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166화 (166/357)

#166. <사천에 번지는 혈해(2)>

“제에엔장!”

전생에 무림맹의 윗선들을 경멸했던 이유는 비단 내 열등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기득권의 위선이 하루 이틀도 아니었고, 능력 있는 자들이 권력을 탐하는 게 어제오늘 일이 아니니까.

문제는 그 새끼들의 무능이 나에게 피해를 끼친다는 것.

하급무사가 모여있는 백랑각 소속 소정대.

무림맹 본대도 아니고.

부대도 아니고.

곁가지에 불과한.

나에게까지 그들의 무능이 뻗어온다.

놈들은 명령을 내리고 우린 그저 따른다.

능력 없는 건 저들인데, 죽는 건 우리다.

사실 이 정도 무능이면 마교 첩자라 봐도 무관하다.

현생에서 내가 죽어라 기득권들과 처싸우는 건 이런 엿 같은 상황이 재발되지 않길 바라서다.

윗선의 멍청한 명령 때문에 사제와 동료가 또다시 주검으로 돌아오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마교에 투신해서 무림맹을 내 손으로 박살 내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할 지경.

‘정말 대단한 새끼들이다.’

장로원의 정도회 소속 인원들이 구파일방을 이끌고 사천으로 향했다.

이 와중에 멸혼진의 사태로 정도회 탈퇴가 가속되자, 소속이 없는 이들을 정도회로 끌어들이고 싶었던지 학관에 남아있는 이들을 모조리 긁어 사천으로 가버렸단다.

“정말이지 대단한 새끼들이다.”

그렇게 삽질하지 말라고 틀어막고 틀어막았건만,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삽질을 벌인다.

사천에 가서 정도회가 뒈지는 거야 어쩔 수 없다 치자.

그래, 그건 네놈들이 선택하고 네놈들 제자가 죽는 거니까!

그런 바보 같은 짓으로 자멸하는 거야, 내가 어찌 막겠나.

근데, 빌어먹을.

왜 모용재화랑 은설란까지 데려가냐고!!!

광역으로 폐를 끼치는 그 꼴은 도저히 참아줄 수가 없다.

전생에서 모용재화는 무림맹의 대후퇴 시기, 마교를 한참 동안이나 붙잡고 있던 인물이고, 은설란은 훗날 무림맹이 북해에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기틀을 마련해 준 사람이다.

그 두 사람은 내 계획이 실패해 현생도 전생과 같이 마도지세가 되어버린다면, 그나마 백도 무림의 정기를 유지하게 해줄 마지막 희망이란 말이다.

내게 소중한 동생인 걸 떠나서.

놈들은 지금 조상님이 남겨주신 최후의 보루인 집문서를 불쏘시개 삼아 한바탕 쥐불놀이를 돌리는 중이나 마찬가지라는 것.

비극적 미래를 생각해 보면, 지금 당장 무림맹 전체에 불을 질러 전각을 모조리 태워버려도 두 사람이 죽는 것보단 피해가 적으리라.

‘아! 마교 투신 마렵다.’

답답한 마음을 누르고 가장 먼저 달려간 곳은 북원평의 집무실이었다.

“지금 학관장님은 외유 중이십니다.”

너무 흥분해서 그런지 내가 그를 태을문에 보냈다는 것도 까먹고 있었다.

애당초 북원평이 학관에 있었다면 정도회가 움직이지 못하게 막았겠지.

“진 공자, 괜찮아요?”

성모란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

괜찮냐고? 전혀 안 괜찮다.

사천에서 피해가 컸던 이유는 학관생들이 사도의 사술에 대비가 안 되어있던 탓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를 꼽자면 방만한 부대 운용 때문이다.

열 개 조로 나뉘어 흉수들을 찾겠다는 그 정신 나간 작전에, 시산혈교는 감나무 밑에서 떨어지는 감을 기다리듯 입만 벌린 채 학관생들을 집어삼켰다.

지휘부가 그때와 다르지 않으리라 가정해 보면, 그 열 개의 부대 중 어디에 은설란과 모용재화가 있는지부터 찾아야 하는 실정.

