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 <혼란을 잠재우는 흑염룡(7)>
“또 이불을 걷어차고 자는구나.”
누이들의 이불을 다시금 덮어준 강유성은 조용히 방을 나왔다.
사위에는 조용히 어둠이 내려앉고, 멀리서 들려오는 풀벌레 울음소리가 깊은 밤임을 알려주었다.
강유성은 그에 상관하지 않고 천천히 걸어 소연무장으로 향했다.
이는 강유성의 정해진 일과.
하루도 빼먹지 않은 습관이었다.
‘대사형께선 벌써 여섯 자루의 만검을 뽑으신다 하셨지.’
전서로 들은 대사형의 경지와 비교해 보면 자신은 이제 겨우 두 자루를 만들어 내는 상태.
태을진경 공부를 시작한 시기가 얼마 차이 나지 않는 걸 생각하면 절로 조바심이 들었다.
‘잘하고 있는 건가?’
그러다가도 어디 하나 기댈 곳 없이 홀로 누이들을 돌봤던 시절을 생각하니 깊은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만약 그날, 대사형을 만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만약 대사형이 태을문으로 오라 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덕분에 지금은 누이들과 편하고 아늑한 곳에서 삼시 세끼를 잘 챙겨 먹고 있었다.
더구나 그렇게나 꿈꾸던 무공도 배우고.
그야말로 진소운 대사형과 태을문은 강유성에게 부모님 품이나 마찬가지인 곳이었다.
‘꼭 은혜를 갚아야 해.’
강유성은 감기는 눈을 비비며 소연무장으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하앗!”
촤르르륵.
청아한 외침과 함께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울린다.
연무장에 세워놓은 허수아비에 철 조각 같은 것이 날카롭게 꽂힌다.
중앙에 선 인영은 나풀거리는 무복을 휘날리며 환영을 만들고, 가려진 손에선 다시금 철 조각이 뿌려지는데, 그 안에 환(幻)의 묘리가 담겨 수십 수백 개처럼 보인다.
촤르르르륵.
철 조각의 세례를 받던 허수아비가 결국 버티지 못하고 우지끈 넘어가 버렸다.
‘왕 사저?’
그제야 선객이 누구인지 알아차린 강유성은 조용히 소연무장을 빠져나가려 했다.
태을문에 와서 알게 된 것인데, 무림인들 사이에선 서로가 서로의 수련하는 과정을 훔쳐보는 것이 매우 큰 실례라고 하였기에.
그렇게 돌아서서 다른 곳을 찾으려 할 때.
“강 사제?”
숨을 고르던 왕소소가 강유성을 불렀다.
“수련하러 온 거야?”
“네, 사저. 전 다른 곳을 써도 되니 여긴 사저께서 계속 쓰셔도 됩니다.”
“그래? 그럼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같이 수련할까?”
“네?”
“왜? 나는 너무 수준이 안 맞아?”
“아니 무슨…… 그런 말씀을.”
“그럼 이리와.”
강유성이 다가가자 왕소소가 강유성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누이들 앞에선 의젓한 어른이었지만 왕소소 앞에선 막냇동생처럼 변해버리는 강유성이었다.
“열심히 하는구나 사제는.”
“……크흠. 그러는 사저야말로 이 늦은 시간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응. 집에 가면 아버지가 연습하지 못하게 하거든. 힘드니까 일찍 자라고. 훈련을 안 하는 게 더 힘든데.”
“…….”
강유성이 신기하다는 듯 왕소소를 바라봤다.
“사저…….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응? 뭔데?”
“왕 사저의 아버님이 태을문에 후원도 많이 하신다고 했고, 왕 사저도 나중에 상인이 될 거라고 하셨는데……. 왜 이렇게 열심히 하시는 거죠?”
왕소소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후원을 많이 하고, 상인이 되는 거랑 열심히 하는 게 무슨 상관인데?”
“네? 아…… 음, 그것이…….”
강유성은 뭔가 말실수를 했다는 생각에 말이 꼬이기 시작했다.
왕소소의 눈이 조금 매서워졌다.
“후원도 많이 하고 상인이 되는 사람이면 열심히 하면 안 되나? 내가 뭔가 잘못한 건가?”
“……아니요! 그건 아니고요……!”
