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170화 (170/357)

#170. <사천에 번지는 혈해(6)>

승호당과 진소운 일행은 결국 성도에 도착했다.

승호당과 12봉성등 인원들은 재정비를 위해 곧장 휴식에 들어갔다.

하지만 모두가 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모두’에 포함되지 못한 남화성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게 뭔 소리야!”

남화성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성도에 도착하면 조금은 쉴 줄 알았건만, 진소운이 바로 출발한다는 말 같지 않은 소릴 내뱉자 남화성은 울분이 차올랐다.

“승호당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도 최소 반나절이라도 쉬고 출발한다. 근데 왜 우리만 먼저 가야 한다는 거냐!”

진소운은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

“우린 가장 앞선 이들을 목표로 움직여야 한다. 도대체 쉴 시간 따위가 어디 있다고 그러지?”

남화성의 입가가 푸들푸들 떨렸지만,

진소운은 그저 어깨를 으쓱일 뿐이다.

“혹시 싫은가? 싫다면 돌아가라.”

저 빌어먹을 놈은 걸핏하면 ‘돌아가라, 돌아가라’를 입에 달고 산다.

다른 12봉성들이 모두 이곳에 남아있는 상황에서 홀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하는 말이리라.

“……이렇게 움직이다 쓰러지기라도 한다면.”

남화성의 심각한 목소리에 진소운이 턱을 치켜들었다.

“삼원문의 남화성이 그것밖에 안 되나?”

“……빠드득.”

“갈 거냐 안 갈 거냐.”

생각 같아선 당장이라도 다 때려치우고 학관으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지난밤 자신이 진소운과 함께 움직인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철순직이 은밀히 전음을 보내왔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기억해 두게, 이번 사건이 그로 하여금 족쇄를 차게 만들걸세.

철순직이 어떤 일을 꾸미는지 모르지만 그건 분명 12봉성에 이익이 되는 일일 터.

그렇기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앞장서라!”

피식 웃으며 말 머리를 돌리는 진소운을 보며 남화성은 이를 갈았다.

‘네놈도 이미 충분히 지쳤을 터.’

끝까지 버텨서 반드시 진소운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 것이다.

내공은 몰라도 체력이라면 어디 가서도 누구에게도 진 적이 없으니.

지켜보라는 철순직의 말도 있긴 했지만, 그보단 우선 놈의 자존심을 한번 뭉개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

#

성도를 나와 파당으로 가는 대로에 들어섰음에도 진소운은 몇 시진째 전혀 지치지 않고 달리고 있었다.

엉덩이가 배기다 못해 헐기 직전인 느낌에 남화성이 결국 참지 못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어이, 안 쉬어 가나?”

“벌써 지친 거냐?”

꼭 말을 해도……!

신경을 박박 긁는 진소운의 말에 미간이 잔뜩 찌푸려진다.

“이대로 가면 금방 지칠 게 분명하다!”

“난 안 지친다.”

“그럼 속도라도 좀 줄이든가. 이 근방엔 녹림채가 있다!”

성도에서 파당으로 가는 길은 서장으로 가는 가장 큰길과 연결되어 있다.

중원과 서역의 상인들이 자주 다니는 길인 만큼 일반 산채가 아닌 녹림채가 위치한 것은 당연한 일.

그러나 소운의 얼굴에는 걱정 한 톨 보이지 않는다.

“걱정 마라. 피해 갈 방법이 있으니까.”

“……진짜 제정신이냐? 관도를 떡하니 막아선 녹림채 세 곳을 그냥 지나치겠다고?”

남화성은 제 귀를 의심했다.

통행세에 누구보다 민감한 이들이 바로 녹림채다.

그들은 자신이 받은 돈보다도 받지 못한 돈에 더 민감했다.

“남화성, 출발하기 전에 뭐라 했었지?”

또 그 빌어먹을 절대복종….

지금이 전시도 아니건만 함께 간다는 이유만으로 절대복종을 해야 할 이유가 무에 있는가.

“불만이 있다면 욕지거리를 해도 상관 안 한다. 애초에 신경 쓴 적도 없으니. 하지만 명령을 듣지 않겠다면 지금이라도 돌아가라.”

“…….”

“철순직이 날 감시하라 했겠지?”

예상치 못한 말에 남화성이 흠칫 놀랐다.

