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 <혈해를 삼키는 흑염룡>
제 이(二)선의 같은 조인 공동파 장로와 짧은 회의를 마치고 막사로 돌아온 소충현은 황망한 소리를 들었다.
“뭐라고?”
“사천에 퍼져 있는 학관생들의 조를 규합해서 하나로 움직여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감히 누가 그런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냐?”
“……학관 대표입니다.”
“허헛!”
불쾌감을 넘어 황당함까지 느껴진다.
하룻강아지가 무서움을 모른다 해도 정도가 있는 법인데.
이 정도면 거의 눈에 뵈는 게 없는 상태가 아니던가?
“그래서, 우리더러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어라?”
“승호당이 만통부의 정식 명령서를 가지고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으니 그때까지만이라도 기다려 달랍니다.”
“어이가 없군.”
어이가 없다 못해 정신이 회까닥 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선두의 점창과 소림의 조가, 흉수들을 모두 처리할까 불안하여 관광도 줄이고 따라왔건만 자신더러 기다리라고?
그것도 감히 무림맹의 장로라는 지고지순한 위치에 있는 자신에게?
“총군사가 조금 이뻐한다고 아주 기고만장하구나. 거기에 감히 승호당까지 동원해?”
이를 가만히 두고 넘어가면 안 된다.
아니, 이번 기회에 아주 단단하게 기강을 다시 잡아야 한다.
“어찌할까요?”
“놈들이 온다면 더 빨리 움직여야겠지. 묘시에 출발하도록 한다. 모두에게 알리도록.”
“알겠습니다.”
소충현이 강정의 특산물인 금화분주를 들이켜며 축객령을 내리자, 제자는 곧장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때.
화산의 제자가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응? 무슨 일이더…….”
동시에 머리를 울리는 날카로운 소리.
지잉─────
난생처음 들어보는 소리였음에도 소충현은 그 귀하디귀한 금화분주를 손에서 놓쳤다.
쨍그랑.
‘사령마음(死靈魔音)?’
심장이 격하게 뛰기 시작하며 머리가 어지럽다.
눈앞의 공간이 기묘하게 뒤틀리며 삿된 음악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생전 처음 겪어 보는 현상임에도 정체를 또렷하게 알 수 있는 이유는, 이 소리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어린 시절부터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기 때문이다.
‘십대 금공!!’
봉인되어 있어야 할 역천의 무공이 세상에 흘러나온 것이다.
소충현은 얼른 자하신공을 끌어올려 정심을 보호하며 외쳤다.
“뭣 하고 있느냐! 내기를 끌어올려 정심을 보호해라! 화산의 무공은 이런 삿된 무공에 무너지지 않는다.”
“으…… 으…….”
하지만 제자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항마진언주! 항마진언주를 외워라!”
음공에 대비해 정심을 보호하는 것은 학관 일 년 차가 배우는 수준이 아니었다.
새삼 평생 신경도 쓰지 않던 학관 교육 과정이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소충현은 내공을 전부 끌어올려 사자후를 내뱉었다.
“갈(喝)!”
쩌렁쩌렁하게 일대를 울리는 굉음에 삽시간에 사령마음이 사라지자, 바닥에 쓰러져 온몸을 부들대던 제자가 각혈을 토해냈다.
사령마음에 지배되어 있던 정심과 사자후가 서로 엉키며 내부를 진탕 내버렸던 것.
“이, 이런…….”
그리고 소충현이 당황하는 순간, 다시금 사령마음이 들려온다.
지잉─────
“항마진언주…… 항마진언주를 외거라!”
“어… 어… 어으…… 뭐라 말씀하신 겁니까? 장로님…….”
제자의 양 귓가에서 줄줄 피가 흐른다.
소충현이 얼른 바닥에 ‘항마진언주’를 새겼지만, 제자는 어느새 눈깔을 뒤집고 거품을 물고 뒤로 쓰러졌다.
‘보통 사령마음이 아니다.’
십대 금공으로 봉인된 사령마음들은 이 정도까지 파괴력을 가지지 않는다.
더구나 정심을 보호하고 있는 자신의 뇌리까지 쿡쿡 찌를 정도의 엄청난 침투력.
더구나 쩌렁쩌렁하게 사자후를 외쳤음에도 막사 밖으로 뛰어나온 제자들이 없다는 것은,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방증하고 있었다.
“누구냐! 감히 누구이기에 겁도 없이 화산의 앞에 나타난 것이냐!”
공동의 장로라도 깨울 심산으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보지만 어쩐지 그의 막사도 조용하기만 하다.
공동파가 그러면 그렇지.
애당초 큰 기대도 하지 않았기에 소충현은 화산의 보검인 적화검을 뽑아 들었다.