“최근 하오문에서 받은 정보 중에 사천에서 등장하는 이들이 심상치 않은 존재들이라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내 이야기에 흠칫 놀라는 일행들.

과거 마교와 조우해 봤던 이들이라 긴장감이 남다르다.

“그럼…… 그럼…… 말려야 하는 거잖아요.”

성모란의 말에 남궁선화가 고개를 저었다.

“그들이 우리 말을 들을 리 없어요, 언니.”

성모란의 눈초리가 사납게 솟아올랐다.

“그 자식들은 왜 엄한 우리 동생들을 데리고 간 거래요!”

당장에 검을 뽑아 사천으로 달려갈 기세인 성모란을 겨우 말렸다.

“지금 당장 급한 일은 재화와 설란이 어디에 있는지부터 파악하는 겁니다.”

놈들이 순순히 부대 편성 정보를 공유한다면 모르겠지만, 퍽이나 해줄까.

직접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찾아다녀야 하는데 혼자선 불가하다.

차라리 행사 자체를 무위로 돌리는 게 낫지.

그래, 행사 자체를 무위로…….

“……어?”

“왜요? 좋은 생각이 있어요?”

“방법이…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방법이요?”

저쪽이 편법을 썼다면 이쪽도 편법을 쓰면 되겠지.

“완벽한 해결책은 아니겠지만 두 사람은 구할 수 있을 겁니다.”

무림학관은 만통부 소속이다.

학관장이 없으면 만통부 책임자가 무림학관을 통솔하게 된다.

그렇담 만통부에서 행사 금지 명령서만 내려주면 끝이라는 이야기.

‘물론 쉽지 않겠지.’

가뜩이나 장로원의 견제를 심하게 받고 있는 제갈소명이다.

그들과 신경전을 벌이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이 당연한 일.

그렇담 최소한 모용재화와 은설란을 구해올 수 있는 명령서라도 받아내야 한다.

그리고 내 일행들만이라도 데리고 가서 그들을 구해와야 한다.

시간을 지체해선 안 되기에 곧장 무림맹의 만통부를 찾았다.

“응? 자네가 여긴 웬일인가?”

만통부의 맹주원은 여전히 눈가에 거뭇한 그을음 같은 것을 묻히고 있었다.

“총군사님은 어디 계십니까?”

다급한 내 물음에도, 맹주원은 여전히 맹한 표정이다.

“총군사님? 얼마 전에 본가에 가셨는데.”

“네?”

무림맹의 총군사라는 양반이 집에 갈 시간이 어디 있다고! 하필 왜 지금!

“정시도 끝났겠다. 거의 일 년 만에 휴가를 내신 거지. 무슨 볼일 있는가?”

만통부의 지휘체계는 생각보다 단순해서 총군사가 없는 자리는 그다음 직위로 이어진다.

그러니까 지금 만통부의 대장은,

“맹주원 부장님.”

이 눈앞에 있는 불쌍한 맹주원이라는 말.

“지금 학관생들이 학관 대표의 승인도 받지 않고 행사를 나가 있습니다.”

“……음, 그런가?”

“이는 무림맹의 엄혹한 맹규를 위반한 사건입니다.”

맹주원은 여전히 느긋했다.

“물론 그렇지. 근데 그 행사에 장로원들이 따라가지 않았는가. 이런 건 관례상 그냥 넘어가게 되어있는 걸 알지 않은가? 갑자기 왜 그러나?”

맹주원은 닳고 닳아 더 이상 닳을 것도 없어 보이는 공직자의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 심정도 알아. 지금에 와서 장로원의 영감들이 나서는 게 꼴 보기 싫겠지. 하지만 어쩌겠나. 어쩔 수 없이 넘어가는 것도 있는 거지.”

“…….”

“더구나 보면 모르겠나? 그 영감쟁이들은 총군사께서 자리를 비우신 동안 속전속결로 일을 진행해 버렸어. 애당초 이를 노리고 있었다는 이야기지.”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맹주원이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어쩔 수 없는 일이잖은가. 그냥 이번엔 눈 꼭 감고 넘어가게. 그들이 돌아온 뒤에 다른 행사로 그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면 될 일이네.”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고.