강유성이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 하자, 왕소소가 빵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검은 귀신같이 휘두르면서 성격이 이리 유약해 어디에 쓰니.”
“……너무하십니다. 사저.”
“그래서 진짜 궁금한 게 뭔데?”
강유성이 잠시 머뭇거리다 왕소소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러니까…… 전 태을문에게서 받은 게 많은데 갚을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수련이라도 하는 거고요. 그런데 태을문에 많이 주고 계신 사저께선 어찌 그리 열심히 수련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진심이 담긴 강유성의 대답에, 왕소소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아! 그런 고민이었어? 음…… 글쎄. 태을문을 좋아해서?”
“태을문을 좋아하신다고요?”
“뭐, 정확히 말하면 진 오라버니께 받은 것이 많아 그런 것이지만, 어쨌든 나도 갚아드릴 날이 있겠다 싶어서.”
강유성의 눈에 의아함이 어렸다.
그에게 대사형은, 누구의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강한 존재로 보였기에.
“……대사형은 이미 엄청나게 강하지 않나요? 과연 저희가 힘이 될 수 있을지…….”
“물론 대단하긴 하지……. 사실 비상식적으로 강하긴 해. 내가 상인 일을 하면서 무림인들을 종종 만나봐서 아는 건데, 동 나이대에 우리 진 오라버니와 비교할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더라고.”
어쩐지 왕소소는 제 자랑을 하는 것처럼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래도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 있을 거야.”
“언제요?”
“그거야 모르지. 아무튼 그게 아니더라도 우리가 강해지는 건 진 오라버니에게 엄청 큰 도움이 될 거야. 최소한 진 오라버니에게 방해가 되진 않을 거잖아?”
방해라니. 자신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부분이다. 강유성이 되물었다.
“……방해가 된다고요?”
“그럼. 진 오라버니같이 특별한 사람들은 세상에 적이 많이 생기는 법이거든. 개중엔 진 오라버니를 어쩌지 못하니까 사문이나 가족을 건드리는 경우도 있고.”
“세상에! 그렇게 비겁할 수가!”
“그래. 그러니까. 우리가 진 오라버니의 발목을 잡지 않도록 노력해야 해. 그래야 진 오라버니가 원하는 바를 이룩할 수 있을 테니까.”
막냇동생을 대하듯 유성의 머리를 쓰다듬던 왕소소가, 이내 단단한 나무를 두드리듯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더 나아가 태을문이 강해지면 누구도 진 오라버니를 함부로 대하지 못할 테니까.”
“결국 저희가 강해지는 게 대사형에게 엄청 큰 도움이 된다는 거군요.”
“그렇지!”
강유성은 오랜 시간 품어왔던 고민이 풀린 듯 개운한 표정을 지었다.
“저, 더 열심히 하겠어요.”
“음…… 지금도 충분한 것 같은데. 뭐, 열심히 하면 좋은 거지.”
“네! 근데 사저는 지금 어떤 훈련을 하고 계셨나요?”
“나? 난 지금 투술(投術)을 연습하고 있었어.”
“투술이요?”
유성의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응, 검도 좋긴 한데, 난 투술이 좀 더 재미있는 거 같더라고.”
“그럼 제가 도와드려도 될까요?”
“그럴래?”
“네! 저도 지금 만검을 수련 중이었거든요. 제가 암기들을 가져올게요.”
“고마워, 난 좀 숨 좀 돌리고 있을게.”
왕소소가 옆에 가져다 둔 수통을 집어 물을 마시는 동안.
강유성은 허수아비에게 다가갔다.
‘응?’
허수아비에 박힌 암기를 빼내려던 강유성은 암기의 모양이 이상하여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왕소소를 바라보았다.
“……사저, 혹시 여태껏 이걸로 수련을 하신 건가요?”
“응? 아! 그게 비도로 하고 싶었는데 아버지가 위험하다고 비도는 쓰지 말라 하셨거든.”
“…….”
“적당한 걸 찾다 보니……. 그게 집에 제일 많기도 했고.”
강유성이 다시 한번 허수아비에 박힌 암기를 바라보았다.
“…….”
전체적으로 동그란 모양에 가운데에 네모난 구멍이 있어, 줄을 꿰기 쉽도록 만들어진 형태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에 줄을 꿰어들고 다니진 않았다.
