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163화 (163/357)

#163. <혼란을 잠재우는 흑염룡(8)>

근 사흘간 조용했던 유장문 일대가 소란으로 가득했다.

악양에서 칼 좀 쓴다 하는 흑도들이 모조리 몰려들었고, 그 때문에 유장문 내부는 물론이고 외부에도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개중에는 서로 담장의 자리를 먼저 차지했다고 싸움을 벌이는 놈들도 있었고, 그 와중에 도박판을 벌이는 놈, 술과 안주를 사 들고 와 비무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놈들까지.

별의별 이상한 놈들이 모조리 모였다.

물론 백도 측에서도 몇몇 문파가 참관했지만, 그 수적 차이가 너무도 커서 쉽사리 어깨를 펴지 못했다.

“백도나부랭이는 뒤로 빠져!”

“어이! 유장문 다음은 너희 문파다. 알고 있나?”

“무림맹은 너희 따위에겐 관심이 없어! 도움받을 생각하지 마라!”

비무결전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건만 열기가 점점 고조되어 가고,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극에 달했을 때.

“왔다!”

한 사내의 외침과 함께 장내의 모든 이의 시선이 뒤로 돌아갔다.

바다가 갈라지듯 빽빽한 인파들이 양옆으로 물러나며 이미 부서진 유장문의 정문으로 길을 열었다.

“멋있다! 묵혈방!”

“저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줘!”

“이참에 악양에서 백도를 모두 내쫓자!”

묵혈방의 부방주…… 아니, 이젠 전대 방주의 죽음으로 묵혈방의 방주가 된 소경추의 뒤로, 돌격대장 상관백, 검악과 사악, 그리고 묵혈방의 무사들이 유장문의 부서진 정문을 거침없이 넘었다.

유장문의 대마장을 지나 대연무장에 선 묵혈방의 인원들이 전면을 바라보았다.

전각 입구에 섰던 유장문의 무사들과 무림학관의 사람들, 그리고 진소운 일행이 천천히 묵혈방의 반대편에 섰다.

왁자지껄 떠들던 이들까지 조용해지자, 묘한 긴장감이 장내를 휩쓸었다.

이윽고 연무장의 한편에 무림맹원들과 함께 선 당혁재가 외쳤다.

“비무결전을 시작하겠소.”

“““와아아아아아!”””

누가 싸움 구경 좋아하는 흑도 놈들 아니랄까 봐 유장문이 떠나가라 환호성이 일었다.

유장문 진영을 쭉 바라보던 소경추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 건방진 놈은 어디 간 거지?”

소경추의 말에 검악도 앞으로 나섰다.

“진 전표. 없다. 진 전표 데려와라.”

당혁재가 대신 답을 했다.

“진소운은 지금 준비해서 나오는 중이오.”

“핫! 우리 묵혈방이 그리도 우습게 보였단 말인가!!”

쩌렁쩌렁한 소경추의 외침에 장내의 소란마저 가셨다.

당혁재는 침착한 표정으로 말했다.

“……애당초 댁들이 일찍 온 것 아니오.”

“…….”

“흑도 놈들이 시간 약속을 왜 이리 칼같이 지키는 게야. 쯧.”

혼자 중얼거리듯 한 말이지만 사방의 흑도들에게 선명하게 들렸다.

이곳저곳에서 이를 갈고 살기를 펑펑 내뿜었지만, 당혁재는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며 무시했다.

이윽고 전각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에 몰렸다.

“아니…… 세상에…….”

“뭐야? 저 꼴은?”

“저거 흑염룡 맞아?”

모인 이들이 당황해하기 시작했다.

남궁선화의 부축을 받으며 전각에서 나오는 흑염룡.

그의 모습은 피골이 상접해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보였다.

단 사흘밖에 되지 않았건만 과연 사흘 전에 봤던 사람이 맞는지 의아할 정도로 변해있었다.

“전표, 상태가 이상하다.”

검악의 말에 소경추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안 봐도 알 만하군.”

핏기 없는 얼굴, 깊게 파인 눈두덩이, 온몸의 혈관이 터질 듯 부풀어 있으면서 동시에 살이 쪽 빠져있다.

