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 <혼란을 잠재우는 흑염룡(9)>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속으로 욕지거리가 수십 번은 터져 나온다.
기껏 목숨 걸고 검마의 무공을 익혔건만 나오라는 검악(劍惡)은 범을 본 개새끼처럼 벌벌 떨고 있고 엉뚱한 부악(斧惡)이 목이 잘렸다.
물론, 부악이 내 손에 죽은 게 싫은 건 아니다.
놈은 그야말로 살인과 방화를 일삼는 미친놈이었으니까.
이참에 강호에 덕을 쌓는 셈 치고 놈을 청소하는 것도 좋은 일이지.
하지만.
‘부악이 나올 줄 알았으면 검마의 무공을 익힌다고 그 미친 짓은 안 했겠지.’
백월제천삼식의 일 초식을 어찌어찌 익히긴 했지만, 그 때문에 몸이 무슨 목내이가 되어버렸다.
혈맥이나 단전이 다친 건 아니다.
되려 검마와의 비무로 깨달음을 얻으면서 몸은 다시 한번 변화하였고, 혈맥에 도는 내기는 장강의 흐름처럼 거침이 없다.
겉모습이 이리된 것은 순전히 무리한 연공을 몸이 버텨내지 못했기 때문.
이쯤 되니 흑도 놈들이 비무의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걱정한 내가 등신 같다.
아니, 이제는 그냥 다 덤벼 줬으면 좋겠다.
저놈들의 잔악무도한 행위에 내가 빡이 치지 않았다면 이따위 짓을 할 리가 없었을 테니까.
“검악(劍惡). 진짜 안 덤빌 것이오? 내게 원한이 있지 않소?”
내가 검악을 호명하자 놈은 사레들린 아이처럼 ‘히끅’ 놀란다.
‘히끅’ 이라니…… 다 큰 어른이 ‘히끅’이라니…….
“사악! 도, 도망쳐야 한다. 빨리 가야 한다!”
검악(劍惡)이 다리에 붕대를 감은 사악을 질질 끌고 뒤로 도망치기 시작한다.
사악은 검악의 손도 뿌리치지 못하고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만 있다.
“……묵혈방, 혹시 비무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소? 그럼 올라오시오.”
“…….”
묵혈방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네가 나가라’, ‘네가 나가라’만 외치고 있다.
나는 흑부궁주와 함께 선 다른 팔악(八惡)을 보았다.
“그대들 중에 부악의 복수를 할 사람은 없소?”
“…….”
저들끼리 눈을 마주치지만 나서는 이는 없었다.
그러다 창악(槍惡)이 물었다.
“……그대가 쓴 무공이…… 검마의 무공이 맞는가?”
“보았으면서 뭘 물어보시오.”
“……진짜란 말인가?”
창악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다.
유장문에 모여있던 흑도들도 동요하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럼 그대가 검마의 제자라도 된단 말인가?”
“난 태을문의 제자요.”
“그럼 어찌 그 무공을 쓰고 있는가? 그대가 직접 배우기라도 했단 말인가?”
검마는 자신에게 한 자락이라도 배웠다는 소릴 하고 다니면 다리 몽둥이를 부러트리겠다고 했었지.
나는 기억력이 절대적으로 좋고, 검마 같은 이가 한 경고는 특히나 절대 어기지 않는다.
“아니오.”
“그럼……?”
“뺏었소.”
“으잉?”
창악이 동그랗게 눈을 뜬다.
흑도 놈들 사이에서 수군거림은 더욱 커진다.
검마가 이렇게 이야기하라고 했으니 거짓말은 아니지. 암 그렇고말고.
“검마에게 무공을 빼앗았대.”
“미친 그게 말이 돼?”
“어쩌면 말이 될지도…… 흑도 연맹의 공동전인이라잖아.”
“아! 역시 흑도신성!”
흑도신성은 그렇다 치고, 흑도 연맹의 공동전인은 또 무슨 개소리야.
“궁금증이 풀렸으면. 빨리 올라오시오!”
한시라도 빨리 이 더러운 기분을 풀고 싶다.
내가 고생한 보람의 보상을 얻고 싶다!
아아, 이렇게 피를 갈구하는 것을 보니 검마의 무공에 사이한 부분이 있는 게 확실하다.
천생 도인인 내가 누군가를 때려죽이고 싶다는 마음이 들 리 없으니.