지금은 사령마음에 당한 아이들을 깨우는 것보다 흉수를 잡는 편이 더 효율적이다.
소충현은 전력으로 기감을 끌어올렸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일대.
하나, 미약한 기운이 결국 소충현의 기감에 잡혔다.
“거기 있으렷다!”
암향표를 밟은 소충현의 신형이 섬전처럼 쏘아져 나갔다.
쐐액.
바람마저 가를 듯 쏘아져 나간 소충현이 지체 없이 검을 휘두르려는 순간.
‘등롱?’
있어야 할 적 대신 허공에 뜬 붉은 등롱이 눈에 들어왔다.
“이따위 허접한 사술로 화산의 행보를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더냐!”
소충현은 거리낌 없이 검을 휘둘렀다.
콰직.
붉은 등롱이 꺼지자, 장막이 찢어진 듯 일대에 백 명에 가까운 혈의인들이 나타났다.
어마어마한 규모에도 소충현은 다리를 굳게 지탱하며 그들을 노려보았다.
“이따위 허접한 잡술이라니. 오만하기 이를 데 없구나.”
“…….”
머리부터 발끝까지 붉은색으로 휘감은 인원들.
그들은 마치 한 사람이 움직이듯 등 뒤에서 중검을 꺼내어 공격 자세를 취하였다.
소충현이 적화검을 바로잡았다.
“오너라! 내 오늘 화산의 검이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주겠노라!”
팔랑.
한 떨기의 매화 잎이 나타난다.
그 뒤로 두 개의 매화 잎이.
이어 네 개의 매화 잎이 공간을 잠식하기 시작한다.
십이성에 이른 매화검법.
일대엔 매화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기 시작하고 사방엔 매화향이 진동을 한다.
이윽고 바람에 흩날리듯 사방에 휘몰아치던 매화꽃이 혈의인들을 향해 낙화하기 시작했다.
퍼퍼퍼퍼펑!
퍼퍼퍼퍼퍼퍼펑!
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펑!
매화에 닿은 혈의인들이 제대로 된 대응도 하지 못한 채 팔이 잘리고, 가슴에 갈라지며 목이 잘려나간다.
사방엔 혈의인들이 입은 옷보다 더 붉은 핏물이 분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바닥에는 어느새 그들의 핏물이 모여 작은 시냇물이 생겨난다.
찰박-
소충현은 발이 피 웅덩이를 밟아 붉어졌음에도, 딛고 선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화산의 매화이니라!”
하지만 아무리 많은 피가 흘러도 매화향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파괴력.
백에 달하는 인원들은 순식간에 줄었다.
하지만 어쩐지 소충현의 얼굴은 그리 편하지 않았다.
“지독한 놈들이로고.”
시산혈해(屍山血海).
사방에 시체들이 산처럼 쌓이고, 피가 바다처럼 흐른다.
하지만 어느샌가 나타난 새로운 백 명의 인원들이 그 공간을 채운다.
놈들은 동료가 죽었음에도 누구 하나 비명조차 지르지 않는다.
“그래, 이 정도의 자신감이 있어야 화산의 적이다.”
사령마음 때문에 당황하긴 했지만, 직접 검을 부딪쳐 본 결과 그리 대단한 실력을 가진 놈들은 아니었다.
‘대저, 사도 놈들이란 이런 법이지.’
좌도방문의 술을 쓰는 이들이 언제고 백도의 힘을 넘어선 적이 있었던가.
놈들에게 혼란을 주어 술사들이 사령마음을 이어갈 수 없으면, 아이들이 금방 정신을 차리고 이곳까지 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모두 정리할 수 있다.’
이곳을 빠져나가기만 하면 다시 재정비하여 놈들을 한 번에 일망타진할 수 있다.
소충현은 낙관적인 미래를 그리며 다시금 사자후를 터트렸다.
“화산의 제자들은 이곳에 모여라!”
혹시나 듣지 못할까 싶어 몇 번이고 내공을 담아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곤 다시금 매화를 흩뿌려 다가오는 적들을 베어 넘기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
조금 떨어진 화산과 공동의 주둔지에선 정신을 차린 제자들이 당황해하고 있었다.
“장로님은? 소충현 장로님은 못 봤나!”
“막사에도 안 계십니다.”
“갑자기 어딜 가신 거지?”
갑자기 울린 굉음에 막사 밖으로 나온 학관생들은 가장 먼저 소충현 장로와 공동의 장로를 찾았지만, 두 사람 다 막사를 비운 상황이었다.
“……두 분만 따로 술을 드시러 가신 건 아닐까요?”
화산의 속가인 화성문 제자의 말에 화산의 인원들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멍청한 소리! 장로님들께서 이 와중에 어딜 가신단 말이냐!”