“주화입마에 빠진 거다.”

“주화입마?”

“사흘의 시간 동안 뭔가 한 수를 개발하려다가 실패한 것이겠지. 검악께서 수고를 더시겠소.”

“…….”

남궁선화의 손에 부축받아 나타난 진소운은 유장문 일행들이 가져다 놓은 의자에 축 늘어져 앉았다.

그러자 흑도들 사이에서 커다란 웃음이 터져나왔다.

“야! 흑염룡! 거기 백도 자리야! 새끼야, 정신 차려!”

“인마! 넌 이쪽에 서야지~!”

“사황봉주가 안부 전하라더라!”

축 늘어져 있던 진소운이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

그러곤 천천히 두 팔을 들어 감자를 만들어 냈다.

흑도 진영에선 그 와중에 속도가 느린 것을 보고 배를 잡고 자지러지는 자도 있었다.

소경추가 대연무장 위로 올랐다.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데, 여전히 저자가 참석하나?”

소경추의 질문에 유장문의 문주가 진소운을 바라보자, 진소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대로 할 생각이오.”

“겨우 기대고 기댄 데가 저런 목내이라니. 유장문이 망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

말을 끝으로 소경추가 연무장을 내려가고, 이어 낫을 든 사내가 올라오자, 유장문 측에서도 장우재가 앞으로 나왔다.

“손속이 잔인하다 원망하고 싶다면 진소운을 원망해라.”

낫 든 사내의 말에 장우재가 진소운을 바라봤다.

자신에겐 폭혈단은 사용치 말라던 사내가, 유장문을 위해 무리한 시도를 하다 저 꼴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그는 언제나 예상을 뛰어넘을 만큼, 자신을 희생하고 인내한다.

장우재는 다시금 낫 든 사내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오늘 죽더라도 그런 일은 없을 것이오.”

장우재가 비류검법 기수식을 취하자, 낫 든 사내 또한 기수식을 취했다.

“시작!”

당혁재의 외침과 동시에 두 사람이 화살처럼 서로에게 튀어 나갔다.

먼저 무기를 빼 든 쪽은 낫이었다.

짧은 동선을 활용해 열십(十)자 형태로 공간을 긋고, 이어 다섯 개의 사혈을 노려 낫을 찍는다.

날카로운 공격에 비류검법을 펼치던 장우재는 급히 검을 회수하며 사혈 위주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채채채챙.

본래 낫이란 무기의 공격 형태는 무척 낯설기에 어지간한 경력이 있는 자도 막아내기 버거워할 만도 하건만, 장우재는 제법 능숙하게 낫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이제 내 차례요!”

비류검법의 흡자결을 이용해 낫을 끌어당겨 상대의 신형을 뒤흔든 장우재가, 곧장 세 개의 요혈을 노리고 낫 든 사내를 공격했다.

사내는 재빨리 공격을 피하려 했지만 미증유의 끌어당기는 힘에 별수 없이 팔에 상처를 남겨야 했다.

“칫!”

상처를 한번 바라본 사내가 허리춤에 메여있던 중도까지 꺼내었다.

“이제 시작이다.”

일반 검의 절반 수준 길이밖에 되지 않는 중도를 꺼낸 순간, 사내의 기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꿀꺽.

장우재는 자신도 모르게 군침을 삼켰다.

그때.

-애당초 낫은 시선을 끌기 위한 도구입니다. 중도에 집중하세요.

갑작스레 들려온 전음.

진소운과 눈이 마주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장우재는 다시금 이를 악물며 이번엔 먼저 움직였다.

“으아아앗!”

회풍비류 초식과 함께 그의 주위로 바람이 일기 시작했고, 그 바람을 타고 장우재의 검이 낫 든 사내를 옥죄기 시작했다.

“이따위 잡기 따위로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더냐!”

사내의 낫이 아찔하게 장우재의 얼굴을 긁어낸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진작 낫을 피하고도 남았을 공격.

하지만 장우재는 진소운의 말을 떠올리며, 끝까지 낫 대신 중도를 노리고 검을 휘둘렀다.