“잘 감시하고, 본대로 잘 전해줘라. 난 상관하지 않으니. 하지만 자꾸 일을 방해하면 더 이상 쫓아오지 못하게 두 발을 부러뜨려 놓을 것이다.”

격하게 말을 타고 있었음에도 진소운의 목소리는 차분하기 그지없다.

그 차분한 목소리를 들으며 남화성은 서늘한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뭐, 뭐야?’

분명 살기를 끌어올리지도 않았건만, 누군가 목 아래 칼을 들이민 듯 섬찟한 기분.

남화성은 저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지는 느낌이었다.

그 위로 들려오는 단호한 목소리.

“어쩔 것이냐? 따를 것이냐? 돌아갈 것이냐?”

열 받아 돌아가는 것도, 꼬리를 말고 따라가는 것도 자존심이 상한다.

빌어먹을 새끼.

남화성은 이놈을 만난 후 자주 이빨을 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풍겨오는 위압감에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따라가겠다.”

남화성의 무거운 대답에 진소운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삼원문의 녹각풍운종이 그렇게 대단하다지?”

물론 삼원문의 녹각풍운종이 강호의 일절로 손꼽히긴 한다.

헌데 왜 갑자기 그 이야기를 꺼내는 거지?

남화성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지금부터 말을 버린다.”

“……가로질러 가겠다는 거냐?”

불안감은 이내 현실이 되었다.

“그래.”

남화성이 기겁했다.

“방금 녹림채를 피해 간다고 하지 않았나!”

녹림채들은 관도보다 산에서 다가오는 존재들을 더 민감하게 받아들인다.

관도로 오는 이들은 대부분이 손님일 가능성이 높은 반면, 산으로 오는 이들은 녹림채의 적일 가능성이 높으니.

“피해 갈 거다.”

진소운이 남화성을 바라보며 씨익 미소 지었다.

“조금 거칠긴 하겠지만.”

“…….”

조금이라고?

남화성은 괜히 오금이 저려오는 기분이었다.

#

삐익----

날카로운 피리 소리가 산천을 울린다.

산등성이 위치해 있던 녹림채 한 곳이 들썩거리는 것이, 신호를 받고 벌써 나설 준비가 끝난 듯 보였다.

“들켰군.”

태연한 진소운의 말에 남화성이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럼 안 들키겠냐?’

산적들이 산 곳곳에 세워놓은 망루에서 감시를 하고 있는 대낮에, 잠행복도 입지 않은 무인 둘이 산을 타고 오르는 모습을 보였다.

이 정도면 어지간한 약초꾼도 다 알아볼 터.

“속도를 내지.”

“……뭐?”

지금까지 전력으로 달리고 있던 게 아니었나?

당황해하는 남화성이 대답을 하건 말건, 진소운이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헌데 그 방향이 조금 이상했다.

“야, 야, 야! 너 어디 가냐!”

녹림의 시선을 피해야 한다는 사실도 잊은 채 남화성이 진소운에게 소리를 질렀다.

진소운이 곧장 산속 망루로 달려가고 있었던 것.

“저, 저 미친 새끼가….”

가파른 산길을 내리막처럼 타고 올라간 진소운은 곧장 망루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그의 일권에 주위로 십여 개의 권형이 남으며 망루 다리를 강하게 때렸다.

콰직!

끄아아악!

“침입자다!”

“습격이다!”

망루가 쓰러지며, 사방에 뽀얀 먼지가 일었다.

“미, 미친!”

그 먼지를 보고 사방에서 경계를 서던 산적들이 망루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뒤늦게 남화성이 망루 근처로 다가가자, 진소운이 그 방향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이대로 내려간다.”

“뭐?”

“시선을 끌었으니, 포위망을 뚫어야지.”

“그게 뭔…….”

“‘동섬서홀’ 작전에 대해서 못 배웠나?”

그냥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라는 말에 작전만 붙이면 작전이 되는 거냐!

그러나 남화성은 진소운의 개소리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망루가 망가지자 녹림도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기 시작했던 것.

남화성은 녹각풍운종을 필사적으로 달려 겨우 그와 거리를 맞췄다.

“시부랄, 그딴 말 같지도 않은 이름 붙일 때부터 알아봤지!”

“뭐가 불만이냐?”

“이딴 실패할 작전을 왜 시행하는 거야!”

눈앞에 대도와 대부를 들고 뛰쳐 올라오는 산적들의 숫자가 셀 수도 없이 많다.