도난의 위험이 있기에 작은 전낭 안에 넣어, 품 안 가장 깊숙한 곳에 보관하곤 한다.
그러니까 왕소소가 마구잡이로 던진 건 바로.
“……은전을 암기로 쓰신다고요?”
“그래. 그러니까 그만 물어보고 빨리 가져와!”
“…….”
강유성은 궁금해졌다.
혹시 이 암기가 살 속을 파고들면 자기 것이 되는지.
그렇다면 몇 대까지 맞아도 자신이 버틸 수 있을지가.
#
“우웩.”
한 움큼의 핏물을 토해내자 답답했던 속이 풀린다.
“하아, 하아, 하아.”
숨을 몰아쉬니 조금은 정신이 돌아왔다.
‘대체 뭐가 잘못된 거지?’
분명 검마 백해광의 움직임을 그대로 따랐다.
너덜너덜해진 근육은 어느 정도 그와 비슷한 형태로 변했고, 뼈를 가는 고통을 견디어 낸 덕에 뼈도 백월제천삼식을 펼치기에 충분한 상태로 바뀌었다.
구결과 요결까지 완벽했다.
하지만 백월제천삼식을 펼치기만 하면 내공의 운기가 뚝뚝 끊어지고, 오장육부가 뒤집히는 느낌이 든다.
완벽하게 모든 것을 따라 했지만 결국 백월제철삼식의 일 초식도 구현해 내지 못했다.
“세상에…… 진 공자님.”
멍한 정신으로 고개를 돌리자 남궁선화의 창백한 얼굴이 보였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럼 이 피들은 다 뭔데요?”
“…….”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니, 사방에 내가 토해낸 울혈들이 가득하다.
이거 뭐, 생사대적이라도 치른 듯한 모양새네.
“수련을 하던 중이었는데, 뭔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이게 수련이라고요?”
남궁선화는 못 믿겠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다가 손에 쥔 수통을 넘겨주었다.
나는 쉬지 않고 수통에 담긴 물을 절반 가까이 다 마셔버렸다.
“하아… 하아… 하아…….”
“…….”
당최 뭐가 잘못된 걸까?
비무 시간이 다가오니 절박한 마음이 요동을 친다.
“……자님, 진 공자님!”
“네?”
놀라며 고개를 돌리니 남궁선화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보고 있었다.
“대체 어떤 부분이 막히신 건가요?”
“어떤 부분?”
“네. 여기 뱉어내신 거 다 피 아닌가요?”
“맞습니다.”
“내기의 순환이 제대로 되고 있지 않은 건데. 이대로 계속 무리하다간 주화입마가 올지도 몰라요.”
“…….”
내기의 순환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는 건 분명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내기의 순환이 제멋대로 날뛰고 있는데 그것을 내가 제어하지 못하는 상태.
그나마 구령신초의 힘으로 혈맥과 단전을 단단히 하지 못했다면, 주화입마가 와도 열 번은 더 왔을 것이다.
‘검마 이 양반이 혹시 틀린 구결을 알려준 건가?’
그런 생각을 하다 머리를 털어냈다.
애당초 그가 먼저 쥐여준 것이다. 만약 나를 죽이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직접 제 손으로 죽였어도 충분할 터.
구결도 완벽하고, 동작도 완벽하고, 숙련도도 완벽하다.
헌데 어째서 제대로 검식을 펼쳐내지 못하는 것일까?
“선화 소저.”
“네?”
“신검님께 제왕검법을 배우셨습니까?”
“그렇죠?”
“성취는 어느 정도 되시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남궁선화의 얼굴이 굳었다.
상대의 경지를 함부로 묻는 건 무인들 사이에서 실례 중 하나니까.
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신검님에 비해서 어떤 수준인지를 알고 싶습니다.”
“……할아버지에 비해서요?”
표정을 푼 남궁선화는 손가락으로 턱을 받치며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조족지혈(鳥足之血) 정도?”
“……비유적 표현인 겁니까? 아니면 실제적 표현인 겁니까?”
“둘 다이긴 해요.”
“내공의 차이 때문입니까?”