“크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몸을 숙인 장우재의 볼에 긴 자상이 남았다.

사내는 낫을 회수한 뒤 다시금 살벌하게 낫을 세 번 휘둘렀다.

공간에 기의 잔상이 남을 정도로 엄혹한 공격.

하지만 장우재는 피를 뚝뚝 흘리는 와중에도 다시 몸을 일으켜 세워, 끝까지 비류검법으로 사내의 왼손을 공격했다.

푹, 푹, 푹.

살이 꿰뚫리는 소리와 함께 장우재의 복부와 허벅지 왼팔에서 핏물이 분수처럼 쏟아졌다.

하지만 정작 비명은 낫 든 사내에게서 흘러나왔다.

“끄아아악! 내 손!!!”

중도를 들고 있던 손이 통째로 잘려나간 사내.

그는 허전한 왼팔을 보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 다 바닥에 쓰러져 있었기에 누가 이긴지 알 수 없는 상황.

소경추가 당혁재를 바라보며 물었다.

“누가 이긴 것이지?”

“…….”

당혁재는 장우재의 볼을 톡톡 치며 의식을 확인한 후 말했다.

“묵혈방의 승리요!”

당혁재의 판정에 잠시간 묵혈방에서 환호하는 소리가 울렸다.

유장문의 사람들이 장우재를 옮긴 후 응급진료를 시작했고, 연무장에 올라선 장사경이 그 광경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

“자식을 생사로 몰아넣으면서까지 버틸 가치가 유장문에 있는 것인가?”

장사경이 고개를 돌리자 연무장에 올라선 소경추가 말을 이었다.

“흑염룡의 기지로 목숨은 붙여주지 않았나. 적당한 상대와 붙인 후 포기해도 될 것을.”

“부방주…… 아니 이젠 방주라 불러야겠지.”

장사경이 천천히 검을 뽑았다.

“어찌하여 아무리 세가 좋은 흑도 문파도 백 년을 넘기지 못하는지 아시오?”

“…….”

장사경의 눈이 반짝 빛났다.

“바로 신념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오.”

“……먹물쟁이 백도놈다운 말이로군.”

장사경은 아랑곳하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아니, 이는 진정 중요한 것이오. 사문을, 가문을 세우는 강력한 신념이 없다면 그건 그저 하나의 왈패들의 집단에 불가하다오.”

“그럼 오늘로써 증명되겠구나. 신념이 있어도 결국 약한 놈은 죽는다는 사실을.”

“그럴지도 모르지. 만약 그대가 이곳에서 살아 돌아간다면, 묵혈방의 기둥을 세우는 정신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시오.”

“간악한 말로 나를 떠보려는 수작이구나.”

소경추가 대도를 들어 올리며 기수식을 준비했다.

장사경은 장우재와 마찬가지로 비류검법의 기수식을 펼치며 준비를 마쳤다.

휘잉.

당혁재가 시작이란 말도 하지 않았건만 두 사람은 동시에 서로에게 기를 날렸다.

퍼펑.

허공에서 검기와 도기가 폭발하고, 연무장 바닥에 깔린 모래 먼지가 자욱이 피어나는 순간.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욱한 먼지안으로 들어가 비무를 이어갔다.

채채채채챙-

콰쾅, 쾅, 쾅.

쇠와 쇠가 부딪치는 소리.

기와 기가 폭발하는 소리.

자욱하게 쌓였던 먼지가 사방으로 흩어지며 사람들의 시야를 가렸다.

“에퉷퉷!”

“뭐야, 유장문의 문주가 이 정도였어?”

“그럼 그동안은 왜 일방적으로 당했던 거야?”

사람들의 의문은 이내 모래 먼지가 모두 걷힌 후 해결되었다.

무인의 내기 활용이란 본디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쓰이는 법.

권사라면 주먹에만, 검사라면 검에만.

하지만 현재 장사경에게는 검뿐만 아니라 온몸 전체에 기가 둘려있었다.

“선천진기를 쓴다고?”

“어차피 진 싸움 아닌가? 왜 저렇게까지……?”

“아주 발악하는군, 발악을 해.”