우리 애들 죽는다고.

“그럼 그 행사에 강제 동원된 모용재화와 은설란을 학관으로 복귀시키라는 명령서라도 써주실 수 있겠습니까?”

“응?”

“그 두 사람이 그 행사에 참석하는 걸 제가 원치 않아서 말입니다.”

“…….”

맹주원이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본다.

“자네 무슨 꿍꿍이인가?”

“네?”

“어차피 외유처럼 간 행사일 뿐이네.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돌아올 일. 자네 사람이라면 그 행사에 참여한다 해서 그들의 사람이 될 일은 없지 않은가.”

아오, 답답해.

사천에 혈교가 뜬다고 다 까발릴 수도 없고.

“……정도회에게 나쁜 물이 들까 봐 그럽니다.”

“…….”

맹주원은 맹했던 표정을 고치곤 나를 째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안 되네.”

“네?”

“안 된다 하지 않았나. 돌아가게.”

“아니, 왜요?”

“말하지 않았나. 이번 행사는 장로원의 영감들이 직접 기획한 행사라고. 그들의 행사를 방해하면 일개 맹원인 내가 버틸 수 있겠나?”

맹주원이 다시금 서류를 집어 들곤 내게서 등을 돌렸다.

역시 그런가?

제갈소명도 꺼려 하는 집단을 맹주원 더러 상대하라 하는 건, 하급무사더러 천마흑검대를 상대하라는 말이나 다름없으니까.

“……그러게 진작 내 말을 들었으면 얼마나 좋아.”

응?

내가 잘못 들었나?

“방금 뭐라 하셨습니까?”

“……뭐가 말인가?”

“방금 전에 ‘진작 내 말을 들었으면……’ 어쩌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맹주원이 애꿎은 서류를 손가락으로 툭툭 친다.

“……왜 혼잣말을 훔쳐 듣고 그러나?”

그게 무슨 혼잣말이야, 난 누가 내 고막에 대고 말하는 줄 알았는데.

“……뭘 원하시는 겁니까?”

맹주원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마치 금은보화를 앞에 둔 무흔신투처럼 제 손을 제어하지 못하고 보석을 집어버릴 눈빛이다.

“크, 크흠. 원하긴 뭘 원한다고. 난 그런 거 없네.”

저, 저 봐라. 저러다 서류 다 찢어지겠네.

고개를 돌려보려 애를 쓰지만 어째 눈알은 나를 직시하고 있다.

저 정도로 눈알이 돌아가는 걸 보니 잘하면 뒤통수도 보이겠는데?

“원하는 걸 말씀하시면 생각해 보겠습니다.”

“커흐흐흠!”

마치 가래라도 낀 양 한참을 헛기침을 하던 맹주원이 입을 열었다.

“휴일 중 이틀 모두를 오고, 평일에도 이틀은 학사 일정이 끝난 후 만통부에 오도록 하게.”

“…….”

뭐지? 일을 너무 많이 해서 드디어 미친 건가?

“만통부에 와서 뭘 하라고요?”

“뭘 하긴, 일을 미리 배우고 연습하라는 거지.”

그걸 내가 왜?

“안 합니다.”

“그럼 나도 명령서 써주기 힘드네.”

“…….”

나는 빤히 맹주원을 바라봤다.

차분한 척 있지만, 발끝이 타달타달 떨리고 있다.

최대한 관심 없는 척 하지만 놓칠까 걱정하고 있는 모습.

적당히 좋은 패를 가진 초보 도박꾼들이 꼭 저런 모습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맹주원의 눈이 급격하게 커진다.

“그냥 무단결석하고 데리러 가야겠군요.”

“으잉? 무단결석은 퇴관의 사유가 될 수 있는 것 모르나?”

“알고 있습니다. 그냥 의무복무만 마치고 사문으로 돌아가야지요.”

“무림맹에 남지 않고?”

“전 부귀영화에 매우 목이 말라있는 사람입니다. 간부가 된다면 승진을 위해 만통부를 거쳐 가는 일도 있을 수 있겠지만, 간부가 아니라면 무림맹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지요.”