“무슨 소리. 뚫으면 실패가 아니다.”

미친 새끼야, 피해 간다며!

챙.

검을 뽑아 든 진소운이 곧장 열 명의 산적들에게 달려들었다.

산적들의 기세도 만만치 않았다.

“죽여!”

“이 새끼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몰아!”

사방을 가득 막고 달려드는 산적들 앞에서 진소운은 그들보다 족히 두 배는 빠른 속도로 산적들을 베어 넘겼다.

“커흑.”

“끄억.”

“빨라…….”

눈 깜짝할 사이에 진소운은 다시금 달리고 있고, 뒤늦게야 그가 지나간 자리에서 산적들이 쓰러지는 현실성 없는 모습.

‘뭐야, 대체?’

일각과의 일전을 이긴 것만 해도 무림학관 내에선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

하지만 지금 보인 움직임은 그때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불과 두 달 사이에 다른 사람으로 느껴질 정도로 발전이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지경.

“남화성, 정신 안 차리나!”

진소운의 일갈에 눈앞을 바라보니, 산적 넷이 동시에 대도를 내려치고 있었다.

남화성은 권갑을 착용한 주먹을 마구 휘둘렀다.

파파파파파팡!

사방으로 격기가 터져나가며 산적들이 돌멩이처럼 날아다닌다.

그러자 진소운에게서 불만 어린 음성이 터져 나온다.

“멍청하긴. 굳이 그렇게 소리를 내면 동섬서홀 작전이 무의미해지지 않나.”

“아니, 애당초 네놈의 시작부터가 글러 먹었는데…….”

남화성의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는, 진소운이 먼저 출발하며 말했다.

“가지. 네놈 때문에 작전이 망했으니…….”

그의 싸늘한 눈빛이 날아와 꽂힌다.

“제대로 달려야 할 거다.”

미친놈아, 나 때문에 망한 거 아니라고!

진소운이 망루 쪽에서 달려 내려오는 산적들을 향해 무언가를 던진 뒤 달려가기 시작했다.

‘꽃봉오리?’

산적들 사이로 떨어지던 황동색의 꽃봉오리가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개화하기 시작했다.

팽그르르-

금속으로 만든 꽃이 개화하며 제자리에서 마구 회전한다.

그 모습이 사뭇 신기해 멍하니 바라보던 남화성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었다.

“크아아악!”

“커흑!”

“끄아아아악!”

산등성이를 뛰어 내려오던 산적들 수십이 동시에 얼굴과 목을 부여잡고 바닥에 쓰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남화성, 안 가냐!”

분명 진소운이 던진 꽃봉오리와 관련이 있을 거다.

하지만 그것이 뭔지는 당최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금속 꽃이 피었더니 녹림도 수십이 동시에 쓰러지더라.

과연 철순직에게 이런 보고를 하면 그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애초에 믿어주기나 할까?

“나라도 못 믿지.”

남화성은 어쩐지 보고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화성!”

“간다, 가 인마! 네놈 목소리 때문에 다 들킨다!”

남화성이 다시 전력으로 발을 놀려 겨우 진소운을 따라잡았다.

“차라리 이럴 거면 그냥 관도로 가면 안 되냐?”

가뜩이나 산꼭대기까지 올라갔다 내려가느라 두 배는 더 힘든 지경이었다.

“걱정 마라. 이번엔 분명 피해 갈 테니까.”

“…….”

“왜 그런 표정을 짓지? 나를 못 믿나?”

믿음이 가겠냐?

남화성은 어째서 진소운이 저리 당당한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그의 뒤를 쫓고 있었다.

#

‘흠…… 애당초 난 백도회 소속이 될 사람이 아니었나?’

음식이 담긴 쟁반을 들고 가다 멈춰선 모용재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은 분명 오대세가 직계이고, 자격이 없긴 하지만 다음 모용세가를 이끌어 나갈 후계자이다.

좀 이상한 성격을 가지긴 했지만, 강호 절대 고수 중 한 명인 풍백파검의 하나뿐인 손자란 말이다.

막말로 진소운 형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었다면 진즉 백도회에 들어가 간부 자리도 하나 떡하니 꿰차고 다녔을 거란 이야기.

‘흠…… 근데 이건 뭐지?’

그런 자신이 왜 백도회도 아니고 정도회가 이끄는 행사에 참석해 허드렛일을 하고 있는지, 영, 감이 잡히지 않았다.