흑도인들의 조소가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유장문의 사람들도 그 광경을 보고 놀라기는 마찬가지.

“문주님!”

“아버지!!!”

대경실색하여 목이 터져라 장사경을 불러보았지만, 장사경은 눈앞에 있는 소경추만 바라볼 뿐이었다.

“……동귀어진이라도 할 셈이더냐?”

이를 악문 소경추의 질문에 장사경은 되려 느긋하게 답했다.

“두렵소?”

“이따위 잡술로 우리 사이의 격차를 메울 수 있다 생각하더냐!”

“죽음이 두려운 것이오?”

“이놈!”

소경추의 마강혈겁도가 굉음을 울리며 도기를 폭사했다.

사방으로 뻗어나간 여덟 개의 도기가 연무장과 전각 등에 마구 부딪치며 터져나간다.

퍼퍼퍼퍼퍼펑.

그 어마어마한 파괴력 안에서 장사경은 고요하게 비류검법을 휘둘러 도기를 흘리고 파편을 막아냈다.

“그대가 죽음이 두려운 이유를 아시오?”

“뭐라?”

“뒤에 남겨둔 것이 없기 때문이오.”

“무슨 개소리냐!”

장사경이 힐끔 시선을 돌려 장우재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기절해 있던 녀석이 파리한 안색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두려움이 가득한 얼굴이지만, 분명 또렷하게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렇기에 신념이… 정신이… 중요한 것이외다. 죽음이 다가와도 남는 것이 있기에.”

“그래, 그리 두렵지 않은 죽음 내가 선사하마!”

소경추의 대도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대도의 위로 이 척에 달하는 시뻘건 도강이 피어났다.

“혈겁치세!”

소경추가 도강을 내리치자 여덟 개로 갈라진 도강이 청강석으로 만들어진 연무장을 마구 헤치며 장사경에게 쏘아져 나갔다.

“물론이오. 난 두렵지 않소.”

이어 장사경의 주위를 감싸는 기의 양이 더욱 많아졌다.

유장문의 사람들이 질겁하며 그를 불러보았지만, 그는 더 이상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회풍비류!”

장사경을 중심으로 기의 바람이 그의 주위를 감싸기 시작했다.

그는 곧장 앞으로 쏘아져 나가며 검 끝에 일 척 크기의 검강을 피웠다.

콰콰콰쾅.

연무장 바닥이 뒤집히고, 흙더미들이 파도처럼 밀려난다.

파파파팍-

“피, 피해!”

“자갈이 튄다!”

연기와 모래가 강기를 타고 사방을 휩쓰니 여유롭게 구경하던 흑도들이 질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비류제제!”

장사경의 외침과 함께 다시금 고막을 때리는 커다란 굉음.

콰쾅. 콰쾅. 콰쾅.

그리고 어느 순간 굉음들이 뚝 하고 끊겼다.

잠시간의 고요.

“어, 어떻게 된 거야?”

“누가 이겼어?”

고개를 돌리고 있던 이들은 연무장에 펼쳐진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세상에.”

“이게 무슨…….”

묵혈방 이인자인 소경추의 애병으로 수백의 사람의 피를 묻혀왔던 대도가 두동강 나 있었고.

장사경의 검이 소경추의 심장을 정확하게 찌르고 있었다.

“비, 빌어먹을…….”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뒤로 넘어간 소경추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털썩.

뒤이어, 모든 연료를 소진한 듯 바닥에 무릎 꿇은 장사경의 주위로 유장문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문주님!”

“문주님!”

그때, 유장문 사람들 사이에서 검은색과 흰색이 섞인 의복을 입은 자가 사람들을 헤치며 나왔다.

그는, 곧장 장사경의 맥을 짚더니 그의 입에 단환 하나를 넣고는 십여 개의 침을 꽂아 넣었다.

“허억!”

방금 전까지 다 타버린 재처럼 미동도 없던 장사경이 두 눈을 부릅떴다.

“움직이지 마시오.”

“누, 누구시오?”

“당가에서 나왔소이다.”

“그렇습니까?”

“……왜 이리 무리한 거요?”

장사경의 맥을 짚던 사내는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잠시 시간을 번 것에 불과하오.”