“죄, 죄송합니다.”
“아마, 굉음을 조사하러 가장 먼저 가신 것이 분명하다. 다른 학관생들을 모두 깨워라! 그리고 장로님들을 먼저 찾는다.”
학관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사방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뒤를 붉은 등롱이 천천히 따르기 시작했다.
#
“분명 피해 간다고 했잖아!”
남화성은 분에 차 소리를 질렀다.
동섬서홀이니 뭐니 하는 말들은 다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진소운은 달리는 동안 마주친 녹림채 세 곳과 모두 크고 작은 전투를 치렀다.
신기하게도 매번 달려가는 곳마다 녹림채가 떡하니 자리하고 있다.
니기럴, 이렇게 찾으려 해도 못 찾겠구만.
더구나 녹림채들에게 매번 꼬리를 잡히는 바람에, 녹림채 세 곳이 남화성과 진소운 두 사람을 잡겠다고 모두 협업을 하게 생겼다.
그야말로 기적적인 작전.
“네놈이 굼떠서 걸린 것을 두고 내 탓을 하는 것이냐?”
“시부럴…….”
녹각풍운종은 강호에서 속도로는 절대 뒤지지 않는 뛰어난 신법이다.
진소운에게 본때를 보여줄 생각으로 실력을 펼쳤지만, 진소운의 속도는 뒤처지지 않았다.
되려 자신은 죽을 똥을 싸며 달리고 있는 와중에 작전이니, 뭐니 하며 옆에서 느긋하게 지껄이기까지 한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진소운의 실력은 그렇다 치고, 그가 보이는 신법도 자신이 알고 있던 태을문의 것이 아니다.
이전까지 태을문에 관한 소문을 믿지 않았던 남화성은 자신의 머릿속에서 태을문에 대한 정보를 새롭게 바꿔나가야 했다.
남화성이 철순직에게 보고해야 할 것들에 대해 정리하며 머리를 맹렬하게 돌리고 있을 때, 진소운이 부적 다발을 꺼내어 그중 한 장을 남화성에게 건넸다.
“이게 뭐냐?”
“삼매진화는 쓸 줄 알겠지?”
“헥, 헥, 날 뭘로 보고.”
“형산파의 복마부다. 신체가 제어되지 않고 환상이 보이는 것 같은 순간에 부적을 태워. 그럼 사술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테니.”
이게 그 형산파의 부적이라고?
도력 높은 술사가 백 일간의 기도를 해야 만들어진다는 형산파의 부적은 무림인들의 대표적인 사치품이었다.
가지고 있으면 좋지만, 그 값에 비해선 딱히 쓸데는 없는.
흔히 말하는 명품.
그런 걸 한 다발이나 가지고 있다는 것에도 놀랐지만, 진소운이 말한 사술이 진짜라는 생각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래, 분명 절체절명의 상황인데…….
“왜 난 한 장뿐이지?”
진소운은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퉁명스레 말했다.
“네놈이 절반이나 가지고 있다 죽어버리면 부적이 아깝지 않겠나.”
“시부랄! 꼭 말을 해도!”
쐐액.
바람을 찢어발기는 파공음이 들림과 동시에 남화성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화살을 보고 몸이 굳었다.
‘어, 어느새!’
떨궈냈다 생각한 적화채의 녹림도들이 어느새 화살의 반경까지 쫓아왔던 것.
‘못 피한다.’
감각이 무뎌진 탓에 너무 늦게 발견하여 화살을 피할 도리가 없었다.
최소한 머리는 보호하겠다는 심정으로 손을 들어 올린 순간.
턱.
예상했던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응?”
남화성은 감았던 눈을 조심스레 떠보았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화살을 맨손으로 잡아챈 진소운의 모습.
“놈들이 가까이 왔군. 속도를 더 내자.”
“……어, 어. 그, 그러지.”
남화성이 이제 바닥이 보이는 단전의 내공을 삭삭 긁어 속도를 내려는 순간.
각양각색의 복장을 차려입은 사내 열이 눈앞에 툭 하니 떨어졌다.
“감히 우리 적화채가 우습…….”
적화채의 녹림도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소운은 등에 메고 있던 기다란 철봉을 무지막지하게 휘두르기 시작했다.
기이하게도 철봉의 주위로 봉의 환영이 생겨나며 허공을 수놓기 시작했다.
열 명의 산적들은 이런 압도적인 광경은 처음이었는지 필사적으로 검과 도끼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퍼퍼퍼퍼퍼퍼퍽.
하지만 검이건 도끼건 할 것 없이 모두 철봉에 박살 나고, 무기를 쥔 존재들의 대가리마저 퍼석퍼석 깨버리는 철봉.