“……그건 아니에요. 알다시피 제왕검법을 익히기 위해선 천뢰제왕신공을 익혀야 하는데, 일정 수준 이상으로 올라가면 제왕검법을 펼치는 데는 크게 무리가 없거든요.”
내가 생각한 바와도 같다.
검마 백해광의 내공 수위가 대단하다 한들, 지금의 내 내공이라면 백월제천삼식을 펼치는 데는 크게 무리가 없다.
“그렇다면 신검님과 소저의 성취 차이는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요?”
“……아무래도 시간 때문이겠죠.”
“숙련도를 말하는 겁니까?”
“그것도 그건데…….”
“그럼 만약 선화 소저가 신검님과 똑같은 동작과 자세로 펼칠 수 있다면 신검님과 같은 수준의 성취가 이뤄질까요?”
나의 경우 구결과 내공, 숙련을 위한 시간까지 모두 맞췄다.
되려 검식이 발현되지 않는 쪽이 더 이상한 것.
고개를 갸웃거리던 남궁선화의 얼굴이 점점 굳어가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꿍꿍이가 있으신 거죠?”
왠지 걱정을 끼칠 것 같은 생각에 적당히 둘러대었다.
“그냥 궁금했습니다. 저희 문파에는 신검님 같은 초고수분이 없지 않습니까. 그렇담 신검님과 같은 분께 똑같이 배워도 왜 성취의 차이가 나는지 그저 궁금했을 뿐입니다.”
그렇게 이야기했음에도 남궁선화는 전혀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이 위급한 상황에 갑자기 그런 궁금증이 드셨다고요?”
남궁선화는 바닥에 흠뻑 젖은 핏물을 보며 어이없어 했다.
나는 한 점 부끄럼 없이 답했다.
“무인의 수련이 때와 장소를 가려서야 되겠습니까.”
나를 노려보던 남궁선화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신뢰가 안 가지만, 어쨌든 이야기해 드리면. 약간 비슷한 일이 세가 내에 있었어요. 삼촌 중 한 분께서 할아버님을 매일 따라다니면서 검식은 물론이고 행동과 버릇까지 따라 하려 했었거든요.”
호오, 나랑 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남궁세가에도 있었다니, 왠지 동질감이 느껴지는걸.
“그분의 성취는 어땠습니까? 신검님과 비슷했습니까?”
“전혀요.”
엥?
“전혀 오르지 않았어요. 되려 동 나이대에 시작한 분들보다 성취가 낮았어요.”
“……어째서요?”
“나중에 할아버님이 말씀하시기로 자신의 깨달음이 없이 다른 이의 것을 따라만 해서는 되레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하기만 할 뿐이라고 하셨어요.”
“…….”
“공(空)은 스스로의 힘으로 스스로가 쌓아야 한다. 한 가지 무공을 백 명의 사람이 익히면 백 가지 무공이 되는 거라 하셨어요.”
“……!”
머릿속 그림들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검마가 펼치는 백월제천삼식.
그리고 내가 펼치는 백월제천삼식.
똑같은 검을 휘두름에도 검이 품은 묘리가 사뭇 다르다.
두 사람의 그림을 하나로 겹쳐내니, 같은 동작을 하고 있음에도 하나로 딱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검마의 검을 똑같이 따라 한다 한들, 검마와 같은 수준의 힘을 낼 수 없는 것이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나쁜 방법은 아니라고 하셨어요. 높은 수준의 이가 오랜 기간 쌓아온 성취를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자신의 것으로 체화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이야기하셨어요. 정작 본인은 다른 이들이 달라붙는 걸 싫어하셨지만요.”
“실제 그 삼촌분은 어떠셨습니까?”
“지금 집행각에서 부각주로 활동하고 계세요.”
“창룡옥검(蒼龍玉劍) 대협이 과거 그런 일을 했다는 겁니까?”
창룡옥검 남궁선명은 전생에서도 사람의 배경이 아닌 법과 규율에 따라 맹법을 집행하던 이였다.
그가 가진 세가의 입김이 워낙 강하기도 했거니와 그 본인이 가진 대단한 무력으로 강호 백대 고수의 순위 안에 들기도 했기에, 감히 창룡옥검에게 외압을 넣을 수 있는 자는 없었다.
“네.”
“…….”