“…….”

“시간을 뺏어서 죄송합니다. 그럼 이만.”

나는 그리 말하고 밖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맹주원이 얼른 내 옷소매를 잡았다.

“에헤, 이 사람! 왜 이리 성질 급해! 좋아! 휴일 중 이틀만 오게.”

어디 소정대 양아치들 사이에서 사기도박을 하던 나를 상대로 공갈을 치려고.

“휴일 중 하루. 와서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고 돌아가겠습니다.”

“좋아! 일을 배우는 동안은 이틀. 일을 다 배웠다 생각하면 하루만 하겠네. 나도 더는 양보 못 해.”

맹주원이 으름장을 놓듯 몸을 홱 뒤로 돌려버린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꿀 같은 휴일 중 하루를 날리는 건 아쉽지만, 반대로 만통부에서 말 안 듣는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를 골려줄 수 있는 걸 생각해 보면 꼭 나쁘다고 할 수는 없는 거래.

“좋습니다. 그럼 정도회가 벌인 행사 취소 명령서는 확실히 써주십시…….”

“좋아! 더불어 장로원의 반맹 행위에 대한 추포령을 내려주면 되는 거겠지?”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신이 나서는 서류를 뒤적거리는 맹주원.

아니, 방금 전에 일개 행원으로서 버틸 수 없다면서요?

“……행사 취소 명령서면 충분합니다.”

“음…… 하긴 나도 구파일방을 모두 적으로 돌렸다간 목숨을 보전하긴 힘들겠지.”

“…….”

“아 참, 자네. 그럼 무사는 안 필요한가? 정예 무사 백 명 정도면 어떤가? 그들 정도면 으름장을 놓아 행사를 멈출 수 있겠지?”

맹주원은 만통부의 힘을 보여주겠다는 듯 이것저것 종류별로 서류들을 가져왔다.

“…….”

이 사람 대체 뭐지? 뒤가 없는 사람인가?

하여간 무림맹에도 평범한 사람이 없다.

#

학관에 만통부의 외출증과 행사 취소 명령서를 전달하자, 학관 관리와 교두들이 난색을 표했다.

두 번째 학사가 시작되자마자 대표와 대표 간부단이 모두 외출을 하겠다고 이야기하니 저들로서도 어처구니없는 상황.

하지만 어쩌라고, 이쪽은 만통부의 명령서다.

애당초 이런 사태를 맞이하고 싶지 않았으면 장로원의 의견도 들어주지 말았어야지.

“대체 만통부에서 이런 건 어떻게 받은 거예요?”

남궁선화는 믿기지 않는 듯 명령서를 몇 번이나 살폈다.

“그건…… 슬픈 사연이 있습니다.”

휴일이 하루 날아가 버렸지요.

나는 내 일행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명령서를 받아 왔지만, 장로원들은 이것마저 무시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불편하신 분들은 빠지셔도 좋습니다. ……어, 거기 은호는 가만히 있어라. 맞기 싫으면. 태을문은 자동 참석하는 거야.”

남궁선화와 성모란을 배려해 이야기했지만 두 여자의 대답은 격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전투를 벌이는 한이 있더라도 데려와야죠.”

“애당초 만통부의 명령서를 따르지 않는 사람을 용서해선 안 돼요.”

적극적인 두 사람의 모습에 괜히 미소가 지어진다.

“좋습니다. 그럼 바로 준비하도록 하죠.”

준비는 신속하게 끝났다.

우리는 무장과 비상식량을 챙기고 한자리에 모였다.

“일단 이거 하나씩 받으십시오.”

작은 가죽 가방을 개개인별로 하나씩 나눠주었다.

검을 손질하던 이들이 물건을 받고선 내용물을 본 후 물었다.

“신호탄은 뭔지 알겠고, 목걸이랑 부적이네요?”

목걸이는 장도원에게 맡겼던 백향옥으로 만든 것이다.

시산혈교도 나름대로 마교의 분파 중 하나라고, 정심을 흩트리는 사이한 술법을 사용한다.

마기와 마찬가지로 장시간 노출되면 정심이 상할 뿐 아니라 후유증까지 남아, 평생 환영을 보며 살 수도 있다.