절정에 이르러야 겨우 실체를 알아차릴 수 있는 태을문의 환(幻)의 묘리를 산적들이 대응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남화성은 속절없이 진소운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환검은 많이 봤어도, 환봉은 또 처음이군.’
산적 열을 순식간에 처리한 진소운이 봉을 다시금 꽂아 넣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 이렇게 하면 흔적이 남지 않느냐?”
이런 흔적들 때문에 세 개의 녹림채가 죽어라 자신들을 쫓고 있는 중이었다.
진소운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했다.
“네가 남긴 흔적들은 흔적이 아니었나 보지?”
확실히 삼원문의 패도적인 권법은 검술처럼 깔끔하게 적을 처리하지 못한다.
그렇다 해도 검을 쓰는 진소운이 굳이 철봉까지 꺼내어 사람들을 살려두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남화성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당최 무슨 일을 꾸미는 거지?’
대답 없는 진소운을 죽어라 쫓아간 남화성은 슬슬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처음 가지고 있던 자존심이고 뭐고 다 날아가 버린 채, 제발 쉬어 가자고 조금만이라도 쉬자고 말하려는 찰나.
진소운의 신형이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허억, 허억, 허억, 이, 이제 네놈도 한계에 다다랐겠지? 그런 것이지?”
남화성은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숨을 몰아쉬며 진소운을 바라봤다.
“…….”
하지만 진소운은 숨소리조차 평온하다.
‘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놈이야!’
남화성이 속으로 분투를 하거나 말거나 진소운은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간다.
휘적거리는 발걸음으로 진소운을 쫓아가던 남화성의 신형이 우뚝 멈췄다.
‘혈향?’
코를 강렬하게 찌르는 비릿한 혈향.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였을 때. 발치를 적시는 것이 물이 아님을 그때야 깨달았다.
“헙! 이게 무슨!”
얼른 고개를 돌려 진소운을 바라보지만, 그는 이미 저만치 가있다.
그뿐 아니라 아무렇게나 퍼질러진 시신들 사이에서 주검을 파악하고 있었다.
“화성문?”
무복에 새겨진 문양.
부러진 검의 생김새.
화산파의 직속 속가 문파나 다름없는 화성문의 제자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더구나 얼굴은 학관에서 오며 가며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대체…….”
그뿐만이 아니다.
주변에 널브러진 시체들 대부분이 학관 소속의 인물들이다.
화산파와 공동파.
그리고 그 두 문파의 속가문파 제자들이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지, 진소운!”
방금 전까지 숨이 꼴딱꼴딱 넘어갔었다는 것도 잊은 채, 남화성이 번개처럼 진소운에게 다가갔다.
“어, 어서 무, 무림맹에 알려야 한다! 이, 이건 결코 작은 일이 아니야!”
하지만 진소운은 침착하기 이를 데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소란 떨지 마라.”
순식간에 그를 감싸고 있는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진소운이 살피고 있는 시체는 다른 학관생들과 달리 훨씬 나이가 들어 보이는 시체였다.
남화성은 그를 단박에 알아보고 빽 소리쳤다.
“홍매검 소충현?”
한번 검을 휘두를 때마다 일대에 붉은 매화가 만개한 듯 피어오른다는 매화검법의 고수가 한낱 시체로 발견되다니.
덜덜덜.
남화성의 손이 자신도 모르게 떨리기 시작했다.
“정보에 따르면 이들은 이(二)선 정도인데, 벌써 여기까지 들이닥친 것인가?”
녹림채 세 곳에게 쫓기면서도 걱정 한번 하지 않았던 진소운의 얼굴에 수심이 드러났다.
“누, 누가…… 대체 누가 화산과 공동을 상대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는 거냐?”
“경거망동하지 마라. 다행히 모두 피해를 입은 건 아닌 듯하니. 하지만 이리 일방적으로 당한 건 좀 의외군.”
더구나 놀라운 점은 일대에 학관생들의 피해는 확연했지만, 적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 다른 사람들은?”
“도망쳤겠지. 그래도 화산과 공동의 제자들인데.”
“도망쳤다고? 적이 누구기에?”
“적?”
진소운의 몸에서 예의 묵직한 살기가 흘러나온다.
“무림학관을 이리 습격하는 건 어지간히 간 큰 흑도들도 할 수 없는 짓이다.”
“……흑도가 아니라 하지 않았냐.”
그때, 진소운이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침 저기 오네.”
“뭐, 뭐?!”
진소운의 턱짓을 따라 남화성의 시선이 옮겨졌다.
‘저게 무슨…….’
어둠 사이로 붉은 등롱이 허공에 두둥실 뜬 채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