긁적긁적.

“어이! 뭐 하고 있냐! 장로님께서 시장하다고 하신다!”

자신을 찾는 소리에 모용재화가 ‘예, 예!’ 하며 뽈뽈 달려가 음식을 전달했다.

차오르는 의문을 억누른 채 웃으며 음식을 전달했건만, 정작 음식을 받아 든 점창의 제자는 인상을 잔뜩 찌푸린다.

“이게 뭐야! 음식이 다 식었잖아?”

“고산지대고, 숲이지 않습니까. 금방 식지요.”

모용재화가 좋게 달랬지만 점창의 제자는 음식을 내던지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자식 시킨 일도 제대로 못 하나! 어디 이따위 음식을 장로님께 올릴 생각이더냐?”

바닥에 구르는 음식을 멍하니 바라보던 모용재화.

그런 모용재화에게 위협을 가하는 점창의 제자.

이상하다. 뭔가, 이상하다.

“근데 왜 내가 이런 잡심부름을 하는 거지?”

모용재화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뭐?”

“난 모용세가의 장자이고, 직계이며, 파검님의 손자인데. 이걸 왜 내가 하고 있냐고.”

“……네가 하겠다며!”

“내가?”

“그래! 은설란 대신 네가 하겠다 하지 않았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모용재화가 자신의 머리를 몇 번이나 꿀밤으로 때렸다.

“아! 아아! 아! 맞다! 맞아! 그래. 그랬어.”

수색을 마치고 돌아와 잠을 청하려던 순간, 은설란이 시중을 드는 것을 보곤 눈이 뒤집혀 접시를 빼앗았었다.

“다시 차려와라! 이번에도 제대로 못 하면…….”

“야.”

순식간에 분위기가 가라앉는다. 점창의 제자는 자신이 잘못 들었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너 지금 ‘야’라고?”

“너 뭐 좀 되냐?”

“……뭐?”

“뭐 좀 되냐고. 너 점창 물려받기로 돼 있냐?”

“…….”

진소운에 비하면 제대로 된 시험도 치지 않고 들어온 녀석들.

안 그래도 진소운을 무시하는 모습이 꼴 같지 않았는데.

주제도 모르고 호가호위하는 꼴이라니.

모용재화는 괜히 손끝이 간지러운 느낌에 주먹을 쥐었다 폈다.

“아니지? 난 원친 않지만 세가를 물려받을 수도 있어. 너 학관 생활만 하고 강호에서 은거할 거냐? 모용세가 앞에서 당당해?”

“…….”

“아니지? 그러니까 자꾸 나대지 마라.”

“…….”

점창의 제자는 입술을 주억거리다가 제가 직접 취사 인원이 있는 곳으로 갔다.

모용재화가 서늘한 눈빛이 그의 뒤를 쫓았다

‘잠…… 잠이 부족해…….’

벌써 며칠째 잠조차 제대로 못 잤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자고 있어도 깨어 있는 것 같고, 깨어 있어도 자고 있는 듯했다.

‘빌어먹을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악양이나 따라갈걸…….’

그랬다면 최소한 여기까지 와서 이 고생은 하지 않았을 텐데.

“미안해요. 모용 공자. 그냥 내가 해도 되는데.”

자리로 돌아오자 은설란이 죄스런 표정을 지었다.

잘못은 저놈들이 했는데 왜 은설란이 죄책감을 느끼는 걸까.

“아닙니다. 제 사문의 어른들한테 음식을 가져다주는 건 제 놈들이 해야죠. 근데 은 소저, 안 추워요?”

고산지대에 들어오면서 다른 이들은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모포며 겉옷을 두 겹 세 겹으로 껴입고 있었다.

“전 괜찮아요. 본래 고향이 춥기도 하고. 제가 익힌 무공은 음의 기운이 강하거든요.”

“아, 북해에서 왔다고 했죠.”

이제는 알고 있던 기억들도 제대로 떠오르지 않는다.

“근데 괜찮으세요?”

“네? 뭐가요?”

은설란은 핏줄이 터져 두 눈이 시뻘건 모용재화를 걱정스레 바라봤다.

“무척 피곤해 보여서…….”

“내가요? 아닌데?”

말은 그렇게 하지만 모용재화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밤잠 설치며 정찰 일을 계속하느라 밥은커녕 잠도 제대로 못 잔 상황.