장사경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소이다. 그것으로 충분하오.”

장사경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축하려는 이들의 손을 뿌리치고 자신의 자리로 걸어갔다.

이윽고 진소운이 남궁선화의 부축을 받으며 연무장 위로 올라오는 순간, 두 사람은 잠시 마주했다.

장사경이 숨을 토해내듯 읊조렸다.

“유장문이… 신념을… 이어갈 수 있도록… 힘써주게.”

진소운이 메마른 입술로 씨익 웃으며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이미 문주께서, 유장문의 신념이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도록 만드셨습니다.”

진소운을 따라 시선을 돌린 장사경은, 눈물은 흘리고 있지만 강렬한 기운을 뿜어내는 유장문의 눈들을 보았다.

무척이나 단단한 눈빛들이었다.

장사경은 만족스러운 듯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 진작 이렇게 했어야 했음이야.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직접 바로 섰어야 했단 말이지.”

장사경이 유장문의 인원들과 연무장을 내려가자, 진소운도 남궁선화의 손에서 벗어나 천천히 연무장 중심으로 걸어갔다.

몇 걸음을 걸을 때마다 휘청이던 진소운이 결국 연무장 중심에 도착하여 검악(劍惡)을 바라봤다.

“올라오시오. 이 결전의 끝을 봐야 하지 않겠소.”

“…….”

하지만 어쩐지 검악은 멍하니 진소운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 미동도 하지 않았다.

“검악! 애송이에게 쫄아버린 거냐? 왜 움직이질 못해!”

부악(斧惡)의 걸걸한 소리에 검악이 반응하듯 고개를 저었다.

“전표, 이상하다. 사흘 전이랑 다르다. 나 안 한다.”

검악이 마치 범을 만난 강아지처럼 기이한 모습을 보이자, 부악이 사악을 보며 욕지기를 내뱉었다.

“시벌, 네 강아지가 벌벌 떠는데 어쩔 셈이냐?”

“…….”

사악(蛇惡)은 검악을 잠시 보다가 더불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미친놈이! 싫다는데 뭐 어쩌라고. 그럼 네가 나가든가 새끼야.”

“헹! 멍청한 새끼들. 네들이 그러면 그렇지.”

부악이 우악스럽게 자리를 박차고 높이 떠올라 연무장에 쿵 하고 내려앉았다.

“애송이, 내가 상대해도 상관없겠지?”

진소운이 묵혈방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쪽이 인정만 한다면…….”

진소운의 질문에 묵혈방 내에서 잠시 소란이 일었다.

감자기 방주와 부방주가 죽어버리자 결정권자가 사라졌던 것.

잠시 뒤, 한 사내가 나타나 고개를 끄덕였다.

“애송이, 무대가 이런데 괜찮겠냐? 걸음도 제대로 못 걸을 것 같아 보인다만.”

“상관없소. 어차피 발을 떼지 않을 생각이라.”

“흑염룡의 정신이 오락가락한다더니 그게 사실이었구나.”

진소운은 어쩐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요즘 그게 사실이 아닌가 의심이 되곤 하오.”

“미친놈.”

부악이 휘이휘이 대부를 흔들기 시작했다.

이어 그의 대부에 녹색의 기가 어리기 시작했고, 그는 커다란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기민한 움직임으로 진소운에게 빠르게 달려들었다.

통나무만 한 두 팔을 휘둘러 단매에 진소운의 허리를 잘라버리려는 순간.

찰칵.

샥-

기이하게도 부악의 대부는 결국 휘둘러지지 않았다.

부악은 진소운을 지나쳐 몇 걸음을 걸은 뒤, 멍한 눈동자로 자신의 목 부근을 만지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그 순간 그의 목에 가는 실선이 생겨나며 핏물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이내 그의 거대한 몸과 머리가 똑 하니 분리되어 바닥에 뒹굴었다.

“…….”

“…….”

“…….”

충격적인 광경에 수천의 사람이 모여있음에도 숨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그때, 검악이 부르르 몸을 떨며 사악을 부여잡고 말했다.

“거, 검마…… 검마다! 검마! 도망쳐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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