“……우린 흑부궁에 고용된 존재다. 애당초, 묵혈방의 일에 나선 부악의 잘못이지.”
그리하며 창악은 뒤로 물러서서 팔짱을 낀다.
흑부궁주는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창악을 노려보는데.
창악은 지지 않고 ‘뭐 어쩌라고?’ 하는 눈빛으로 받아친다.
“그럼 나올 사람 없소?”
“…….”
나는 흑도 무리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흑룡검을 지팡이 삼아 두어 걸음 나아가며 다시 한번 말했다.
“나올 사람 없냐 말이오.”
사사삭-
흑도 무리들이 동시에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난다.
다시 내가 세걸음 나아가자.
사사삭-
흑도 무리들이 동시에 다섯 걸음 뒤로 물러 난다.
“…….”
아니, 내가 무슨 병균이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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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무결전’은 그렇게 끝났다.
그 자리에서 묵혈방의 대표는 유장문에게 그간의 피해 보상 및 유족들에 대한 보상까지 하겠다는 각서를 쓰고 돌아갔다.
사람으로 바글거리던 유장문은 반나절 만에 텅 비어 버렸다.
사람이 빠진 자리엔 다 부서진 전각과 담벼락, 정문의 잔해만이 가득해 을씨년스런 분위기를 더했다.
“대사형,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어이없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은호.
나는 끊임없이 물을 마시며 말했다.
“옥예금화의 단계에 들어서면 상단전이 개통되고, 심상이 곧 실제와 같이 적용될 수 있다. 이는 곧 심상수련이 곧 실제 수련과 같아질 수 있다는 것이지.”
“그래서요?”
“심상의 속도란 현실의 속도보다 더욱 빠르지 않더냐. 단기간에 강해질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지. 나중에 전수해 주마.”
“……아뇨. 전 그냥 현실의 시간에서 하루하루 실패를 쌓아나가고 싶습니다.”
못 볼 걸 봤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떠는 은호.
하긴, 나도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은 방법이긴 하다.
나야 절대적인 기억력이 있으니 가능한 일이었지, 평범한 사람들이 혹여 심상수련을 하는 도중 망상에라도 빠진다면 곧장 주화입마로 이어질 테니까.
다시 생각해도 열 받는다. 난 뭘 한다고 목숨 걸고 그 짓을 한 거지.
애당초 흑도 놈들의 성향이 강약약강이란 걸 알고는 있지만 이건 패기가 없어도 너무 없는 것 아닌가.
몸을 부르르 떨던 은호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이제 유장문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묵혈방으로부터 승리를 얻어내고 사문의 이름을 지켰지만, 분위기는 전혀 들뜨지 않았다.
당가에서 초청한 의원이 장사경의 상태를 살피고 있지만, 선천지기가 깨지면서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고 전했다.
그나마 당가에서 온 의원이 아니었다면 비무가 끝난 순간 명을 달리했을 것을 지금까지 끌고 왔던 것.
때문에 유장문의 제자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장사경과 마지막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울음을 참고 있는 그들을 돌아보며 은호에게 되물었다.
“어떻게 될 것 같으냐?”
“…….”
은호는 한참이나 고민에 빠졌다가 입을 열었다.
“잘 모르겠습니다만, ……앞으로 더 강해지지 않을까요?”
전생에 유장문은 정마대전이 일어나자마자 멸문당했다.
점창의 명을 받고 제대로 된 정보도 없는 채로 문파의 인원 전부가 마교를 상대했었기 때문.
그리고 점창은 그에 대해 전혀 책임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생의 유장문은 다른 모습으로 나아가겠지.
나는 유장문의 다른 미래를 만들어 낸 장사경을 떠올렸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
잠시 뒤, 장사경과 마지막 인사를 나눈 이들이 하나둘 전각을 빠져나왔다.
대부분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못난 모습을 감추려 고개를 숙였지만, 계속 흘러나오는 눈물을 결국 숨기지 못했다.
은호는 그 광경을 보고 입을 꾸욱 다물었다.
나는 그런 은호에게 말했다.
“이는 유장문에게만 일어날 일이 아니다.”
“……네.”
이 정도만 말해도 은호는 알아들을 것이다. 워낙 영민한 아이였으니까.
“진 소협.”
유장문 당주가 시뻘겋게 달아오른 눈동자로 나를 불렀다.