“재화 공자. 그렇게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닌가요? 다른 이들은 그냥 정찰하는 시늉만 하던데요.”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요.”

말을 하던 모용재화가 꾸벅꾸벅 존다.

그러나 이내 두 눈을 번쩍 뜨고 일어난다.

“…재화 공자.”

“……하하.”

모용재화가 머쓱함에 뒷머리를 긁적거리다가 조심스레 말한다.

“저 조금만 자도 될까요?”

“네. 그러세요.”

은설란은 얼른 자신의 몫으로 받은 모포를 모용재화에게 덮어주고 장작을 추가로 집어넣었다.

“고마……워…….”

모용재화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잠에 빠져들었다.

“……정말 피곤했구나.”

은설란은 모용재화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정도회의 행사에 억지로 끌려오긴 했지만, 정작 행사라 해서 특별한 것도 없었다.

점창과 소림을 주축으로 이뤄진 선발대.

그들의 신경은 예하의 문파들이 자신들을 얼마나 더 잘 접대하느냐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정시의 사건을 조사하러 나왔다 했지만 정작 그 인근에는 가지도 않았다.

‘이게 무슨 꼴인지.’

그녀의 머릿속엔 얼른 돌아가서 소수신공을 완성시키고 싶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멸혼진 내부에서 깨달음을 얻은 후, 소수신공의 새 길을 찾긴 했지만, 아직 전설 속에 나오는 것처럼 위력을 뿜어내기란 요원한 상태였기 때문.

‘진 오라버니께 상담 한번 받아봐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멍하니 모닥불을 바라봤다.

“좀… 춥나?”

산 속의 기온이 빠르게 떨어지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여행이라도 나온 듯 조잘거림을 멈추지 않았던 학관생들도 다들 모포를 꽁꽁 만 채 모닥불 앞에서 잠이 들어있었다.

얼어붙는 추위 속에서 적막을 뚫고.

스륵.

모닥불 옆으로 붉은 지네가 지나갔다.

징그러운 지네를 보았지만 은설란은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다 의아해졌다.

‘지네는 습하고 더운 곳에 살지 않던가?’

이 일대는 아직 눈이 다 녹지도 않았고, 딱딱한 바닥엔 낙엽 한 장 굴러다니지 않았다.

“어?”

딱딱한 땅에서 기어 나온 지네는 천천히 학관생의 근처로 향하기 시작했다.

스륵, 스륵, 스륵, 스륵.

또 한 마리.

이어 또 한 마리.

수십 마리의 붉은 지네가 어딘가에서 나타나 사람들의 곁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은설란은 화들짝 놀라며 지네를 잡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몸이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어라?’

고개를 내린 은설란의 시선에, 어느새 자신의 온몸을 덮고 있는 지네가 들어왔다.

아- 악- 악-

입을 벌려 소리를 질러보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대신 붉은 지네들이 입으로 코로 귀로 마구 파고들기 시작했다.

끔찍한 감각에 몸을 부르르 떨고 있는 순간.

-……란, ……저, ……나요.

어디선가 들리는 다급하지만 따뜻한 목소리.

대답을 하고 싶지만 대답하지 못하는 상황에 눈물이 터질 것만 같은 순간.

“설란 소저!”

은설란이 꿈에서 깨어나며 정신을 퍼뜩 차렸다.

눈앞엔 언제 깨어난 건지 모용재화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은설란을 보고 있었다.

자신의 몸을 뒤덮었던 붉은 지네들을 기억해 낸 은설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온몸을 털어내었다.

“꺄악!”

“괜찮아요?”

“헉헉! 헉! 헉!”

분명 온몸을 뒤덮을 정도로 수없이 많은 붉은 지네가 있었는데.

‘어, 없어?’

지네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지이잉──────

머리 안쪽을 바늘로 찌르듯 날카로운 소리에 은설란이 얼른 귀를 막았지만, 불쾌한 소리는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는 듯 계속해서 머리 안쪽을 찔러댔다.

“항마진언주를 외워요! 설란 소저!”

모용재화의 목소리에 은설란은 얼른 항마진언주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머리 안쪽을 찌르던 고통이 옅어졌다.

그러나 또다시 귓가로 기이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짤랑. 짤랑.

“이, 이건?”

“적……인 것 같습니다.”

“적이요?”

짤랑. 짤랑.

사이한 종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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