식으로 상대할 순 없었다.

다행히도 내겐 방법이 있었다. 최근 검마에게 얻은 백월제천삼식(白月制天三式).

하지만 문제는, 이 어려운 무학을 익히기엔 이틀이란 시간이 너무도 짧다는 것.

“이걸 쓰게 될 날이 올 줄이야.”

과거 신검에게 얻은 조언으로 정기신의 조화를 이루며 언뜻 떠올렸던 이론이 있었다.

바로 내 저주를 이용하는 것.

나는 저주라 느껴질 정도로 괴로운 기억력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 더불어 오룡봉성의 경지에 이르러 정기신의 조화를 이루었고.

최근 기연을 얻어 일월합벽을 넘어 옥예금화의 단계에 이르렀다.

생각하는 대로 몸이 움직이고, 기가 나아가고 들어옴에 있어 막힘이 없는 상승의 경지.

이 두 가지를 이용해 아주 짧은 시간 안에 무공을 얻어 내는 것이다.

“백 선배가 이렇게 했던가?”

머릿속에 백해광이 나타나 백월제천삼식을 펼치기 시작한다.

난 백해광 선배의 움직임은 물론이고 호흡의 수, 근육의 이용 방법, 발걸음의 간격까지 모두 정확하게 떠올렸다.

마치 그가 눈앞에 나타난 듯 생생한 모습.

나는 백월제천삼식의 구결을 외는 동시에, 내 몸에 명령을 내려 백해광의 움직임을 똑같이 따라 하게 했다.

뚜둑.

팔이 채 펴지지도 않았건만 근육 끊어지는 소리가 울린다.

퍼퍽, 퍼퍽.

손이 다 펴지자, 관절이 급격히 뒤틀리며 뼈가 갈리고.

두근두근두근.

과도한 움직임 때문에 놀란 건지 심장이 격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 순간,

“아아악!”

챙그랑.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흑룡검을 놓쳐버렸다.

“하아, 하아, 하아.”

이것은 정기신의 조화를 통해 생각해 낸, 시간을 단축하는 기술이다.

절대적인 기억력을 가진 나만이 할 수 있는 미친 짓.

나는 상대와 내 몸을 똑같이 만들어 그가 겪어온 지난 한 수련의 시간을 한 번에 뛰어넘는다.

나는 시큰거리는 팔꿈치를 붙잡으며 중얼거렸다.

“미친, 대체 무슨 수련을 했던 거야.”

오랜 수련과 휴식을 통해 서서히 바뀌어야 하는 신체인데, 하룻밤 만에 십 년의 세월을 뛰어넘자니 몸에 무리가 오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더구나 상대의 경지가 대단할수록 고통의 정도도 기하급수적으로 오르는 느낌이다.

손을 뻗어 흑룡검을 잡으려 하니, 나도 모르게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음에도 본능적인 공포를 느꼈던 것.

그러나 한계에 다다랐을 때 길이 보이는 법.

“후우, 후우, 후우. 여기서 놓아버리면 다 무용지물이다.”

나는 입술을 앙다물고 흑룡검에 손을 뻗었다.

“끄아아악!”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