“네.”
“문주님께서 뵙자고 하십니다.”
“……알겠습니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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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의 양옆엔 장사경의 사형제들, 그리고 장우재가 조용히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면엔 장사경이 생기가 하나 없는 모습으로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어서 오시오. 진 소협.”
내공이 쌓이고 기감의 수준이 높아지면서 애써 신경 쓰지 않아도 상대의 존재를 느끼는 데 큰 무리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장사경에게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를 존재케 하는 모든 기운이 메말라 버렸다는 뜻.
그나마 지금도 장사경의 옆에서 계속 침을 놓고, 뜸을 들이고 기를 주입하는 당가의 의원이 없었다면 이처럼 앉아 이야기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야기를 듣기로…… 벌써 이틀 전에 당가에서 의원님을 모셔왔다 들었소. 내가 선천진기를 건드리라곤 어찌 안 것이오?”
이틀 전 장사경의 모습에서 전생에 홍문기를 보았다.
그 또한 마지막까지 제자들을 살리기 위해 자기 몸을 불사르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어쩌면 나는.
장사경에게서 전생에 살리지 못한 홍문기를 보았는지도 몰랐다.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장사경은 나를 빤히 보더니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린 소협께서 참으로 지난한 경험들을 가졌나 보오.”
“……좀 더 슬기롭게 헤쳐 나갈 방법이 있었을 텐데. 제가 부족하여 죄송합니다.”
장사경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이 이상 나는 바랄 수 있는 것이 없소이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소. 내 자식들에게, 그 자식들의 자식들에게도 잊지 말라 전하였소.”
유언과도 같은 말에 사람들의 울음이 터져 나왔다.
“정말로 고맙소. 진 소협. 내 과연 전생에 무슨 덕을 쌓았는지 모르겠으나, 진 소협 덕분에 편히 눈을 감을 수 있게 되었소이다.”
“…….”
장사경이 아들 장우재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것을 가져오너라.”
“네.”
장우재가 자신의 뒤편에 있던 것을 아비의 앞에 두었다.
장사경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나무 쟁반을 내게 밀었다.
쟁반 위에는 푸르른 결정의 작은 보석이 놓여있었다.
“풍령이라 하는 것이오.”
“풍령?”
내 장대한 장서고 안에서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물건.
“시조이신 비류신검의 유품이오. 한서불침의 효능이 있어, 강호를 질주해야 하는 진 소협 같은 이에게 유용한 물건일 것이오.”
시조의 유품이라니?
나는 대경하며 거절했다.
“애당초 보상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닙니다. 이런 귀한 물건은 받을 수 없습니다.”
장사경이 입가에 크게 미소를 지었다.
“진 소협, 그렇기에 드리는 것이오. 세상의 어느 협사가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자신의 목숨까지 걸 수 있겠소.”
“…….”
“그대의 선한 영향력이 천하에 퍼져 많은 이들이 개안(開眼)하길 바라는 나의 작은 바람을 담은 것이오.”
나는 그저 내 기억 속 악몽을 지우기 위해 움직였을 뿐인데…….
“자신은 그런 의도로 움직인 게 아닌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소?”
뭐지?
장사경은 통쾌하다는 듯 웃었다.
“역시 끝이 다가오니 안 보이던 것이 보이나 보오. 진 소협. 걱정 마시오. 그대의 의도가 어떠하였든 우리는 그대에게 갚지 못할 은혜를 받았소. 아마 내가 그대에게 이걸 주지 못하고 눈을 감는다면 죽어서도 죄책감에 귀신이 될 것 같소이다.”
지독한 농을 건네는 장사경.
나는 깊게 고개를 숙이며 포권을 쥐었다.
“……문주님의 선물을 감사히 받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고개를 들자 장사경이 눈을 맞춰왔다.
“어떻소? 이 정도면 잘한 것 같소?”
그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셨습니다.”
우리는 잠시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웃었다.
당가의 의원이 나와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젓는다.
이제는 진정 저들끼리 보내야 하는 시간.
나는 조용히 방을 나섰다.
“달이 어찌 이리 밝을까.”
멍하니 유장문 위에 뜬 달을 보고 있잖니, 전각 내부에서 울음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이런 날엔 조금 흐린 것도 좋을 텐데.”
이내 울음소리는 유장문 전체로 번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