직접적으로 시산혈교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보다 놈들의 사이한 술법에 당하지 않도록 더 신경을 써야 할 터.

탕마사령주에 비하면 부족하긴 하지만, 최소한 항마진언주를 미친놈처럼 계속 외고 있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부적은 형산파의 복마부입니다. 혹시나 모를 요도와 사도를 방비하는 데 쓰시면 될 겁니다.”

남궁선화가 뜨악한 심정으로 부적을 보았다.

“형산파의 부적이면 엄청 비싼데…….”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나섰다가 되려 내가 다치는 일이 있어선 안 되지 않겠습니까.”

#

우리가 그렇게 출정 준비를 모두 마쳤을 때.

맹주원이 보낸 인원들이 학관에 도착했다.

“…….”

난 그 면면들을 보고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승호당 당주 구정룡이다.”

맹주원이 적당히 보내주겠다 하기에 흑무각이나 적봉각 정도로 생각했는데.

‘이 양반 그냥 내 질러버리네.’

무려 승호당.

청룡각 내에서도 가장 공격에 최적화되어 있는 타격대.

흑도들이 무림맹에 침공하면 나타나는 이를 보내준 것이다.

장로원하고 한판 붙으라는 말인가?

‘아니, 애초에 만통부 부장이 움직이란다고 움직일 수 있는 직위였던가?’

총군사인 제갈소명도 파견을 보낼 때 각 단체들의 이해관계를 따져 조심스레 보내는 법이었는데.

물론 혹시라도 마주칠 시산혈교와 장로회를 동시에 상대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승호당이 오는 것이 좋으면 좋았지, 싫을 일은 아니다.

문제는 이들이 과연 내 말을 들어줄까 하는 걱정.

“사천으로 움직인다고?”

구정룡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아무리 만통부의 파견서를 받았다 한들 후배인 학관생의 명령을 듣고 싶진 않겠지.

“네.”

“부대 편성은 어찌할 거지?”

“사천에 나가있는 학관생들의 위치를 파악하고 한 번에 움직일 겁니다.”

“……우린 무공이 강한 자들이 주로 몰려있는 집단이다. 그건 알고 있겠지?”

“수색은 저희가 할 겁니다. 당주께선 명령서를 시행하는 정도만 도와주시면 됩니다.”

“가만히 있다가 장로원과 대적하란 말인가?”

“어렵겠습니까?”

“……맹의 명령이라면 따라야겠지.”

오? 제법 말이 통하는 이인가?

“단, 지휘를 비롯한 모든 책임은 그대에게 맡기겠다.”

“…….”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말이구나. 그럼 그렇지.

나로선 되려 환영인 상황이다.

이 와중에 승호당과 신경전을 벌인다는 건 손해가 극심하니.

아직 인원이 부족하지만 아주 못쓸 정도는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저쪽 장로원에게 만통부의 명령서를 전해 행사 취소의 명분을 가지게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니까.

무력이 부족한 것은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커다란 무림학관의 교정을 가로 질러 학관 정문에 다달았다.

그때, 한쪽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진소운 대표.”

“…….”

언제 봐도 반갑지 않은 이가 다가왔다.

“바쁜데 무슨 일이십니까?”

내가 불편함을 팡팡 풍겨냈지만, 찾아온 상대는 여유를 부린다.

역시나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

“학관 대표가 뭔가 일을 벌이시는 것 같아 찾아와 봤습니다.”

“이건 12봉성과 상관없는 일이니 돌아가십시오.”

철순직은 그 반질거리는 낯짝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잠시 이야기는 들어주실 수 있지 않습니까?”

“……이야기요?”

분명 정시 때 대가리를 깨지 않아서 이렇게 바쁜 사람 붙잡고 있는 거다.

대가리가 한번 깨져보면 바쁜 사람 함부로 못 잡을 테니까.

이번에야말로 쓸데없는 이야기라면 대가리를 깨겠다는 심정으로 녀석을 바라봤다.

그런데,

“저희도 대표님과 함께 움직여도 되겠습니까?”

“…….”

철순직은 의도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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