그렇다면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다만 난 여태껏 나의 깨달음이 아닌 검마의 깨달음만을 추구해 왔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똑같이 따라 하는 것을 넘어 그 안에서 자신만의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는 뜻.
“아!”
나는 머릿속에 번뜩이는 생각이 날아가기 전에 얼른 가부좌를 틀었다.
“선화 소저, 혹여나 제게 어떤 일이 있어도 저를 깨우지 말아 주십시오.”
“……아니, 대체…….”
나는 남궁선화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 나뭇가지를 든 검마를 구현해 내기 시작했다.
한 명… 여덟 명… 열네 명… 서른 명…….
동시에 흑룡검을 든 나 또한 구현해내었다.
그렇게 검마 서른 명과 나의 환영 서른 명이 동시에 백월제천삼식을 펼치기 시작했다.
허무에 집중하고 있음에도 머리에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금방이라도 김이 피어오를 만큼 뜨거워진 머리를 식히기 위해 얼른 내기를 상단전에 보내어 안정을 꾀한다.
각기 서른 명씩이 초식을 펼칠 때마다 머리뿐 아니라 온몸에 열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양 코에서 쇠 냄새가 짙게 배며 주르륵 액체가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검마의 검식은 서른 명 모두가 동일하다.
각기 다른 시작을 하더라도 동작이 똑같으며 동시에 끝난다.
그러나 나의 모습들은 제각각이다.
동시에 시작하며 다르게 끝난다.
검마와 나의 환영 하나씩을 꺼내어 비무를 시작한다.
삼 초식.
불과 삼 초식만에 나의 환영이 사라진다.
쿨럭.
나도 모르는 사이 입 안에서 울혈이 터져 나왔다.
-진 공자님……!!
남궁선화의 목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무시하고 비무를 이어 나갔다.
두 번째 비무…….
패배.
네 번째 비무…….
패배.
일곱 번째 비무…….
패배.
열세 번째 비무…….
패배.
앞선 나의 환영이 패배를 당하면 뒤에 이은 환영은 그 기억을 받아 다르게 대응한다.
검마의 환영은 만서고에서 만날 당시 그대로이다.
지난 한 달간 그가 한 말들이 선명히 떠오른다.
-일 초식의 오의는 극쾌이다. 가장 빠르기 위해선 아무것도 가져선 안 된다.
열여덟 번째 비무…….
패배.
스물한 번째 비무…….
패배.
스물아홉 번째 비무…….
패배.
서른 번째 비무…….
패배.
정신이 번쩍 들며, 뒤집어진 속에서 커다란 무언가가 튀어나온다.
“우웩!”
검은색의 무복이 핏물로 더렵혀졌다.
“진 공자님! 그만하세요! 이러다 죽어요!”
나는 남궁선화에게 손을 뻗었다.
“호법을…… 부탁합니다.”
그리고 다시 서른 명의 검마와 서른 명의 내가 격돌하기 시작했다.
서른네 번째 비무…….
패배.
서른아홉 번째 비무…….
패배.
마흔여섯 번째 비무…….
패배.
-가장 가벼운 상태가 되어야 가장 빠를 수 있다. 무엇도 쫓아오지 못하는 속도는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법이다.
쉰한 번째 비무…….
무승부.
쉰네 번째 비무…….
무승부.
-완성되지 않은 검은 언제든 부서질 수 있는 모래성에 불과하다. 가장 가볍고 가장 빠른 검으로 완성되기 전에 부숴라.
쉰여섯 번째 비무…….
……무승부.
쉰아홉 번째 비무…….
예순 번째 비무…….
온몸이 부르르 떨리며 눈이 번쩍 떠진다.
온몸을 지배하는 경기에 근육과 뼈가 마비되고, 제멋대로 뒤틀리기 시작한다.
우드득, 우드득. 뚜둑. 뚜둑.
몸속 깊은 곳에서 뭉친 거북스러움이 역류하여 빠르게 식도를 타고 올라온다.
“……우웨웩!”
마치 감당하지 못할 만큼 술을 마셨을 때처럼 핏물과 거품을 토해낸다.
“진 공자님!”
저 멀리서 아득한 남궁선화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그렇게 멀어져 가는 의식을 결국 놓아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